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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푸른 하늘 발 아래; 鱗
작가 : 동그라미네모선
작품등록일 : 2020.5.15

그의 존재는 악당이라는 말도 아깝다. 악당보다는 악마, 악마보단 포식자에 가까웠고. 그 포식 대상은 인간을 넘어선 무언가에 가까웠으니까.

 
1. 혈로(血路).
작성일 : 20-10-09 15:09     조회 : 275     추천 : 0     분량 : 16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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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

 

  아이와 대면 아닌 대면을 마친 이벨리아는 ‘지워지지 않은 피’나 아이에 관한 신분 혹은 처지에 관해 알아보기로 한 것을 중단하기로 했다. 고갯짓과 발걸음 정도로 의사를 표현하는 아이에게 예민한 사항을 구체적으로 알아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저 역시 공작과 의견이 같습니다.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그런 이벨리아의 결정에 진중한 태도를 취한 토르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도 아이에게서 세세한 사연 청취 따위가 가능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고민거리가 있을 때마다 종종 집사와 일을 의논했던 공작은 그 대답을 듣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될 대로 되라지.”

 

  고민거리를 가득 안고 있던 그의 입술이 오른쪽으로 비죽 올라갔다. 그 모습에 이벨리아의 얼굴을 바라보던 토르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입을 열었다.

 

 “토르.”

 

 “예.”

 

  토르의 시선을 받던 그의 눈동자가 짙은 색을 띠며 위로 올라왔다. 종이에 반대로 든 펜을 톡톡 찍던 그의 손이 멈추며, 검지와 엄지를 이용해 펜촉을 종이에 찍었다. 그러자 펜 안에 들어 있던 잉크가 종이에 스며들었다.

 

 “일족 어르신들에게 연락을 드려야겠습니다.”

 

 “다른 곳에도 직접 연락을 취할까요?”

 

 “물론.”

 

 “보좌관에게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환족 외에 챠하트도 직접 연락하기로 한 것에 의외라는 듯 눈을 떴던 토르가 금세 수긍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 토르를 향해 부드러운 표정을 보였던 이벨리아는 문이 닫히자 자신의 앞에 있는 종이에 시선을 두며, 펜의 표면을 검지로 느리게 쓸었다.

 

 ‘챠하트에서는 솔이, 환족에서는 한께서 협조할 가능성이 높으니 그에 맞춰서….’

 

  응접실 탁자에 홀로 앉은 이벨리아의 손 아래로 펜촉에서 빠져나오던 검정 잉크가 도로 철필 안으로 들어갔다. 매끈하게 생긴 철필의 촉으로 도로 들어간 잉크가 모조리 들어가자 그것을 쥔 그의 손이 바삐 움직였다.

  그렇게 완성한 의견서가 예정된 두 곳으로 향했다. 그것에는 이벨리아가 아이에게 얻어낼 수 있는 정보와 그에 관한 –해석에 가까운- 분석이었다.

  아이와 여러 형태의 대화를 시도해 보았을 때, 당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수준의 대화는 이루기 힘들다. 아이에게 변화가 일어나거나 그것 외부의 자극에 의해 아이를 변화시킬 수준의 무언가가 아닌 이상, 당신이 원하는 답변을 들을 수 없다. 유감스러우나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 아이는 사람을 잘 따르며 사람을 쉽게 믿는 행동을 보인다. 그러므로 아이가 성인의 말에 쉽게 휘둘릴 수 있다는 위험이 있으니, 아이에게 변화가 있을 때까지 공작인 자신이 보호하는 것을 필히 이해해 달라며 덧붙이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의견서를 받은 두 곳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챠하트의 경우 –이벨리아의 예측대로- 솔이 그의 판단을 신뢰하며 믿고 기다린다는 태도 취했다. 그러나 이벨리아의 의견을 접한 환족은 ‘지워지지 않는 피’가 후에 변질할 리 없다며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항상 호의적이던 일족의 이번 태도는 이례적이었다.

  이렇듯 냉소적인 일족의 반응에도 아이를 향한 그들의 위협이 없었던 것은 이벨리아에게 협조적이던 한의 영향 때문이었다. 일족 수장(首長)에 버금가는 그의 태도가 그들의 행보에 강한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했다. 그런 연유로 일족은 가장 비협조적인 자세로 이벨리아의 제안에 협조했다.

  마지막까지 탐탁지 않은 눈을 하던 그들은 비헤일리스 공작인 이벨리아를 향해 으름장을 놓듯 을렀다.

 

 “그 약조 잊지 말게. 공작.”

 

 

 ***

 

 “챠하트는 대화가 가능하다는 상황에 아이의 보호자 한 명을 대동하고 지하에 있는 심문실에서 기록관 두 명과 대화하며 솔 하나를 입회할 것을, 환족은 카제하를 대표로 일족 다섯 명이 입회하며 장소는 공작 성, 공작이 보호자 자격으로 자리하는 것으로 결론지었습니다.”

 

  이번 일에 관한 공작의 의견서를 직접 전달하고 두 곳의 이견을 조율한 첸이 들고 있던 서류를 이벨리아에게 건네며, 그 아래에 있던 다른 서류의 내용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고생했어. 첸.”

 

  보좌관과 마찬가지로 건네받은 서류를 빠르게 훑은 이벨리아가 종이에 적힌 서명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챠하트와 달리, 이벨리아에게 적대적이기까지 했던 환족도 하루도 안 되어 협조적으로 변하자 일이 –비교적- 수월하게 풀렸다.

  그런 일을 한결 더 편하게 해준 보좌관에게 치하의 말을 건넨 이벨리아가 첸의 손에 아직 남아 있는 서류에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일거리가 더 있을 거란 것은, 물어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더 보고할 것이….”

 

  이벨리아가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머뭇거리던 첸이 공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성문 교역소부터 그 근처에 있는 광장까지 아이를 목격했거나, 올 광장에서 챠하트와 환족 기사단의 대립을 지켜본 시민들이 아이의 보호와 오늘 일어난 상황에 관한 설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또 세 기관 모두 대립 당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터라 이에 관한 소문이 특히 에롭트와 황제령에 빠르게 확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발언을 마친 첸이 광장 바닥을 영롱하게 수놓던 수정 파편을 떠올렸다. 비헤일리스 장미를 깨뜨리면 위험에서 구원해줄 –세간에서는 영웅이라 하나, 비헤일리스는 유독 그 단어를 좋아하지 않기에- 귀족이 나타난다는 풍속이 있었다. 그런 전설을 지푸라기 삼았을 시민의 불안과 공작에 대한 믿음이 절절하게 느껴져, 반짝이는 바닥을 확인한 그는 마음이 묘했다.

  어쩐지 다른 생각에 빠진 듯한 첸을 향해 이벨리아가 철필을 들었다. 그가 들고 있는 철필촉이 번드르르 반짝이며 자신이 잘 관리됐음을 보는 이에게 알리는 듯했다.

 

 “언론 보도는 막을 수 있나?”

 

  고심하는 공작의 물음에 잠시 바닥을 향했던 주홍빛 눈동자가 올라갔다. 아이의 상황은 환족의 위협 말고도 여러 가지 불리한 정황이 있는데, 어느 사람과 연관이 있는지 불분명한 신분이나 신체 부분이 피로 덮여 있는 외관이 입방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신원과 출처가 확실치 않기 때문에 출현한 사실 자체는 보도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밖의 정보를 보도할 시에 아동인권보호법에 저촉되기에 그런 위험을 감수할 확률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래.”

 

  아이가 언론에 보도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다는 사실에는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모든 걸 막기는 부족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제국이니, 며칠 내에 그에 관한 소식이 퍼질 것이었다.

 

 “이번 일은… 우선 공작께서 직접 보호하시겠다고 하셨으니, 그에 관해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이의 소식을 막는 것에 단념하는 듯한 이벨리아의 모습에 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비헤일리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벨리아라 해도 아동기관의 대표 격인 마운보히 후작의 인증을 받지 않는 이상 단독으로 보호하기가 힘들었다.

 

 “현재 기관에서 인증을 받지 않은 피보호자와 보호자의 동거는 임시만 가능하고 장기적으로는 불가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공작께서는 기간을 두어 장기 보호에 관한 서류를 인증받고, 자격을 취득하셔야 합니다.”

 

 “아이를 양육한 경험이 있는 사람 자체로는 자격이 미달인가?”

 

  아이를 직접 양육한 지 오래된 이벨리아가 현재 법에 해박한 첸에게 자문했다. 그의 적극적인 모습에 첸이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범위에서 차근차근 설명을 이었다.

 

 “저하가 가진 조건으로 볼 때 며칠 이내의 임시 보호는 가능하시지만, 장기적으로 아이를 보호하는 보호자 자격은 별도로 취득하셔야 합니다. 보호자 자격은, 저하의 혈육이신 다오크 씨가 취득하신 양육자 자격보다는 수월하기 때문에, 이점에 관해서는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될듯합니다.”

 

 “양육자 자격 취득은 더 어려운가?”

 

 “이것 역시 저하께서 취득하시는 데 어려움은 없지만, 양육자 자격은 교육받는 과정만 10년이 넘습니다. 취득은 그보다 10년에서 50년 정도 시간이 소요되고요. 그렇게 된다면 저하가 이 자격을 취득하기도 전에, 임시 보호기간이 지나버린 아이를 기관으로 보내시게 될 겁니다. 이번 아동의 경우 신원 미상이며, 명확한 소통이 불가능하기에 다른 가정에 임시 보호할 수 없을 확률이 높습니다, 특수한 상황을 참작해 배려를 받더라도… 에롭트 성에서 후작이 직접 보호하는 것이 최선일 겁니다.”

 

 “음….”

 

  이벨리아가 아이를 오랫동안 보호하길 희망한다는 티를 내자, 열심히 답변해주었던 첸이 슬쩍 눈치를 보았다. 정무에 시달린 그가 양육자 자격을 취득하기엔 시간이 촉박했던 터라 상대적으로 수월한 –조건에 있어서 유리한- 보호자 자격을 추천했는데, 정작 그 말을 듣던 이벨리아는 좀 더 장기적인 양육자의 자격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 정도로 깊게 생각할 줄 몰랐던 첸은 잠시 갈등하다가, 공작의 얼굴을 보고 고민이 금세 끝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해 먼저 입을 열었다.

 

 “공작.”

 

 “아…. 미안하군.”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것인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천천히 눈을 깜빡인 이벨리아가 첸을 향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혹여 양육자의 자격을 생각하고 계신 것이면, 마운보히 후작에게 먼저 연락을 취해 아이에 관한 일을 상의하시는 걸 조심스럽게 추천해 드립니다. 그분처럼 아동에 관해 해박한 이도 없고, 무엇보다 저하께서 진지하게 고려하시는 일에 관해 도움을 주실 분이라 생각 듭니다만, 저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어떻게….’

 

  보좌관의 부름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이벨리아의 눈이 아래로 쳐졌다. 의지가 확고한 데 비해 무언가 걸리는 점이라도 있는지, 그답지 않게 고민을 오랫동안 끌고 있었다.

 

 “저하?”

 

  그 모습에 짐작되는 것이 있던 첸이 먼저 입을 열자, 그 물음에 공작의 시선이 보좌관을 향했다.

 

 “후작에게는… 내가 직접 연락하지. 조언 고맙네.”

 

 “예.”

 

  고민, 고민 중. 억지로 푼 표정을 살피던 첸이 그런 공작의 사정을 모른척했다. 그런 보좌관의 배려에 굳게 다물렸던 공작의 입술이 열렸다.

 

 “아이에 관한 정보는 기사단을 비롯한 기관의 모든 이들에게 함구하도록 하고. 발견 장소, 시간, 보호의 여부, 보호자 정보에 관해서는 정확히 보도하되, 그 신상이 차후 밝혀진다면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원래 보호자를 찾을 것이란 소식도 실어주게.”

 

  차분하게 돌아온 공작의 말소리를 수첩에 적던 첸이 마침표를 찍으며, 그 옆에 있던 문장을 쓱 살펴보고는 말을 이었다. 아이의 보호에 관한 정보 요구만큼이나 모드나드 기사단, 챠하트, 환족의 충돌에 관한 해명 요구가 계속 빗발쳤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일어난 갈등에 관해선 대외적인 견해 표명으로 한정할까요?”

 

  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이벨리아가 수첩에 적힌 것 중 한 문장을 펜으로 쭉 그었다. 공작의 손바닥만 한 수첩에는 아직 그어지지 않은 항목이 밑줄 쳐져 있었다.

 

 “그게 좋겠어. 아이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한 기사단은 제 역할을 했을 뿐, 다른 곳과 충돌한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고.”

 

  사실이기도 하고. 문장을 가로지른 선을 보던 공작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런 이벨리아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일어서 있던 첸의 고개가 앞으로 살짝 숙였다.

 

 “그러겠습니다.”

 

  자신이 들고 있던 서류와 공작의 지시 사항을 기록한 수첩을 확인한 첸이 슬슬 나갈 때라 생각했는지, 습관적으로 이벨리아의 얼굴을 살폈다. 날렵한 필기체가 빼곡한 수첩을 덮으며 조금 피곤해 보이는 공작의 안색을 바라보던 그의 귓가에 마음속 갈등이 조금 느껴지는 깔깔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사관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나?”

 

 “…아직은 없습니다.”

 

  은근한 기대가 드러난 공작의 물음에 고개를 들던 첸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그가 기다리는 ‘연락’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주홍빛 눈망울을 잠시 굴려보던 첸은 공작의 기대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확인하게 된다면 공작께 반드시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시원시원하던 보좌관이 자신의 눈치를 보며 다급히 말을 덧붙이자, 공작의 아랫눈시울에 속눈썹의 그림자가 길게 뻗었다. 그리 티 나지 않지만, 첸과 동고동락만 수백 년인 이벨리아가 그것을 알아채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그렇게 당황하는 첸의 모습에, 눈썹을 쓱 올려 보인 이벨리아가 쓰게 웃었다.

 

 “…그래, 그렇군.”

 

  자신에게 온 소식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그가 회의용 책상 위에 놓인 것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첸에게 건네받은 서류와 업무용 수첩, 그리고 청청한 빛깔을 자랑하는 그의 철필과 대비되는 색을 토해내는 붉은 장미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을 눈에 담던 공작의 짙은 눈망울이 깜짝였다. 그 눈에 비친 것들이 사라졌다가 다시 온전히 들어와 있었다. 그 사라지지 않은 것들을 한 손에 챙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책상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하고 있던 보좌관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저….”

 

  그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기는 첸의 얼굴이 이벨리아보다 창백해 보였다. 그런 보좌관의 안색을 살핀 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 첸. 이만 들어가 봐.”

 

 “…예.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의도가 다분한 공작의 재촉에 잠시간 머뭇거리던 첸이 어색한 미소로 뒷말을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회의실을 벗어나 응접실을 거쳐 사라진 첸의 인기척에 이벨리아의 옅은 미소가 타래타래 엉켜서는 마침내 저변으로 가라앉았다.

 

 ‘일단락….’

 

  서재에 덩그러니 남은 이벨리아가 힘없이 내리깐 시선으로 자신의 이맛머리를 쓸어 올렸다. 세로로 길게 이어진 넓은 방에서 홀로 서 있던 그의 시야에 유리창을 넘어 들어온 월광이 강렬했다.

  그 빛을 따라 이벨리아의 고개가 자연히 창가로 향했다. 좁은 폭으로 천장부터 바닥까지 길게 이어진 창살 사이로 휘영청 뜬 보름달이 천계의 감시자처럼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빛에 홀린 듯이 우두커니 서 있던 이벨리아 앞에 찬란한 달빛을 가르는 까마귀 떼가 맹금과 같은 기세로 맹렬히 날아올랐다.

 

 ‘달이 나뉘었어….’

 

  만월을 현야월(玄夜月)로 만들어버리는 까마귀 떼의 우렁찬 비상에 호흡을 되찾은 이벨리아의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했다. 까만 밤하늘을 잠식하듯 영롱한 빛의 향연에 머물러 있던 그의 시선이 검게 쏘아진 빗금에 의해 그 궤도가 반사적으로 틀렸다.

  결국 찬란한 빛 속에 스며들지 못한 이벨리아가 자조적인 목소리로 서재의 문을 향해 걸었다. 환히 뜬 달을 보고 홀려서는 잠시 망각한 존재가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뭐 하고 있는 건지….”

 

  그렇게 자신을 비웃은 그가 자신의 침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조금은 낯선, 작은 손님이 머무르고 있을 곳으로 성큼성큼 걷는 그 걸음이 초조한 듯 점점 더 빨라졌다.

 

 “후….”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긴 복도를 지나쳐 단숨에 위층으로 향하던 그의 발걸음이 익숙한 형태의 검은 문에 다다르자, 서서히 그 속도가 줄어들었다.

 

 

 ***

 

 “…들어가겠다.”

 

  누가 쫓아오지도 않는데, 빠른 걸음으로 –5층에 있는- 자신의 방문 앞에 선 그가 짧게 심호흡하며 방문을 열었다. 문고리를 돌려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는 그의 표정은, 사회 초년생이 막 면접관 앞에 서기 전과 비슷한 얼굴이었다.

 

 ‘자나?’

 

  처음 만나는 이가 자신을 평가한다는 긴장, 그에 관한 자신에 대한 기대, 그 못지않은 실망감이 들까 하는 지레짐작하게 되는 두려움, 무엇보다 그것을 전부 삼켜 자신을 짓누르는 초조함이 그 살갗 위로 드러나 있었다.

 

 ‘…똑같군.’

 

  방에 들어온 그가 작은 손님의 상태를 확인한 이후 감상이었다. 밑으로 그리 꺼지지 않은 침대보 위에 처음 앉은 상태 그대로 꼼짝 않고 앉아 있는 아이를 본 그의 눈꼬리가 저절로 내려갔다.

 

 ‘작아.’

 

  정말 하찮아 보일 정도로 작은 몸집에 둥글둥글 피를 뒤집어쓴 행색이 –적절할진 모르겠으나, 그의 감상에 의하면- 색이 혼탁한 포도주로 만든 젤리 같았다. 자신의 키에 한참 못 미치는 땅딸막한 아이를 향해 다시 걸음을 천천히 옮긴 이벨리아가 조금 안쓰러운 어투로 그를 얼렀다.

 

 “피곤하면 먼저 자도 된다. 눈치를 보는 것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

 

  급한 일만을 처리하고 그가 방으로 돌아온 시각은 새벽 한 시. 평소 몸이 좋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 평소 퇴근이 6시에서 7시 사이였던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다. 더구나 이 작은 인형이 예외의 경우가 아닌 이상 성인일 리도 없으니, 아이가 깨어있기엔 적절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게 아닌 거면 상관없다만, 그래도….”

 

  고민을 삼킨 그의 입술이 잠시 멈췄다. 아니, 사실은 목소리가 잠시 사라졌다는 것이 더 정확하리라, 무엇 때문인지 갈등하는 표정을 드러내던 그가 조심스럽게 붉은 인형을 향해 좀 더 걸어갔다. 그림자조차 검지 않고 붉은, 인형의 표면이 은은한 등불에 반짝이는 것을 보고 멈춰 섰다.

  자신의 다리로 두 걸음 정도 되는 거리서 멈춰선 이벨리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는 어리니까.”

 

  은은한 조명 속에서 붉게 흘러내리는 표면이 마치 자신이 들고 있는 장미 같아, 무심결에 자신의 손에 들린 꽃을 바라본 이벨리아가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너는….”

 

  어쩐지 자신의 손에 들린 꽃에서 시선을 뗄 수 없던 그가 속병을 앓듯 아랫입술을 이로 물었다. 잠시 침묵하는 그의 긴 속눈썹이 아래로 살짝 쳐졌다. 주인의 망설임을 따라 길게 늘어진 그림자에 어둠을 머금은 자색 눈망울이 아래로 숨어들었다.

 

 「뚝뚝」

 

  첸에게서 돌려받은 꽃에서 선명한 핏방울이 그의 손끝을 타고 무심하게도 흘렀다. 긴 가시 줄기를 잡고 있어, 공작의 피인가 싶은 그것은 순수한 석영에서 아무런 연고도 없이 흐르는 선혈이었다.

  그 또렷한 색깔이 두 사람의 간극을 붉게 물들였다. 분명 피가 세지 않게 조처를 했건만 다시 아이와 마주한 장미꽃은 눈물 상봉한 피붙이처럼 굵직한 핏방울을 떨어뜨리더니, 이내 공작의 앞에 드리워진 붉은 그림자에 스몄다.

 

 “그러니까, 너는….”

 

  너는. 그가 자신을 지칭하는 줄 알았는지, 아이의 두루뭉술한 발이 아래로 떨어졌다. 기척 없는 인형답게 걸음조차 가벼웠던지라 –종달새의 걸음처럼- 발소리가 없었다. 공작의 심신을 위해 조명 대신 놓인 등불이 그 붉은 표면에 반사광을 띠게 했다.

  세 걸음. 서툰 듯 아닌 듯, 좁다란 붉은 줄을 타던 아이가 여인의 앞에 섰다. 어른 걸음으로 하나, 아이의 걸음으로 셋. 그렇게 좁혀진 틈이 갈등의 폭을 좁힌 것인지, 속병을 앓기만 하던 할미꽃과 같은 공작의 눈망울이 빛을 향했다.

 

 “…?”

 

  그 찰나의 순간에도 작은 인형은 움직여 공작의 바지를 붙들었다. 그 인기척에 하염없이 꺾이기만 할 듯싶던 이벨리아의 고개가 들렸다. 그제야 자신의 바지를 붙잡은 아이를 확인한 그의 표정이 얼떨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시선이 묘하게 자신의 손을 향하는 것 같다고 느낀 이벨리아가 잠시 고민하다 왼손에 들린 것을 아이에게 들어 보였다.

 

 “이것이… 궁금하구나.”

 

  공작의 손에 들린 것을 확인이라도 하듯 머리를 움직인 아이가 그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이벨리아가 놀라 큰 눈망울을 드러냈다가 곧 차분한 표정을 되찾았다. 아이가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고개를 움직여 의사를 표현한 것은 처음이지 않을까.

  새삼 느껴지는 경이로움에 잠시간 침묵했던 그가 아이의 흥미가 끊기지 않도록 바로 말을 이었다.

 

 “비헤일리스를 상징하는 맹약의 꽃은 본래 투명한 수정으로 되어 있는데, 이렇게 안에 붉은 피로 채워져 밖으로 흐르는 꽃을 멸문의 꽃으로 불린단다. 그 줄기 안에 든 것이 투명한지 붉은 것인지 하는 차이이지.”

 

  최대한 사실만을 전달하려고 노력한 이벨리아가 무릎을 굽혀 작은 인형의 앞에 앉았다. 앉은키가 비슷하진 않았지만, 허리를 숙이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안정적인 구도였다. 그렇게 아이와 가까이 마주한 이벨리아가 꽃을 들고 있던 팔을 좀 더 앞으로 뻗었다.

 

 “자.”

 

  아이는 자신 앞에 있는 것에 여전히 관심을 두고 있던 것인지, 붉은 손을 뻗어 앞에 있는 꽃의 잎을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싱그럽게 피어나는 여느 꽃과는 달리 석영의 매끄러운 곡선이 유려하게 쓸렸다. 그 불투명한 꽃잎을 쓸어 보던 아이의 두루뭉술한 손을 본 이벨리아가 짧은 설명을 덧붙였다.

 

 “조금 색다른 것이야.”

 

  단단한 꽃의 감촉을 느낀 아이가 이윽고 공작이 내민 꽃을 받았다. 흘러내린 피로 온통 뒤덮인 탓에, 꽃을 든 아이의 모습이 화살 박힌 뭉툭한 봉우리를 보는 듯했다. 꽃을 건네받은 아이는 자신의 손에 들린 물건의 무게가 제법 무거운 것인지, 두 손을 모아 꽃을 들었다.

  그와 반대로 아이에게 꽃을 건네줬던 이벨리아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에 든 상념은 그대로이건만 마음만 가벼워지는 기분이 생소하기도 하고 썰렁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묵은 감정의 타래가 들춰지자, 그늘에서 허우적거리던 그의 눈망울이 청청한 비단처럼 반짝이며 붉은 머리통으로 향했다. 그 시선을 따라 창백한 손이 아이의 정수리에 조심스럽게 닿았다.

 

 “내가….”

 

  어른인 자신의 손 아래 있던 아이의 작은 키가 새삼 와닿던 그의 손이 얌전히 선 아이의 머리를 도닥였다. 이미 장성한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그다지 해주지 않았던 터라 어렴풋한 추억을 되짚은 그의 손길은 투박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반드시….”

 

  공작의 손, 그 아래서 자신이 잡은 꽃을 빙글빙글 돌린 아이가 발끝을 조금 움직였다. 이른 봄에 움트는 꽃망울에 닿은 것처럼 그 끝이 간지러웠기 때문이리라.

 

 “지켜주마.”

 

  그 진솔한 고백에 아이의 손에서 빙글 돌아가던 꽃잎이 한순간에 고운 입자가 되어 버리더니, 순식간에 흩어져 그 윤곽을 잃었다. 윤곽을 잃은 무수한 입자가 붉은 손에서 겨우 형태를 유지하는 것도 잠시, 무언가 낌새를 느낀 공작이 시선을 돌리려 하자, 겨우 형태를 유지하던 입자를 단숨에 휘어잡은 투명한 빛이 원래의 형태를 되찾았다.

 

 ‘방금 이상한 기운이….’

 

  시선을 돌린 이벨리아가 아무 변화 없는 꽃의 상태에 의아하게 생각할 때쯤, 그 꽃대를 잡고 있던 아이의 등을 감싼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속삭였다.

 

 [깃을 뽑아.]

 

 

 ***

 

  이른 아침, 푸른빛이 감도는 창가에 비친 햇살에 눈을 뜬 이벨리아가 옆에서 느껴지는 미온한 온기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베갯잇의 부드러운 마찰과 함께 오른쪽을 튼 그의 시선에 붉은 인형이 옆구리에 찰싹 붙어 누워있었다. 습관적으로 새벽녘에 일어난 그의 눈망울은 아침 이슬을 머금은 싱싱한 솔방울처럼 선명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천장을 보던 그는 자신의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조금 난감하다는 듯이 두 눈을 깜빡였다.

 

 ‘어쩐다….’

 

  자신의 옆구리에서 꼼짝 않고 있는 것을 보니, 아이는 자고 있으리라. 새벽에 가까운 시간인지라 이불 속에서 슬쩍 빠져나오는 여인의 몸짓이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웠다. 미약하게 구김 가는 소리와 함께 이불을 걷어지고 어른의 다리가 조심스럽게 바닥을 디딜 때쯤이었다.

 

 ‘젠장맞을….’

 

  그 누구보다도 조심스럽게 빠져나왔으리라 생각했던 이벨리아의 확신이 뒤에서 들리는 작은 인기척에 산산조각이 났다. 살금살금 맨발로 바닥을 딛던 그가 발놀림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그의 예상처럼 이불 안에 있던 붉은 인형이 슬근슬근 움직여 침대 가장자리에서 발을 빼기 위해 잠깐 버둥거렸다.

  이벨리아는 자신의 신장에 맞춰 만들어진 긴 이불 밖으로 몸을 빼내려는 아이의 버둥거림을 보며 작게 탄식했다. 맹세컨대, 아이를 깨울 생각은 절대 없었다.

  그는 자신 때문에 깬 아이를 향해 사과의 말을 전하며 미안스럽다는 듯이 표정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의 사과는 이어지지 못했다. 이불을 전부 걷어낸 아이의 다리를 보게 된 그가 입을 벌린 채로 그곳에 온전히 시선이 빼앗겼기 때문이다.

 

 “미안하….”

 

  눈을 휘둥그렇게 뜬 그의 앞으로 보이는 하얀 솜이불 아래 아담한 발목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어제만 하더라도 투박하다 못해 두루뭉술하던 그 실체가 오늘 드러나다니! 아이를 덮고 있던 진득한 핏물이 하룻밤 사이에 자취를 감춘 것을 맨눈으로 본 이벨리아의 눈동자는 경이로움을 가득 담고 있었다.

  뺨을 치고 다시 봐도 어제 봤던 뭉툭한 핏덩이 모양이 아닌, 분명한 신체였다.

 

 “아니, 이게….”

 

  본래의 목적을 잊은 그가 아이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침대 가장자리로 바투 다가온 이벨리아가 아이를 향해 손을 뻗자, 바닥을 디디려던 작은 발바닥이 금세 허공에 떠서는 결국 침대로 돌아갔다.

 

 “이게 이렇게….”

 

  혹여나 싶어 발목 외에 다른 곳을 꼼꼼히 살폈지만, 다른 곳은 여전히 피로 덮여 있었다. 결국 다시 아이의 발에 시선을 옮긴 이벨리아가 아이의 발가락 사이를 꼼꼼히 살폈다. 미처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 잔여물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발을 꼼짝없이 이벨리아에게 내주던 아이는 그런 그의 생각을 알아챈 것인지, 몸을 뒤로 빼며 들어 보인 발가락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여 보였다.

 

 “발가락이 꼼지락… 아니, 발이 보이는군요. 저하.”

 

  이벨리아의 다급한 부름에 황급히 방으로 들어왔던 토르가 보잘것없이 작은, 좀스러운 아이의 발가락을 보며 멍하니 입을 열었다가, 자신의 옆에서 눈을 반짝이는 이벨리아의 표정을 보고 급하게 표현을 고쳤다.

  이벨리아에 이어 토르마저 놀라게 했던 아이의 변화는 저택 고용인들까지 예외 없이 놀라게 했다. 어떤 것을 해도 씻길 수 없던 몸이 물에 닿고, 바닥을 걷는 걸음이 확연하며, 무엇보다 그 발에 양말과 함께 신을 신길 수 있다는 것이 신났…, 아니 경이로운 사건이었다.

 

 “…헐?”

 

  토르의 지시를 따라 지키와 리리가 욕실로 데려간 아이의 발에 물을 끼얹자, 그 표면에 남아 흘렀다. 만에 하나, 아이의 겉면이 또다시 물을 통과시킨다 하더라도 실망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두 사람의 얼이 나갔다.

 

 “되… 나? 되네, 된다!”

 

  그 옆에서 거품을 낸 손으로 아이의 발을 건드린 지키가 신이 난 얼굴로 물기 어린 살갗에 거품을 묻혔다. 드러난 발목 아래를 약한 힘으로 살살 씻어낸 두 사람이 탈의실로 데려와 물기를 닦아주고, 토르가 탈의실에 준비해 놓은 양말을 씌웠다.

  꼼지락, 양말을 씌운 아이의 발이 낯선 촉감에 반사적으로 움직이자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두 사람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 소리에 욕장 근처에서 일하던 고용인이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이들과 달리, 처음부터 아이를 적대시하던 이들은 욕장 근처에서 기웃거리다가, 그 안에서 크게 울리는 지키의 감탄에 움찔하며 황급히 복도를 빠져나갔다.

 

 ‘어이구씨! 깜짝아!’

 

  아이의 모습에 변화가 일었다는 소식은 고용인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러나 망측하게도 공작은 그들의 입단속을 따로 하지 않았다. 그렇게 허무맹랑할 줄 알았던 공작의 신뢰는 외부인의 질문에 침묵을 자처한 고용인의 태도로 입증됐다.

  그렇게 퍼진 아이의 소식은, 미지의 이방인에 관한 고용인들의 경계심을 낯선 것을 알아가고자 하는 호기심으로 전환했다. 그 호기심은 점차 낯선 아이에게 관심을 두게 했고, 그 관심 덕에 기괴한 모습으로 인해 아이가 식사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그들은 작은 인형을 향해 동정의 눈길을 보내며, 그 사실을 제일 안타깝게 여겼다.

 

 “사람은 밥심인데….”

 

  걷는 것 외에는 딱히 무언가 할 수 없던 아이의 모습에 고용인의 태도가 서서히 변했다. 존재하나 존재가 의문스러운 이를 향한 의심이 점점 익숙함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다음날, 변했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벨리아의 옆에 붙은 인형을 힐끔 바라본 고용인들은 속으로 안타까움을 삼켰다.

  그들의 시선을 받은 아이는 여전히 물렁물렁한 핏물에 덮여서는 발목만 드러내며 복도를 걸었다.

 

 “무, 무릎! 무릎!”

 

  그로부터 일주일 후, 아이의 무릎이 드러났다. 한 달 뒤에는 허벅지, 반년 뒤에는 허리, 일 년 뒤에는 목이 드러났다. 고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나비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통에 저택의 고용인들은 어서 빨리 아이의 얼굴 보기를 희망했다.

  업무상 공작 성을 찾았다가 그 소식을 듣게 된 핌이 점차 드러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크게 기뻐했다. 온몸(?)으로 아이를 향한 위협을 막아냈던, 그는 기쁨을 넘어 뿌듯함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뿌듯함에는 아이가 좀 더 활발해지는 변화를 비롯하여 이런 상황을 만들 수 있도록 유도한 자신의 상사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역시 우리 공작님, 보는 눈이 탁월하시다니까!”

 

 “….”

 

 “…?”

 

  고용인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핌은 서재에서 쉬고 있던 이벨리아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씩 웃었다. 그러나 이벨리아는 자신의 곁으로 성큼 다가오는 핌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시선만 줄 뿐이었다.

 

 “아~.”

 

  그런 이벨리아의 반응에 혹시나 하던 핌이 그의 옆에 자리하고 있는 조그만 인형을 보고는 알만하다는 듯 감탄사를 발했다. 그러고 발소리를 줄인 그가 눈가를 접어 살살 웃었다.

 

 “제가 오붓한 사이를 방해한 것 같군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다가 옆에 있던 작은 인형을 눈치챈 핌이 매끄러운 동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돌아서는 핌을 보던 공작의 표정이 처음 외출했다가 신발을 읽어버린 것을 뒤늦게 깨달은 아이처럼 굳더니, 회의실 방향으로 몸을 튼 핌을 향해 황급히 입을 열었다.

 

 “가지 마.”

 

 ‘예?’

 

  웃음기 서린 핌의 감탄에 이벨리아가 답지 않게 간절한 목소리로 돌아서던 그의 발걸음 붙잡았다. 웬일로 자신을 붙잡나 싶었던 핌이 안쪽으로 돌아보자, 작은 인형과 맞붙어 앉아 있는 공작의 표정이 제법 얼떨해 굳어있는 것이 보였다.

 

 ‘아하!’

 

  둘을 위해 자리를 피해주려 했건만, 정작 그 당사자가 어렵사리 서재로 들인 손님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보낼 줄이야. 여전한 웃음기를 애써 지운 핌이 살짝 굳은 이벨리아를 힐끔 보더니, 잘난 체하며 두 사람을 향해 걸어가는 시늉을 했다.

 

 “이것 참, 인기인은 이래서 피곤하지.”

 

 “….”

 

  여전히 빳빳하게 세워진 공작의 목덜미에 입술을 씰룩거리던 핌이 정말 안타까워 미치겠다는 듯 탄식을 뱉으며 이벨리아의 옆에 바짝 붙어 있던 아이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에 생각보다 왜소한 아이의 몸이 보였다.

 

 “설마하니, 천하의 비헤일리스 공작께서 아이를 상대로 낯가리다…”

 

 “나가.”

 

 “…니.”

 

 ‘하여간, 쑥스러우면 변덕이 죽 끓듯 하다니까.’

 

  이벨리아의 거절에 뒷말을 마저 뱉은 핌의 시야에 목 언저리까지 형체를 드러낸 인형이 선명하게 보였다. 다리가 드러났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는데, 반소매와 반바지를 입은 터라 덩치가 더욱 작아 보였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핌의 변명에 싫증이 조금 깃든 공작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저 보고하러 왔…”

 

 “나가.”

 

 

 ***

 

  그로부터 3년. 이른 아침에 깬 이벨리아는 당혹을 감출 수 없었다. 옆구리에서 느껴져야 할 미약한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없어….”

 

  황급히 이불에서 나온 그의 신경이 곤두섰다. 이상했다. 이미 눈을 떴을 때부터 그의 뇌리에 은근히 밀려드는 불안이 현실이 된 것처럼, 그가 자리한 침실에 어떠한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을 깨달은 이벨리아는 잠옷 바람으로 복도에 뛰쳐나와 그곳에 있던 고용인을 놀라게 했다.

 

 “저하?”

 

 “없어, 아이…, 아이가 없어졌어.”

 

  절망에 빠진 자색의 눈동자와 마주한 토르의 눈동자가 커졌다. 순식간에 창백해진 이벨리아의 안색에 그를 잠시 쉬게 한 집사가 다시 복도로 나서자, 이미 상황을 전해 들은 고용인들이 아이를 찾기 위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이야!”

 

 “얘!”

 

 “어디 있니?!”

 

  저택에 온 지 거의 5년간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사실에, 아이를 찾아다니는 고용인의 모습도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고용인들은 새삼스럽지만 넓은 건물에서 길을 잃은 것일지도 모른다며 건물 지하까지 샅샅이 뒤지는 통에, 아침 준비를 마치던 주방 식구들도 ‘아이 찾아 저택 수색 탐방’에 합류했다.

 

 “얘, 아가야!”

 

 “어딨어?”

 

 “들리면 대답해봐!”

 

  아이의 이름을 모르기에 저마다 다른 지칭으로 건물 안을 샅샅이 훑어보는 고용인과 다르게 그 밖을 살피던 이벨리아가 문득 느껴지는 기척에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한순간 느껴진 기척이었지만, 그 인기척은 사라지지 않고 정원에 계속 머물고 있었다.

 

 「…말라」

 

  그 인기척에 저택 뒤로 난 숲과 성의 앞에 있는 평야 사이에 조성된 중앙 정원 쪽으로 달려가던 이벨리아는 아침햇살을 은은하게 머금고 투명하게 반짝이는 장미 덤불을 보고 속도를 늦췄다.

 

 ‘그 자리는….’

 

  투명한 수정으로 이뤄진 가시덤불을 마주하고 선 작은 인형 하나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이를 발견했던 날, 그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던 붉은 꽃을 쥐던 자리에 있었다. 그 인형은 수정으로 이뤄진 가시덤불을 감상하는 데 여념이 없는 듯했다.

  맹약의 꽃 앞에 선 아이의 머리는 까만 단발, 그 밑으로 보이는 것은 이벨리아의 눈에도 –익숙하지 않은 듯- 익숙했던 반소매와 반바지였다. 그렇게 이벨리아에게 등을 보인 아이가 서 있는 곳은 11월 중순, 뼈까지 시린 한파가 휘몰아치는 모드나드 성의 중앙 정원이었다.

  그 계절감 없는 복장을 익숙하게 입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이벨리아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하얀 설원 속 까만 단발머리가 몰아치는 바람에 잠시 나부꼈다.

 

 안 맞아.

 

  투명한 덩굴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아이의 까만 머리칼과 그것을 덮을 듯 소복이 내려앉은 눈송이가 어울리지 않은 채, 묘하게 어긋나는 느낌을 주었다. 마치 억지로 끼워 넣은 조각처럼 두드러져 보이는 아이의 뒷모습에 이벨리아는 확신했다.

 

 ‘너구나.’

 

  이 까만 머리칼의 아이가 자신이 찾고 있던 아이일 것이라고. 지금 느껴지는 이 위화감이야말로 눈앞에 있는 아이의 정체성이었으니까.

 

 “아.”

 

  햇살에 번쩍이던 꽃잎의 반사광을 직시한 아이의 입에서 짧은 감탄이 흘렀다. 그 소리의 주인이 자신의 뒤에 선 이의 기척을 뒤늦게 인지한 것인지, 역광 속 그림자에 몸을 숨기며 시선을 돌렸다.

  찬란히 떠오른 태양 빛이 드리운 그림자에 가려진 윤곽에서도 또렷한 한 쌍의 눈동자가 영롱히 빛났다. 그 눈동자와 마주한 이벨리아는 편린(片鱗)처럼 반짝이는 눈망울을 보며 숨을 멈췄다. 그와 마주하고 있는 아이의 눈동자가 마치 하늘의 색을 훔친 바다의 조각처럼 반짝여, 그 눈을 잠시 멀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 여인과 마주하던 아이의 눈동자가 대수롭지 않게 깜빡였다. 자신을 보고 굳어버린 공작과 달리, 그런 여인이 익숙해 보이는 아이의 입술이 벌어졌다.

 

 “안녕.”

 

 이벨리아.

 

  아이의 말소리와 함께 푸드덕 날아오르는 새들 사이로 송이송이 떨어지는 눈이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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