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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열여덟 스물아홉
작가 : 애플타이거
작품등록일 : 2020.9.30

열여덟, 양양, 한여름, 새파란 바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2주간 전부를 나눈 수현과 진호가 11년 후, 청춘의 끝자락에서 재회한다.

 
15화. 친구
작성일 : 20-09-30 17:02     조회 : 223     추천 : 0     분량 : 1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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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태식이 진호의 짐을 언제 풀어놨는지 캐리어에 있던 옷가지와 물건들이 옷장과 서랍장에 깔끔하게 정돈돼있다. 진호는 정말 도움 안 된다는 얼굴로 옷걸이에 걸린 옷가지들을 신경질적으로 빼서 캐리어에 집어던진다.

 

 서랍장을 부술 듯 쾅쾅 여닫는 소리에 깊은 잠에 들었던 수현이 눈을 뜨고 주변을 살핀다.

 

 “어디가?”

 

 “집에 갈 거야.”

 

 진호가 양양에 도착한 첫날부터 조금만 수틀려도 서울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터라 수현은 잔뜩 화가 나있는 진호의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짐을 싸고 있는 진호를 멀찍이 떨어져서 가만히 지켜본다.

 

 “이별선물!”

 

 갑자기 날아온 물건을 수현이 반사적으로 두 손을 펼쳐 받아낸다.

 

 “좀 하는데?”

 

 “웬 선크림?”

 

 “뱀도 아니고, 허물을 왜 벗는데? 내 침대 위에 떨어진 네 등껍질은 다 치우고 가라.”

 

 바깥활동을 할 때 선크림을 발라야 한다는 상식을 알면서도 수현은 바르면 미끄덩거리고 달걀귀신처럼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선크림을 멀리했다. 그래서 여름만 되면 수현의 등은 허물 벗는 애벌레마냥 살갗이 항상 벗겨져 있었다.

 

 “가면 안 오는 거 아냐? 그럼 태식이형님한테 졸라서 이 침대 내 꺼해야겠다.”

 

 “누구 맘대로?”

 

 “네 돈 주고 산 것도 아니잖아.”

 

 “어째 오늘따라 맞는 말만 한다? 가만있지 말고 이리 와서 캐리어 좀 닫아봐. 물건이 많지도 않은데 왜 안 닫히지?”

 

 수현이 귀찮은 척 마지못해서 캐리어와 씨름 중인 진호의 곁으로 간다.

 

 “비밀번호가 잘못됐잖아.”

 

 “똑바로 눌렀어.”

 

 “뭔데?”

 

 “1111”

 

 “바보냐?”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바보는 당신이거든요? 시간 없으니깐 빨이 어떻게 좀 해봐.”

 

 수현이 진호가 알려준 비밀번호로 자물쇠를 재설정해 보지만, 캐리어가 닫힐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잘못됐는데? 1111, 확실해?”

 

 “저리 가봐. 뭣 좀 할까 싶어서 불렀더니 도움이 되기는커녕.”

 

 진호가 다시 자물쇠를 붙들고 1111을 연달아 누르다 안 되겠는지 이 숫자 저 숫자 다 눌러보지만, 캐리어가 말을 듣질 않는다.

 

 “가게에 가방 같은 거 있으면 좀 갖다 줘. 그것도 없으면 봉지라도.”

 

 캐리어를 버리고 갈 생각인지 진호가 캐리어를 뒤집어엎어 안에 있는 내용물을 바닥에 쏟아내고, 수현이 재빠르게 100리터짜리 쓰레기종량제봉투를 내민다.

 

 “장난 치냐?”

 

 “이것 밖에 없는 걸 어떡해. 서울 가기 싫음 말고.”

 

 “빨리 넣기나 해.”

 

 진호의 방 바로 옆에 있는 다용도실에 쓸 만한 거라곤 쓰레기봉투밖에 없었다. 진호가 봉투의 입구를 벌리고 있는 동안 수현이 진짜 쓰레기를 담듯 진호의 옷가지와 물건을 한 움큼씩 집어 담는다. 진호는 금세 채워진 봉투를 산타할아버지가 선물보따리를 짊어진 것과 같은 자세로 어깨에 짊어지고 바로 방을 나선다.

 

 “어디가?”

 

 민지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진호의 길을 막고 선다.

 

 “좀 비켜줄래?”

 

 “어디 가는지 말해주면 비켜줄게.”

 

 “집에 가. 됐어?”

 

 “집이 어딘데?”

 

 “서울. 너랑 말씨름 할 시간 없으니깐 좀 비키지.”

 

 “서울 가는 버스 다 끊겼을 텐데.”

 

 “강릉터미널엔 밤늦게까지 있어. 그런데 내가 왜 너랑 이런 대화를 해야 하지?”

 

 “막차가 몇 신데?”

 

 “야.”

 

 “아이~ 막차가 몇 신데~”

 

 같잖은 민지의 애교에 진호의 표정이 절로 일그러지는데, 민지가 갑자기 진호의 손목을 콱 움켜쥐고 문밖으로 진호를 끌고 나간다. 한때 전도유망한 강원도대표 유도선수였던 민지의 힘을 공부 밖에 하는 것 없는 진호가 당할 리 없었다.

 

 “여자애가 왜 이렇게 힘이 쎄?!”

 

 “남자애가 왜 이렇게 약하냐? 난 뭐 종이인형 끌고 오는 줄 알았잖아.”

 

 “야.”

 

 “부탁 좀 하나 하자.”

 

 “싫어. 내가 왜?”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야박하기는. 서울 사람들은 깍쟁이에다가 얼음물처럼 차갑다더니 맞구나?”

 

 “알면서 왜 나한테 부탁을 하겠다는 건데? 그럼 볼 일 끝난 것 같으니깐 난 간다.”

 

 때마침 건너편에서 빈 택시가 다가오고, 반색을 하며 손을 뻗는 진호 앞으로 봉고차 한 대가 지나가나 싶더니 뒷문이 활짝 열리자마자 동건과 수현이 진호의 손을 안으로 팍 끌어당기고, 뒤에 서 있던 민지까지 합세해 진호의 등을 떠밀어 진호화 함께 차에 올라타자마자 바로 문을 닫아버린다.

 

 “병진형님 출발!”

 

 “분부대로 합죠.”

 

 무슨 꿍꿍인지 희희낙락인 병진과 동건, 수현, 민지와 달리 진호는 잔뜩 화가 나있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진호야, 내가 시킨 거니깐 화내려면 나한테 내라. 애들은 아무 죄 없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에요? 집에 가려는 사람 잡아다가, 의사도 묻지 않고 어디로 데려가는 거냐고요!”

 

 “목청 좋은 걸 보니 태식이 아들이 맞긴 맞네. 오늘 경포대해수욕장에 유명한 가수들 엄청 많이 오거든. 여름썸머 축젠지 뭔지, 무튼 그것 때문에 먹을 것도 엄청 많고 마지막엔 불꽃축제도 한대. 안 그래도 애들이랑 공연 보러 가기로 예전부터 약속해놨었거든. 그런데 마침 태식이가 너 강릉터미널까지 데려다주고 오라 길래, 겸사겸사 같이 공연도 보고 터미널에 내려주면 되겠다 싶었지. 내 계획이 어때? 왜? 섬마을에 팔려가는 줄 알았어?”

 

 “하... 전 공연 같은 거 관심 없으니깐 가는 길에 터미널에 그냥 내려주세요.”

 

 화낼 힘이 없는 건지 화낼 가치가 없는 건지, 진호가 짐이 든 쓰레기봉투를 바닥에 내려놓고 잠 잘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 있는 진호를 사이에 두고 병진과 동건, 민지, 수현은 뭐가 그렇게 재밌고 신이 나는지 서로 숨을 죽이고 웃기 바쁘다.

 

 

 

 

 거의 여덟시가 다 돼 가는데도 불구하고 대낮까지 훤한 축제거리에 인파가 가득하다. 경포대 해수욕장 입구에 돔 형태로 설치된 임시 조형물 앞은 인증샷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길게 줄이 늘어서있고, 계단형태의 나무 데크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수 십대의 푸드트럭 앞에도 발 디딜 틈 없이 음식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병진을 필두로 진호-수현-민지-동건이 기찻길 놀이를 하듯 서로의 어깨를 붙잡고 일렬로 서서 푸드트럭 지도가 담긴 축제 팸플릿을 보고 정한 타코를 먹기 위해 인파를 비집고 무한 전진을 한다.

 

 “한 시간 내에 밥 까지 먹고 터미널에 도착하는 게 진짜 가능하긴 한 거예요? 개미가 우리보다 더 빠르겠다.”

 

 초입을 지나자마자 자의적으로 움직인다는 것보다 인파에 밀려간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인의 장벽에 갇힌 진호가 병진의 뒤통수에 대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네가 아직 날 많이 안 겪어봐서 모르나본데, 내 사전에 거짓말이란 없다 이거야. 내가 맞다하면 그건 맞는 거야. 안 그래도 시끄러운데 그만 궁시렁거리고 얌전히 따라오기나 해. 자자~ 사람 지나갑니다~ 길 좀 비켜주세요~”

 

 병진이 호기롭게 말을 뱉어놓고 똥침 자세로 손을 앞으로 쭉 뻗어 인파를 헤쳐 나가려는데, 눈앞에 서 있는 꼬마 한 명도 제치지 못하고 한자리에 정체된 채 멀뚱히 멈춰 서있다.

 

 “여기서 강릉터미널까지 5분 거리라는 것도 거짓말이죠?”

 

 “어디서 개가 짖나?”

 

 “믿은 내가 잘못이지.”

 

 병진이 귀를 사정없이 후비고 검지 손가락에 낀 귀지를 진호를 향해 툭툭 턴다.

 

 “아 진짜!”

 

 “정이야 정! 수현이랑 동건이랑 민지랑 내 귀지 맛 안 본 놈 없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너 첫인상은 재수 없었는데, 보면 볼수록 매력 있다?”

 

 병진이 노란 귀지가 묻어있는 검지손끝으로 진호의 얼굴을 요염하게 훑고 지나간다. 얼굴에 바퀴벌레가 기어가는 것과 진배없는 경험 중인 진호는 구토가 올라오는 매스꺼움에 속이 울렁거린다.

 

 “남자 좋아하시면, 제 뒤에 있는 애 소개시켜드릴게요. 야 김수현, 나랑 자리 바꿔.”

 

 진호가 자신의 어깨 위에 얹혀있는 수현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앞에 방어막인양 갖다 세운다.

 

 “수현이 키가 나보다 쬐~꼼만 컸어도 내가 어떻게 해볼 텐데, 작아서 안 돼. 그것만 빼면 완전 내 스타일인데. 너~무 아까운 거 있지?”

 

 병진이 장난스럽게 수현의 가슴팍을 치며 과장되게 웃어 보인다.

 

 “난 또 뭐라고. 형님도 제 스타일 아니니 피차일반입니다.”

 

 수현은 병진이 틈만 나면 실없는 농담을 즐기는 것을 잘 아는지라 놀라는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맞받아친다.

 

 “아 재미없어. 신참이 들어와서 오랜만에 놀리는 재미가 있었는데, 쟤 지금 나 게이로 착각하고 있는 거 맞지?”

 

 병진이 아예 등을 지고 돌아서있는 진호를 가리키며 수현과 같이 키득거린다. 동건과 민지는 원조 치토스 맛은 불갈비맛이다 매운맛이다를 두고 설전 중이고, 진호는 어느 대화에도 끼지 못하고 붉게 물드는 하늘을 넋 놓고 바라본다.

 

 “노을이야말로 배신한 적이 없지.”

 

 “노을 좋아하면 며칠 더 있다가 가.”

 

 노을마니아인 진호에게 수현이 구미가 당길만한 제안을 한다.

 

 “양양에 전국에서 제일 유명한 노을명소가 있거든. 거기서 노을을 안 본 자, 노을을 논하지 말라. 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단 걸 알랑가 모르겠다.”

 

 “됐고. 앞으로 가기나 하지?”

 

 인파가 한결 느슨해진 틈을 타 병진이 거침없이 앞으로 전진 한다. 그 뒤로 수현-진호-민지-동건이 줄줄이 소시지 마냥 끊어지지 않고 쫓아가고, 운 좋게 타코 트럭 바로 앞에 있는 해안가와 맞붙은 나무 데크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해안가 메인무대에선 이미 가수들의 공연이 진행되고 있었다.

 

 “주문은 내가 알아서 시키고 올게. 종류별로 그냥 다 쓸어오면 되는 거잖아?”

 

 하루 이틀 해본 주문이 아닌 듯 의기양양하게 돌아서는 병진을 향해 수현, 동건, 민지가 엄지를 치켜들며 한껏 오른 병진의 기분을 더 추켜세우는데, 진호는 다리를 꼬고 앉아 메인무대 너머에 있는 시커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야 너도 엄지 같은 거 들 수 없어?”

 

 “왜?”

 

 “우린 하나니깐.”

 

 “나 오늘 너희 처음 봤는데.”

 

 “으구~ 서울 깍쟁이~”

 

 민지가 얄밉다는 듯 시종일관 퉁명스런 진호의 볼을 덜컥 꼬집는다. 얼마나 놀랐는지 진호는 말도 못하고 입술을 빼앗긴 것 마냥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고 민지를 흘겨보는데, 이미 냉기만 도는 진호의 매력에 푹 빠진 민지는 진호의 위협 따위 안중에도 없다.

 

 “귀여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듯 냉소적으로 생긴 진호를 민지가 진심으로 귀여워 죽겠다는 꿀 떨어지는 눈으로 쳐다보더니, 이번엔 양손으로 진호의 볼 살을 잡아 쥐고 앞뒤로 막 흔든다.

 

 “야!”

 

 “귀여워~~~”

 

 “허민지양~ 고백실패로 오래된 장난감 김수현군을 잃으시고, 새 장난감 양진호군을 찾으신 것 감축드리옵니다~”

 

 동건의 너스레에 수현까지 가세해서 진호를 향해 절하는 시늉을 하고, 고백실패의 쪽팔림 따윈 진즉에 날려버린 민지는 왕이라도 되는 것 마냥 진호의 어깨를 감싸 안고 손을 흔든다.

 

 “야!”

 

 진호가 소리를 치든 욕을 하든 화를 내든, 그 누구에게도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 물론 수현에게도.

 

 때마침 병진이 맥주와 타코를 양손에 바리바리 싸들고 와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다들 일사분란하게 포장을 뜯어 음식을 늘어놓고 카메라를 들고 있는 병진을 향해 포즈를 취한다. 물론 진호만 빼고.

 

 “어딜 빠져 가시려고.”

 

 박력 있는 민지에게 붙잡혀 진호까지 단체사진을 찍은 뒤에야 저녁식사가 시작된다.

 

 “축제에 술이 빠지면 쓰나. 논알콜이니깐 마음 놓고 먹어.”

 

 “경찰한테 걸리면 어쩌려고요.”

 

 “이것 같고 철창 들어갈 거면 오천만 대한민국 사람들 다 거기 살아야 할 걸? 자자, 잔소리 그만하고 카르페디엠~!”

 

 현재를 즐기라는 건배가 끝나기 무섭게, 분위기를 위해 사온 논알콜맥주를 콜라인 것 마냥 동시에 원샷으로 끝내버리고, 테이블을 가득 채웠던 음식이 순식간에 동이 난다.

 

 “진호야 어떡하지? 아홉시 넘었다.”

 

 미안함을 끌어 모아 한껏 짜부라진 얼굴과 달리 병진의 목소리는 낭랑하기만 하다.

 

 “이것까지 다 계획된 거 다 알아요. 열시 막차 타면 되요. 다 먹었으니깐 일어나죠?”

 

 볼일 끝난 진호가 미련 없이 일어나서 앞장서는데, 그 누구도 진호의 뒤를 따르지 않고 의자에 붙박인 듯 가만히 앉아서 공연을 보고 있다.

 

 “아 그럼 병진형님만 데려다 주세요. 애들은 여기서 공연보라고 하고. 괜히 저 하나 때문에 다 갈 필욘 없잖아요.”

 

 “야 넌 당연한 말을 무슨 선심 쓰듯이 말한다?”

 

 “아니 뭐 그렇다고요.”

 

 진호가 머쓱한 얼굴로 병진이 일어나기만을 바라고 있는데, 불현 듯 서운함이 솟구친다. 동건과 민지는 그렇다 쳐도 수현인 자신과 1박2일을 함께한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진호에게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고 선글라스에 수염을 달고 슬램덩크를 외치는 가수한테 푹 빠져있다.

 

 “진보야 나 화장실 좀. 큰 거니깐 한 10분만.”

 

 “아 예.”

 

 듣고 싶지 않은 병진의 속사정 브리핑을 듣고, 진호가 수현의 곁에 슬쩍 다가선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에게 관심조차 없는 수현의 팔뚝을 쿡쿡 찌른다.

 

 “아직 안 갔어?”

 

 말 그대로 수현이 간 줄 알았는데 여기서 뭐하냐는 얼굴로 진호를 한 번 훑고 바로 공연으로 시선을 돌려버린다.

 

 “병진형님 취하신 것 같은데...”

 

 “먹은 게 있어야 취하지. 논알콜맥주 먹어놓고 뭘 취해.”

 

 “취했어. 그래서 지금 화장실로 토하러 갔어.”

 

 “그래? 괜찮아 병진형님 원래 토 잘해.”

 

 수현이 공연에 아예 푹 빠져 진호의 질문에 듣는 둥 마는 둥 대충 대답을 이어간다. 그런데 갑자기 조명이 화려하게 발광하고 무대 위로 폭죽이 사정없이 터지더니 무대 앞에 서 있던 사람들부터 푸드트럭 거리를 메운 사람들까지 떼창을 부르며 일제히 뛰기 시작한다.

 

 “날 부르는! 바람의 함성을 향해! 하늘을 향해! 내 몸 던져! 내가있어! 가슴 벅찬 열정을! 끌어안고! 박차 올라! 외치고 싶어~”

 

 진호도 수현과 민지의 손에 이끌려 어깨동무를 하고 방방 뛰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수현이 진호의 귀에 입을 밀착시키고 말을 한다.

 

 “여기서 미친 듯이 뛰어야 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경포대해수욕장 위로 “crazy for you crazy for you 슬램덩크!” 떼창이 왕왕 울리고, 동시에 진호가 픽 고꾸라진다.

 

 친구들은 당연히 장난이라 생각하고 관심도 갖지 않는데,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온 병진이 바닥에 쓰러져있는 진호를 보자마자 머리를 받치고 일으켜 세워 몸을 흔든다.

 

 “양진호! 양진호! 정신 차려. 양진호? 진호야? 내 말 들려? 양진호?”

 

 진호를 안전하게 터미널까지 데려다주라는 태식의 부탁대로만 행동했으면 이런 일 따윈 없었을 텐데, 자세히 알진 못하지만 분명 오해가 있어 보이는 두 부자 사이를 가깝게 해주려한 자신의 오지랖 때문에 이 사태를 만든 것 같아 병진은 눈앞이 아찔하기만 하다.

 

 “진호야. 내 말 들리면 눈동자 좀 움직여 볼래?”

 

 일정치는 않지만, 진호는 호흡을 하고 있었다. 구조자격증이 있는 병진은 cpr 대신 진호의 맥박과 동공반응을 살핀다. 조난사고가 났을 때만 봤던 병진의 행동에 수현과 동건, 민지가 잔뜩 겁에 질려 진호를 둘러싼다.

 

 “못난 놈들. 이러고도 네들이 친구야? 진짜 큰일이라도 났으면 어쩔 뻔 했어!”

 

 “진짜 장난인 줄 알았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형님...”

 

 수현이 얼빠진 얼굴로 진호의 팔다리를 주무른다. 민지와 동건도 진호의 곁에 붙어 몸 여기저리를 쓸어내리는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있던 진호가 술 취한사람마냥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일행의 손길을 뿌리치고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양진호 지금 뭐하는 거야? 괜찮아?”

 

 “어지러워. 어지러워. 앞이 안 보여. 앞이 안 보여. 아씨~ 나한테 뭘 먹인 거야~”

 

 진호가 술 취한 사람마냥 갈지자를 그리며 걷다가 1m도 채 가지 못해 바닥에 풀썩 주저앉는다.

 

 “맞다. 집에 갈 때 택시 부를 생각으로 내 맥주는 알콜로 주문한 걸 깜빡하고 있었어...”

 

 “형님!”

 

 수현과 민지, 동건의 입에서 일제히 앙칼진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태식이 아들이면 말술일 텐데... 이상하다...”

 

 “형님 지금 그게 할 소리예요?”

 

 “아니 그냥 말이 그렇다고. 그래도 다행이네. 난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었는데, 단순한 숙취면 뭐...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을까?”

 

 “그럼 저희 작전성공인 거예요?”

 

 놀라서 소리 칠 땐 언제고, 동건이 배시시 웃으며 허공에 손을 쫙 펼친다. 그제야 숙취 정도라면야... 라는 생각이 네 사람의 머리를 차례로 지나가고, 동건의 손등 위로 나머지 손바닥이 착착착 올려 진다.

 

 “수현이 곁엔 내가 있을 테니깐, 다들 가서 공연 봐.”

 

 수현의 자진 희생으로 동그랗게 머리를 맞대고 선 네 사람이 평화롭게 손바닥을 아래로 내리꽂으며 파이팅을 외치고 흩어진다.

 

 수현이 절하는 자세로 바닥에 엎드려있는 진호의 곁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꽤나 속이 쓰릴 듯한 진호의 등을 힘 있게 쓸어내리는데, 진호가 갑자기 눈앞에 보이는 풀숲으로 전속력으로 뛰어 들어가 내장이 나올 기세로 토를 쏟아낸다.

 

 “야 괜찮아?”

 

 식사 중에 tv에 분변이나 토사와 관련된 대화나 이미지만 나와도 구역질이 올라올 정도로 비위가 약한 수현은 진호의 곁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찍이 서서 말로만 진호의 상태를 파악한다.

 

 “그렇게 걱정되면 와서 등이나 두드려 주든지.”

 

 “그거 한다고 토가 잘나온다거나 그런 거 없데. 증명된 사실이 없데.”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이치우고 빨리 와서 등 좀 두드려줘. 진심이야.”

 

 “혼자선 안 돼?”

 

 “되면 부르겠냐? 아 빨리! 머리 아파 죽겠단 말야! 병진형님이랑 너희랑 짰지? 나 서울 못 가게 하려고 일부러 나한테만 술 먹인 거지? 시골 사람들이 순진하고 착하다고 누가 그래? 처음부터 이상했어. 네가 짐 싸주는 거 도와 줄 때부터 이상했어.”

 

 풀숲에 고개를 처박고 토사와 침을 줄줄 흘리는 와중에도 얼마나 억울하고 화가 났으면 진호의 입이 쉬질 않는다.

 

 “야 그 정도 말 했으면 술 깼을 것 같은데? 이제 좀 괜찮지 않아? 타코집에서 물티슈랑 휴지 얻어왔으니깐 토 다 하면 말해. 던져줄게.”

 

 “필요 없으니깐 꺼져.”

 

 전날 태식이 차려준 산해진미에 오늘 새벽 복순이 차려준 12첩 반상까지. 먹은 게 많은 만큼 아무리 쏟아내도 끝이 없다. 복순이 귀한 거라며 마지막 한 줄기까지 꾸역꾸역 먹인 고사리가 진호의 목구멍에 걸려 입 밖까지 늘어져 대롱거린다. 입안에서 끝없이 끈을 뽑아내는 마술사마냥 진호가 고사리를 빼내는 사이, 진호의 머리 위로 대형 폭죽이 터진다.

 

 새까만 하늘 위로 폭죽이 쉼 없이 솟구치고, 화려한 불꽃이 하늘을 수놓는다. 불꽃쇼에 완전히 넋이 나간 수현의 얼굴이 불꽃에 반사돼 아름답게 빛난다. 그리고 그 옆으로 퀭하다 못해 초췌한 얼굴로 진호가 입가를 스윽 닦으며 다가와 선다.

 

 “뭐야 별것도 아니잖아. 병진형님 말 믿을게 못 되네.”

 

 “괜찮아?”

 

 “불꽃에 정신 팔려서 등 좀 두드려 달라고 해도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이제 좀 걱정 되냐?”

 

 “예쁘지?”

 

 수현이 진호의 불평을 웃음으로 맞받아치고 그야말로 꽃이 핀 아름다운 밤하늘을 가리킨다.

 

 “여의도 불꽃축제 가 본적 없지?”

 

 “나한텐 이게 내 인생 첫 불꽃축제야.”

 

 시시하다는 듯 심드렁하게 하늘을 바라보던 진호의 시선이 뭐에 홀린 듯 수현의 얼굴로 옮겨간다. 빨간 불꽃이 터지면 빨간색으로, 노란 불꽃이 터지면 노란색으로, 초록 불꽃이 터지면 초록색으로... 불꽃이 터질 때마다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수현의 얼굴빛에 따라 진호의 얼굴도 같이 변화한다.

 

 끝을 알리듯 귀를 찢는 굉음을 내며 대형폭죽 수십 발이 동시다발로 터지더니 하늘에서 불꽃이 비처럼 쏟아진다. 그리고 대낮같이 밝았던 하늘이 칠흑으로 뒤바뀌고, 바로 옆에 서 있는 수현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축제현장에 일시적 어둠이 내려앉는다.

 

 “김수현.”

 

 “어.”

 

 “어디 있어?”

 

 “네 옆에.”

 

 “안 보여.”

 

 “기다려봐. 어둠에 익숙해지면 보일 거야.”

 

 “완전 밤이 돼버렸네.”

 

 “그러게. 진짜 하나도 안 보인다.”

 

 “그럴 땐 하늘을 봐.”

 

 “오!”

 

 “별 보인다. 그지?”

 

 “응. 그런데 진짜 별일까?”

 

 “가만히 있는 걸로 봐선 그렇지 않을까?”

 

 축제 중 커플들을 위한 깜짝 타임으로 계획된 암전타임이 계속 이어 진다

 

 “양진호.”

 

 “어.”

 

 “어디 있어?”

 

 진호가 대답대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스쳤던 수현의 손을 조심스럽게 그러쥔다. 그리고 수현의 다섯 손가락 사이사이로 자신의 다섯 손가락을 퍼즐 맞추듯 끼워 넣는다.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은 수현의 심장박동에서 터져 나온 피가 동맥을 타고 수현의 손을 지나 그 파동이 진호의 손으로 이어져 진호의 심장에 닿는다. 그리고 진호와 수현이 동일한 맥박으로 호흡하며 서로의 감정을 오롯이 느끼고 있다.

 

 “어둠이 걷히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수현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린다. 바보 같은 질문이란 걸 알지만, 수현은 진호의 마음이 듣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친구.”

 

 진호의 담백한 한 마디가 수현의 기대를 보기 좋게 저버리고 지나간다.

 

 “친구...”

 

 “응 친구...”

 

 두 사람 사이에 친구라는 단어가 쓰게 오간다.

 

 두 남자가 비밀스럽게 손깍지를 낀 것을 본 사람도 없지만, 볼 수도 없는 어둠이 내려앉은 밤. 지금 이 순간. 진실을 가장한 거짓이 둘 사이를 무의미하게 오간다. 겁쟁이 같은 두 사람 사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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