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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푸른 하늘 발 아래; 鱗
작가 : 동그라미네모선
작품등록일 : 2020.5.15

그의 존재는 악당이라는 말도 아깝다. 악당보다는 악마, 악마보단 포식자에 가까웠고. 그 포식 대상은 인간을 넘어선 무언가에 가까웠으니까.

 
2.독배(毒杯)// ※
작성일 : 20-12-09 18:01     조회 : 290     추천 : 0     분량 : 15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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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존재만으로 끔찍한 마녀 같은 년.’

 

  그를 먼저 ‘살해’한 자신을 쏙 빼 버린 살인마가 제가 믿던 윤리에 어긋나는 존재를 발견하고 역겨워했다. 그 거슬리는 존재를 너무 미워한 나머지, 그 미움을 받는 이에게도 어느 누구와 같은 역린이 있다는 것을 잊은 듯했다.

  공포에 짓눌렸던 자신의 몸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조차 잊은 그가 이제는 몸에 가득 배어버린 감정을 저도 모르게 토해냈다.

 

 “괴, 괴물….”

 

  가을 코스모스 위로 피어난 아지랑이처럼 떨리는 노엘의 목소리에, 자신의 옷차림을 연신 살피던 백작의 행동이 눈에 띄게 굳었다. 곧이어 숨 막히는 정적과 함께 그의 고개가 자신을 경멸하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 때문에 자신 앞에 있는 모든 이들을 얼어붙게 만든 괴물의 입매가 발코니를 넘어 들어오는 노을빛을 받으며 붉게 휘었다.

 

 “…괴물이라.”

 

  움직이는 고개를 따라 다만 암살자를 비추던 붉은 눈동자가 별빛을 받고 자라나는 붉은 꽃의 꽃잎을 짜내어 가득 마신 것처럼 선명하게 빛났다. 그 눈망울 중앙에 정확히 비친 암살자는 자신을 비춘 투명한 눈망울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숨이 막ㅎ….’

 

  볼록한 유리알을 들고서 모래알 사이로 지나가는 개미 새끼 하나를 비추는 듯한, 땡볕 아래의 사람 눈동자. 그 숨 막히는 시선에 노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참신하지 못한 비유인걸.”

 

  노엘을 바라보던 백작의 눈이 안타깝다는 듯이 휘었다. 그 미소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그 부하들이 상체를 움직였지만, 빙글거리는 백작의 기묘한 웃음과 함께 느껴지는 압력에 못 이긴 그들의 몸은 이미 뻣뻣해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세 사람을 살핀 붉은 동공이, 위로 올라가는 눈시울에 살짝 덮였다. 그믐의 눈초리처럼 날카로이 휜 그의 눈매와는 다른, 따뜻하리만치 다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60초 줄게.”

 

  푸른 피라고 하던가? 날 때부터 거만함을 타고난 자들처럼, 귀족 차림을 한 여인이 너그러움을 흉내 내어 반쪽짜리 귀족 앞에서 겸손을 떨었다.

 

 “그 안에 이 방을 나가면 모두 살려줄 거야.”

 

  들판이 아닌 정원에 잘 손질된 가시 꽃을 두고 다가오는 손이 몹시 느긋하다. 뿌리까지 뽑아야 말라 죽는 잡초를 흔들흔들 움직이는 백마의 수완에 완전히 얼어붙은 연둣빛 눈동자가 생기를 잃었다.

  이것을 죽일까, 그도 아니면 저것을 죽일까. 대평원보다도 넓은 제 정원의 꽃잎을 느긋이 쓸어보던 폭군의 손길이 서서히 뾰족한 잎으로 향했다.

 

 “그때까진 내 유희가 되어주는 거야.”

 

  모든 이가 염원하는 권좌에 앉아서는 오만가지 이유로 권태로워하더니, 결국 죽어서야 그 자리를 벗어난 난폭한 짐승의 손안에 분명 모든 물살을 휘어잡는 파랑이 있으리라.

  그러할진대, 너울이 한낱 인간을 삼키는 것 따위야. 과녁을 응시하는 붉은 고리눈이 황혼마저 삼킬 듯이 번뜩였다.

 

 “너희가.”

 

 

 ***

 

 “허억…, 헉.”

 

  데구루루, 시야가 트인다. 노엘 슈만. 올해로 이백이 조금 넘은 나이. 야망이 한창 그득그득 들어찰 때, 그런 남자의 눈동자에 한 여인의 모습이 언뜻 비쳤다.

 

 ‘붉은… 눈?’

 

  태양의 테두리를 따놓은 듯한 붉은 고리눈, 생기를 머금은 두 뺨과 한쪽으로 살짝 비틀려 올라간 입꼬리까지, 대들보 위에서 보던 백작과는 정반대의 인상을 지닌 여인의 얼굴이 또렷해졌다가 흐려지길 반복했다.

  그 얼굴을 한 뼘도 채 되지 않은 거리서 보게 된 노엘은 크게 당황하면서도 온몸이 저린 통증에 연신 숨을 몰아쉬었다. 그 가쁜 호흡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아 어질병에 걸린 것처럼 한쪽 시야가 뿌옇게 보였다.

 

 ‘왜…’

 

  그 가쁜 숨이 겨우 진정되며 흐리던 한쪽 시야가 다시 돌아왔다. 선명해지는 그의 시야 속에서 책상에 걸터앉아 무언가를 살피는 듯한 여인과 그 주변을 맴도는 래피어가 보였다. 그러나 노엘은 자신의 시야가 돌아온 것에 기뻐할 틈도 없이, 머릿속으로 각기 들어오는 정보에 무언가 크게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두 개로 보이지?’

 

  그의 시야가 오른쪽과 왼쪽으로 정확히 나뉘어, 그의 머릿속으로 각기 다른 두 개의 시각이 전송되고 있었다. 오른 눈의 시야가 왼 눈의 시야와 겹치지 않아, 오른쪽 눈에 콧대 너머의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반대편에 있는 왼 눈은 어느 곳이든 막힘없이 볼 수 있었다. 특히 제 눈앞에 있는 백마의 얼굴부터 발코니의 큰 창을 통해 볼 수 있는 에슈탄트숲과 그 시야를 공유할 수 있는 자신까지.

 

 ‘나라고?’

 

  그 눈에 왼쪽 눈두덩이 무너진 남자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 보였다. 노엘은 그 시야 속 남자를 따라 자신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속이 비어 있어 내려앉은 눈꺼풀에 닿은 노엘의 손이 마른 이파리처럼 바르르 떨었다.

 

 ‘…없어, 없어!’

 

  움푹 들어간 자신의 눈두덩을 몸소 확인한 그가 가쁜 호흡을 뱉었다. 자신의 상황을 인지한 노엘의 뇌리에 핏줄이 불거져서는 그것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외눈의 한 남자가 금방 떠올랐다.

 

 “내, 내 눈….”

 

  그 모습이 이런 이유에서였다니…. 참혹한 자신의 모습에 통탄하는 것도 잠시, 서서히 등허리를 잠식하는 고통에 노엘은 전신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 앞, 유유히 서 있는 여인, 그가 들고 있는 알사탕 모양의 포장, 그 속에서 터지지도 않고 사방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연두색 눈동자, 그 눈깔을 감싼 포장지 끝을 들고 있는 레인슐레이츠만의 표정까지 그 모든 것이 끔찍하고, 상황에 맞지 않게 평화로웠다.

  무너져 내린 왼쪽 눈두덩을 비롯하여 고통을 참기 위해 악 다물린 이, 그곳과 이어진 턱, 관자놀이 등 그 모든 곳을 총괄하는 머리까지, 모든 것이 타는 듯한 열감이 척추를 타고 전신을 휩쓸었다. 정도를 넘어서면 그 고통에 무감각해지기라도 해야 하건만, 어찌된 일인지 그의 고통은 점점 배가되어갔다.

 

 ‘…!’

 

  그와 동떨어진 눈동자는 온몸의 신경을 태우는 강한 열감에 겨우 버티고 있는 주인을 배려할 생각이 없는지, 자신이 보았던 모든 것을 노엘에게 공유했다. 말이 좋아 공유지, 화염에 휩싸이는 고통 속에서도 강제적으로 개안하듯, 그 정보를 꼬박꼬박 받아들여야 했던 노엘은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그런 정보를 고스란히 받아내던 노엘은 백작의 손아귀에 든 것이 제 부하라는 것을 마침내 알아차리고 양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그것이 끝이었다. 온몸을 마비시키는 열감으로 인해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던 노엘은 호흡하는 것만으로 벅찬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 단장!”

 

 “사, 살려….”

 

  그런 수장을 향해 다급한 시선을 보낸 부하들이 동아줄을 발견한 사람처럼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 다급한 발버둥에 암살자의 목을 쥐어 잡고 있던 백작의 손에 힘이 실렸다. 두 사람의 목을 쥔 백마의 손에 힘이 실리자마자, 으득으득 얇은 뼈에 금 가는 소리와 함께 두 개의 인형이 목 꺾인 닭처럼 바닥으로 나란히 떨어졌다.

  백작의 손에 망가진 인형은 허리를 곧추세울 힘조차 없어, 바닥으로 곧장 부딪혀서는 그 바닥에 흥건한 핏물에 자신의 얼굴을 박으며 숨넘어갈 듯이 힘겹게 호흡했다. 그러나 그 바닥에 떨어진 피가 워낙 많아, 그들의 들숨 절반이 바닥에 고인 핏물에 반이나 막혔다.

 

 “커헉….”

 

 “허…억.”

 

  기도가 막혀 괴로워하는 그 숨소리를 배경 삼아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을 살피는 레인슐레이츠만의 모습이 보였다. 제 눈동자를 갖고서 와인 침전물을 확인하는 감별사처럼 조명 가까이 들어 보인 그 눈매가 무언가를 알아차린 것인지 일순 가늘어졌다.

 

 “너희는 참, 재밌는 걸 만들어.”

 

  그 가늘어지는 시선과 함께 노엘의 등이 더욱 굽었다. 계속되는 고통에도 실낱같은 정신을 잡아 겨우 버티던 그가 숙이려 하지 않아도, 그의 허리는 무언가에 짓눌린 듯이 펴지지 않고 점점 굽어갔다.

  암살자의 등을 그렇게 만든, 그 알 수 없는 힘은 급기야 방 안의 모든 것을 우그러뜨리며 점점 세력을 넓혔다. 모든 것이 일그러지는, 그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던 서슬이 암살자에게 겨눠졌다.

 

 “그런데 말이야….”

 

  그 서슬 퍼런 날을 느낀 노엘은 그것이 자신을 향하고 있으리란 것을 몸소 느낄 수가 있었다. 레인슐레이츠만이 직접 자신에게 겨눴던 그 소름끼치는 감각이 정신없는 와중에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겨눠졌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을 짓누른 압박에, 그 고개가 쉽게 올라가지 않았으니까.

 

 “나도 만들 줄 안다?”

 

  살이 타는 듯한 열감을 추위로 착각한 암살자의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또렷하게 들리는 백마의 목소리가 그의 시선을 조종하듯 노엘의 허리가 저절로 펴졌다.

 

 “…야~”

 

  그러자 고개를 들어 보인 그의 주위로 무언가 오싹한 시선이 느껴지더니, 백작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암살자의 귓가에서 악동 같은 무수한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각…”

 

 “…시…”

 

 “나머지 …도 ….”

 

  그 속에 있는,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조롱만으로 이뤄진 웃음소리는 덤이었다. 그 소름 끼치는 소리 사이에서 저절로 시선을 올린 그는 선연한 빛으로 이뤄진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 숨을 멈췄다.

 

 ‘괴물. 괴물, 괴물! 괴물!!’

 

  그 시선과 바로 마주한 암살자의 몸은 본능에 의해 목청이 막히고 잘 갈린 이를 딱딱 부딪었다. 어둠 속에 자리한 붉은 눈망울이 확고한 살기를 띠며 자신을 한가득 담는 우리처럼 번들거렸다.

 

 “재밌는 거.”

 

  하늘이 빛나는 듯했다. 지붕도 온전한 방 안에서 말이지. 그의 왼 눈이 그것을 포착한 순간, 그 오른 눈은 기이하리만치 빛나는 어둠을 배경으로 서 있던 백작의 윤곽에서 하얗게 뿜어져 나오는 빛을 담아내다 탈이 났다.

 

 “으윽…!”

 

  두 눈이 멀 정도로 내뿜어지는 하얀빛에 전신을 감싼 고통을 잠시 잊은 노엘이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자 그 정수리 위에 겨눠진 늘씬한 검날이 급작스럽게 방향을 틀었다. 그 표적은 제 주인의 피를 쏟아내게 하고도 그 바닥에서 염치없게 빠끔거리고 있는 노엘 슈만의 수하들이었다.

 

 “으으ㅏ…!”

 

  피에 절어 있던 목구멍에서 강한 쇳소리가 터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빠끔빠끔하던 부하의 호흡이 끊겼다. 그 끊긴 호흡을 정적으로 고스란히 느끼게 된 노엘이 황급히 시선을 올리자, 그 시야에 허공에 뜬 검이 침입자들의 제법 거칠게 피를 터는 것이 보였다.

 

 ‘먹힌다, 먹힐 거야, 먹혀…!’

 

  난폭할 정도로 제 몸에 묻은 피를 빠르게 털어낸 래피어가 연둣빛 외눈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한 서슬의 낯을 목격한 노엘은 재빨리 그것을 움직이고 있는 백마를 향해 두 손을 모았다.

 

 “사…,”

 

 

 ***

 

  백작의 재촉에 못 이겨 복도로 나온 보좌관이 어두운 바닥에 홀로 섰다. 어떤 광물보다도 단단한 바닥을 딛고 선 남자의 차분한 얼굴이 어두운 방을 나오고 나서야 가볍게 찌푸려졌다. 그 근육의 움직임과 함께 어둠에 잠겨 있던 녹금색 눈동자가 빛에 반응하듯 반짝였다.

 

 ‘고집불통….’

 

  서서히 풀리는 인상과 함께 금빛을 잔뜩 머금은 녹안이 복도 전체를 비췄다. 금강석으로 만들어진 복도는 일차적인 세공으로 투명하지만,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두꺼웠다. 그 석재에는 복도를 걷는 남자의 그림자만이 보일 뿐이었다.

  백작의 방에서 점점 멀어지는 보좌관의 그림자가 복도에 켜켜이 자리한 등불에 번져 한 발, 두 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창가의 등불이 더욱 밝아졌다. 그 덕에 은은히 보이던 그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환해진 복도는 백마성이란 별칭과는 다르게 그 바닥이 검정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위를 걷는 미하엘의 그림자가 창가를 지나칠 때마다 각각의 창틀이 반짝였다.

  밖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도 끄떡없는 창문이 창창한 나뭇가지들이 손 흔드는 거대한 숲을 비추고 있었다. 그런 숲의 인사에 보좌관의 걸음이 멈췄다. 밖의 거센 바람은 아직도 이어지는 것인지 빽빽이 들어선 나무 사이를 거칠게 헤집었다.

  그렇게 동관의 복도 끝에 도달한 미하엘 브리텐슈가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기망이라….”

 

  동관의 복도와 중앙계단을 잇는 통로에 자리한 그가 멀리서 들리는 인기척에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그의 뒤에 있던 복도와 층계참을 연결하던 중문이 저절로 닫혔다.

  께름칙한 소음이 나올 법한 두께의 문이 소리 없이 닫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서부터 누군가가 사뿐사뿐 걸어오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흠….’

 

  그가 걸친 외투의 빳빳한 표면이 월광처럼 빛났다. 어떠한 빛을 받고 흐르는 빛줄기가 아닌, 그 자체에서 타오르는 빛이 화려한 이목구비를 쓸고 지나갔다. 그 빛을 머금은 사내의 시선이 제게로 다가오는 소리를 따라 조금씩 올라섰다.

  떨리는 마음을 애써 숨긴 채 발끝에 힘을 주며 조심스레 걷는 소리, 그 소리를 기다리는 남자의 눈망울이 잘 벼려진 칼날을 삼킨 것처럼 선선히 빛났다.

 

 ‘아하.’

 

  작은 머리통이 보인다. 익숙한 갈색 머리칼. 백작 성의 고용인 중 하나. 그 모습을 본 브리텐슈의 눈매가 순하게 휘었다. 그 순한 인기척에 계단을 오르던 고용인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기가 막힌 우연이자 필연처럼 두 쌍의 눈이 마주쳤다.

 

 ‘미하엘 브리텐슈….’

 

  자신을 향해 밝게 빛나는 녹안과 마주한 남자가 작게 움찔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그가 가장한 모습의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는 이미 1층에서 목덜미에 단검이 꽂혀 죽었다.

  ‘제리’라는 이 고용인은 의외로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는데, 그가 갖고 있던 수첩을 살펴보니, 백작이 아끼는 고용인 중 하나인 듯했다. 그런 제리의 모습으로 둔갑했던 암살자는 백작의 측근인 미하엘 브리텐슈를 보고 얼어붙은 사고 회로를 애써 살렸다.

 

 ‘침착. 침착해.’

 

  본능이란 생각보다 기민해서 수없이 반복한 훈련을 종종 쓸모없게 만든다. 고작 1초. 그 반의 반도 안 되는 순간이었으나, 그 일순이 일의 성패를 크게 갈라놓았다.

  멍한 표정을 빠르게, 그리고 제법 자연스럽게 변화시킨 암살자가 통로 앞을 떡하니 막아선 보좌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보좌관님.”

 

 “아, 제리.”

 

  또박거리는 발소리가 썰렁한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성큼성큼 제게로 걸어오는 제리의 모습에 위층에서 그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런 보좌관을 보던 제리-의 모습을 한 암살자-가 층계 한 칸을 두고 멈춰 섰다.

  걸음을 멈춘 그의 손에는 투명한 재질의 쟁반이 들려 있었다.

 

 “백작께서는 괜찮으신가요?”

 

 “음. 농담으로라도 그렇다곤 못하겠네요.”

 

  제리의 물음에 잠시 뜸을 들이던 보좌관이 선뜻 입을 열었다. 미하엘 브리텐슈, 레인슐레이츠만 백작만큼이나 경계해야 할 요주의 인물. 그 인물과 마주한 암살자의 가면이 더욱더 두꺼워졌다. 실제 고용인과 흡사한 분장만큼이나 뛰어난 마음가짐이다.

 

 ‘신호가 끊겨서 왔는데. 하필이면 백의의 천사가….’

 

  미하엘의 대답을 듣고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낸 암살자가 속으로 탄식을 뱉었다. 들킬 위험이 있어 단독으로 5층까지 올라온 것인데, 백작이 여태 보좌관과 함께 있었을 줄이야.

  아니…. 동관 최상층의 길목을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자처해서 이곳을 지키고 서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둔 요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좌관을 향해 물었다.

 

 “오늘은 안 드시려나요?”

 

  그의 복잡한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쟁반 위의 작은 유리잔이 잘게 떨렸다. 쟁반을 받친 손이 잘게 떨려 그 위에 있던 음료의 표면이 잔잔히 울리자, 그 미미한 기척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보좌관이 눈을 살짝 내리깔며 암살자의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아무래도 나중에 다시 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백작의 심기가 불편하셔서요. 제리의 손에 들린 잔을 바라보던 그가 천연한 표정을 지었다. 백작과 마주할 수 없게 되어 진실로 안타깝다는 보좌관의 화사한 눈매에, 제리의 모습을 한 암살자가 마지못해 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물러서야겠어.’

 

  최상층에 잠복한 노엘의 신호가 끊긴 것이 내심 신경 쓰였던 그는, 부드러운 태도이나 단호한 보좌관의 거절에 위로 더 올라가려던 생각을 단념했다.

 

 “예, 그럴게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가 따르던 수장이라면 웬만한 위기는 거뜬히 뚫고 갔으리라. 노엘 슈만이라는 사람이 워낙 출중하다는 것을 알았던 암살자는 그렇게 믿으며, 보좌관의 거절에 순순히 물러났다.

 

 “백작께서 거르실 때도 계시네요.”

 

  뒷말을 중얼거린 요한이 옅은 탄식을 뱉으며, 보좌관을 향해 들어 보였던 쟁반을 자신의 골반에 걸쳤다. 일단은 빠져나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그가 몸을 돌리며 아래로 발을 뻗을 때였다. 그러자 그의 뒤로 가벼운 발걸음이 들렸다.

 

 “내려갈 참인 거죠?”

 

  무슨 변덕인지, 조용조용한 발걸음으로 제리의 등 뒤에 바짝 다가온 그가 조용히 물었다. 듬직한 덩치와는 달리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보좌관의 조용한 인기척에 암살자의 솜털이 쭈뼛해졌다.

  외출하다 돌아오면 어느새 발견하고야 마는, 하늘로 곤두선 머리칼처럼 암살자의 작은 솜털이 삐쭉 솟았다.

 

 “…예, 보좌관께서도 내려가시게요?”

 

  짧은 순간 얼굴을 굳혔던 암살자가 의식적으로 표정을 풀었다. 고용인 제리를 모방한 가짜 거죽을 뒤집어쓴 다른 사람이란 것을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그럼요.”

 

  그 빠른 변화에 화려한 색소를 머금은 남자의 긴 속눈썹이 깜빡였다. 그 눈꺼풀의 움직임을 따라 반짝이는 체모 아래로 드러난 눈동자가 –가짜- 제리를 향해 황홀히 빛났다.

 

 “제리 씨를 따라서 내려가면 심심하지 않고 좋은데.”

 

 “….”

 

  그 황홀한 눈망울과 가까이 마주하게 된 요한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 황홀함에 숨 쉬는 것도 잠시 잊었던 그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시야에서 브리텐슈를 지웠다.

  그는 자신을 향해 살살 웃는 미인을 피해, 그 모습을 완전히 등진 후에야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진짜 사람이 맞나?’

 

  천사, 천사 말은 들었으나, 이렇게까지 화려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니. 그와 직접 대면한 요한의 심장이 좋지 않았다.

 

 ‘위험해….’

 

  무엇을 묻더라도 뭐든 대답해주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그의 존재는 매혹적이었다. 그야말로 존재 자체가 위험한 남자다.

  그런 요한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던 미하엘의 눈지방이 살짝 위로 솟았다. 보기만 해도 재미있다는 듯 살짝 솟은 그 눈언저리엔 백의의 천사라는 악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순수함이 가득 담겨 있어, 그 표정을 힐끔 바라본 요한의 속은 태풍의 가장자리처럼 엉망이었다.

 

 “그럼, 같이 내려가요.”

 

  정 그러시다면야. 그런 표정 따위를 애써 만들어낸 요한이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의 뒤에서 옆으로 성큼 넘어온 미하엘을 바라봤다. 멀리서 봐도 화려한 인물인 건 알았지만, 그 정도가 정말 심각한 미모와 분위기였다.

 

 ‘와씨, 미치겠다….’

 

  그 피 말리는 상황 속에서 백마성의 실세와 나란히 계단을 내려가는 암살자의 머릿속은 개미굴의 애벌레였으리라. 천하의 황제를 홀린 마녀와 같은 남자와 나란히 계단을 걷게 된 그는 안 그래도 버석버석한 입안이 건조해져 쩍쩍 갈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요한은 그런 상황에서도 용케 보좌관의 말에 맞장구까지 치는 여유를 보였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더니, 반은 맞는 말인 듯했다.

 

 ‘브리텐슈를 만난다면 그에게 절대 덤빌 생각 말고, 반드시 여유를 두고 뒤로 물러나.’

 

  신신당부하는 노엘의 말을 반사적으로 떠올린 암살자가 남몰래 침을 삼켰다. 수장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풍채 좋은 그의 특유한 분위기가 있어, 애당초 그에게 덤빌 생각조차 없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위화감이 들지 않게.’

 

  피나는 훈련의 성과가 빛을 발하는 것인지, 황홀하고도 살벌한 대화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그것이 암살자인 요한에게 있어 다행 중 불행이자, 불행 중 다행이었다.

  백마성의 고용인으로 둔갑한 가짜 제리가 그 막힘없는 대화에 진짜 제리보다 더욱 열성적으로 반응한 것이 실이라면 실, 득이라면 득이란 소리였다.

 

 “예예가 저번에 그랬다니까요?”

 

  미리 전해 받은 정보를 통해 보좌관에게 지난번 있었던 백작의 방관을 완곡하게 돌려 말한 암살자가 억한 표정으로 토로했다. 마치 수십 년을 근무한 고용인처럼 은근한 감정 토로에, 그 옆에서 천천히 발맞춰 층계참을 건너던 남자가 곧게 뻗은 자신의 콧등을 찡긋거렸다.

 

 “저런, 이빌린에게 한마디 전하겠습니다. 요즘 백작께서 날카로워지셔서 많이 힘들겠어요.”

 

  자신의 말에 오로지 집중해주는 보좌관의 태도에 감명받았다는 듯이 잠시간 뜸을 뜰이던 요한이 이윽고 고개를 살살 가로저었다. ‘이빌린’이란 자는 필시 백작이 총애하는 집사를 말하는 것이리라. 집사에 대해서는 보좌관만큼이나 다양한 정보가 들어와 있지 않았기에 신경 쓰이는 대목이었다.

 

 ‘보좌관과도 친밀한 관계인가?’

 

  보좌관의 말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 이름만 보아도 그가 백작 성의 실질적 책임자인 듯했다. 또 그가 덧붙인 말에 ‘백작 건강 이상설’이 사실임을 확신했다.

  역시, 위층에 잠복한 수장은 위험할 리가 없다. 암살에 있어서 그와 같은 인재를 본 적도 없으니, 지금 그를 걱정하는 것은 괜한 설레발일지도 몰랐다. 백작의 상태가 심각해졌으리란 소식에 임무 성공을 확신한 그의 마음이 점점 가벼워졌다.

 

 “아니에요. 그래도 백작께서는 힘드셔서 그러신 거잖아요.”

 

 ‘우리 쪽 사람을 수백이나 죽인 마녀 같은 년이지만 말이야.’

 

  속이 까만 암살자의 독백에 그와 나란히 걷던 보좌관의 고개가 상대방을 향해 살짝 기울었다. 진짜 제리와 흡사한 요한의 모습에 장신의 사내가 걸친 하얀 코트 깃이 아래로 살짝 움직였다.

  친밀함을 가장하여 언뜻 윤곽만 드러낸 대화에 아리송한 듯 고용인을 잠시간 바라보던 녹금색 눈망울이 제자리를 찾았다.

 

 “그래요?”

 

  두 사람이 지나친 층계참마다 정교하게 세공된 보석이 밤하늘의 별처럼 그 바닥에 수놓아져 있었다. 그 중앙에는 성인의 상체보다 큰 보석이 저마다 색을 내며 박혀 있었는데, 보좌관에게 신경이 쏠렸던 요한은 그것에 큰 의미를 두고 살펴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중 하얀 장미를 밟고 선 고용인의 정수리에서 쟁반에 놓인 잔으로 시선을 옮긴 보좌관의 눈매가 가늘게 휘었다. 탁한 빛깔의 음료를 들고 있는 요한의 시선에 보좌관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 눈초리엔 타인을 향한 호의가 가득했다.

 

 “제리 씨는 역시 다정하신 분 같네요.”

 

  그러나 그를 돌아본 요한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남자한테서 이런 말을 듣는 것도 처음이거니와 이런 말을 남자끼리 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경악이었으리라.

  미하엘의 말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 암살자의 표정이 자연스러웠다. 작은 유리잔에 담긴 정체 모를 음료와 나란히 대칭을 이룬 하얀 손수건의 가장자리가 흔들릴 만큼 거북스러워했다.

 

 “오늘따라 매우 짓궂으시네요.”

 

  자신을 놀린 브리텐슈에게 눈을 흘긴 암살자가 먼저 발을 뗐다. 그러자 그 모습에 흥미롭다는 듯 미소한 남자의 시선이 요한의 손과 그 위를 훑었다. 투명한 유리잔에 지문 하나 없는 것을 확인한 그가 요한의 곁으로 성큼 다가와 장난스럽게 몸을 기울였다.

  장난치고는 조금 빠른 행동에도 무리 없이 고개를 돌린 암살자의 시선 속에 준수한 용모의 청년이 들어왔다. 그 시선에 들어온 남자는 입꼬리를 올리며, 생긴 것과는 다르게 제법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인가요?”

 

  제리 반응이 재밌는 걸. 소리 내며 웃는 남자의 얼굴이 선연하다. ‘맑다’라는 단어가 단번에 떠오를 법한 웃음이었다.

  특히 대부분이 어두운 빛깔로 이뤄진 성의 내부에서 홀로 밝은 옷을 걸치고 있기에 더욱 두드러지는 점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상대를 압도하는 것은 화려한 외모와 맞먹는 그 특유한 분위기였다.

  그 빛과 같은 존재가 저를 향해 웃으며 농담을 건네는 것은, 당사자에게 있어 굉장히 파괴적인 행위였다.

 

 “그 음료, 마시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집사에게 매번 물어봐도 안 알려 줘서. 그냥 마셔도 되는 거면, 내가 확 마셔버릴까?”

 

  집사한테 혼나면 어떻게. 그를 안타깝게 보는 보좌관의 얼굴이 무해하게 빛났다.

 

 ‘아…, 진짜 미치겠네!’

 

  그가 직접 마주하고 있는 미하엘 브리텐슈의 얼굴은 어떻게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낯선 존재였다. 그는 특히나 에녹 위고르 출신이라면 좋아할 금발과 녹안을 갖고 있었으니, 그와 마주한 요한의 심미안은 흠잡을 데 없는 미의 화신을 보며 외려 독을 삼킨 것처럼 속이 쓰리다 못해 아렸다.

  그 미모에 홀릴 수 없다는 듯 거세게 저항한 암살자가 애써 정신을 다잡으며, 보좌관을 향해 자신의 고개를 똑바로 쳐들었다. 그러면서 그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도 잊지 않았다.

 

 “…예? 보좌관께서요?”

 

 “네, 제가요.”

 

 “….”

 

  농담인 줄 알았더니, 진담이라는 것을 재차 강조한 브리텐슈의 확고한 태도에 요한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어떤 말로 그의 말을 되받아칠지 몰라 당황하는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당황해하던 요한의 눈꺼풀이 느릿느릿 감겼다. 잠시 조는 것처럼 넋이 나가 있던 그는 조금 무거워진 듯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다시 정신을 차린 것처럼 눈꺼풀을 빠르게 두어 번 정도 깜빡였다.

 

 ‘…어라?’

 

  무언가 생각해내려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중요한 것이면 기억해내려니 했던 그는 잠시 망각하던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부단히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무슨 말을 했더라? 아 그렇지, 몹시 궁금해했다. 아니, 대관절 저렇게 무해하게 웃는 사람이 자신에게 무슨 꿍꿍이를 가질까.

 

 ‘그래. 저렇게 순수한 눈으로 보고 있는데, 내가 암살자인 줄 어떻게 알겠어.’

 

  고혹적인 푸른 눈동자와 마주한 암살자의 입꼬리가 앞부분이 뜯어진 옷소매의 실밥처럼 금세 풀어졌다. 아주 잠깐, 그렇게 짧은 시간에 경계가 풀린 요한의 사고는 두 번 다시 도로 감을 수 없는 실타래의 실처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예쁜데….’

 

  신의 부름이라면, 제 날갯죽지를 갈가리 찢어 저마다의 잇속을 차릴 인간일지라도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어줄 것만 같은, 그 화사한 광채에 눈이 멀어버린 가련한 이가 기어코 제 목을 옥죌 우리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화려히 빛나는 남자가 백작에게 오는 음료를 이제껏 한 번도 막은 적이 없으며, 그 음료를 들고 온 고용인과 보좌관이 친밀한 만큼 서로 적대적이었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도….”

 

  환상 속에 존재하는 꽃처럼 사르르 피어나는 미소에 잠시 넋을 놓은 요한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마음의 경계가 풀리니 입이 저절로 열리고야 말았다.

  그만큼 아름다운 사내를 보며 황홀경에 빠진 사람처럼 입을 다물지 못하던 암살자가 손끝에 힘을 주며 고개를 성실히 끄덕였다.

 

 “저야 그래 주신다면 고맙….”

 

  미인의 눈동자에 홀려 고개를 주억거리던 요한의 말이 끊겼다. 맞은편에서 차근차근 올라오는 또 다른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그의 눈동자가 밖으로 튀어 나갈 듯 커진 나머지 할 말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왜 여기에….”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자신과 똑같은 정복 차림의 남자를 보며 눈에 띄게 주춤거리던 암살자가 뒤늦게 이상함을 눈치채고 제 옆에 있던 보좌관을 향해 재빨리 시선을 옮겼다.

  똑같은 모습을 한 사람이 같은 장소에 두 명이나 존재하는 데도 그 옆에 자리한 보좌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요한의 표정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변하자, 그런 그를 향한 보좌관의 미소가 변함없이 화사했다.

 

 ‘알고 있었…!’

 

  자신을 향한 은은한 미소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눈송이가 아닌, 하늘로 피어오르는 하얀 잿가루일 줄이야. 자신을 어떻게 불살라 버릴까 싶은 그 순수한 눈망울이 소름 끼쳤다.

  그런 요한의 모습을 한 칸씩 올라오며 계속 주시하던 맞은편 사람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가 마치 자신으로 변장한 암살자를 비웃는 듯했다.

 

 “백작께서 드시는 음료를 다른 분에게 드리다니요.”

 

  자신으로 변장한 요한과는 달리, 조금 더 낮고 퉁명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와 함께 계단을 타는 남자의 그림자가 가짜를 향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암살하기 전에 살인죄로 처형당하십니다~”

 

  뱀의 허리처럼 계단 모서리를 부드럽게 넘어가는 그림자가 요한의 구두코에 닿았다. 사냥감을 향해 서서히 몸을 조이는 것처럼 느긋하게 걸음을 옮긴 발걸음이 멈췄다.

  1층과 2층 사이에 자리한 층계참을 앞에 두고서 걸음을 멈춘 이의 눈동자는 상대의 얼굴 근육이 뒤틀리는 것을 명확히 포착했다.

 

 ‘처리했는데….’

 

  층계참에 자리한 투명한 활등 무늬를 밟고 요한의 앞에 선 남자의 눈자위가 번들거렸다. 확연히 드러난 이목구비와 신장을 비롯한 복장, 가르마를 탄 방향까지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한 모습의 두 사람이 계단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분명히 그랬었는데.’

 

  단지, 쟁반 하나가 들려 있느냐 아니냐 하는 그런 차이 뿐이었다.

 

 “어째서 여기에…”

 

  층계 하나를 두고 자신 앞에서 멈춰선 제리를 본 암살자가 싸한 입안을 혀로 쓸었다. 무언가 움직이지 않고서는, 눈앞에 닥친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리라 하는 본능이 가장 먼저 작동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요한의 위기의식을 알아차린 것인지, 반대편에서 그와 그 옆을 노려보는 제리의 잔잔하던 표정이 금세 새초롬해져서는 그 눈초리가 쌀쌀맞았다. 특히, 오랜 앙숙처럼 보좌관을 향해 눈을 흘기던 그는 자신과 같은 복장으로 제가 들고 있어야 했던 것을 빼앗아 든 요한을 대놓고 노려봤다.

 

 ‘백작과 유일한 소통 창구를… 이 머저리 같은 게.’

 

  암살자의 손에 들린 쟁반에는 그가 신경 써서 준비했던 반질반질한 유리잔과 그의 측근에게 건네받은 손수건 등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있는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한 암살자가 그의 갈색 눈망울에 반사됐다.

 

 ‘아, 잠시만.’

 

  자신을 보고 얼빠진 표정을 짓는 요한의 모습에 제리의 적갈색 눈썹이 무언가 눈치챈 것인지 쓱 올라갔다.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하던 제리의 눈에 다시 보좌관의 생글거리는 얼굴이 들어왔다.

  마치 자신을 잔뜩 골린 후의 미하엘 브리텐슈의 얼굴, 그 모습을 가장 싫어하는 제리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저 변태 새끼가….’

 

  별달리 물을 것도 없다. 둘 중 누군가에게 묻지 않더라도 미하엘 브리텐슈라는 작자가 제 얼굴과 닮은 암살자에게 무슨 짓거릴 했는지, 그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자신의 빼어난 외모를 이용해 제 얼굴로 변장한 암살자 하나를 홀렸을 테지. 그것도 아주 즐거워하면서, 사람의 정신을 희롱했을 거다. 저 등신 같은 건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헤벌쭉 웃고만 있었겠지.

 

 ‘× 같은 새끼.’

 

  제리의 마음속에서 절로 우러나오는 자신에 대한 반감을 알아차린 것인지, 층계참에서 암살자와 나란히 서 있던 미하엘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와는 반대로 제게 희롱당하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유쾌하였을 보좌관이 심히 불쾌한 제리의 표정은 불퉁하기 짝이 없었다.

 

 “요즘 일이 많아서 도와주신 건 감사한데요. 다음부턴 뒷목 찌르지 마세요.”

 

  그 딱딱한 표정에, 피 묻은 그의 정복을 살피던 보좌관의 입매가 더욱 완만해졌다. 단호한 어투로 제 얼굴을 한 암살자를 타이르던 제리가 자신의 목덜미를 쓸었다. 목덜미를 쓸어내리던 그의 손길에 피로 물든 옷깃이 살짝 닿았다.

 

 “위험합니다~”

 

  그 축축한 느낌이 좋지 않았던 것인지, 눈가를 살짝 찌푸린 제리가 암살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위를 향하는 제리의 그림자가 요한의 다리를 검게 물들였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제리의 모습에 얼어붙었던 암살자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긴장에 잔뜩 굳은 근육을 사용하여 시선을 돌리니, 화려하리만치 빛나는 녹금색 눈망울이 천연하게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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