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를 좀 더 잘 관찰해주면 좋겠어. 저 악마랑 같이 있을 땐 더더욱 신경 써서. 키리안 네가 가져온 증거 물품에 따르면 저 악마도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중 하나니까.’

　보고서를 쓰는 내내 키리안의 머릿속에 비비안의 그 말이 떠나질 않았다. 내내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키리안은 컴퓨터 자판을 치는 걸 멈춘 채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야 선배가 현재 유력한 살인 용의자인 7대 악마 중 한 명과 친하다니…….’

　키리안으로서는 신경이 안 쓰일 수 없는 일이었다. 이때 엘리야가 키리안에게 다가와 우물쭈물하더니 말 한마디를 겨우 뱉었다.

　“키리안…… 혹시 커피 마시지 않을래? 내가 가져다 줄게.”

　키리안은 심각하던 표정을 풀고 산뜻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감사합니다. 엘리야 선배.”

　엘리야는 고개를 작게 끄덕인 뒤 커피를 사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키리안은 그런 엘리야의 등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보고서 진도를 못 빼고 있던 키리안이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자판을 치기 시작했다. 키리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엘리야 선배가 요즘 다정한 것 같아. 이제 헬퍼인 나에게 마음을 좀 연 거라고 생각해도 될까…….’

　여기까지 생각한 키리안의 얼굴이 약간 붉게 달아올랐다. 키리안의 머릿속으로 엘리야가 자신에게 처음으로 같이 저녁을 먹자고 제안한 일, 요리를 해준 일, 넥타이를 매준 일들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그걸 생각하는 키리안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오늘 저녁은 내가 해서, 집에서 같이 먹자고 할까?’

　키리안은 엘리야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상상을 하다가 방금 전까지 자신이 했던 고민을 기억해냈다. 키리안은 잠시 턱을 괴고 진지한 얼굴로 생각했다.

　‘그래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엘리야 선배한테 그 7대 악마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보면 좋겠다.’

　‘방금도 결국 부탁하는 말을 못 꺼냈어.’

　그 시각, 엘리야는 커피를 들고 키리안에게로 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야는 키리안에게 헬레네 조회를 부탁하는 걸 시도해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엘리야가 생각했을 때 자신이 키리안에게 도움을 받은 건 많았다. 하지만 자신은 정작 키리안에게 도움을 준 게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 상황에서 염치없이 헬레네의 조회에 대한 부탁을 도저히 키리안에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엘리야는 키리안에게 계속 잘해주려 노력하고, 먹을 것 공세를 퍼붓게 되었다. 특히 엘리야가 자신이 요리를 그다지 잘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뒤로는 이것저것 간식거리를 사 키리안에게 챙겨주고 있었다.

　‘역시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게 우선이겠지? 그 뒤에 조심스럽게 부탁해보면 괜찮지 않을까.’

　이것저것 생각을 하느라 엘리야는 자신 앞으로 누가 오는 걸 보지 못했다. 엘리야와 한 사원이 부딪칠 뻔한 상황에서, 그 사원이 겨우 엘리야를 피했다. 그녀가 엘리야를 향해 높은 목소리로 화를 냈다.

　“어머, 뭐야. 조심해야죠!”

　그제야 엘리야는 자신이 커피를 들고 있는 상태에서 상대와 부딪칠 뻔했다는 걸 자각했다. 엘리야가 정중하게 사과했다.

　“앗,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엘리야를 꼼꼼히 살피던 그녀의 눈이 흥미로운 걸 발견한 사람처럼 반짝였다. 그녀가 엘리야에게 몸을 가까이하며 물었다.

　“어? 당신, 이번에 새로 배정된 키리안의 파트너 아닌가요?”

　“네…… 맞는데요.”

　“역시 맞네!”

　시원스럽게 웃음 짓는 그녀는 엘리야를 만난 게 반가워 보였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엘리야와 악수를 하며 말했다.

　“저는 그 키리안의 전 파트너거든요. 당신이 파트너가 되기 바로 직전 파트너.”

　“네…… 그렇군요. 안녕하세요.”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숨기지 못하게 엘리야에게 질문했다.

　“그 콧대 높은 천사 양반이 잘 해줘요?”

　곧이어 그녀의 시선이 엘리야가 들고 있는 두 커피에 향했다. 그녀는 경악하는 얼굴이 되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설마 키리안이 당신에게 커피 심부름도 시켜요?”

　“아뇨. 제가 키리안이랑 같이 커피 마시려고 준비한 겁니다.”

　그 말에 그녀는 더 크게 놀란 듯 더 높은 옥타브로 외쳤다.

　“세상에, 그 철벽 천사 키리안이 악마인 당신이랑 커피를 마신다고요?”

　엘리야는 슬슬 이 악마에게 불쾌감을 느꼈고 자리를 피하고 싶어졌다. 그런 엘리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 양반 어디 아픈가, 죽을 때가 된 거 아니에요?”

　“저기요. 말이 좀 심하신 것 같은데.”

　“심하다고요? 제가 당신보다 키리안이랑 최소 몇십 년은 같이 일했어요.”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엘리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서 엘리야를 향해 힘주어 말했다.

　“그런데 그거 알아요? 키리안은 저랑 몇십 년을 같이 파트너로 지내면서도 말 몇 마디 제대로 섞어본 적이 없어요. 물론 이 회사에서는 악마를 심하게 무시해서 못살게 구는 천사들이 많죠. 그래서 키리안 정도면 양반이라는 거 알아요. 그래도 키리안은 분명히 천사 동료를 대할 때랑 저를 대할 때랑 태도가 달랐어요. 선을 철저히 긋고 대했다고요.

　그 키리안이 당신이랑은 같이 커피를 마실 수 있다니. 저로서는 신기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 말을 듣는 엘리야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엘리야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녀를 무시하고 지나쳐 갔다.

　자신의 사무실에 도착한 엘리야는 복잡한 표정으로 키리안에게 커피를 건넸다.

　“키리안, 여기 커피.”

　“고마워요. 아 저기 엘리야 선배, 오늘 저녁…….”

　엘리야는 자신을 향해 선선히 웃어 보이는 키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엘리야의 머릿속에 방금 들었던 키리안의 전 파트너 말이 쟁쟁하게 울렸다.

　‘키리안은 저랑 몇십 년을 같이 파트너로 지내면서도 말 몇 마디 제대로 섞어본 적이 없어요.’

　엘리야는 키리안이 하려던 말을 막고 빠르게 시선을 피했다.

　“…키리안 미안. 나 지금 급하게 봐야 하는 일이 있어서 좀 보고 올게. 나중에 이야기하자.”

　“네, 그러면 나중에 이야기할게요.”

　엘리야는 급하게 사무실을 나섰다. 그녀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당연히 천사와 악마들이 인간의 신상을 조회할 때 가는 조사실이었다. 그녀는 제발 이번에 갔을 땐, 헬레네를 볼 수 있는 허락이 떨어지길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엘리야는 최대한 키리안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또 엘리야는 헬레네 조회 신청을 거절당했다. 결국 엘리야는 자신만의 힘으로는 헬레네를 조회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녀는 복도의 벽에 등을 붙이고 키리안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이때 언제 다가왔는지 모르게, 엘리야의 옆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너는 인상을 펴고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엘리야가 고개를 돌리자, 레비가 붉은 눈을 반짝이며 엘리야 옆에 서 있었다. 엘리야는 놀라는 기색 없이 익숙하게 받아쳤다.

　"너는 관심이 남한테 너무 많은 게 탈이랬지."

　엘리야의 그 말에 레비가 엘리야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나른하게 말했다.

　"난 아무한테나 관심 있진 않은데.“

　레비의 말에 엘리야가 당황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런 엘리야의 반응을 본 레비가 시원하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엘리, 뭐야 그런 표정? 나 상처받는다?”

　“아, 아니…….”

　그는 미소를 짓는 얼굴로 허리를 굽혀 엘리야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무튼 내가 도와준 일은 어떻게 되어가? 조회를 비비안에게 부탁해보는 거 말이야.”

　“아직 방법을 모색 중이야. 난 그분이랑 개인적인 일로 대화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엘리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레비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분명 도움이 되는 정보였어. 고마워. 혹시 뭐 원하는 거라도 있는 거야?”

　“나는 은혜를 갚을 줄 아는 놈이거든.”

　“오, 정말?”

　“그래. 우리 첫 만남이 내가 복도에서 쓰러져 있던 걸 네가 일으켜주는 거에서 시작됐지?”

　레비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잘못한 일을 시치미 떼는 아이처럼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레비와의 첫 만남을 떠올린 엘리야가 픽 웃음을 지었다.

　“그때 정말 깜짝 놀랐어. 복도에 네가 난데없이 쓰러져 있었잖아. 그러고 보니 요즘 몸은 괜찮은 거지?”

　그 말을 들은 레비가 빙글빙글 웃으며 얼굴을 엘리야 쪽으로 가까이 들이밀었다.

　“걱정해주는 거야?”

　“……그래.”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듣자 레비의 눈동자가 커졌다. 엘리야는 괜히 레비의 시선을 피하며 툴툴거리며 말했다.

　“회사에서 얼마 없는 악마 사원 동기잖아. 걱정은 당연히 하지.”

　그런 엘리야를 보며 레비는 과거를 잠시 회상했다.

　몇백 년 전, 가브리엘이 큰 슬픔에 잠겨있을 때가 있었다. 가브리엘을 극렬히 싫어하는 레비로서는 그를 도발할 아주 좋은 기회였다. 그는 가브리엘의 신경을 벅벅 긁어놓았고 결국 큰 싸움으로 번졌다.

　부상을 입고 복도에 널브러져 있는 레비를 발견한 게 엘리야였다. 그전에는 천사도 악마도 레비를 못 본 척하고 지나쳤다. 천사들은 경멸하는 눈빛으로 지나쳐 갔고 악마들은 자신이 모르는 악마를 경계해 다가가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야만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레비는 과거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가지고 있었던 엘리야를 떠올렸다.

　‘괜찮아요?’

　그녀는 레비를 향해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큰 주홍빛 눈동자가 걱정을 한 가득 담고 레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비는 처음으로 이 회사에 다니고 있는 악마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이때 엘리야는 레비가 그저 아파서 쓰러진 이 회사에 다니는 악마 평사원인 줄 알았다. 복도를 걸으며 둘이 몇 마디를 나누었는데 레비는 7대 악마 외에 다른 악마랑 대화를 해본 것도 역시 처음이었다.

　레비는 본래 대천사들의 신경을 긁는 것 외엔 흥미가 없는 지루한 일상을 지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관심이 가는 이가 생긴 것이었다. 그는 7대 악마의 능력을 써 평범한 악마 회사원으로 둔갑해 이 회사에 입사를 했다. 그는 레비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엘리야의 곁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회사에서 7대 악마의 존재 자체를 아는 건 대천사와 고급 인력 몇 명 외에는 없었다. 그들조차도 사내에서 7대 악마에 대한 이야기를 어떤 정당한 명분 없이는 평사원들에게 할 수 없다는 조약에 걸려 있었다.

　상념에 잠겨 있는 레비의 정신을 깨운 건, 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엘리야 선배! 어디 다녀오셨어요?”

　“아, 키리안.”

　반가운 얼굴로 엘리야에게 가까이 다가오던 그는 레비를 보고 급격하게 얼굴을 굳혔다. 레비는 키리안의 표정 변화를 세심하게 살폈다. 악마를 싫어하는 천사라 해도, 이렇게까지 적대감을 드러내는 경우는 요새는 적은 일이었다. 엘리야는 키리안이 레비한테서 눈을 못 떼는 걸 알고 말했다.

　“키리안 이쪽은 내 악마 동기, 레비라고 해.”

　“…….”

　키리안은 엘리야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혐오와 경악이 뒤섞인 얼굴로 레비를 응시했다. 그 표정을 본 레비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이 애송이가 누구였는지 기억해냈다. 바에서 비비안의 옆에 앉아 있던 천사였다. 레비는 키리안이 자신이 변신술을 하는 걸 봤다는 것을 떠올렸다. 레비는 한쪽 입꼬리를 미미하게 올리고 생각했다.

　‘귀찮게 됐네.’

　키리안이 엘리야를 향해 당혹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엘리야 선배, 선배는 사실 속고 있는 거예요. 이 악마는 7대-”

　그때였다. 갑자기 세상이 멈춘 것처럼, 키리안은 자신의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시선을 돌리니 엘리야도 얼음에 갇힌 것처럼 완전히 멈춰있었다. 그녀는 키리안과는 달리 시간이 멈춰있다는 걸 의식도 못 하는 것 같았다. 키리안은 눈을 겨우 굴려 레비를 바라보았다. 레비는 두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여유로운 얼굴로 키리안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키리안을 보고 있는 레비의 붉은 눈이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와인처럼, 유독 검붉게 빛났다. 그걸 본 키리안은 자신이 어떤 강력한 마법에 빠진 걸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멈춰 있는 그 시공간에서 레비가 물 흐르듯이 키리안에게 다가오더니,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리고 키리안의 귓가에 대고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남의 사생활을 함부로 말하면 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