<8화>
수능을 치르고 대학 입학 전까지 그녀와 난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녀는 대학 입학 선물을 골라주었고, 저녁을 사주었고, 내가 하고 싶어 하던 영화관 데이트, 노래방 데이트도 해주었다. 여느 커플과 다른 점이 없었다. 아니, 난 없는 줄 알았다. 다른 여성과 사랑을 나눠본 적은 없었으니……. 우리와 다른 커플들과의 차이점이라면 손을 잡는 다거나, 입을 맞추는 행위가 없었다는 것 정도? 그땐 몰랐다. 사랑하는 이들에겐 꽤 흔한 행위였다는 것을.
대학에 입학한 뒤로 조금은 만남이 뜸해졌다. 난 거의 매일, 과장 없이 모든 평일을 술과 함께 살았다. 선배들은 시험 기간에도 새내기들을 불러내기 일쑤였고, 무난한 대학 생활을 위해선 참여는 필수였다. 주말엔 지친 몸을 달래며 쓰러져 있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피폐해져 갔다. 그렇지만 난 그녀를 마음에서 한순간도 지우지 않았다. 전화 통화로 대학 생활을 들려주거나, 문학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녀는 자신이 똑같이 걸었던 길을 회상하며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고, 우리의 관계는 무난히 유지되었다. 물론 동기 여학생들과의 야릇한 관계도 적지 않게 생겨났다. 스무 명의 신입생 중 절반 이상이 여학생이었고,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몇몇 녀석들이 있었다. 매일 술을 함께 마시며 붙어 있다 보니, 그런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정도였다. 이성의 끈이 제어되지 않아 심각한 사이가 되어 버린 경우도 있었다. 동기들끼리 갔던 MT에서 술에 취해 잠들어버린 나를 누군가 덮쳐버린 것이었다. 녀석은 내 옆에 누워 내 얼굴을 쓰다듬었고, 몰래 입을 맞추기도 했다. 정신이 흐릿한 상태에서도 난 녀석을 밀쳐냈다. 그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번뜩였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눈을 뜬 뒤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대하는 동기를 보며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여하튼 난 의도적으로 모든 여자를 멀리하고 있었다.
대학교 신입생의 시간은 발이 무척 빨랐다. 몇 안 되는 남자 동기들은 하나둘 사라져갔다. 사지가 멀쩡한 나에게도 당연한 흐름이었고, 난 입대 영장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나던 날,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인 날이었다. 그녀와 난 처음으로 술집에서, 마주 앉았다. 내 눈에 비친 그녀는 마치 소녀 같았다. 대학 신입생이라고 말해도 모두가 믿을 만큼 그녀의 얼굴은 앳되고 귀여웠다. 내 오른손을 그녀의 왼쪽 뺨에 대고 온기를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튀어나오려 했다.
“우리 진작 술 한잔했어야 했는데, 그치?”
“그러게나 말이에요. 그간 뭐 하고 산 건지…….”
“왜 이렇게 우울해. 죽으러 가는 것 아니잖아. 다녀와서 또 만나면 되지!”
난 알고 있었다. 일말상초라든가, 고무신에 대한 숱한 전설적인 이야기들. 두려웠다. 그녀가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될 것만 같아 난 급격히 우울해졌다. 눈에 눈물까지 맺힐 지경이었다. 가기 전에 확답이라든가, 다짐이라든가 하는 무언가가 내게 필요했다. 타이밍을 봐서 제대로 이야기를 꺼내 볼 생각이었는데, 그녀가 갑자기 옛날, 아니 옛날이라기엔 불과 일 년 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 우리의 추억들을 끄집어냈다.
“그때 성현이 아니었음……. 아찔하다, 정말. 좀 뜬금없지만 정말 고마워, 성현아.”
“아……. 아니, 뭐 그런 얘길 하고 그래요. 밝은 얘기 좀 해요, 우리. 안 그래도 울적해 죽겠는데.”
“그럴까? 그때 반장선거에서 뭐라고 말했었다고? 유튜브? 뭐 봤었다고 했잖아. 그 얘기 좀 다시 해봐!”
“아, 그건 또 부끄러운데! 아이 정말!”
금세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그녀는 나의 장단을 맞춰주려는지 술을 계속 따라주었다. 물론 그녀는 내가 한 병을 마실 동안 한 잔을 마셨다. 내가 두 병을 마셨으니, 그녀는 두 잔 정도 마셨을 거다. 결과적으로 난 취해버렸다. 비틀거리지 않을 정도까지. 솔직히 조금은 비틀거렸고, 집은 찾아갈 수 있을 정도까지 마셨다. 12시가 넘은 시간, 우린 술집에서 나와 택시를 타러 큰 길가를 향해 걸었다. 그 길에서 난, 마지막 타이밍을 놓치기가 싫었다.
“선생님.”
“춥지? 뛸까?”
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이대로 보낼 수 없었다. 지난 일 년 대학교 신입생으로 살았던 난 술에 굉장히 단련되어 있었다. 취하기는 해도, 순간의 집중력은 발휘할 수 있는 나름의 스킬이 있었다. 더군다나 상황이 주는 묘한 분위기는 나의 용기를 벅차오르게 했다.
“할 말 있어요. 한 번도 못 한 것 같아서.”
“무, 무슨 말? 가, 가면서 해도 돼.”
“저, 선생님 좋아해요.”
“응? 나도 성현이 좋아해. 말했었잖아. 너 같은 학생이…….”
“아뇨. 학생 말고요. 저 이제 어른이잖아요.”
“어른? 어른이지. 근데, 그게…….”
“선생님을 여자로, 여자로 좋아해요.”
“…….”
그녀는 대답 대신 침을 꿀꺽 삼켰다. 귀여웠다. 난 가만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겨울날의 찬바람이 눈치껏 우릴 비켜 가고 있는지 꼭 붙어 있는 우리에게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온기가 우릴 휘감았다. 그리고 내 품속에 가만히 안겨있던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고, 난 조용히 내 입술을 그녀의 입술 위에 포개었다. 달콤했다.
포개어진 시간이 물리적으로 십 초였는지, 십 분이었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분명 그때의 그 감촉은 강렬했다. 심장 깊숙이 새겨진 문신과도 같았다.
우린 그길로 헤어졌다. 그녀가 먼저 택시를 탔고, 난 다음 택시를 탔다. 조금의 민망함이 있어서인지 그녀는 말없이 가버렸다. 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몰랐고, 그렇게 그녀를 보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난 입대를 했다.
훈련소에서, 그리고 자대 배치를 받고 나서, 난 꾸준히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집 주소는 몰도 그녀의 직장은 알고 있었다. 그곳으로 편지를 보내면 되었다. 그녀의 근무지는 나의 모교였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테니까.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답장은 단 한 번도 오질 않았다. 심지어 공중전화를 붙들고 몇 번이고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역시나 받지를 않았다. 휴가를 나와서도 찾아가질 못했다. 찾아갔어야 했는데……. 난 또 찌질하게 굴고 말았다. 괜히 찾아가면 그녀가 그날의 입맞춤을 실수였다고 말할까 두려웠다. 거절당할 것만 같았다. 거절의 말을 하기가 미안해서, 내 연락을 받지 않는 것이라고 난 생각했던 거다. 거절 당하든 말든 찾아는 갔었어야 했는데. 찌질한 나의 마음은 ‘전역할 때까지 참아보자’였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편지쓰기도, 전화거는 것도 모두 멈췄다. 물론 휴가 때 나와 그녀를 찾는 일도 하지 않았다. 길고 긴 2년이었다.
군대에서 전역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휴대폰 개통이었다. 아버지는 이제야 진정한 어른이 되었다며 선물로 새 휴대폰을 장만해주셨다. 전역 첫날은 대한민국 남성들 모두 그러하겠지만, 내가 없던 세상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지난 2년을 찾아내는 일로 바쁠 수밖에 없었다. 난 스마트폰 메신저에 들어갔다.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이었다. 정우의 이름도 보였다. 녀석은 한번도 자신의 프로필 사진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그냥 기본 사진. 기본 사진을 보니 또 한 명이 떠올랐다. 정우처럼 늘 자신의 프로필 사진을 기본 사진으로 해놓는 사람. 나의 그녀. 이제는 연락해도 되지 않을까.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여 그녀의 이름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난 너무 놀라 새로 산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고개를 막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다시 들여다보았다.
프로필 사진 속 그녀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정확한 날짜도 적혀 있었다.
이틀 뒤, 그녀의 결혼식 날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