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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열여덟 스물아홉
작가 : 애플타이거
작품등록일 : 2020.9.30

열여덟, 양양, 한여름, 새파란 바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2주간 전부를 나눈 수현과 진호가 11년 후, 청춘의 끝자락에서 재회한다.

 
13화. 녹아내린 빗장
작성일 : 20-09-30 16:52     조회 : 223     추천 : 0     분량 : 7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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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나무화로에 불이 거의 잦아들어 검게 탄 나무에 빨간 기운조차 감돌지 않는다. 각자 손에 든 컵마다 바닥에 코코아가 말라붙어 있다. 태식도 민지도 동건도. 그리고 진호까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깊은 잠에 든 병진과 수현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아까부터 궁금했었는데 이 분은 누구세요?”

 

 말괄량이, 천방지축, 못난이, 수다쟁이, 선머슴 등등 활발하고 발랄한 성격과 관련된 온갖 별명을 보유하고 있는 민지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얼굴로 진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빤히 쳐다본다.

 

 “너 못 들었어?”

 

 동건이 모를 수가 없을 텐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는 얼굴로 민지를 놀리 듯 쳐다본다.

 

 “뭘? 너 알아?”

 

 “아침부터 와이키키 형님들이랑 누님들이랑 난리 났었잖아. 몰라?”

 

 “뭔데? 말은 해주고 나서 모르냐 마냐 묻는 게 정상아냐? 나 오늘 지각해서 바로 바다로 간 거였잖아... 야 이 눈치 없는 놈아! 나 오늘 지각한 거 태식이형님은 모르고 있었는데, 너 때문에 지금 다 들켰잖아!”

 

 “내 아들이야. 닮지 않았어?”

 

 동건과 티격태격하던 민지가 진호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친한 척 하는 태식을 정신 나간 사람 보듯 빤히 쳐다보다 장난스럽게 야유를 퍼붓는다.

 

 “형님! 아 물론~ 우리 태식이형님 잘생긴 거야 우리 동네 사람들 다 알죠. 그런데 이분하고는 급이 다른데? 이분은...”

 

 존칭까지 써가며 진호를 향해 깍듯하게 손을 뻗던 민지가 진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순식간에 홍당무로 변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돌아선다.

 

 “너 뭐하냐? 왜 여자 짓하냐? 어이없다.”

 

 “닥쳐. 입 쫙 찢어버리기 전에 입 닫아라.”

 

 민지와 동건, 수현까지, 젖먹이 시절부터 초중고를 함께 한 세 사람은 마을에서 삼총사로 불리며 성별 구분 없이 동성친구처럼 지내온 터라 동건은 잘생긴 남자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민지의 모습이 이상함을 넘어 괴상하기까지 한 모양이다.

 

 “허민지, 너 요즘 약 먹냐? 요즘 따라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아 진짜. 연동건 이 잡것아! 닥치지 못할까! 당장 닥치지 않으면 내 너의 주둥아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어?”

 

 “왜 무슨 일인데? 형한테만 말해봐. 진호야 넌 귀 좀 막고 있어. 민지가 부끄러워하니깐.”

 

 민지 놀리기에 태식까지 합세하고, 이런 거에 관심 없는 줄 알았던 진호까지 귀를 막는 시늉을 하면서 동건의 입이 열리는데 일조한다.

 

 “글쎄 우리 민지가 사랑에 빠졌었다는 것 아닙니까!”

 

 “뭐?!”

 

 자고로 남녀청춘들의 사랑얘기만큼 흥미진진한 것은 없는지라 태식과 진호가 반색을 하며 동건 앞으로 의자를 당겨 앉는다. 민지가 동건의 목을 죄고 코브라트위스트까지 걸어보지만, 발동 걸린 동건의 입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누군데?”

 

 “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 김! 수! 현!”

 

 자체효과음까지 준비한 동건의 입에서 수현의 이름이 비장하게 튀어나온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태식은 배를 잡고 웃음을 참지 못하는데, 진호의 낯빛은 퉁명스럽게 뒤바뀐다.

 

 “형님, 수현이가 바보 같고 숙맥 같고 머저리 같아보여도 학교에서 인기 제일 많아요.”

 

 “너네 그래봤자 초중고 다 합쳐서 전교생 50명도 안되잖아.”

 

 “에이~ 50명은 사람 아닙니까? 그 중에 여자가 35명인데, 그 여자들은 남자 좋아하는 여자 아닙니까?”

 

 “미안하다. 아무튼 우리 수현이가 인기가 많다는 건 알겠고. 민지 얘기나 계속해봐.”

 

 “연동건, 이쯤에서 마무리 지으면 내가 용서해줄게 고마하자 새끼야. 많이 얘기했다 아이가. 좀! 아 씨.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친구아이가?!”

 

 동건에게 역으로 코브라트위스트 기술에 걸려 오도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된 민지가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동건의 입을 막으려 동정심 유발 작전을 펼쳐보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

 

 “학교에서 저희 셋이 거의 붙어 다니거든요. 특히 2교시 수업 끝나고 쉬는 시간에 편의점 갈 때, 셋이 안 간 적이 없어요. 그런데 며칠 전에 두 놈이 보이질 않는 거예요.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초중고 교실을 다 훑어봐도 없길래 혹시나 하고 소각장 쪽으로 가봤죠. 예전에 허민지가 소각장에서 혼자 햄버거 먹다가 수현이랑 저한테 걸린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놈들이 나만 따돌리고 뭐 먹는 구나! 백프로 확신을 하고, 괘씸한 마음에 놀려주려고 양동이에 물을 퍼 담아서 갔어요.”

 

 “너네 도대체 몇 살이냐?”

 

 “이 중요한 순간에 나이가 왜 나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너네 하는 짓이 초딩보다도 유치원생에 가까워보여서. 그냥 나눠 먹으면 되지. 더럽게 소각장에 숨어서 먹냐. 보릿고개 세대도 아니고.”

 

 “아 형님 진짜! 더 듣기 싫으십니까?”

 

 “미안 미안. 이제 말 안 끊을 테니깐 빨리 말해봐.”

 

 태식이 두손을 모아 공손하게 사죄의 뜻을 표하며 다시 동건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진호는 흥미가 없어졌는지 팔짱을 끼고 의자 끝에 엉덩이를 걸친 채 거의 눕듯이 앉아있다.

 

 “제 예상대로 소각장에 수현이랑 민지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두 놈이 마주보고 서 있는 거 있죠? 그런 적이 없거든요? 가위바위보나 내기를 할 때 빼고는. 그때였어요! 갑자기 허민지가 수현이의 가슴팍에 뭔가를 확 던지면서 ”내 사랑을 받아줘!“ 이러는 거예요.”

 

 민지의 앙칼진 말투와 두 손을 수현의 가슴팍에 댄 채 한쪽다리를 뒤로 반쯤 굽히고 서 있던 민지의 자세까지 흉내 내던 동건이 더 이상 오글거림을 참을 수 없는지 온몸을 마구 긁어댄다.

 

 “하... 연동건 오늘부터 너랑 절교야.”

 

 “그래서? 수현이는 뭐래?”

 

 “수현이가 더 대박인 게, 민지가 뭐라고 말했는지 못 들은 거예요. 그래서 ”뭐라고?“ 그러더니 땅에 떨어진 과자봉지 같은 걸 주워서 ”네가 먹는 걸 떨어뜨리고 웬일이냐. 혹시 집에 무슨 일 있어?“ 이렇게 묻는 거예요.”

 

 “우리 민지 어떻게... 그럼 차인 거야? 그것도 수현이한테?”

 

 “들어보세요 형님. 허민지 얘도 보통이 아닌 게, 돌아서는 수현이의 팔을 붙잡아서 자신 쪽으로 확 땡기더니!”

 

 “땡기더니?!”

 

 동건의 말이 끝날 때마다 태식이 어찌나 추임새를 잘 놓는지, 민지는 배신감에 오늘부로 양브로샵 알바를 그만 둘 생각이다.

 

 “수현이의 입술에 지 입술을 아주 쫙! 박치기 하는 거 있죠!”

 

 “연동건! 이 무식한 놈아! 박치기가 뭐야?! 박치기가!”

 

 “뽀뽀라고 해줘? 아님 키스?”

 

 “뽀뽀. 혀 안 넣었어. 넣으려고 했는데, 김수현 그 새끼가 입을 꾹 닫고 안 열어주는 거 있지? 나쁜 놈. 늦어도 열여덟 안에는 첫키스 하려고 했는데 망했어!”

 

 팔짱 끼고 있던 팔을 풀어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고 의자에 눕듯이 앉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던 진호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어이 거기. 비웃지는 말죠? 지금 2차 가해한 거 알죠?”

 

 “미안. 아 그리고, 나 너랑 동갑이야. 말 놔. 안 친한 사람한테 원래 말을 높이는 경향이 있는 거라면, 너 편한대로 해.”

 

 “오늘 일진 왜 이러지. 야! 그 말을 왜 이제야 하는 건데! 존댓말 다 들어 처먹고! 사과해! 당장 사과해! 그리고 연동건 이제 좀 놓지? 너 나 좋아하냐? 나랑 그렇게 몸을 섞고 싶어?”

 

 동건의 기술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민지가 괴성을 지르며 순식간에 동건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민지의 번뜩이는 눈빛에 동건은 두 팔을 위로 치켜들고 항복을 선언하고, 태식은 뒷정리 하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며 다용도실로 냉큼 도망가고, 진호는 갑자기 똥이 마렵다며 자리를 피한다.

 

 “야!!!”

 

 민지의 용트림보다 더 격한 분노에 동건이 바닥을 기어 몰래 가게를 나서려는데, 바로 민지에게 뒷덜미를 잡혀 화로 앞으로 질질 끌려온다.

 

 

 

 

 화장실에서 나와 조용히 방을 나서던 진호가 수현이 몸을 뒤척이는 소리에 몸을 돌려 침대에 누워있는 수현을 바라본다. 진호의 방에 딸린 화장실에서 용무만 보고 나가려던 진호가 생각이 바뀌었는지 책상의자를 침대 앞으로 끌고 가 누워있는 수현의 곁에 앉는다.

 

 “잘 자네.”

 

 진호가 잠든 수현의 얼굴을 찬찬히 살핀다. 그러고 보니 수현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 적이 없다. 까까머리는 햇빛에 그을려 푸석하고, 쌍까풀 없이 길게 찢어진 눈 위로 꿰맨 자국이 있다.

 

 “바다에서 다쳤나?”

 

 진호가 수현의 상처를 유심히 살펴본다. 그리고 직각콧날에 두툼한 입술, 까무잡잡한 피부까지 남성성이 도드라지는 수현의 얼굴을 지나 가슴근육과 복근, 치골까지 아찔하게 이어지는 수현의 탄탄한 몸에 시선이 닿은 순간, 수현의 목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준다.

 

 “여름에도 이불은 덮어야해.”

 

 진호가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이, 수현이 몸을 뒤척이다가 서서히 눈을 뜨고 주변을 살핀다.

 

 “깼어? 좀 더 자지. 몸은 좀 어때?”

 

 수현의 안색을 살피는 진호의 얼굴이 반가움에 발갛게 떴다.

 

 “내가 왜 여기 있어?”

 

 “내가 너 여기까지 들쳐 업고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 내 허리 어떡할 거야?”

 

 “네가 나를? 파도타고 내려온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아! 병진형님이랑 무슨 얘길 하고 있었다. 그런데 병진형님은 어디 계셔? 병진형님 비 맞으면 안 되는데...”

 

 “네 걱정이나 하셔. 병진형님은 지금 꿈속에서 스칼렛요한슨이랑 연애하고 있으니깐 깨울 생각 말고, 너나 좀 더 자.”

 

 “병진형님 이상형이 스칼렛요한슨인 건 어떻게 알았냐?”

 

 “다 아는 수가 있지.”

 

 수현이 몸을 일으켜 세워 침대머리맡에 기대앉는다. 진호가 목까지 애써 덮어준 이불이 다시 치골이 살짝 보이는 정도까지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간다.

 

 “누굴 꼬시려고 이렇게 헐벗고 있을까?”

 

 “아 미안.”

 

 수현이 당황한 얼굴로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덮고 진호의 눈치를 살핀다.

 

 “잠깐만, 남자끼리 옷도 못 벗고 있냐? 뭐가 이렇게 까다로워.”

 

 “너라서 안 되는 거야.”

 

 “왜? 내가 왜? 어디가 어때서?”

 

 “아니 그냥.”

 

 진호가 피식 웃더니 의자에 눕듯이 앉는다. 마치 이 얘기는 여기서 그만하자는 듯. 위기상황에 닥쳤을 때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도마뱀마냥 진호의 속내를 떠보려던 수현의 대화를 진호가 무심하게 끊어버리고 흥미 잃은 사람마냥 앉아있다.

 

 “너 그 말 하지 마.”

 

 “무슨 말?”

 

 “알잖아.”

 

 “모르는데.”

 

 “알아.”

 

 “몰라.”

 

 “재밌어?”

 

 “전혀.”

 

 진호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 몸짓 하나에 일일이 반응하며 시시각각 감정이 널뛰는 수현과 달리 진호의 감정은 수현이 화가 날 정도로 진호의 통제아래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

 

 수현이 덮고 있던 이불을 진호에게 집어던진다. 울그락불그락 얼굴이 달아오른 수현과 달리 진호는 너무나 정적인 얼굴로 수현의 몸에 다시 이불을 덮어준다.

 

 “감기 걸려. 덮으라면 덮어. 여름감기는 개도 안 걸린데. 얼마나 고약하면 개도 안 걸린다는 말이 있겠어.”

 

 “내가 감기에 걸리든 말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더워서 안 덮겠다는데 네가 왜 참견을 하는데?”

 

 수현이 바닥으로 던진 이불을 진호가 또다시 집어서 수현의 몸을 덮어준다.

 

 “네가 아프면 짜증나게 신경 쓰일 거 아냐.”

 

 “누가 신경 써 달래?”

 

 “너 언어영역 진짜 몇 등급이야? 등급을 받을 만한 점수를 받아 본적이 있기는 해?”

 

 “이 새끼가 진짜!”

 

 수현이 단숨에 진호의 멱살을 잡고 위로 끌어올린다. 진호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다. 수현만 홀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눈물이 날 정도로 치솟는 분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너 나 좋아하냐?”

 

 “닥쳐.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내 질문이 왜 너를 화나게 하는 건지 모르겠네.”

 

 “닥치라고 했다. 아가리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조용해. 멀쩡한 얼굴에 기스 나기 싫으면 입 닫으라고 난 분명히 경고했다.”

 

 “비겁한 새끼, 겁쟁이새끼, 한심한 새끼, 머저리, 바보, 병신, 천치, 등신...”

 

 참고 있던 감정을 토해내듯 진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쏟아진다. 그럴수록 진호의 멱살을 쥔 수현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거의 발끝이 바닥에 닿을락말락할 정도로 멱살을 잡힌 진호의 얼굴은 거의 핏기가 없는 상태로 새하얗게 질려있다.

 

 “죽여. 빨리. 죽여줘.”

 

 숨이 끊기는 고통에도 미소를 머금고 있는 진호의 모습에 덜컥 겁이 난 수현이 진호의 멱살을 놓고, 그대로 주먹을 날려버린다.

 

 “너 진짜 죽을 뻔 했어! 미쳤어?! 미쳤냐고! 숨을 못 쉬겠으니 못 쉬겠다 말하면 되잖아. 손 좀 풀어달라고 말하면 되잖아. 왜 버텨? 뭐 때문에 미련하게 버틴 거야?!”

 

 “내 질문 아직 안 끝났어. 너 나 좋아하냐고 물었어. 답해.”

 

 진호가 입안에 고인 피를 바닥에 뱉어내고 일어나 수현과 마주보고 선다. 진호의 입술 옆이 찢어졌는지 핏물이 고이다 못해 흘러내린다. 이를 지켜보는 수현은 불안하고 무섭고 미안하기만 한데, 진호는 손으로 대충 입가를 닦아내고 수현의 흔들리는 눈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너는 어떤데?”

 

 수현이 겨우 입을 뗀다.

 

 “내 마음이 어떤지가 네 마음에 영향을 주기라도 한다는 거야?”

 

 “아마도.”

 

 “그럼 됐네.”

 

 진호가 재미없다는 얼굴로 보란 듯이 피식 웃어 보이며 수현의 가슴팍을 세게 확 밀친다. 그 힘에 수현이 침대 위로 쓰러지는데, 진호의 손목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수현의 몸 위로 진호가 그대로 포개진다.

 

 진호의 입가에 맺힌 피가 수현의 입술로 뚝뚝 떨어진다. 진호가 엄지손가락으로 수현의 입술을 닦아내고 연이어 자신의 입가를 닦아낸 뒤에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수현이 진호의 팔을 잡아당긴다. 그리고 그대로 자신의 몸을 돌려세워 침대에 누운 진호의 몸 위에 앉는다.

 

 “뭐하자는 거야?”

 

 “왜? 불편해?”

 

 “너 남자 좋아하냐? 민지라는 애가 대놓고 고백을 했는데도 모른 척 했다더니. 키스하고 싶어서 혀까지 내밀었는데 그것도 거부했다더니. 남자가 여자한테 그러면 쓰나. 비겁하게.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잖아?”

 

 “정상이 뭔데?”

 

 “스무고개가 취미야? 독해력도 딸리면서 답도 못 찾아낼 스무고개가 무슨 소용이야? 넌 왜 질문하는 거에 답은 안 하고 계속 질문에 질문으로 꼬리를 물면서 사람을 질리게 해?”

 

 “자기 얘기를 참 남 얘기 하듯이 잘 한다 너.”

 

 “아~ 이제야 알겠네. 진즉 말하지 그랬어.”

 

 진호의 한쪽 입꼬리가 기분 나쁘게 올라가고, 상의를 벗어젖힌 진호가 자신의 벨트를 풀고 바지 지퍼를 내리더니 팔베개를 하고 수현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그러나 수현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바지까지 벗어줘야 돼? 그런 거야? 이쪽 세곈 그런 거야?”

 

 바지춤을 잡고 내리려는 진호의 손을 수현이 꽉 잡아 쥔다. 그리고 진호의 몸에서 내려와 진호의 옆에 나란히 눕는다. 둘 사이에 입으로든 몸으로든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는다. 그저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만이 자유롭게 방 안을 이리저리 오간다.

 

 “처음부터 느꼈지만, 너 참 사람 비참하게 잘 만든다. 너 같이 가진 게 많은 놈은 몰라. 가진 게 쥐뿔도 없는 놈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직구? 좋지. 쉽고 빠르고 간편하잖아. 변화구? 어려워. 상대방의 눈치를 마지막 순간까지 헤아리고 결국엔 보기 좋게 속이기까지 해야 하거든. 어렵고 머리 아프고 복잡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날 절대로 드러내선 안 돼. 껍데기로만 존재할 뿐, 속은 카멜레온처럼 주변 환경에 맞춰 그때그때 변해야만 해. 이런 삶이 얼마나 서글픈지 알아? 아니다. 엿 같아. 그냥 엿 같아. 그냥 존나 엿 같아...넌 이런... 삶을...몰...”

 

 진호가 아무런 대꾸 없이 수현의 말을 듣고 있다. 그저 들어주는 것만으로 수현의 속이 풀릴 수 있다면 진호는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수현의 말수가 점점 줄어들고, 말소리가 점점 잦아들더니 이내 수현이 깊은 잠에 들어 규칙적으로 숨을 내뱉는다.

 

 천장을 향해있는 진호의 손바닥과 바닥을 향해있는 수현의 손바닥이 0.1mm 간격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있다. 진호의 시선이 닿을 듯 말 듯 간지럽게 간격이 유지되고 있는 손바닥에 가 있다. 진호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할 때마다 수현이 새끼손가락이 기분 좋게 진호의 엄지손가락에 닿는다.

 

 진호는 이것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지만 하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몸을 뒤척이던 수현의 손이 진호의 손 위로 자연스레 깍지가 껴진 순간, 진호의 머리와 가슴과 몸을 묶어놨던 모든 빗장이 힘을 잃고 예상치 못한 시뻘건 쇳물에 녹아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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