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 선배 괜찮아요? 자료 읽고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보여서요.”
엘리야는 자신을 향해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키리안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 전체에 퍼지는 온기에 잠시 위로를 받았다.
그러나 곧 엘리야는 자신의 어깨 위에 있는 키리안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는 헬퍼를 자신이 너무 의지하게 될까 두려웠다.
‘잊지 말자. 키리안은 그저 헬퍼로서 본분을 다하고 있는 것뿐이겠지…….’
엘리야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침착하게 말했다,
“별일 아냐. 나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런데 자리 좀 피해줘.”
“네……. 선배.”
키리안이 헬퍼로서 베푼 도움이 거절당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씁쓸해 보이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엘리야를 바라본 뒤 자리를 떴다. 키리안이 가고 나서도 엘리야는 초조한 얼굴로 계속해서 보고서를 읽으며 생각했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설마 정말로 이 사건들이 헬레네와 연관이 있는 걸까? 아냐, 아닐 거야. 헬레네는 다시는 천계의 일에 엮이면 안 돼……. 절대로.’
멀리서 키리안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가, 엘리야를 다시 눈에 담았다. 그는 누가 봐도 도움이 필요했던 엘리야가 조금 전 자신의 도움을 거절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
숙소에 들어서기 전 키리안은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는 오늘만큼은 엘리야 선배에게 사과를 하고 관계를 회복시키리라 다짐했다. 물론 그는 매번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다짐해 왔지만, 키리안은 엘리야에게 말을 걸 타이밍을 번번이 놓쳤다.
마음을 다잡은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들어선 거실은 온통 불이 꺼져있어 어두컴컴했다. 엘리야 선배가 이미 숙소에 와있을 것으로 알았던 키리안은 잠시 당황했다.
'아직 안 돌아오신 건가?‘
키리안은 별생각 없이 부엌 쪽으로 들어섰다. 부엌 불을 켠 키리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엘리야가 바닥에 힘없이 쓰러져 있었다. 키리안은 순간 엘리야가 죽은 것처럼 보여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선배!“
키리안이 소리를 지르며 엘리야를 안아 올렸다. 이름을 부르며 몇 번 흔들어봤지만, 눈을 감고 있는 엘리야는 키리안의 손길대로 흔들릴 뿐이었다. 그는 엘리야를 업고 문 쪽으로 뛰어갔다. 그때 키리안은 자신의 등을 치는 엘리야의 힘없는 손짓을 느꼈다.
"키리안…."
"엘리야 선배! 정신이 들어요?“
그는 엘리야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뉘며 그녀와 눈을 맞추려고 했다. 엘리야는 키리안의 품에 안긴 채 천천히 눈을 굴리더니 말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
“선배 부엌 바닥에 쓰러져 계셨어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요.”
몸을 일으키는 엘리야는 상황을 파악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아아, 별거 아니야. 사실… 몽유병이 있어서 그래."
"몽유병이요?"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몽유병이 나타나곤 해. 걱정시켜서 미안해.“
자리를 일어서려고 하는 엘리야의 손을 키리안이 잡았다. 그가 걱정된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 순간 엘리야는 풀이 죽어있는 키리안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엘리야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키리안의 손등 위에 다른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니, 키리안. 그게 꼭 너 때문만은…….”
엘리야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키리안이 일어나 허리를 구십 도로 숙였다. 그가 정말 반성한다는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정식으로 사과하겠습니다.”
그런 키리안 앞에서 엘리야는 너무 당황해서 멍해 보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천사가 자신 앞에서 이렇게까지 사과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키리안은 얼떨떨해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말했다.
“선배 말씀이 틀린 게 없어요. 저는 그동안 악마들을 저와 아예 다른 존재라고 생각해서, 아예 가까이 지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어요. 그게 잘못인지 몰랐다는 것도 지금은 부끄럽습니다. 다시 사과드립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리야는 가슴 한쪽이 욱신거리는 걸 느꼈다. 엘리야의 머릿속으로 그동안 자신이 봐왔던 키리안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저주에 걸린 여성의 저주를 망설이지 않고 자신에게 옮겼던 키리안, 헬레네 조회를 부탁했을 때 주저않고 고개를 끄덕이던 그의 모습, 악몽에 잠을 못 이루는 자신의 옆을 지켜줬던 키리안,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햇살처럼 웃어 보였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렇게 다정할 수 있는 그가 상대가 악마라는 이유로 표정을 굳히는 걸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엘리야는 키리안의 양팔을 붙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사실, 너를 처음 만났을 땐 네가 소문대로 날 사무적으로 대해도 나한텐 상관없었어. 그편이 마음 편할 거라고 생각도 했어. 하지만 그때 내가 너한테 화낸 이후로 알았어. 네 행동이 이제 나에게 상관없지 않아.”
그 말을 듣고 키리안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약간 커졌다. 그러다가 키리안은 의지로 눈을 빛내고 있는 엘리야를 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키리안과 시선을 맞추며 엘리야가 마저 말했다.
“앞으로 네가 만나는 모든 악마들에게, 네가 평소 천사들에게 대하듯이 대해줘. 안 그러면 내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거기까지 말한 뒤 엘리야가 키리안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떨궜다. 그런 엘리야의 두 손을 키리안이 조심스럽게 쥐었다. 엘리야가 고개를 들자 키리안이 엘리야의 눈을 보며 속삭였다.
“만회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 당연히, 그럴게요.”
두 눈썹이 아래로 처지고, 물기 어린 청회색 눈을 반짝이는 키리안의 얼굴을 본 엘리야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녀가 키리안에게서 잡힌 손을 슬쩍 빼내며 말을 돌렸다.
“그… 그러고 보니……. 우리 사적으로 제대로 대화한 게 얼마 만이지?”
“아……. 사흘이요.”
“어, 응…….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렀었나?”
둘 사이를 순식간에 침묵이 감쌌고, 둘은 동시에 어색해진 분위기를 느꼈다. 키리안과 엘리야는 멋쩍은 얼굴로 각자 다른 쪽의 허공만 바라보았다. 엘리야가 키리안을 흘긋 보았다. 키리안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 같았다.
자신에게 향한 시선을 느꼈는지 키리안이 엘리야를 제대로 보았다. 시선이 한순간에 통한 둘은 화들짝 놀라며 다시 시선을 각자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그러다 키리안이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엘리야 선배.”
“응?”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몽유병이 다시 나온 거라고 하셨는데.”
"……."
“물론 저 때문인 것도 있겠지만,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요?”
그 말을 들은 엘리야의 눈빛이 흔들렸다. 망설이던 그녀가 어렵게 입을 뗐다.
“키리안, 내가 악몽을 자주 꾸는 거 알지.”
“네.”
“날 괴롭히는 문제가 있어. 그게 해결되지 않으면 악몽과 몽유병은 아마 평생 날 따라다닐 거야.”
엘리야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녀는 자신을 걱정하는 눈빛으로 살피는 키리안을 향해 말했다.
“게다가 이 증상이 더 심해진 이유는, 우리가 요즘 조사하는 사건들 있잖아. 내 과거의 문제가 그 사건이랑 연관된 게 아닐까…… 그 생각에 너무 불안하거든. 그래서 말인데 키리안.”
엘리야는 간절한 눈빛으로 키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비비안님께, 한 인간을 조회해봐 달라고 네가 부탁할 수 있을까?”
키리안은 비비안이 한 인간을 조회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키리안은 그 어떤 때에도 보지 못했던, 도움을 요청하는 엘리야의 눈빛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그가 순순히 답했다.
“그럴게요. 그 사람 이름이 뭐죠?”
“헬레네 엘르시아.”
그 말을 들은 키리안은 약간 표정을 굳히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에로스의 그녀’인가요?”
그 말에 엘리야는 목이 콱 메인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키리안이 고민하는 얼굴이 되는 걸 알아챈 엘리야가 키리안의 팔을 더 세게 쥐었다.
“제발 도와줘. 제 수명만큼 살지도 못하고, 너무나 비참한 운명으로 삶을 마감해야 했던 아이야. 내가 본 인간 중에서 그 누구보다 선한 아이였는데도…….”
엘리야의 고개가 서서히 숙여지면서, 키리안의 팔을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힘이 풀려갔다. 엘리야가 떨리는 목소리로 횡설수설 말했다.
“헬레네를 사랑한 건 라파엘 선배뿐이 아니야. 나도…… 나도 그녀를 아꼈어. 그러니 나도 금기를 깬 거나 마찬가지지.”
엘리야의 말에 키리안은 충격을 받은 얼굴을 했다. 그런 키리안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엘리야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런데 걔는 누구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이였어. 어떤 천사나 악마이든 그 아이를 배정받았다면 안 사랑할 수 없었을 거야.”
엘리야는 헬레네를 보지 못한지 몇백 년이 흘렀는데도 머릿속에서 그녀를 생생히 그려낼 수 있었다. 굽이치듯 부드럽게 흘러내리던 연갈색 긴 머리칼과 햇빛을 머금은 것 같은 연둣빛 눈동자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말을 타는 걸 좋아할 정도로 활동적이던 그녀에게서는 언제나 풀 내음이 났다. 엘리야와 눈이 마주치면, 헬레네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는데 엘리야는 헬레네의 그런 웃음을 가장 사랑했다. 엘리야는 꿈꾸듯이 중얼거렸다.
“헬레네는 몸이 약했어. 몸이 약한 사람이 주로 영적인 존재들을 잘 알아차린다는 거 알지. 그래서 그녀는…… 나와 라파엘 선배를 볼 수 있는 존재였어.”
엘리야의 말에 키리안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엘리야는 덤덤히 말을 이어나갔다.
“신을 위해서 만들어진 우리에겐 추억도 가족도 없지. 하지만 헬레네와 라파엘 선배는 나에게 거의 가족이나 마찬가지였어.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을 때의 시간이 지금까지 몇천 년을 살아왔던 시간 중에 가장 빛나던 때였어. 그런데 라파엘 선배가 헬레네에 대한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형벌을 받고 난 뒤…….”
여기까지 말하던 엘리야는 생각만으로 괴로운 듯 몸을 떨었다. 그녀는 가볍게 몸서리치면서도 말을 이어나갔다.
“헬레네도 신에 의해서 자신의 수명만큼 살지 못하고, 저주받은 운명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쳐야 했어.”
그 말을 하는 엘리야의 머릿속으로 불에 타던 헬레네의 성이 떠올랐다. 나무 기둥에 묶인 채 불구덩이에 휩싸인 헬레네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 엘리야는 자신의 머리를 양손으로 감쌌다.
키리안이 진정시키듯 엘리야의 어깨를 다독였다. 키리안의 품에서 엘리야는 절절하게 그에게 애원했다.
“이제 몇백 년이 지났으니 헬레네가 환생했을 텐데. 아직도 그때의 업보로 불행하게 살고 있을까 봐 너무 걱정돼. 제발……. 제발……. 환생해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줘.”
엘리야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엘리야의 그런 얼굴을 응시하는 키리안은 오랜 시간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키리안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선배 설마…….”
키리안과 눈을 마주친 엘리야는 엄습하는 불길한 느낌에 몸이 굳었다. 엘리야를 바라보는 키리안의 눈빛이 슬픔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요즘 저에게 잘해주셨던 거, 이걸 부탁하려고 하신 거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