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웅!”
먼 곳에 간다고 솔트의 머리에는 모자가 씌워져 있었다. 솔트는 그게 불편한지 열심히 잡아 뜯고 있었다.
“황녀님!”
세르시가 프시케를 반갑게 불렀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약간의 당황스러움이 깔려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그 당황스러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게 뭐니?”
“마차라는데요….”
“집 아니고?”
그녀의 눈앞에는 호사스러운 네모난 물체가 있었다. 이 네모난 물체는 커다란 방 하나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색은 분홍색과 노란색으로 꾸며져 있어 아기자기해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그 주위를 둘러싼 장식들은 하나같이 희귀하고 값진 것들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마차라는 증거는 있었다. 그 네모난 물체에는 바퀴가 달려 있었고, 이것을 끌고 있는 것들은 말처럼은 보였기 때문이었다. 분명 그 네모난 물체 앞에서 푸르릉 대는 것은 말들이 확실했으나, 말들의 생김새조차 생전 처음 보는 형태였다. 말들의 갈기는 해초마냥 길었고 그 주위에는 푸른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마계의 특급 마차입니다. 마왕님께서 직접 타고 다니시는 마차이지요.”
나긋한 목소리에 프시케는 뒤를 돌아보았다. 앞에는 외눈안경을 쓴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멀끔한 연미복에 단정한 머리. 부드러운 눈빛은 그의 성품을 잘 보여주는 듯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마왕 루시펠 님을 보좌하는 보좌관, 벨모트라고 합니다.”
남자가 프시케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아…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프시케 루안 아인스입니다.”
“예, 반갑습니다.”
자신을 향해 지어주는 부드러운 미소. 이상한 일이었다. 프시케는 그 미소를 보는 순간 갑자기 울음이 터질 뻔 했다.
‘떠날 때가 되니 감수성이 풍부해진 건가?’
시니컬하고 이성적인 성격이라 생각했건만. 떠날 때가 되니 또 다른가보다.
“떠나기 전에 인사는 잘 마치셨는지요.”
아씨. 얼굴 보면 이번에는 눈물이 날지도 모르는데.
“……잠시만요.”
하지만 인사는 하는 게 도리였다.
프시케는 배웅 나온 이들을 돌아보았다. 많은 하인들 옆으로 리벨로건과 사루비아의 모습이 보였다. 사루비아의 눈에는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반면 리벨로건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프시케는 두 주먹을 꼭 쥐었다.
“걱정마라. 너랑 한 약속은 꼭 지킬 것이니.”
“네. 아무렴요.”
답지 않게 리벨로건의 앞에서 툴툴거리게 된다. 평소라면 그 모습을 보고 장난이라도 쳤을 법한 오빠는 입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가 하도 사고를 치니까 귀찮기도 했겠지. 아주 잘됐다 싶겠지.’
생각하던 차에 리벨로건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건강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건강히 돌아와.”
“……네. 아무렴요.”
순간 또 울컥, 눈물이 날 뻔 했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절대로 울 수 없다. 걱정 끼치는 게 싫어서가 아니다. 그냥 쪽팔려서 그런다.
“다녀올게요.
두 사람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프시케. 자주 연락할게.”
“일 년 뒤에 뵙죠. 더 예뻐져서 돌아올게요.”
검은 머리카락의 검은 눈동자를 가진 리벨로건과 사루비아. 그리고 백금발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프시케. 그 세 사람은 생김새가 너무나도 달랐지만 그들을 둘러싼 분위기는 너무나도 비슷했다.
곧 프시케는 우아하게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그 마차의 내부는 프시케의 상상이상이었다.
*
베르딘의 경계와 맞닿아 있는 블제리트의 끝자락, 알프헨. 그곳에는 마계에서 온 사절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 온통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남자가 눈에 띄었다. 그는 소맷자락으로 뻗은 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툭툭툭.’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그의 손놀림에 다른 사절단들은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툭툭투둑’
그러나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무 소리도 못 들은 것 마냥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저녁쯤이면 도착한다고 하였으니 이제 곧 오시겠군요.”
붉은 머리를 높게 묶은 여자가 중얼거렸다.
“맞아요.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네요.”
사절단 중 가장 자그마한 체구의 앳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맞장구 쳤다. 그녀는 자신의 세 번째 손가락을 뺏다 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럼 우리 그때까지 조금 쉬고 올…”
맑은 호수를 연상 시키는 머리카락의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으나,
“도대체가.”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가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이내 꽁무니를 내렸다. 검은 로브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왜 아직 안 도착하는 거지.”
“벨모트님께서 저녁때쯤이나 도착하실 거라고 하셨습니다만…?”
“하늘을 봐라. 이미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지금이 저녁이 아니라면 언제라는 거지?”
“아, 아직 해는 저물지 않았습니다만!”
“시간은 엄연히 저녁이다. 오던 중 경계에서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은 아닌가.”
“아, 아직은 기다려 보심이…!”
순간 대리석 조각상 마냥 가만히 앉아 있던 건너편의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눈처럼 흰 로브를 입은 남자였다.
“확률은 있습니다. 가서 확인해 보는 편이 효율적입니다.”
그리고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인을 향해 손짓하더니 말을 내오라 하는 것이 아닌가.
“아, 아니… 벨모트 님이 함께 계신다구요. 감히 누가 그 마차를 건드린다고 그래요?”
“그리고 아직 저녁 아니라니까요…!”
“……두 분 다 너무 과하십니다.”
‘화르륵’
다른 세 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탁자에 불길이 일었다. 마계의 저 끝, 화염지옥이라고도 불리는 무스펠헤임의 불길이었다.
“안전 불감증.”
검은 로브 속에서 보랏빛 눈동자가 시릴 정도로 번뜩였다. 약한 마족은 가까이만 가도 녹아 버린다는 무스펠헤임의 불길에 세 사절단이 오른쪽으로 몸을 사렸던 순간.
‘까득, 까득.’
건너편 탁자에서 시린 냉기가 일었다. 마계의 반대편, 니플헤임의 얼음과 냉기가 순식간에 탁자를 얼어 붙였다.
“위험에 대비하는 것엔, 과함이란 없는 법입니다.”
하얀 로브 속에서 붉은색 눈동자가 무서울 정도로 이글거렸다. 냉기만으로도 한 마을을 얼려버린다는 니플헤임의 냉기에 세 사절단은 왼쪽으로 몸을 사렸다.
벨모트 님, 제발 빨리 돌아오세요…….
모두의 바람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얀 로브가 하인이 가져온 말에 다가가며 말했다.
“내가 간다.”
검정 로브가 그를 저지하며 말했다.
“제가 모셔오겠습니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은데.”
“저 역시 시간 낭비하는 걸 아주 싫어합니다.”
두 명 사이에서 불꽃과 냉기가 튀기는 듯 했다. 안 그래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분위기 속에서 저 둘까지 난리를 부리니 죽을 맛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오셨나 봐요!”
“드디어!”
“무사히 오셨네요!”
사절단이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희고 검은 로브 둘은 언제 신경전을 벌였냐는 듯 표정이 싹 바뀌어서는 밖으로 나갔다.
그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앳된 듀라한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노랑색 로브를 쓴 여자에게 물었다.
“그냥 인간계에서 요리 선생님 오시는 거 아니였어요? 저 두 분이 왜 저렇게 난리를 피우는 거예요?”
그 말에 졸고 있던 베르아체가 눈을 떴다.
“루시펠이랑 조슈아?”
잠에서 막 깨어난 베르아체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중요한 손님이거든.”
“……? 인간 황녀가요?”
“그렇지. 움브라로 어두워진 마계에 빛을 전해줄 사람은 중요한 존재니까.”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저렇게 안절부절 못 한다고?
납득이 가진 않는 이유였으나 베르아체가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일단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저 멀리서 마차가 들어왔다. 종일 달리느라 지친 타르마 다섯 마리가 검정 로브의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타르마의 갈기를 쓸어 주었다. 그가 갈기를 쓸 때마다 푸른 불꽃이 일렁였고 축 늘어져 있던 갈기에 윤기가 흘렀다.
이윽고 사절단들은 조용히 마차의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러나 일 분, 이 분이 지나도 마차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
검은 로브 안의 보랏빛 눈이 서늘해졌다.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마차 위로 성큼 올라가 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여태껏 본 적 없는 진귀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래서 제가 생전 듣도 보도 못했을 욕을 해주었죠. 사람의 면전에서 그따위로 얘기하는 게 예의인가요?”
“그런 놈이 있으면 제가 코뼈를 부러뜨릴 겁니다. 황녀님은 진짜 현명하십니다. 아주 잘하셨어요!”
“큐우, 큐우!”
“아니에요 보좌관님. 그 상황에서 저는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 줄 아시나요? 우리 황녀님께서는 욕을 너무 많이 드신단 말이에요.”
“큐우?”
“황녀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건 황녀님 말마따나 욕하는 놈들의 잘못이죠! 같이 혼쭐을 내주면 됩니다!”
“큐우웅!”
마차 내부에 있는 테이블에는 이상한 소스가 묻어있는 빈 접시들과 술잔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마족의 화주 장인이 200년간 묵혀 놓은 200년산 화주병이 바닥을 드러낸 채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안에 있던 이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큐큐대는 너구리 한 마리가 다가와 그의 다리를 흔들었다. 검은 로브는 인사불성이 된 너구리를 치우고 벨모트를 보았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폐하!”
항상 엄숙한 태도만을 보이던 벨모트가 술에 취한 꼴이란 아주 끔찍했다.
“헉. 안녕하십니까!”
그 옆에 시녀로 보이는 듯한 여성이 고개를 푹 숙였다. 검은 로브는 이내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양 볼 가득 홍조가 피어난 여자에게로 향했다.
“어어?”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 하는 여자.
백금발의 풍성한 머리카락. 술에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렷한 녹색 눈동자. 그가 잘 아는 누군가를 너무나도 닮은 그 모습에 검은 로브의 몸이 흠칫 굳었다.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베르딘 제국의 셋째 황녀인 프시케 루안 아인스라고 합니다.”
흐트러짐 없는 우아한 인사. 예의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몸가짐. 술에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뿜어져 나오는 내가 바로 베르딘 제국의 셋째 황녀다, 라는 기품.
일 것이라고 프시케는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못했다.
“여러붕께 잉샤드림니다. 베르딘 제국 세째 프시케 루아 아이스랍니다아.”
검은 로브는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벨모트를 죽여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