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내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
“결혼하자고...”
“당신 드디어 미쳤군...”
지담은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상황에서 저런 말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 미쳤지, 당신한테....”
지담은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저 오글거리는 멘트는 정말 듣기가 민망했고, 좀처럼 적응이 안됐다.
지담이 뭐라고 하려는 순간, 강현이 이내 입을 열었다.
“다시 생각해... 나에 대한 당신 마음... 당신 상처와 자책감 속에 나를 집어 넣지마... 오로지 당신과 나, 둘만 생각해... 그래야 우리 둘 관계를 제대로 볼 수 있어”
뭐라고 반박할 수 없는 그의 단호한 말에 지담은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강현이 먼저 일어서며,
“오늘은 그만 갈게. 동생도 왔으니까...” 라고 말하며 카페를 나갔다.
집으로 돌아온 지담은 한동안 멍했다.
“왜 그래? 그 사람이랑 무슨 일 있었어?”
멍한 지담의 표정에 준이 물었다.
“어, 어?”
“뭐야? 진짜 무슨 일 있었어?”
“아냐... 아무것도”
“그 남자랑 무슨 사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남자와 누나 사이가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 준이는 지담에게 물었다.
“아무 사이도 아냐....”
“아무 사이도 아닌데 나더러 처남이라고 해?”
“그건, 장난이야”
“나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암튼, 수상해”
“수상하긴 뭐가 수상해? 아무일도 없었어”
지담의 행동이 수상쩍었지만, 준이는 더는 묻지 않았다. 그리고 짧게 한숨을 쉬고는
“나... 제대하고 외가부터 갔었어...” 라고 입을 열었다.
“그래? 참.. 너 제대 언제 했어?”
“일주일 전에...”
“외가에는 다들 잘 계시지?”
“응.... 근데...”
준은 더 말을 하지 못했다.
“근데 뭐?”
“아버지 소식 안 궁금해?”
“안 궁금해”
단박에 궁금하지 않다고 말하는 지담을 보고, 준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엄마 돌아가시고 아버지하고 나하고 할머니 집 나왔잖아... 나와서 어디로 갔는지 알아?”
그때의 일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데, 이 녀석은 왜 그 얘길 꺼내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
“그걸 어떻게 알아? 너 대학 들어와서 나한테 왔잖아”
“왜 한 번도 안 물어봐? 내가 어디에서 살았는지...”
“...........”
“물어보면 아버지 얘기가 나올까 봐?”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정곡을 찌른 준이의 말에 지담은 오히려 화를 내버렸다.
지담이 화를 내도 준이는 아랑곳 하지않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할머니 집에서 나와서 아버지랑 난, 외가에 들어 갔었어... ”
“뭐? 어떻게 뻔뻔스럽게!”
“그래.... 뻔뻔스럽게, 어떻게 여길 왔냐고 처음에 외가에서는 아버지를 인간 취급도 안 했어.... 외가에서는 나만 받아 주었지... 근데, 문밖에 무릎 꿇고 있는 아버지 때문에 난, 말도 안 하고 밥도 안 먹고 그랬었어... 그때는 내가 어리기도 했지만, 내 눈엔 아버지가 안쓰럽고, 불쌍하게 보였어... 안팎으로 부자간이 시름시름 앓으니까 안 되겠다 싶었는지, 외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받아주셨어... 외가에서 누나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언제까지 숨길 수도 없어서 말하는 거야”
“그래서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뭐야? 외가에서도 하지마란 얘기를...”
“그때 외가에서 아버지를 받아주셔서 지금까지도 아버지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고 살고 계셔... ”
“모시고 사는 게 아니라, 얹혀사는 거지... 그리고 그건 당연한 일 아냐? 엄마가 누구 때문에 그 고생을 하고, 그렇게 돌아가셨는데...”
“이제 아버지 용서하면 안 돼?”
준이는 지담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지담은 입을 열었다.
“후... 용서라... 내가 용서할 자격이 있을까? 난 나도 용서를 못 하겠는데 누굴 용서한다는 거야....그럴 자격 나한텐 없어”
“그건 사고 였어... 엄마도 누나가 이렇게 사는 거 원하지 않으실 거야”
“이렇게 사는 게 뭐 어때서?”
“아버지 때문에 남자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거... 그리고 엄마에 대한 자책감으로 평생 혼자 살려는 거... 이게 정상적으로 사는 거야?”
준이의 말에 왜 강현이 떠오르는지 지담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 번도 아버지 얘길 꺼내지 않던 동생이,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궁금했다.
“갑자기 왜 아버지 얘길 하는 거야?”
“아버지가 누나 만나고 싶대”
“뭐?”
“만나서 할 말이 있데”
엄마가 돌아가시고 처음에는 아버지와 할머니를 원망하고 원망 했다. 그러다 차츰, 그녀는 자신이 용서가 되지 않았다.
엄마를 죽음으로 몰고 간 당사자들이 만나서 뭐 어쩌자고.... 그렇다고 엄마가 살아 돌아오시진 않는데 말이다....
그래서 아직은 아버지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만나고 싶지 않아”
“휴~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누나도 이제 그만해.... 이건 엄마가 원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아닐 거라고 생각해”
준이의 말에 지담은 아무말도 못했다.
어쩌면 준이 말대로 자신의 어머니는 그녀가 이렇게 살아가는 걸 무엇보다 가슴 아프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당신 상처와 자책감 속에 나를 집어 넣지마... 오로지 당신과 나, 둘만 생각해... 그래야 우리 둘 관계를 제대로 볼 수 있어’
순간, 강현이 한 말이 뇌리에 스쳤다.
그런 걸까? 그와의 관계도 내 감정만 중요한 그 트라우마에 갇혀서,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걸까....
-엄마.... 난,...어떻게 해야 할까....-
지담은 허공을 바라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을 용서해야만 아버지도... 강현, 그 사람도... 자신의 마음도 제대로 들여 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용서하고, 인정하면, 자신의 어머니가 살았던 삶이 너무나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것 같고, 안타까웠다.
그렇기에 더더욱 자신이 용서가 안 되는 그녀였다. 자신의 엄마는 한 번도 행복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자신만 행복할 수 없으니까... 자신만 행복하게 된다면, 그건 너무나 이기적인 거니까.
“내일 엄마한테 갈래?”
주말이기도 했고, 준이의 제대 소식을 엄마에게 알리고자 지담이 준이에게 말했다.
“알았어... 그리고 나중에 그 남자에 대해 다시 얘기해”
남자라면 질색을 하는 지담이 집에까지 남자가 찾아온 걸 보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걸 준이는 감지했다.
그리고 누나가 이런 생활을 청산 할 수 있는 방법이, 어쩌면 그 사람에게서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준이였다.
“다시 얘기할 것도 없어! 아무 사이도 아니야!”
강현의 얘기를 다시 꺼내는 준이에게 지담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쪽은 아닌 것 같으니까 그렇지”
“신경 쓰지마, 내가 알아서 해!”
지담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슬쩍 눈치를 보던 준이는 지담의 핸드폰에 강현의 연락처를 찾아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했다.
그리고는,
- 서 준입니다. 내일 시간 있으십니까?- 라고 강현에게 문자를 보냈다.
-네... 오후 2시 이후는 괜찮습니다-
-그럼, 00동에 있는 00포차 아십니까?-
-네, 거기 압니다-
-그럼 거기서 8시에 뵐 수 있을까요?-
-네... 알겠습니다-
다음날....
지담은 준과 함께 어머니가 안치되어있는 납골당에 들어섰다.
사진속의 엄마는 여전히 예뻤고, 지담의 마음은 여전히 먹먹했다.
“엄마, 나왔어... 준이가 이렇게 커서, 벌써 군대 제대를 했네”
“어린애 취급 하지마... 엄마, 나 제대 했어... 이젠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누나가 제대로 살게 거기서 힘 좀 써”
“야~ 나 잘살고 있거든? 엄마 준이가 괜히 그러는 거야”
“누나 남자 생겼어, 엄마”
“야! 네 마음대로 말 하지마!”
“조용히 좀 하지”
“네가 헛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엄마, 그 남자 제대로 된 남자인지 내가 잘 보고 와서 말해 줄게.... 알았지?-
준은 지담을 슬쩍 쳐다보고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사진 속에 웃고 있는 정희의 모습이 꼭 대답해 주는 것 같아 준이도 싱긋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