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유림이
이제 진달래가 온 산을 덮었다. 노미는 한동안 가보지 못한 친정에 가기로 했다. 한 달 정도 친정에서 지낼 작정이었다. 노미가 시집간 이후 노미네 친정 식구들은 노미 동생 준이 교육 때문에 경주로 이사했다. 그리고 연로하신 할아버지 대신 아버지는 손 놓으셨던 한의원 일도 거들기 시작하셨다.
진화네 동네인 구길에서 경주까지는 높은 산을 굽이굽이 넘어가야 했다. 가는 길이 멀기도 하고 험하기도 했다. 차로 가도 한 시간 이상이 걸리고, 걸어가면 아침에 출발해 해 질 녘이나 되어야 도착하는 먼 길이었다.
새 식구가 된 황돌이가 끄는 달구지에 노미가 셋째 홍주를 안고 타고, 절대로 엄마를 안 떨어지는 둘째 원이도 탔다. 소고삐는 태화가 잡았다. 노미는 경주 가는 길에 태화 병도 살피고 올 생각이었다.
첫째 홍이는 집에서 민화가 봐주기로 하고, 장사 다닌다고 한참 바쁘던 윤화랑 석이도 봄 농사 준비하느라 집에 있었다. 민화는 평소와 다름없이 시간을 내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다.
경주 노미네 친청 식구들은 노미와 태화 그리고 원이와 홍주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항상 같이 붙어있던 민화가 곁에 없으니 태화는 좀 쓸쓸해 보였다. 하지만 민화가 다시 살아 돌아온 이후로 태화는 부쩍 더 어른스러워졌다. 어느새 태화 나이가 해를 넘겨 스물넷이었다. 민화는 공부에 뜻이 있어 혼인을 미루고 있다지만 태화는 장가를 가도 벌써 갔어야 할 나이인데 지병이 있다 보니 혼담이 왔다가도 슬그머니 말이 들어가 버리곤 했었다. 노미는 이번 기회에 태화 혼처도 알아보리라 마음먹었다.
노미는 태화를 데리고 조부님댁에 갔다. 이제 칠순을 넘기신 할아버지는 태화의 병증을 살펴주시며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차차 증세가 약해질 것이라 해주셨다. 그때였다.
“언니! 노미 언니지예?”
하며 반기는 목소리가 있어 돌아보니 낯이 익은 어여쁜 소녀가 노미를 향해 달려왔다.
“유림이? 유림이 아이가?”
유림이는 노미가 경주에 살던 시절 바로 이웃에 살던 아기였다. 유림이가 준이랑 동갑이라 노미는 유림이 엄마가 바쁠 때마다 유림이랑 놀아주기도 하고, 놀다가 잠이 들면 업어다 집에 데려다주곤 하던 참 이쁜 동생이었다. 노미네가 유림이 아홉 살 때 두메골로 이사를 오면서 헤어지게 되었지만, 할아버지 댁에 올 때마다 찾아가 얼굴을 보고 안부도 묻고 하며 살갑게 지내는 사이였다. 몇 해 전에도 잠깐 본 적이 있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유림이는 어느새 이렇게 훌쩍 자라 처녀티가 나는 열일곱 꽃다운 소녀가 되어있었다.
“시상에, 참말로, 요만하던 애기가 언제 이래 이쁘게 컸노?”
하며 노미는 유림이 손을 쥐고 소녀의 발그레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반겼다. 어린 시절 자기를 항상 이뻐해 주던 언니를 만나니 유림이도 반갑기 그지없었다. 유림이는 아기 때처럼 노미 품을 파고들며 매달렸다. 그러다 유림이 눈에 노미 뒤에 멀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태화가 보였다. 태화와 눈이 마주치자 유림이는 얼굴이 빨개지며 얼른 시선을 피했다. 태화도 유림이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한번 웃고는 괜히 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유림아, 우리 도련님! 정태화!”
그러자 태화는 유림이 눈도 안 보고 옆으로 대충 고개만 꾸벅하며 인사를 하는데 총각이 처녀를 만나니 어찌할 줄을 모른다. 어찌나 민망해하고 부끄러워하는지, 저런 사람이 아닌데 오늘따라 좀 이상하다 싶었다. 노미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유림아, 우리 도련님 어떻노? 진짜 잘 생깄다 아이가? 니 저래 잘생긴 사람 본 적 있나?”
하며 대놓고 자랑을 했다. 그러자 유림이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노미 앞으로 바짝 다가와서는
“아, 언니....”
하며 어찌할 줄을 모른다. 노미는 그 모습이 우스워서
“유림아, 똑바로 좀 봐봐라. 우리 도련님 진짜 잘생기싰다 아이가? 니 어데 가가 저래 잘생긴 사람 본 적 있나? 우리 도련님들이 마카 다 참말로 인물들이 훤하신데, 여 태화도련님 인물이 젤로 훤하다 아이가.”
하며 큭큭 웃었다. 그러자 부끄러운 태화가
“어데예. 형수는 참!”
하며 더 부끄럽게 웃는데, 웃으니 더 훤하다. 태화 웃는 얼굴에 유림이는 얼굴이 또 빨개져 버렸다. 잠깐,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렇게 서로 바라보는 눈빛이 노미는 좀 남다르게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옥가락지 하나를 얼른 치워야겠구나 하던 참이었다. 노미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유림이에게 집에 놀러 오라고 몇 번이나 약속을 받고는 태화와 함께 약을 받아 친정으로 돌아오는 길에 노미는 태화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련님, 우리 유림이 어떻습니꺼?”
“예? 뭐가예?”
“내가 잘 아는 동생이고, 참말 심성도 곱고 인물도 고운 아인데 도련님 보시기에 어떻습니꺼? 도련님 색시감으로 내 꼭 마음에 드는데 도련님은 어떻습니꺼?”
하고 대놓고 물었다.
“지는.... 지가 뭘 압니꺼. 형수님이 좋다 하시믄.... 지도 좋습니더.”
하고 태화가 싫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참말인교? 그럼 지가 다리를 좀 놔도 되겠습니꺼? 형님한테 여쭤봐야 하겠지만 젤로 중요한 것이 도련님 맘입니더. 맘에 드십니꺼?”
“몰라예! 형수님이 좋다 하는 사람이믄 지도 좋아예!”
하며 태화는 색시처럼 얼굴이 빨개져서 먼저 막 앞으로 뛰어가 버렸다. 노미는 이렇게 해서 옥가락지 주인 하나를 또 만날 수도 있겠구나 싶어 설레었다.
그다음 날, 노미는 유림이 어머니랑 유림이가 점심 먹고 난 후 잠깐 놀러 오겠다는 기별을 받았다. 노미는 옳거니 싶었다. 이번 기회에 슬그머니 두 사람을 서로 보게 하고 무엇보다 유림이 어머니께 태화를 잘 보이게 하고 싶었다.
“도련님, 이리 좀 오이소.”
하며 노미가 태화를 불렀다. 영문을 모르는 태화가 다가오자 노미는 태화를 세워놓고 아래위로 살폈다. 노미는 새삼 눈앞에 서 있는 태화를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키도 크고, 어깨도 딱 벌어지고, 농사일하느라 볕에 좀 그을리긴 했어도 워낙에 피부가 환했다. 커다란 눈은 파란 하늘 같고, 오뚝한 코는 산등성이 같고, 붉은 입술은 산 아래 핀 진달래 같았다. 가만히 다물고 있으면 붓으로 그린듯한 입술이 활짝 웃으면 보는 이들을 다 깜빡 반하게 만들었다.
어릴 때는 태화가 그저 어여쁜 소년인 줄만 알았는데 인제 보니 남자답고 늠름한 대장부였다. 노미는 새삼 태화가 어디 빠지지 않게 잘생긴 청년이구나 싶어 자랑스럽고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한 번씩 사람 애달프게 하는 그 병만 아니면 마음씨 곱고, 일 잘하고, 영특하기까지 한, 세상 둘도 없는 신랑감이었다.
“도련님, 저 가 앉아 보이소.”
하며 노미는 태화를 한창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꽃 나무 밑에 가 앉아 있게 했다.
“여기요? 여 앉으라꼬요?”
“예, 거 거기.... 거 그렇게 그림처럼 앉아 계셔 보시소.”
“야? 그림처럼 앉아 있으라꼬요?”
“도련님, 젤로 잘하는 거 아입니꺼. 그림처럼 그래 딱 앉아 있는 거 말입니더.”
태화는 멋쩍게 웃었다.
“요래 요래 턱을 탁 괴고 있어 보이소.”
“뭐할라꼬요. 부끄럽습니더.”
“부끄럽기는, 요래 다리를 올리고 요래 탁 얼굴을 대고 있어 보이소.”
하며 노미는 태화 자세를 잡아 주었다. 태화는 부끄럽다면서도 시키는 대로 한다. 그렇게 원하는 자세로 앉혀 놓으니, 이보다 더 한 그림이 없었다. 태화는 진짜 누군가 붓으로 그려놓은 듯 아름다웠다.
“오메, 시상에! 뉘집 아들이 이래 잘 생깄노. 시상에, 내 우리 도련님 잘생기신 거는 진즉에 알았지만, 이래 잘 났습니꺼?”
하며 노미가 혀를 내두르며 감탄을 하자 태화는 우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좋기도 하다.
“형수는, 참말로, 오늘 와 이럽니꺼?”
하며 태화가 몸을 꼬며 웃는데, 노미는 진지하게
“좀 있다 유림이랑 유림이 어무이가 올낍니더. 그 때 여 요래 앉아 계시다 내가 도련님 어디 가셨나 하고 부르믄 이쪽으로 오시소.”
하고 태화에게 단단히 일렀다. 그러자 태화는 더 몸을 꼬며,
“몰라예~.”
하면서도 좋아서 벙긋 웃는다.
“내 ‘도련님~!’ 하고 부르모 그때 이리 오시소. 알았지예?”
하고 노미가 한 번 더 단단히 이르자, 태화는 다시 아기 같은 표정을 지으며 몸을 막 꼬아댔다.
“몰라예, 형수님, 지는 못하겠습니더.”
“못하는 게 어딨습니꺼. 일단 부딪혀 보는 기지예. 용감한 사람이 미인을 얻는다 했습니더. 유림이가 지금은 유림이 어무이랑 단둘이 살아가 집안 형편이 그닥 좋지는 않아도 도련님 병 있는 거 같고 뭐라 할 다른 일가도 없고, 심성이 참말 좋은 사람들이라 마음 여린 우리 도련님이랑 잘 지내지 싶습니더.”
노미의 말에 태화는 잠시 노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형수님, 형수님이 내 생각 그래 해주고 있었습니꺼?”
태화가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노미는 깜짝 놀랐다.
“내는, 내만 형수 좋아하고, 형수는 낼로 별로 안 좋아하는가 싶었습니더.”
노미는 더 깜짝 놀랐다.
“그기 무슨 말인교? 참말로, 내가 도련님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이뻐라 하는지 몰라서 그랍니꺼? 내 눈이 부셔가 도련님 얼굴을 똑바로 못 볼 때가 한두 번이 아입니더.”
하며 노미는 태화를 향해 흐뭇하게 웃었다. 노미의 말은 진심이었다. 언제나 햇님 같은 태화를 볼 때마다 그저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벙긋 웃는 것만 봐도 온갖 시름이 사라졌다. 그렇게 귀하디 귀한 도련님이 자꾸 아프니 노미는 태화를 볼 때마다 늘 마음 한쪽이 아릿했다. 태화가 금방이라도 울 듯 눈이 붉어졌다.
“알고는 있었는데예, 그래도 이래 귀로 들으니 참말로 좋습니더.”
노미는 다 큰 줄 알았더니 아직도 아기 같은 도련님이 안쓰러워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져 주었다.
“시상에, 다 크신 줄 알았는데, 아직도 이래 얼라 같아가 우얍니꺼. 이래가 장가 가겠습니꺼?”
하는 노미도 목이 멨다. 태화도 코를 훌쩍이며 애써 웃었다. 눈에 눈물이 맺히니 더 어여쁘다.
그때, 담 너머로 유림이랑 유림이 어머니가 오는 것이 보였다.
“오매, 벌써 저 옵니더.”
태화도 담 너머로 유림이와 유림이 어머니를 보았다. 태화는 자리에 꽂힌 듯 움직이지 못했다. 온 천지가 진달래랑 벚꽃으로 덮힌 어느 봄날, 태화는 그렇게 유림이를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