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그 여자(1)
“뭐라고요? 지금... 뭐라고 했어요!”
은수는 스쳐 지나가려고 했는데 지담의 말에 뒤돌아섰다.
“내가 뭘요... 내가 뭐라고 했나요?”
지담도 뒤돌아보며 은수와 마주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의 눈빛에서 파바박 불꽃이 일었다.
그때,
-하 은수?-
연호가 그 옆을 지나면서 은수를 알아봤다.
“은수...언니?”
“아~ 연호구나. 잘 지냈니?”
“응... 근데 언제 귀국한 거야?”
“지난주에.”
“강현 오빠는 알아?”
“음... 그게”
은수는 슬쩍 지담을 한 번 보더니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봐야지~ 그리고 앞으로는 시간 많으니까 자주 만나야지”
일부러 지담을 화나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런데 의외의 인물이 지담의 분노를 해소 시켜 주었다.
“그래? 근데 강현 오빠는 언니 만날 시간이 없을걸? 강현 오빠, 애인 생겼는데, 몰랐어? 이 언니가 강현 오빠애인이야!”
연호가 그렇게 말하면서 갑자기 지담의 팔짱을 끼며 은수에게 말했다.
-언..니? 이게 언제부터 내가 자기 언니라고-
지담은 어쨌든 자신을 도와주는 연호에게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다.
연호의 말과 행동에 은수는 표정이 사라졌고, 지담은 '얘가 왜 이럴까'하는 표정으로 연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고마운데? 내 애인을 직접 소개를 다 해주고...”
그때, 강현이 불쑥 세 여자 사이에 끼어들었다.
애인이라는 말에 지담이 미소를 지었고, 은수는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고맙지? 나중에 밥 사!”
연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큭큭~ 알았어”
“언니 이따가 나랑 얘기 좀 해요. 꼭!”
입구 쪽을 바라보던 연호가 지담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급하게 자리를 떴다.
지담이 연호 때문에 정신없는 사이,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은수가 강현에게 말을 건넸다.
은수의 말에 강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담의 어깨를 감싸며
“보시다시피 잘 지내”라고 말했다.
그런 강현을 보고 은수는 피식 웃으며,
“나,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하고 말하고는 지담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나..연호가 할 말 있는 거 같던데... 당신, 얘기 끝나면 와. 나 연호랑 있을게”
라고 말하고는 지담이 자리를 피해 주려 했다.
“그래, 금방 갈게”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강현은 지담의 손을, 한 번 꽉 잡고는 놓아주었다.
지담의 뒷모습을 본 은수는 한쪽 입술이 잠시 올라갔다가 이내 사라졌다.
강현은 지담과 은수를 우선 떼어놓고, 은수에게 경고하려고 지담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래 할 말이 뭐야?”
“답답하네... 잠깐 나갈까?”
“아니, 그냥 여기서 해.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잖아?”
“후~ 이강현, 많이 변했네... 예전엔 그렇게 다정하더니....”
“할 말 없으면 가라, 그리고 내 주위 사람들 이용해서 다시는 이런 일 꾸미지 마... ”
“나... 너한테 다시 돌아가면 안 될까?”
단호하게 말하고 돌아서는 강현에게 은수는 다급하게 말했다.
“너! 지금 제정신이니?” 강현은 화가 났다. 괜히 은수의 말을 들어 준다고 했나, 후회됐다.
“내가...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나한테 기회를 한 번만 줘. 강현아~ 나한테 돌아 와줘”
글썽이는 눈빛으로 은수는 간절하게 말을 했다.
“미쳤군. 나 사랑하는 사람, 있어”
“나를 잊기 위한 방패막이인 거 알아”
“뭐? 하~”
강현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트렸다.
“너 힘들었던 거 알아... 그렇지만 나도 힘들었어... 너를 떠난 후에야 네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게됐어”
은수는 간절하게 말했지만 강현은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해! 지난 일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아! 그리고 지금 그 사람이 나한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해. 오늘 얘긴 못들은 걸로 할게”
강현은 그렇게 돌아섰다. 은수는 그의 말에 주먹을 말아 쥐고는 부르르 떨었다.
한편, 지담은 일부러 자리를 피해줬다.
강현을 바라보는 눈빛, 자신에게 내보이는 적대감... 누가 보아도 하 은수, 그 여자는 강현의 전 여자 친구가 틀림없었다.
그 여자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강현이 잘 대처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일부러 비켜준 지담이었다.
그래도 기분은 개운치가 않았다.
“어? 강 수훈, 네가 여기 어쩐 일이야?”
“어? 너는 여기에 왜 있어?”
“난, 강현씨 친구가 여기 대표라 초대받고 왔지...넌? 아~ 넌 부잣집 도련님이라 이런 데 오는 거 당연하지, 참...”
“부잣집 도련님이라니? 오빠네 집 부자야?”
“오.....빠? 너 수훈이 알아?”
“응. 여기도 내가 초대했는데? 근데 둘이 아는 사이였어?”
“응... 대학 친구야...강 수훈, 어떻게 된 거야?”
“아...그게...” 수훈이 머리를 긁적이며 설명하려는데,
“아~친구~ 언니, 우리는 썸타는 사이야”
수훈이 말을 흐리자 연호가 재빨리 수훈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뭐, 뭘 타?”
지담이 떨떠름하게 두 사람을 쳐다봤다.
“썸~ 이 언니 보기에는 안 그렇게 생겼으면서 엄청 고지식해... 그치, 오빠?”
“송 연호, 장난 그만해. 이 꼬맹이는 어쩌다가 알게 된 사이야”
수훈이 연호의 이마에 꿀밤을 때리고는 지담에게 말했다.
“아~, 아프다고!”
“어디? 그러니까 장난 하지마라니까! 괜찮아? ”
수훈이 ‘쎄게 때렸나’ 생각하고는, 연호의 이마를 살펴보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지담은 흐뭇하게 둘을 바라보았다.
“근데 너 나한테 할 말 있다며...”
지담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연호를 쳐다보았다.
“응. 언니... 아까 그, 하 은수 조심해”
“그게 무슨 소리야?”
“예전에 강현 오빠랑 사귀던 사이였는데, 강현 오빠 버리고 딴 남자랑 해외 연수 갔었어”
“그래? 전 여친일 거라고 생각은 했어”
“근데 저렇게 둘만 있게 해줬다고? 다시는 그런 짓 하지마! 틈이 있으면 저 언니는 비집고 들어올 사람이야... 아마도 다시 돌아온 것도 강현 오빠 때문일걸?”
“설마... 그렇다고 해도 강현씨가 알아서 잘 대처하겠지... 근데 너 나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흠흠..엄~청 싫어했지~근데 언니한테는 강현 오빠를 보낼 수 있어도, 하 은수, 저 불여우에게는 절~대 안돼!!”
“너... 이 선생님 좋아해?”
수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연호에게 말했다.
“아~좋아했었는데 보시다시피 이 언니한테 뺏겼지~그니까 오빠가 나한테 잘해줘야 해, 나 실연당한 여자거든”
연호의 어리광에 수훈과 지담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수훈은 연호로 인해 지담과 이렇게 편하게 웃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역시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는 게 맞는 말인 것 같다.
“저 여자 신경 안 써도 괜찮은 거야? 연호 말처럼 불안한 상황 아니지?”
그래도 친구로서 걱정이 되어 수훈은 지담에게 물었다.
“괜찮아, 이제 연호에게 신경 써”
지담은 연호가 처음에는 못된 철부지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안 지금은, 수훈과 어쩐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훈은 내성적이라 이렇게 적극적인 연호랑 잘 맞을 것 같았다.
“네가 이 선생님이랑 행복했으면 좋겠다.”
수훈은 진심으로 바랐다.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그래, 고마워”
지담은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이건 또 무슨 조화야? 강수훈씨와 연호... 사귀는 사이야?”
마침 강현이 다가오면서 수훈과 연호가 같이 서 있는 모습에 놀라워했다.
“오빠, 우리 잘 어울리지? 오빠보다 우리 수훈 오빠가 더 멋지지?”
연호가 수훈에게 팔짱을 다시 다잡으며 강현에게 말했다.
“송 연호! 까불 지마”
수훈이 당황해하며 얼굴을 붉혔다.
“잘 어울리는 건 맞는데, 나보다 멋진 건 아닌데?”
“으악~왕자병~강현 오빠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이상 해졌어...언니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봐”
“큭큭~ 그럴까? 나도 저 오글멘트는 적응이 안돼거든”
“하하하~ 큭큭큭~”
지담의 말에 한바탕 웃었다. 얼마 전까지도 얽혀있던 네 사람이 이렇게 만나서 웃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인생은 참 알 수가 없기에 재밌는 거 아닐까...
그리고 그들의 웃음 뒤로 표정 없이 굳은 얼굴을 하고, 그들을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