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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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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땡글
작품등록일 : 2020.9.27

쓸쓸한 삶과 죽음을 대하는 고귀한 삶과 죽음에 대하여.

 
여름 나기
작성일 : 20-09-27 21:35     조회 : 340     추천 : 0     분량 : 8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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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희야, 잘 있지? 엄마도 잘 있어. 이번엔 적어서 미안. 엄마가 필요한 게 있어서 뭣 좀 사느라고 좀 덜 넣었어. 혹시 부족하면 얘기하렴. 사랑해! 딸!]

  오월 말일에 엄마에게 문자가 왔다. 난 문자 메시지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엄마는 ‘사랑해’라고 내게 말한 적이 없다. ‘미안하다’, ‘고맙다’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엄마가 잘 쓰지 않는 표현이다. 내가 엄마의 바로 그런 성격을 닮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엄마가 내게 ‘사랑해’라고 말했다. 물론 메시지를 통해서였지만 난 왠지 그 말이 편치 않게 느껴졌다. 문자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가 전화를 걸어 보았다. 엄만 받지 않았다.

  ‘일할 시간이니까........ 바쁘시겠지........’

  난 시간을 확인하며 생각했다. 신경이 쓰였지만 나도 아르바이트를 가야 할 시간이라 별 일 아닐 거라 여기려 했다.

 

 

 

  6월이 되었다. 방학을 목전에 두고 학교의 분위기는 평소와 달랐다.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것과 교내외에서 진행되는 취업 설명회와 기업별 전형 안내 특강 등으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만의 느낌일 수도 있겠지만. 졸업반 아이들은 도서관과 과 사무실을 오가며 수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다녔다. 한편 자신감 가득한 표정을 잃지 않는 부류도 있었다. 그들은 교수 연구실을 들락거리며 로비에 힘썼다. 물론 또 다른 부류도 있었다. 이것도 저것도 여의치 못해 아예 학교도 잘 나오지 않는. 대학생활을 보내는 동안 남은 거라곤 빚뿐이라 아르바이트를 놓지 못하는 나와 같은 근로자 부류이다. 나 또한 게시판에 붙은 취업 설명회나 인턴십, 신입사원 모집 공고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

  난 강의동 앞 게시판에 붙은 한 중소기업의 신입사원 모집 공고를 보고 있었다. 놀라서 돌아보니 용준이가 뒤에 서 있었다.

  “지원하려고?”

  그가 물었다.

  “아니.”

  난 대답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디 봐 둔 데 없어? 가고 싶은 데나.”

  그는 다시 물었다.

  “없어......... 너는, 있어?”

  “정말 없어? 음........ 난 한 군데 아니, 두 군데 정도 있긴 한데........ 경쟁이 좀 센 것 같아서 다시 생각해 볼까 해.”

  그가 대답했다. 왠지 자신감 없는 말투였다. 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넌 정말 없어? 뭐 다른 계획이라도 있는 거야?”

  “없어......... 우리, 기말고사 공부나 하자. 시험이나 잘 보고 뭘 얘기하든가.”

  난 화제를 돌리려 시험 얘기를 꺼냈고 그는 내 말에 공감한다는 듯 미소 지었다.

  물론 당장 기말고사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후의 내 진로를 결정할 수가 없었다. 학자금 대출 이자를 내야했고 내게 있는 돈으로는 부족한 상황이었다. 며칠 전, 난 그 일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바쁜 것 같았다. 서너 번쯤 시도하고 나서야 통화가 됐는데, 겨우 들을 수 있었던 엄마의 목소리는 진지하고 사무적으로 들렸다. 엄마는 내가 돈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내게 먼저 설명했다. 부산 공장이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의 매출에 영향을 주는 정도로 자리를 잡아야 하고 지역사회에도 적응해야 하는 시기여서 여러 가지로 조심스럽고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아저씨가 많이 힘들어하시고 엄마도 정신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하셨다. 납득이 되는 상황임엔 분명했지만 엄마의 상황을 직접 확인할 수가 없어서 걱정이 되고 답답한 마음도 들었다. 물론 돈 얘기도 꺼낼 순 없었다. 엄만 내게 안부를 물으셨다. 난 잘 지내고 있다는 말밖엔 할 수가 없었다. 매달 내게 보내던 용돈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당분간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송금해 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므로 회사 일이 잘 정리되는 대로 보내주겠노라 하셨다. 난 엄마에게 공장이 잘 자리 잡길 바란다고, 건강 챙기시라고 얘기했다. 엄마는 또 말했다.

  “고마워. 사랑해, 딸!”

  엄마는 내게 또 사랑한다고 말했다. 통화를 마치고 난 마음이 무거웠다. 겨우 생각 끝에 우선 기말고사나 잘 봐야겠다는 결말에 닿았다. 다음 문제는 그 다음에 생각해야 했다. 과부하였다.

 

  “어때? 잘 본 것 같아? 잘 봤겠지, 뭐.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기말고사에 온통 기를 빼앗긴 것 같아 난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축 쳐진 내 어깨를 뒤에서 주무르며 말했다. 그가 보기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난 시험을 망쳤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시험 기간 동안 그 무엇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고 시험을 보면서도 그랬으니까. 시험이 끝나고 나오면서 이미 난 절망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고, 실은 그래서 힘이 없었다.

  “못 봤어.”

  난 무심하게 말했다.

  “에이......... 연막 치는 거야?”

  그는 장난스럽게 내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진짠데.........”

  난 풍선 속에 남아있는 마지막 공기가 빠지듯 말했다. 그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우리, 오늘 뭐 할까? 시험도 끝났고........ 또 피 터지는 방학을 보내기 전에.”

  “나......... 휴학 하려고.”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단어이긴 했으나 하필, 아니 다행히 마지막 학기를 남겨둔 이 시점에 난 문득 해결의 키처럼 떠오른 단어가 ‘휴학’이었다.

  “뭐? 뭔 소리야?”

  그는 놀라며 내 어깨에 올려놓았던 손을 내리며 물었다. 난 평정심을 억지로 되찾으려 애쓰며 대답했다.

  “휴학....... 진작 하려고 했었어. 아직 취업하고 싶은 회사도 없고 뭘 하고 싶은 건지 생각 좀 하려고........”

 

  난 그렇게 갑작스럽게 휴학을 결정했고 실행에 옮겼다. 엄마에겐 알리지 않았고 당분간 그럴 생각이었다. 용준이도 뭔가 석연찮아 하는 것 같았지만 내 결정을 존중해 주었다. 의외로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이제부터 할 일을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어떤 것보다 앞서 계획을 가로막는 건 ‘돈’이었다. 답답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그렇다고 어디에다 화를 내거나 하소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봤자 소용없는 일이란 것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너른 세상을 살면서, 겨우 ‘돈’ 때문에 난 청춘의 한 때를 내 안의 나와 전쟁을 치르며 보내고 있었다. 이겨야 했다. 그 싸움이 주는 고통보다는 아마 이겨야한다는 강박이 밖으로 드러났을지 모르겠다. 들키지 않으려, 난 평소와 크게 다름이 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생각을 스스로에게 주입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진짜가 아닌 건 드러나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너무 혼자서만 그러는 거 아니야?”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난 휴학계를 냈고, 방학을 시작한 지 만 하루가 지나고 나서 난 용준이를 만났다. 그가 날 보자마자 내뱉은 첫 마디였다.

  “뭐가?”

  난 해맑게 대답했다.

  “방학 하자마자 휴학에다가, 벌써 이틀이나 지났는데 연락 한 번 없었고......... 설마 날 그렇게 둔한 놈으로 본 건 아니겠지?”

  그는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말했잖아. 휴학은 원래 계획이었고 이제 뭘 할지 생각 좀 하느라고.........”

  내가 말했다.

  “휴......... 그래......... 뭐, 조금씩 널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할게.”

  그는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의 말대로 날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을 자연스레 겪도록 두고 싶었다. 그게 내 못난 자존심이라도 할 수 없다.

  “뭐 먹고 싶어? 맛있는 거 사줄게. 나 오늘 알바 안가. 저녁때까지 실컷 놀아 줄게!”

  그는 말투를 바꾸고 내게 해맑게 말했다.

  “음....... 밥! 그냥 밥 먹고 싶은데? 집에서 먹는 그런 밥.”

  “응? 그냥 밥? 맨날 먹는 건데........?”

  내 대답에 크게 실망한 듯이 그는 말했다.

  “너, 그런 밥을 맨날 먹어?”

  “.............”

  내 질문에 그는 한참 생각하더니 아무 말 하지 않았다. 5초간의 침묵 끝에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가 내 손을 잡고 당기며 말했다.

  “그럼, 따라와!”

 

  그가 그렇게 날 데려간 곳은 어느 한정식 집이었다. 넓은 정원에 연못이 있고 기와집 몇 채가 정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무척 비싸 보이는 집이었다. 입구를 들어서 주변을 둘러보며 난 멈칫했다. 그는 흥분된 표정으로 날 다시 잡아끌었다. 우린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점심시간 전이라 식당 안은 조용한 편이었다. 그 직원은 메뉴판을 건네주고 방을 나갔다.

  “야........ 여기 너무 비쌀 것 같은데........ 그냥 나가자.......”

  난 밖에서 들을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메뉴판을 보고 있다가 내 말을 끊었다.

  “생각보다 안 비싸네. 우리 공장 주임님이 지난주에 여기서 상견례를 했는데, 꽤 괜찮다고 하더라고. 고급스럽고 푸짐하다고 해서 생각났지!”

  그는 주문 벨을 누르며 내게 말했다. 난 메뉴판을 확인했다. 정식이 사만 오천 원부터 십만 원까지 코스별로 적혀 있었다. 직원이 들어오자 그는 내 손에 들려 있던 메뉴판을 낚아채 주문을 했다.

  “저........ B코스에 갈비찜도 포함되어 있나요?”

  “네. 있습니다. A코스에서 육회랑 약선 보쌈이 추가됩니다.

  “그럼, B코스로 주세요!”

  그는 의연하게 주문을 마치고 흐뭇한 미소를 짓고는 나를 보았다. 난 잠시 직원이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뭐 하러! 그냥 A코스 먹어도 충분한데! 그것도 다 못 먹을 것 같던데........ 아무튼 네가 돈이 썩어나는구나!”

  난 그를 야단치듯 말했다.

  “괜찮아! 어쩌다 한 번이야. 방학도 했고 넌 휴학까지 했는데....... 그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우리가 이 정도도 못 먹어서야 되겠어? 앞으로 계속 열심히 살 거잖아, 안 그래?”

  그는 능청과 억울함이 섞인 투로 얘기했다.

  “휴....... 모르겠다. 남기지나 마. 배불러도 다 먹어! 남기기만 해봐!”

  난 못이기는 척 했지만 돈이 아깝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툴툴대는 나를 보며 웃기만 했다. 잠시 후,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조금 먹으려 하면 다음 코스요리, 또 다음 코스........ 생전 처음 보는 음식들도 많았다. 정말 다 먹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맛있어 보이고 비싸 보이는 거 먼저 먹어. 우리 한 두 시간 정도 걸려야겠다!”

  그는 내게 코치(?)까지 하며 신나게 먹었다.

  한 시간 가까이 지나자 배가 터질 듯 불러왔다. 아직도 남아있는 음식이 즐비했다.

  “휴....... 난 더 이상 못 먹겠어.”

  “나도........”

  내가 포기하자 용준이도 몸을 뒤로 재끼며 말했다. 난 웃음이 나왔다. 그도 날 보며 웃었다. 둘이서 배를 매만지며 한참을 그렇게 웃었다. 우리는 그날 먹은 음식을 소화시키기 위해 동네를 거닐었고 영화 관람에 커피 한 잔 까지 제대로 놀았다. 아르바이트 출근 시간이 될 때까지 배는 꺼지지 않았다. 우리는 세 정거장 전에 버스에서 내려 걷기로 했다. 아직 해가 중천이었고 더웠지만 기분은 괜찮았다. 그의 처방전이 효과가 있었다고 속으로 난 생각했다. 우리는 손깍지를 끼고 걷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도 계속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버스에서 내린 후로 그는 말이 없었다. 조용히 걷고 있다가 문득 깍지 낀 손이 축축해 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디 불편해?”

  나는 그에게 물었다.

  “아, 아니........ 왜?”

  “손에서 땀이 왜 이렇게 나?”

  난 물었다. 그는 얼른 깍지 낀 손을 빼며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아! 미안........ 원래는 안 그런데.........”

  그는 민망했는지 손을 옷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괜찮아........ 근데 정말......... 혹시 점시 먹은 거 체한 거 아냐? 갑자기.........”

  당황하는 그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아니라고 부정했다.

  “연희야.........”

  그는 다시 걸음을 떼며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응?”

  “우리........ 같이 살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고민 많이 했어. 너나 나나 시간도 아끼고 돈도 아끼고........ 서로 의지할 수도 있고........ 괜찮은 방법인 것 같은데....... 혹시나 네가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뭐, 꼭 그러자는 건 아니고........ 방법 중 하나일 수 있으니까 한 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

  꽤나 망설이다 뱉은 말이라는 게 그의 표정과 말투에 드러났다. 난 당황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난 계속 걸었다. 내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더욱 당황한 듯 보였다.

  “시......... 싫으면 싫다고 해도 돼. 말했듯이 꼭 그러자는 건 아니야. 근데 잘 생각해 보면 그렇게 나쁠 것도 없는 것........”

  “정말? 정말 그럴까?”

  상황을 정리하려 하는 그에게 난 침묵을 깨고 물었다.

  “그....... 그러니까 생각이라도 해 보라고.........”

  “넌 충분히 생각해 본 거야? 이런 저런 경우 다.........?”

  “응.”

  그는 비교적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나도 충분히 생각해 볼게.”

  난 갑자기 던져진 의외의 제안에 불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생각을 했지만 동시에 그에게 생각을 풀어놓을 수는 없었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기에 그저 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의 반응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래. 잘 생각해 봐. 넌 휴학까지 했는데 앞으로 계획도 세워야 하고........ 좀 더 안정적인 환경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우리는 곧 커피숍 앞에 다 다랬다. 잠시 대꾸 없이 걷고 있던 나를 말없이 그는 기다렸다. 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난 그에게 말했다.

  “생각해 볼게. 너도 좀 더 생각해 봐.”

  “난 벌써........ 알았어. 나도 더 생각해 볼 테니까 생각 다 하면 말해줘. 너무 오래 걸리진 말고........”

  “오늘 재미있었어. 가.”

  난 손을 들어 그에게 인사했다.

  “전화할게!”

  그는 웃으며 내게 말하고 돌아섰다. 난 잠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몇 걸음 걷다 날 향해 몸을 돌리더니, “얼른 들어가!” 라고 말한 후 뒤돌아 뛰어갔다. 난 출근했다.

  “안녕하세요.”

  매니저에게 인사를 하고 탈의실로 향했다. 매니저는 바빠서 내 인사를 받지 못했다. 날씨가 더워서인지 가게 안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우리는 거의 달리다시피 영덕동의 밤거리를 활보했다. 아침부터 땀을 흘리고 하루 종일 짐만 날라서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이 가벼워졌다. 처서가 지났다고는 하지만 아직 한 낮에는 삼십 도를 웃도는 늦더위가 기승이었다. 그래서인지, 주말이어서인지 밤거리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우리는 손을 잡고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음식점을 물색하고 다녔다.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영덕동은 자주 와보지 못한 곳이라 낯설었다. 그래도 그 낯섦이 싫지 않았다. 그저 새롭고 기대되는 분위기에 기분 또한 그랬다.

  작고 오래된 동네임에도 상점들과 사람들은 넘쳐났다. 우리는 상점들의 외관이 주는 느낌을 하나하나 표현해 가며 한참을 돌아다닌 후, 결국 집 근처에 있는 한 선술집에 들어갔다. 오래되어 보였지만 왠지 한자로 쓰여 있는 간판이 뭔가 있어 보였다. 너 다섯 개 정도의 계단을 내려가 빈티지한 느낌의 출입문을 여니 삐그덕 소리와 함께 무겁게 문이 열렸다. 약간의 쾌쾌한 지하 냄새와 싸리한 맥주 냄새가 코를 자극했고 무엇보다 술에 상기되어 시끌벅적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의 소리와 모습이 왠지 모를 행복감을 느끼게 했다. 난 그곳이 아주 맘에 들었다. 커다란 목소리로 맞이하는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우리는 한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했다. 자그만 공간이었지만 공간을 잘 활용한 테이블 배치와 자리마다 정리되어 있는 기본 세팅, 추천 메뉴의 사진과 설명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저 쪽 자리가 더 맘에 드는데?”

  손가락으로 측면의 끝자리를 가리키며 난 말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난 이곳에 대한 만족감을 불평스런 멘트로 표현했다.

  “뭐....... 여기가 더 나아.”

  뒤를 돌아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확인하고는 그가 말했다. 우리는 곧 메뉴판을 살피며 눈을 반짝거렸다.

  “우선 맥주하고........ 너 뭐 먹고 싶어? 배고프지?”

  “음......... 글쎄.........”

  메뉴를 고르고 있는 내게 그는 먼저 제안했다.

  “난 이 낙지. 넌?”

  “낙지 좋아해?”

  “응! 난 날 것일수록 좋아!”

  그는 입맛을 다셨다. 난 낙지가 별로였지만 입맛을 다시는 그의 표정이 귀여워 보였다. 와사비 낙지와 두툼하게 썰어 구워낸 소고기 스테이크를 안주로 주문했다. 매우 상방된 이미지의 두 요리였다. 우린 각자의 선택에 만족해하며 시원한 생맥주를 들이켰다. 하루의 피로를 씻어주는 맛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이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지만 두려움 보다는 설렘이 앞섰다. 그가 주문한 와사비 낙지가 미끈거리고 질기며 코를 쏘아대는 와사비향이 내 입맛엔 맞지 않았지만 그날의 안주로는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화장실을 대 여섯 번이나 다녀 올 정도로 맥주를 마셨고 그 날,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잘 기억을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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