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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노미
작가 : 정진교
작품등록일 : 2020.9.23

1919년에 태어나신 나의 할머니 오노미와 남편 정진화 그리고 그 동생들 윤화, 남화, 석이, 민화, 태화, 정화 이야기.

그때 노미는 열아홉 아리따운 소녀였고, 남편 정화와 여섯 도련님들은 스물두 살부터 열다섯 살 사이의 근동에 소문난 꽃같은 소년들이었다. 그렇게 노미의 꽃길같은 시집살이는 정말 꽃길만 같을 줄 알았다. 그러나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시어머니 대신 여섯도련님들의 어린 어머니 노릇을 하며 한명 한명 제짝을 찾아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대는 일제강점기. 아프고 어두운 시절이었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들과 소중한 사람들을 어이없이 빼앗기고, 또 잃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노미의 가족들은 서로를 지켜내기 위해 매일 매 순간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고,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시절 누구보다 찬란했고, 아름다웠고, 사랑스러웠으며, 아팠지만 따듯했고, 슬펐지만 행복했다.

공출, 가뭄, 강제징용, 그리고 빼앗긴 소녀들... 아파서 부끄러워서 또 몰라서
아무도 하려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해야하는 이야기이기에 감히 시작해보려 한다.

저는 작가 정진교입니다.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제59화 다시 핀 봉숭아꽃
작성일 : 20-09-29 11:00     조회 : 269     추천 : 0     분량 : 7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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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9화 다시 핀 봉숭아꽃

 

 

 그렇게 그 밤이 지났다. 동이 튼 것 같았지만 노미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노미야, 노미야, 노미야!”

 

 누가 자기 이름을 간절하게 부르고 있었다. 아버지인가? 하고 노미가 희미하게 눈을 떴다. 많이 놀란 표정의 진화가 노미를 흔들고 있었다. 진화는 좀처럼 노미의 이름을 부르는 법이 없었다. 보통 ‘보소!’ 아니면, ‘여보!’라고 부르거나 요즘에는 ‘홍아!’하고 불렀다. 자기 이름을 부를 때는 장난이 치고 싶거나 밤에 은근히 안고 싶을 때 귀에 대고 속삭이는 소리였다. 그런데 지금 진화는 애가 타는 표정으로 큰소리로 노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정신이 드나? 노미야! 괘안나?”

 

 노미는 그제야 정신이 들며 진화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오셨어예.”

 

 노미는 희미하게 웃으며 겨우 대답했다.

 

 “와 이라노? 쌀이 떨어졌나? 쌀이 떨어졌으믄 내리와야지! 도대체 며칠을 굶은기고?”

 

 진화는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내 발가락이... 발가락이 다쳐가.....”

 

 하고 노미는 겨우 대답했다.

 

 “발가락이?”

 

 깜짝 놀란 진화는 얼른 노미의 발가락을 살폈다. 왼쪽 엄지발가락이 새까맣게 죽어있었다. 진화는 눈썹이 휙 올라갔다.

 

 “발을 우예다 이랬노? 조심하지 않고! 니는 참.... 내만 없으믄.... 전에는 마늘을 다 쪼사 놓더니, 이제는 니 발을 쪼샀나?”

 

 하며 기가 막혀 했다. 노미는 야단맞을 줄은 알았지만, 막상 아픈 사람을 막 야단부터 치는 서방님이 서운했다.

 

 “형! 사람이 다쳤는데 야단부터 칩니꺼!”

 

 하며 쏘아붙이는 사람은 윤화였다. 윤화는 진화를 밀치고 노미의 발을 살폈다.

 

 “부러진 것 같습니더. 모시고 내려가야겠습니더.”

 

 하고 윤화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니 우찌 아노?”

 

 하고 진화가 물으니

 

 “내 맞고 부러지고 하는 건 전문 아닙니꺼.”

 

 한다. 윤화가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데 웃을 수 없는 말이다.

 

 “일단 형수 밥부터 드시게 하셔야 하지 않겄어라. 형수님! 내 밥을 지어 올텐께 기다리시오. 내 어무이 겉절이도 가지고 왔어라.”

 

 하는 목소리는 석이다. 노미는 그제야 윤화 얼굴도 보이고 석이 얼굴도 보였다. 노미는 반갑고 고마워 흑흑 흐느껴 울었다. 윤화는 표정이 심각했다.

 

 “형수 죽을 수도 있었소. 발가락이 부러진 게 문제가 아이라 이래 발가락이 부러지믄 몸에 독이 올라가 열이 나고 못 견디면 죽을 수도 있는 거요. 다행히 형수가 발가락을 째가 나쁜 피를 빼낸 모양이오. 의사 아부지 둔 덕분이요.”

 

 라고 말했다.

 

 석이가 가져온 쌀로 밥을 짓고, 진화가 곤드레를 넣어 된장국까지 끓였다. 그 사이 윤화는 노미 발가락을 살폈다. 제대로 부러진 것 같았다. 윤화는 화가 난 듯 미간을 지푸렸다.

 

 “와 산은 타고 그랍니꺼. 애 엄마가!”

 

 “그라믄, 굶어 죽게 생깄는데 가마히 앉아 있습니꺼.”

 

 하고 노미는 말대꾸를 했다. 또 야단맞나 싶어 섭섭했다.

 

 “형한테는 안 덤비믄서 와 지한테는 덤빕니꺼. 지가 오빱니더.”

 

 노미는 기가 막혔다. 또 저 소리다.

 

 “우째요. 앞으로 도련님이라 안 하고, 오라버니라 할까예?”

 

 하며 노미가 윤화에게 쏘아붙이자

 

 “목소리 보이 죽지는 않겠습니더.”

 

 하며 윤화는 킥킥 웃었다.

 

 “내는... 내랑 원이랑 죽어 있는 걸 아 아부지가 보믄 월매나 심정이 처참할까 싶어가, 내 절대로 죽으믄 안돼겠구나 싶어가.... 그만..... 그 밥을 다 먹어뿟습니더.”

 

 하며 노미가 울먹였다. 윤화는 기가 막혔다.

 

 “지금 죽어가는 사람이 산 사람 맘 아플까 걱정하는 깁니꺼? 참 형수도 대단한 사람입니더. 죽어가는 거이 억울하고 원통한 것이 아니라 산 사람 맘 아플까 걱정했다꼬요?!”

 

 윤화는 노미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찌 저럴까 싶었다. 어찌 저런 사람이 있나, 도대체 저 사람은 어찌 저런 마음을 타고났나 싶었다.

 

 “그러다 울타리 옆에 있는 봉숭아꽃을 봤습니더. 정신이 아득한데도 그 꽃이 어찌나 이쁜지.... 지가 미순이 생각이 났습니더. 저 꽃을 미순이가 옮겨다 심어놓은 거 아입니꺼.”

 

 윤화는 노미를 따라 꽃을 보았다. 미순이를 닮은 진본홍색 봉숭아꽃이 두 사람을 향해 하늘하늘 인사를 건넸다.

 

 “많이 미안했습니더. 지켜주지 못해, 그렇게 말도 안 되게 뺏기가 찾아오지도 몬하고.... 그래도 참 고마벘습니더. 도련님 품에서 죽었다니 얼마나 좋았을까예. 그것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러분지.... 하지만 다른 여인들도 있었다믄서예. 살아가 그 여인들이 무슨 고초를 당했을지 생각하믄 지는 죄스럽고 미안해가 밥이 넘어가지를 않습니더. 살아도 살은 것이 아닐 텐데,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었을 텐데.... 여자로 태어나 내 이쁘다 해주는 님을 만나 아들 낳고, 딸 낳고 그래 살아보고 싶었을 텐데.... 그 여인들을 생각하믄 내 미안했습니더. 내만 이래 잘 살아가.... 내만 이래 사랑받고 살아가.... 내만 이래 아들 낳고 살아가....”

 

 노미는 눈물을 삼켰다. 윤화는 노미의 이 넋두리를 말없이 들어주었다.

 

 “그래가.... 이제 죽는구나 싶은데도 억울하지 않았습니더. 고맙고, 감사했습니더. 이제 미순이한테 가는구나 싶어 반가웠습니더. 미순이를 보믄 미안했다고 말해줘야지 했습니더.”

 

 어느 틈에 석이가 옆에 와 노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형수님, 이제 미안해하지 마셔라. 이제 그만 미안해 해도 되어라. 미순이 이제 그만 놓아주시오. 가버린 아이 자꾸 그리워하믄 무슨 소용이 있소.”

 

 하며 흐느꼈다. 노미는 석이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렇다. 석이 말대로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미 일어난 일, 지나버린 일, 어쩔 수 없는 일, 아무리 억울하고 안타까워도 돌아킬 수 없는 일 아닌가. 죽은 사람은, 죽어버린 사람은 그저 거기다 묻고 산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그저 앞으로, 앞으로 살아 나가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도련님.... 내가 미안해하지 않으믄, 내가 미순이를 이래 그저 잊어버리믄, 미순이는 우짭니꺼. 그 애가 유일하게 사는 곳이 내 맘속인데, 거기서까지 지워버리믄, 미순이는... 우짭니꺼.”

 

 석이는 노미의 말에 ‘욱’하고 울음이 터져버렸다. 윤화도 진화도 노미의 말에 할 말을 잊었다.

 

 “지는예, 지는예, 그렇게 몬합니더. 지는예, 죽을 때까지 미순이한테 미안해할껍니더. 내내 미안해하며, 그리워하며 살껍니더. 그렇게라도 내 속에서 살아있게 할겁니더.”

 

 하며 노미는 울었다. 그런 노미를 석이가 끌어안았다. 석이는 노미를 끌어안고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둘이 그렇게 부둥켜안고 우는 것을 진화와 윤화는 그저 바라보았다. 두 사람 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노미는 진화 등에 업혔다. 원이는 윤화가 안았다. 한동안 산밭에 오지 않을 것 같아 가지고 온 쌀이랑 반찬들은 도로 지게에 실어 석이가 지었다. 한여름 시원하게 놀던 개울에 물이 없었다.

 

 서방님 등에 업혀 가니 노미는 참 좋았다. 시집오던 날 그 산길에서 업혀보고 난 후 처음으로 업혀보는 것이었다. 살날이 바빠 이렇게 자주 업어주지 못할 것이라 하더니 그 말이 맞았다. 바다같이 넓은 서방님 등에 업혀있으니 노미는 까무룩 하고 정신을 잃은 듯이 잠이 들었다.

 

 “형, 힘들면 말씀하이소. 지랑 교대할까예?”

 

 하고 윤화가 진심으로 걱정되서 물었다.

 

 “됐다! 내 색시다!”

 

 진화의 말에 윤화는 우습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하이고! 색시 없는 사람 서러버 살겠나.”

 

 했다. 그 말에 진화는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여전히 경계하듯 째려보며

 

 “한 줌도 안 되는 사람이 지금은 그나마 업은 것 같지도 않다. 도대체 얼마나 굶은 긴지.... ”

 

 한다. 윤화는 뭔가 더 놀려주려다 그만두었다. 진화 눈이 그렁한 것이 저러다 울지 싶었다.

 

 “니들도 자꾸 남의 색시 걱정한다고 부둥켜안고 울고 그라지 말고 빨리 니들 색시 찾아라.”

 

 하며 진화는 앞서 걸었다. 진화는 말은 안 했지만, 나이는 차는데 제 짝을 못찾고 사방팔방 돌아다니고 있는 동생들이 안타까웠다.

 

 

 업혀 들어오는 노미를 보고 태화도 민화도 깜짝 놀랐다. 오랜만에 보는 쌍둥이 도련님들이 노미는 반가운데 동생들은 형수 발가락 다쳤다는 말에 사색이 되었다.

 

 온 동네를 휩쓸던 장티푸스도 한풀 꺽여 있었다. 홍이가 엄마 품에 안겼다. 발은 아팠지만 노미는 집에 오니 좋았다. 집에는 석이가 전라도에서 가져온 쌀이랑 잡곡이 있었고, 윤화가 북쪽에서 가져온 감자랑 고구마도 있었다.

 

 

 가족들은 오랜만에 둘러앉아 다 같이 밥을 먹었다.

 

 “이게 얼마 만에 같이 먹는 밥이냐.”

 

 하며 진화가 감격에 겨워 말했다.

 

 “석이 덕분에 우리 식구들이 몇 번을 죽을 고비를 넘기는지 모르겠다.”

 

 하고 진화는 석이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형님도, 별말씀을 다 허요. 전라도야 들도 너르고, 뻘도 너른께 가뭄이 이래 심해도 어찌 됐든 먹을 것도 있고, 곡식 구할 곳이 있어라. 이번 해에는 지 고향에서도 아무것도 안 나가 다 죽는구나 혔는디, 전주 쪽으로는 물이 있어가 곡식들이 좀 되었어라. 거기 사람들 솔찬이 영악해가 땅굴을 어마어마하게 파놓고는 공출 오기 전에 싹 다 숨겼다지라이 그래서 다 살았당께요.”

 

 하며 자랑스러워 했다. 다들 석이가 한 일인 것처럼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러나 윤화 표정은 별로 안 좋았다.

 

 “그게 그렇게 마냥 웃을 일이 아이다.”

 

 했다. 다들 무슨 소린가 하고 윤화를 보았다.

 

 “지금이야 이렇게 서로 도움이 된다지만 일본놈들 물러가고 난 후 조선 땅은 피바람이 불끼다.”

 

 다들 윤화의 섬뜩한 예언이 영 못마땅했다.

 

 “형! 밥 먹는데 무섭게.... 그게 무슨 소린데?”

 

 하며 태화가 밥을 마저 못 삼키고 말했다.

 

 “생각해 봐라. 여기는 아무것도 없는데 저기는 뭐가 좀 있다. 우찌 될꺼 같노?”

 

 다들 아무 말도 못 한 채 침만 꿀떡 삼켰다. 누구보다 석이 표정이 난감하다.

 

 “석이 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 된데이. 있는 티 내지 말고, 사람 믿지 말고, 니 재산은 니가 지켜야 된데이. 알겠나?”

 

 윤화의 말에 석이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하는 말이 아닌 걸 알기에 모두 표정이 진지했다.

 

 “근데, 형, 일본이 돌아갈 거 같나? 망할 거 같나?”

 

 하고 민화가 간절한 눈으로 물었다.

 

 “소문이 심상치 않다. 곧 망하지 싶다. 뭣도 모르고 미국을 건드렸는데 미국이 생각보다 쎄다. 중국이나 러시아랑은 차원이 다른 아 들이다.”

 

 윤화의 말에 모두 다시 한번 침을 삼켰다.

 

 “하지만, 도련님, 미국은 멀리 있다 아입니꺼. 이 먼데 있는 나라들끼리 무슨 일이 있든 말든 관심도 없다든데예.”

 

 하고 노미가 거들었다.

 

 “그기 일본 착각이라고요. 생각보다 세상이 빨리 변하고 있습니더.”

 

 윤화는 징용에 다녀온 후 생각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진화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윤화를 바라보았다. 윤화는 진화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안다. 윤화는

 

 ‘걱정하지 마이소. 내 알아서 할게.’

 

 하는 표정으로 진화를 보았다. 진화는 윤화를 믿었다. 하지만 왜 윤화가 석이 옆에 붙어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윤화는 석이를 지켜야 했다.

 

 인간이란 원래 나보다 남이 한 개라도 더 가지고 있으면 괜시리 부아가 나고, 못된 마음이 들고, 약이 오르고 한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이 오묘한 관계는 신라, 백제 시대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일 것이다. 경상도는 언제나 전라도의 풍요로움이 탐났으리라. 일본이 조선을 탐냈던 것처럼....

 

 역사는 언제나 그렇게 인간의 욕심을 쫓아 흔들린다. 나쁜 것은 참으로 그 전염성이 강하다. 그래서 진짜 무서운 전염병은 장티푸스나 콜레라가 아니라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 잡은 탐욕이다. 일제 강점기에 배운 많은 나쁜 것들을 광복 이후의 대한민국은 거의 대부분 그대로 다 한다. 서로에게, 우리끼리....

 

 

 여름이 왔다. 장마가 지나갔다. 윤화와 석이는 내내 돌아다니다가 불쑥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석이 어머니는 광주에도 있다 여기도 있다 하며 왔다 갔다 하셨는데 석이가 광주보다는 이쪽에 더 자주 오니 올여름은 내내 노미랑 지내셨다.

 

 여름 방학이라 정화랑 남화도 집에 왔다. 서울 과자랑 사탕을 잔뜩 사 들고 온 정화는 신이 나서 제일 먼저 노미 입에다 사탕을 넣어주었다. 그다음으로 달래 얼굴을 만져주고, 멍멍이, 고양이, 병아리들을 돌아보았다. 그다음이 쌍둥이 형들이었다. 섭섭한 형들이 정화를 부둥켜안고는 때렸다.

 

 오랜만에 만난 막내들은 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느라 집에 붙어 있지를 않았다. 남화는 병원 일 때문에 겨우 일주일 있다 서울로 가야 했다. 노미는 도련님들 모두 같이 있던 시절이 그리웠다.

 

 

 1942년 일제의 지배가 강화되면서 일제는 선교사들에게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선교사들이 이를 거부하자, 그것을 빌미로 세브란스의대의 선교사들을 강제로 추방했다. 선교사들이 떠나간 빈자리는 일본인 교수들로 채워지고 1942년, 6월 세브란스 의대는 <아사히의학전문학교>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남화는 그런 학교와 병원에 계속 있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해 가을도 무서운 가뭄은 계속되었다. 가진 것이 없으니, 빼앗길 것도 없었다.

 

 

 1942년 12월 8일, 일본은 진주만을 공습하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일본이 힘이 남아돌아 미국을 공격한 줄 알지만, 아니었다. 일본은 조선땅에서 사람이고 곡식이고 더는 아무것도 빼앗을 것이 없어지자 심각한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것을 타개할 방법은 또 다른 전쟁뿐이었다.

 

 그 와중에 정화가 이제는 이름이 바뀐 의대에 합격했다. 말할 수 없이 축하해야 할 일인데 남화는 착잡했다.

 

 세월은 또 한 해를 훌쩍 넘겨 1943년, 봄학기를 겨우 끝낸 남화와 정화는 학교에 휴학계를 냈다. 일본이 차지한 의대에 계속 다닐 이유가 없기도 했고, 그대로 학교에 있다가는 징병을 당해 전쟁터로 끌려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남화는 병원 일도 그만두고 만주로 돌아갔고, 정화는 고향으로 갔다.

 

 정화는 집에 오자마자 형수부터 찾았다. 노미는 막내가 애써 합격한 대학에서 제대로 공부도 못해보고 고향에 돌아온 것이 맘이 아픈데 정화는 눈물을 훔치는 노미를 번쩍 안아 들고는 와하하 웃으며 마당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다음으로 정화는 달래에게 달려가 머리를 쓸어주고, 닭들, 고양이들, 그리고 멍멍이까지 인사를 하고는 쌍둥이 형들을 끌어안고 등에 올라탔다. 민화와 태화는 어찌 됐든 정화를 다시 보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오자마자 열심히 빨래를 시켰다. 착한 막내는 신나게 밀린 빨래를 했다.

 

 그날 밤, 널어놓은 빨래들 사이로 반딧불이 날아다녔다. 식구들은 낮에 밭에서 따 온 딸기를 가운데 두고 춤을 추듯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를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이제 다섯 살이 된 원이는 삼촌들과 함께 반딧불을 잡으러 다녔다. 세상 밖은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삶을 잃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경상북도 경주에서도 한참이나 들어간 작은 시골 마을에는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누군가 지켜주고 계신 아름다운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작가의 말
 

 이제 계절은 어느새 봄을 지나 여름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시골 동네에 살았던 저는 이맘때면 밤에 우리 집 마당으로 날아 들어오던 반딧불을 보았습니다. 탐스러운 딸기도 먹었습니다. 잊지 못할 아름다운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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