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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구남친이 돌아왔다
작가 : 한그루
작품등록일 : 2020.9.23

그날,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던 단 하루는 두 여자의 운명을 바꿔 버린다.
한 여자는 도망쳤고, 다른 여자는 죽었다.
그리고 그녀들과 얽힌 두 남자.
그로부터 6년 후.. 그들이 나를 찾아왔다.
살아남은 여자와 두 남자의 피 튀기는 로맨스릴러!

 
네 번째 이야기, 규칙입니다.
작성일 : 20-09-23 18:12     조회 : 224     추천 : 0     분량 : 9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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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상 위에 팔꿈치를 괴고 머리를 받친 도희가 양손으로 있는 힘껏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지끈지끈한 머리 때문이었다. 지금 관자놀이 마사지라도 하지 않는다면 머리가 곧 터져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희는 또 지고 말았다. 결국 이번에도 돈 때문이었다.

 

 

  “공설 씨 잘 부탁하네. 능력 있는 친구야.”

  “싫습니다.”

  “사장님께서 이 말을 꼭 전해 달라셔. 연, 봉, 협, 상.”

  “…….”

  “곧 보자시더라고. 언제까지 자네 능력을 썩힐 순 없지 않아. 이제는 후배 양성에도 힘을 보태야지.”

 

 

  사장실에 다녀온 왕 부장은 상당히 들떠 보였다. 아마 이번 수석으로 입사한 신입사원의 사수 자리에 반드시 도희를 앉힐 것을 약속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한 몫 단단히 받았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도희가 입사하던 5년 전만 해도 소규모 웨딩홀에 불과했던 블레스 웨딩을 지금의 대기업 급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여한 데에 그녀의 공이 어마무시하기 때문이었다.

 

 

  업무 초반 지지부진하던 업무 성과에 아무도 그녀에게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일순간 마치 번데기에서 변태한 나비처럼 훨훨 날기 시작했다. 밤샘 근무도 모자라 도희는 웨딩홀에서 먹고 자며 웨딩 플래너라는 직업을 곧 자신으로 삼았다. 그녀는 과거로부터 자신을 용서했으며 스스로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도희의 발전은 곧 블레스 웨딩의 발전이었다.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자 그녀에게서 웨딩 플랜을 받고 싶어 하는 고객들이 줄을 이었다. 젊은 예비신부들은 감각 있는 그녀의 컨설팅에 반해 자신들이 원하는 날이 아닌 도희가 가능한 날짜에 맞춰 식을 올리길 원할 정도였다. 그렇게 단 3년 만에 도희는 업계 1위 웨딩플래너가 됐으며, 블레스를 최고의 웨딩 컴퍼니로 만들어냈다.

 

 

  볼품없는 단층짜리 웨딩홀은 23층짜리 빌딩으로 탈바꿈했다. 7개의 지역에 분점을 냈고, 성수기와 비수기를 나눌 것 없이 계약이 밀려들었다. 블레스만의 강점인 백도희를 내건 백플랜이 최근 3년 간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패키지였다.

 

 

  도희의 플랜만 받을 수 있다면 몇 년이라도 기다리겠다는 커플들까지 나타나며 웨딩 업계에는 ‘백도희 모시기’ 전쟁이 한바탕 일었다. 여기저기서 스카웃을 꾀하는 귀한 몸이 된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 한들 새로운 곳, 새로운 남자들에 적응할 수가 없어 매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를 알 리 없는 블레스 측 대표는 그녀를 상당히 의리 있고 믿음직한 직원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하지 않는 것, 단 하나. 후배들을 위한 교육이었다.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던 노하우라든가, 상담만 들어가면 백 퍼센트의 계약 성공을 이끌어내는 그 비법만이라도 알려주면 좋을 텐데 그녀는 늘 교육 일정에서 발을 뺐다.

 

 

  “커피… 한 잔 드시고 하세요. 지현 씨한테 물어보고 타 와봤는데…”

  “앞으론 이런 거 갖다 놓지 마세요. 총괄부 규칙입니다.”

 

 

  선배들에게도 살가운 적 없던 도희였지만 남자 후배들에게 유독 거리를 뒀다. 하지만 사측에서도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었다. 믿을만한 능력을 지닌 직원이 오직 그녀뿐인 상황에서 그녀가 없는 블레스 웨딩은 부실공사로 허물어질 위기를 눈앞에 둔 낡은 건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회사의 규모가 대기업의 반열에 오른 후 이루어진 첫 신입사원 채용에서 우수한 스펙을 가진 것도 모자라 심지어 경쟁력까지 갖춘 잘생긴 남자 사원 설의 입사를 결정하고 임원진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어떻게 하면 공설의 사수 자리에 백도희를 앉히느냐를 논하기 위한 회의가 짧은 기간 동안 무려 6번이나 열렸다.

 

 

  “상사의 커피를 타지 않는다 말고는 총괄부 규칙이 또 뭐가 있습니까? 알려주세요, 팀장님.”

 

 

  그 결과, 일단 밀어붙인다, 로 다수의 의견이 모아졌다. 일단 비밀리에 일을 추진하고 나중에 연봉으로 회유합시다. 회의가 어딘가 개운치 않게 마무리 되어 가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반박하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 누구도 지랄 맞은 총괄부 1팀장 백도희를 말로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뒤에서 그런 식으로 졸졸 쫓아다니는 거.”

  “아… 네. 그럼 옆에서 걷는 게…”

  “이건, 우리 부서 규칙이 아니라 공설 씨한테만 해당하는 내 명령입니다.”

 

 

  종종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좇으며 작은 수첩을 들고 시종일관 메모를 할 준비를 하던 설이 머쓱함에 혀를 내어 건조한 입술을 핥았다.

 

 

  “…네. 주의, 하겠습니다.”

 

 

  싸한 둘의 분위기에 전체 사무실의 분위기가 얼어붙은 듯 했다. 그들의 주위에 자리한 직원들은 괜히 불편함을 느끼며 헛기침을 하고 눈치를 살폈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 이들도 있었다.

 

 

  “일단은 자리로 돌아가세요. 업무 플랜 짜보고 파일로 보내요. 들고 오지 말고.”

  “네, 팀장님! 한 달 치 짤까요? 아님 일 년 치요?”

 

 

  퉁명스럽게 던진 별 것 아닌 일에도 설의 기운이 다시 돌아왔다. 그의 입꼬리가 짧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의 입술에 잠시 시선이 꽂혔다. 잘생긴 외모 때문일까. 그의 표정에 변화가 생기면 도희는 한 번씩 눈길을 멈추고 있었다.

 

 

  아무도 알 리 없는 자신의 변화에 민망해진 도희가 고개를 숙인 채 제자리로 향했다.

 

 

  “일주일 치만 짜요. 한 달을 다닐지 안 다닐지도 모르는데 무슨. 며칠만에 도망가는 사람들 수두룩 빽빽이에요.”

  “네! 그러겠습니다!”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설의 표정이 조금 더 밝아졌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1팀 팀테이블 끝자리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사수가 내린 첫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등을 지고 열심인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괜히 눈을 흘기게 되는 도희였다.

 

 

  그때, 도희의 휴대폰 진동이 요란하게 그녀의 몸을 흔들어 댔다. 발신자는 ‘5월 19일 영균 신랑님’ 결혼을 세 달 앞두고 있는 신랑 영균이었다. 어쩐 일이지? 한동안은 미팅이 없는 커플이었지만 그녀는 우선 목소리부터 가다듬었다. 흠! 흠!

 

 

  “네, 신랑님. 어머, 안녕하셨어요? 네네. 어쩐 일이세요?”

  {다름이 아니구요. 도희씨 회사 근천데 좀 뵐 수 있을까요? 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럼요. 마침 사무실에 있어요. 네네. 네, 그럼 1층 카페에서 이따 뵐게요.”

 

 

  10분 뒤에 약속을 잡은 도희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상담용 짐을 챙겼다. 노트북과 며칠 전 드레스샵에서 전달 받은 신상 팜플렛 몇 장을 가방 안에 넣고 팀원들을 한 번 쓱 훑었다.

 

 

  ‘손 대리는 아까 미팅 나갔고.. 윤진이 회의 준비 하고 있고.. 공설 저 자식도 하라는 거 잘 하고 있네.’

 

 

  내심 일손이 부족했던 터라 팀원이 필요하긴 했지만 하필 설이라는 게 그녀는 아직도 떨떠름했다. 가방을 챙겨들고 나가자마자 눈치만 보고 있던 은정이 얼른 쫓아와 설에게 다가갔다.

 

 

  “설이씨. 뭐해?”

  “업무 플랜 짜고 있었습니다.”

  “사수 지금 고객 미팅 나갔어.”

  “아.. 허락 없이 쫓아다니지 말라고 하셔서요.”

  “이런 답답한! 사수가 밖에 있는데 부사수가 허락 없이 사무실에 앉아있는 건 괜찮대? 이건 직무유기라구. 백날 플랜 짜면 뭐할 거야? 실무를 알아야지, 실무를.”

 

 

  설이 주섬주섬 수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자 은정이 뒤돌며 덧붙였다.

 

 

  “1층 카페래.”

  “감사합니다. 다녀오겠습니다!”

 

 

 *

 

 

  카페로 향하던 도희가 갑자기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섰다. 아까 복도에서 듣던 구둣발 소리였다. 공설은 사무실에서 시킨 일을 하고 있을 텐데?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돌아본 그녀의 눈에는 종종 걸음으로 뒤를 좇다 그대로 멈춰선 설이 있었다.

 

 

  “허? 뭐야.”

 

 

  황당했다. 그러나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그러자 설은 더 빠른 걸음으로 그녀의 옆에 다가와 발을 맞춰 함께 걸었다.

 

 

  “쫓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그래서 뒤 말고 옆에서 걸으려구요.”

  “옆도 안 돼요.”

  “그럼 제가 앞에서...”

 

 

  지금 장난해요? 하고 버럭 화를 내려다 장난기라고는 전혀 묻지 않은 진지한 얼굴에 그냥 입을 닫았다. 애초에 상종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하자. 도희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통유리 너머로 영균의 얼굴이 보였다. 물 한 잔을 앞에 두고 앉은 얼굴엔 제법 긴장이 역력했다. 수십 수백 명의 신랑 신부들을 만나본 도희로서도 무슨 말을 할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는 얼굴이었다.

 

 

  “신랑님.”

 

 

  도희의 목소리에 근심에 잠겨있던 영균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반면 도희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자리엔 신부 없이 오직 그뿐이었다. 만일 설이 없었다면 그녀는 혼자서 그와 마주했어야 했을 터였다.

 

 

  “신부님은 안 오셨어요?”

  “네. 민지가 메리지블룬지 좀 예민해서요.”

  “네... 아, 이쪽은 저희 신입사원이에요.”

 

 

  도희가 자리에 앉으며 노트북을 한쪽으로 밀어뒀다. 멀뚱히 선 설을 소개시키는데 어딘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도희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팀장님, 제가 커피 가져올게요. 신랑님 아메리카노 드세요?”

  “아뇨. 달달한 걸로요. 과일도 갈고 얼음도 갈고 뭐 오래 걸리는 그런 거.”

  “난 냉수면 돼요.”

 

 

  설이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하는 동안 영균은 설을 경계했다. 카운터에 도착한 설이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본 후에야 비로소 그 눈동자가 도희에게 돌아갔다.

 

 

  “도희씨!”

  “신랑님. 왜 이러세요?”

  “우리 한 번 만나볼래요?”

  “네? 그건 안 되죠.”

 

 

  예상은 했지만 그의 손이 도희보다 조금 빨랐다. 도희의 손을 덥썩 잡은 영균의 힘은 무지막지했다. 긴장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제대로 잡혀 이 정도의 힘으로는 빼지 못했을 정도였다. 종종 이런 경우가 있기도 했지만 이렇게 회사까지 찾아와 손을 덥썩 잡는 놈은 처음이었던 터라 그녀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도희는 얼른 테이블 밑으로 손을 감췄다.

 

 

  “그냥 연락만이라도 해요. 나 아직 유부남도 아니고..”

  “신랑님, 그건 어렵구요. 다른 용건 없으시면 저 먼저 일어날게요.”

 

 

  치워뒀던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눈앞에 번쩍, 불빛이 일었다. 영균이 헉하고 숨을 들이마셨고, 도희의 앞을 가로막고 선 여자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다시 한 번 손을 높게 올렸다.

 

 

  “신부님.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놔요, 이거! 저 나쁜년!”

 

 

  소리를 듣고 금세 달려온 설이 여자의 팔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악에 받친 여자는 카페가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있는 힘껏 팔을 잡아 빼려고 용을 쓰면서 여자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여자의 야단에도 설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저 벌개진 도희의 뺨을 내려다 봤다.

 

 

  “놓을 테니까 저희 팀장님 때리지 마세요.”

  “그.. 그래, 민지야. 나가서 얘기하자.”

 

 

  설이 그녀의 팔목을 놓자마자 이번엔 그녀의 예비 신랑인 영균이 바턴 터치하듯 팔목을 잡았다. 영균은 짝 소리가 바닥을 울리도록 뺨을 맞은 도희보다도 더 붉어진 얼굴로 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여자를 끌었다.

 

 

  그러나 여자의 발악은 이후로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결국 도희의 얼굴에 커다란 유리컵 가득 든 냉수를 전부 쏟아 붓고 그 잔을 바닥에 던져 깨버린 뒤에야 여자는 영균을 따라 카페를 나갔다.

 

 

  카페 안의 사람들이 남은 도희와 설을 보며 웅성댔다. 당황한 설이 티슈를 가져와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려는데 정작 도희는 담담하게 턱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물을 소매로 대충 닦았다.

 

 

  “아이씨, 물은 왜 뿌려.”

  “......”

  “커피 한 잔 마시고 천천히 와요. 나 먼저 올라갈게.”

 

 

  도희가 먼저 빠른 걸음으로 카페를 나갔고, 설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쫓아다니지 말라는 그녀의 말을 자꾸만 어기게 되는 것이 미안했고, 아이러니했지만 그래도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지나다니던 직원들이 도희의 젖은 얼굴을 보고 놀랐다. 놀란 얼굴로 인사를 했고, 정작 당사자인 도희는 태연히 그 인사를 모두 받아냈다.

 

 

  오직 둘뿐인 엘리베이터 안에서 설은 그녀의 한 걸음 뒤에 서있었다. 물 한 컵을 다 뒤집어쓴 덕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 끝을 보면서 그는 어쩐지 서글펐다.

 

 

  “팀장님. 괜.. 찮으세요?”

  “우리 직업이 이래요. 뺨 맞고 물 맞는 거 처음 아니야.”

  “어째서..”

  “저 여자도 다 알 거예요. 내가 아니라 자기 신랑이 추근덕 댔다는 거. 그래도 아마 결혼은 그대로 하겠죠. 여자들은 쉽지 않거든. 저 커플, 식이 3개월도 안 남았어요.”

  “......”

  “이미 결혼한다고 여기저기 인사도 시켰을 거고, 신혼집이며 혼수, 신혼여행.. 줄줄이 계약 돼 있겠지. 부모님들한테 오늘 일에 대해 말하면 딸 편 들어주나? 아니거든. 남자 결혼 전 한두 번 실수 할 수 있다. 결혼해서 보단 하기 전에 그러는 게 낫지 않냐. 빼도박도 못하고 그냥 저렇게 식장까지 가는 거예요.”

  “......”

  “저 여자가 왜 모르겠어. 그러니까 그냥, 나라도 원망하고 싶은 거야.”

  “......”

  “누구라도 원망하고 싶은데 하필 내가 있었던 거죠. 어쩌겠어요. 같은 여자가 이해해줘야지. 근데 한 가지 걸리는 건 저 남자 처음도 아닌 거 같고 마지막도 아닐 거 같아서 좀 걱정되네.”

 

 

  도희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11층, 그들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도희가 먼저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봤을 때도 설은 여전히 엘리베이터 안에 우두커니 선 채였다.

 

 

  “웨딩플래너에 로망 있어요? 그럼 당장 때려치우고.”

 

 

 *

 

 

  “아니, 왜요?”

 

 

  이상한 일이었다. 저저번 주에 제출한 휴가계가 아직도 처리되지 않았다는 인사부의 허무맹랑한 답변에 도희의 인상이 한가득 찌푸려졌다. 여태껏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신입사원들 월차를 먼저 처리하라는 부장님 지시가 내려와서요. 복지 차원에서요.”

  “신입사원들 월차요?”

  “작년부터 신입사원들도 달에 한 번씩 월차 생겼거든요.”

  “아니… 그럼 내 복지는?”

 

 

  무려 이주 전에 제출한 휴가계에 대한 답변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당장 내일인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윤화 씨, 같은 부서, 아니 같은 팀만 아니면 상관없지 않아요? 내일 뭐 몇 명이나 쉬는데?”

  “음… 한 명인데요, 팀장님 팀이었던 거 같은데요?”

 

 

  어디 보자 하면서 노란색 파일철을 꺼내 훑어보던 인사과 대리 윤화가 낡은 파일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도희를 향해 민망한 듯 웃었다.

 

 

  “아직 제가 관리 프로그램을 잘 쓸 줄 몰라서요. 아, 여기.”

 

 

  그녀는 정갈한 글씨로 작성된 휴가 신청서 양식지 한 장을 도희 앞에 내밀었다.

 

  ‘공 설’

 

 

  하… 또 너니.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도희는 온 열이 머리로 모이는 느낌을 받았다. 스팀이 나오는 건 아닌지 무의식적으로 정수리를 짚어 확인하기까지 했다. 굉장히 언짢은 기분으로 사무실에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은 그날이었다.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녀를 옥죄던 공포로부터 해방된 날, 그로 인한 트라우마가 생겨난 날. 그리고 그 여자에 대한 죄책감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

 

 

  사내에서는 암묵적으로 도희의 정기 월차로 정해져 있는 2월 12일에, 같은 팀 신입사원 설의 휴가계란 도희에게 거의 도전장 같은 것이었다.

 

 

  “부장님, 잠깐 밖에서 차 한 잔 하시죠.”

 

 

  난생처음 듣는 도희의 말에 왕 부장은 얼떨떨한 얼굴로 로봇처럼 일어나 그녀를 따랐다. 뻣뻣한 걸음걸이는 멀리서 보면 인공 지능 로봇의 외형을 왜 저렇게 밖에 못 만들었을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부자연스러웠다.

 

 

  처음 보는 티 타임 조합에 은정도 놀란 얼굴로 그들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은정의 팀 막내로 합류하게 된 지현이 또 궁금한 얼굴로 은정의 옆에 다가왔다.

 

 

  “대리님, 도희 팀장님 부장님한테 좀 화나신 거 같죠?”

  “넌 뭐 그렇게 궁금한 게 많냐?”

  “아무래도 혼내려고 불러내신 거 같아요.”

  “도희 팀장이 왕 부장을?”

  “네!”

 

 

  전혀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은정은 고개를 저었다. 지현을 자리로 돌려보내고 사무실을 나서던 도희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무언가 문제가 생겼음은 분명했다.

 

 

  “드세요. 제가 쏘는 거예요.”

  “…뭐야?”

  “달달한 다방 커피요. 부장님 좋아하시는 거.”

  “아니이… 왜 이걸 굳이… 여기까지….”

 

 

  1층 로비의 카페는 믹스 커피를 싫어하는 직원들을 위해 특별히 운영되는 곳이었다. 블레스 직원임을 나타내는 ID 카드를 제시하면 이미 시중의 브랜드 커피보다 저렴한 값에서 50%를 추가 할인 받을 수 있어 더없이 좋았다. 이곳은 직원들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이 역시 도희의 반 협박과도 같은 건의로 인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김이 나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넘기고 도희는 유리 테이블 위에 잔을 올려놨다. 흰 머그잔과 그 안에 담긴 새카만 커피. 그 완벽한 색감의 대비가 참 멋스럽다고 생각했다.

 

 

  “저도 이럴 때가 있어야죠. 팍팍한 부하 직원이었잖아요, 제가.”

  “그… 사수 건은 내가 미안하게 됐어.”

 

 

  이미 포기한 일이었지만 내심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는지 왕 부장은 사과를 먼저 건넸다. 그가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대표가 도희에게 주는 그 많은 급여에는 회사의 발전에 기여한 공을 치하하는 뜻도 있겠지만 회사를 더욱 든든하게 받쳐주기를 바라는 의미도 담겨 있음을 그녀는 모르지 않았다.

 

 

  “아뇨. 해볼게요. 어차피 말씀하신 대로 연봉협상도 코앞이고요.”

  “정말이야? 정말 고마워, 백 팀장. 난 진짜 백 팀장 안 한다고 할까 봐 얼마나…”

  “내일 쉬어요, 저.”

  “응?”

 

 

  내가 하나를 양보했으니 당신도 해야 한다. 도희의 단호한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쉬고 싶으면 쉬어야지! 내일 쉬어!”

  “인사부장님 지시가 있었대요. 신입사원 월차를 우선 처리하라는.”

  “…….”

  “신입사원 복지도 중요하지만… 저 백도희에요, 부장님. 신입사원 때문에 월차 밀리는 팀장이 어딨어요.”

  “아이, 그러면 안 되지. 내가 당장 김 부장한테 전화할게!”

 

 

  그게 뭐 문제냐는 듯 휴대폰을 꺼내든 왕 부장이 인사부 김 부장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 연락처를 검색했다. 엄지손가락을 자신 있게 움직이는 왕 부장을 보면서 도희는 커피를 한 모금 더 삼켰다.

 

 

  “그 신입사원이 우리 팀 공설 씨인데요.”

 

 

  왕 부장이 고개를 들었다. 마치 지진이 난 듯 갈 곳을 잃은 그 눈동자가 그녀는 궁금했다. 아무리 보기 드문, 교육 이수를 마치고 정식으로 부서 배치를 받은 남자 신입사원이라지만 어째서 공설에게 그리도 친절하며 그도 모자라 쩔쩔 매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하는지.

 

 

  “도희 씨, 나 좀 봐주라.”

 

 

  대체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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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번째 이야기,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2020 / 9 / 23 418 0 6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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