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7대 악마가 평사원으로 위장한 뒤로 가까이 지내고 있는 악마가 있어. 그게 누군지 알아?”
“누구인데요?”
“……내가 봤을 땐, 엘리야야.”
술을 마시고 있던 키리안이 그 말을 듣고 사레에 걸려서 기침을 쏟아냈다. 비비안은 당황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냅킨을 키리안에게 건넸다. 키리안이 입가를 냅킨으로 닦으면서 비비안에게 물었다.
“왜 엘리야 선배님이 저런 악마랑…?”
“나도 모르겠어. 자연스럽게 친해진 건지, 아니면 레비가 엘리야에게 접근한 의도가 있는 건지. 저 악마의 속내를 알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을걸. 그래서 말인데, 키리안.”
비비안이 술잔을 탁, 소리 나도록 테이블 위에 두었다. 키리안을 바라보는 비비안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엘리야를 세심하게 관찰해주면 좋겠어. 저 악마랑 같이 있을 땐 더더욱 신경 써서. 키리안 네가 가져온 증거 물품이 정말 범인에게서 난 거라면, 저 악마도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중 하나니까.”
**
신입인데도 엠은 과중한 업무량에 굴려지고 있었다. 본래 엠은 자신이 담당한 인간에 대한 업무만 맡으면 되었다. 문제는 그의 파트너가 삼 대 천사 중 하나인 가브리엘이라는 것이었다. 대천사인 가브리엘이 맡은 일들이 너무 많으니 파트너인 엠까지도 자질구레한 일들을 떠맡게 되었다.
게다가 바에 있던 걸 들킨 이후로는 가브리엘은 더 망설임 없이 엠에게 잔업무들을 넘겼다. 오늘도 엠은 서류뭉치들을 들고 복도를 뛰어다녀야 했다. 이때 엠은 정신없이 달리느라 복도 모퉁이에 나타나는 여성을 보지 못했다.
"악!"
"으악!“
크게 부딪쳐 바닥에 주저앉은 엠은 사방팔방으로 날아다니는 서류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이때 엠의 귀에 진심으로 걱정스럽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요? 도와줄게요.“
비비안은 엠이 대답하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바닥에 떨어진 서류들을 줍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엠이 허둥지둥 서류들을 주웠다. 엠은 악마인 자신에게 이렇게 호의를 베푸는 천사는 이 사내에서 매우 적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서류를 자신에게 건네주는 비비안에게, 엠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잘 보고 다녔어야 했는데…“
엠의 말에 비비안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저도 오시는 걸 못 보고 부딪쳤는걸요.”
그렇게 말하면서 비비안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비비안이 미소지으며 엠을 부드럽게 바라봤다.
“허당이신 건 여전하신 것 같네요.”
“네?”
비비안은 시선을 피하면서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어제 숙소는 잘 들어가셨죠?”
그 말에 엠은 어제 자신이 바에서 키리안과 비비안에게 부렸던 주정이 생각나 얼굴을 붉혔다. 대답을 못 하고 있던 중, 엠은 자신 옆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걸 보았다. 그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비비안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가브리엘 님! 마침 만나 뵈러 가는 길이었는데요."
"비비안.“
깜짝이야. 이 양반은 귀신도 아니도 왜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엠이 당황하든 말든 비비안과 가브리엘 사이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가브리엘이 비비안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미카엘을 못 본 지 꽤 됐는데, 미카엘이 날 부르는 건가?"
"네. 미카엘 님 호출 맞아요. 할 말이 있으시다고."
"설마, 정말로 내가 한가해 보인다고 미카엘에게 보고한 건 아니지?“
비비안이 해맑게 웃더니 장난스럽게 답했다.
"미카엘 님이 제 보고에 화가 나신 것처럼 보이긴 했죠. '가브리엘은 대천사답지가 않아.'“
비비안이 눈을 반만큼 뜨고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자 가브리엘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따라 웃던 비비안이 말했다.
"아무튼 가주시죠. 그분을 너무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니까요."
"나 참, 급하기는 알았어.“
가브리엘은 비비안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친 뒤 엠에게 다가왔다. 서류뭉치를 든 채로 엠은 잔뜩 긴장했다.
"미카엘의 호출이니까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제가 다녀올 때까지는 제가 맡긴 일이 다 끝나 있으면 좋겠군요."
"네…넵! 알겠습니다!“
비비안은 입을 가리고 쿡쿡 웃다가 말했다.
"세상에 가브리엘 님. 공과 사에 엄격하시네요.“
그 말의 뜻을 알 수 없는 엠이 고개를 갸웃했다. 가브리엘은 엠의 눈치를 살피더니 빠르게 비비안에게 다가갔다. 가브리엘은 비비안의 눈을 보며 속삭였다.
"미카엘만 하겠어?"
"어머, 미카엘 님도 그 정도는 아닌데.“
비비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브리엘은 엠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준 뒤 비비안을 따라갔다. 두꺼운 서류뭉치와 함께 남은 엠은 복도에 주저앉아 울고 싶어졌다.
가브리엘과 비비안은 미카엘의 집무실로 가는 동안 내내 말이 없었다. 조용한 복도를 거닐다가 가브리엘이 먼저 화두를 던졌다.
"그러고 보니 비비안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네 가브리엘 님.“
"네가 이번에 임시로 배정받은 인간이 헬레네라는 소문이 돌던데 사실이야?
"…….“
비비안은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그녀는 눈을 흘기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무례하네요, 가브리엘 님. 원래 배정받은 인간에 대해서는 비밀 엄수가 원칙인 거 알잖아요."
"미안, 미안. 그 고리타분한 원칙을 아직도 지키고 있는 게 너인 줄은 몰랐지.“
그 말에 비비안이 더더욱 엄한 표정을 지었다. 가브리엘은 멋쩍은 표정으로 잠시 시선을 돌렸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또 다른 질문을 했다.
"내가 궁금한 건, 그동안 헬레네를 맡고 있던 악마가 누구였는지 내 쪽에서 전혀 정보가 없었다는 게 이상해서.“
그 말에 비비안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가브리엘도 걷는 걸 멈추고 비비안을 응시했다. 그녀는 침묵을 유지하다가 곤란하다는 어조로 내뱉었다.
"가브리엘 님… 가브리엘 님도 아시다시피 헬레네, 특히 그녀에 대한 건 모든 게 극비라서요."
"…네 악마 파트너를 만나보긴 한 거지?“
그 말에 비비안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그럼 됐어.“
집무실에 도착한 비비안은 노크를 두어 번 한 뒤 문을 열었다. 가브리엘은 신의 보좌관이라 불리는 대천사 미카엘을 오랜만에 대면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 미카엘.“
정답게 말하는 가브리엘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가브리엘이 들어와도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던 미카엘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일만 아니면 안 보는 건데 말이야.”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 미카엘을 본 가브리엘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자세를 바로잡았다. 가브리엘은 그녀와 몇 세기를 함께했다. 하지만 그런 그라도 미카엘을 일로 만났을 때는 껄끄러워할 정도로 그녀는 모든 일에 철두철미했다.
특히 미카엘은 ‘그 사건’ 이후로 더 예민해지고 깐깐함이 지나치게 되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가브리엘은 일부러 실없는 농담을 건넸다.
"혼약식 준비는 잘 되어가지? 혼약 선물로 가구 하나 정도는 내가-"
"그럼. 네가 신경 써줄 필요 없이.“
사적인 이야기는 칼같이 잘라내는 미카엘의 태도에 가브리엘은 서운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카엘은 가브리엘을 호출한 이유를 말했다.
“인간 업무 담당하는 건 다른 천사에게 맡기고, 대천사의 역할에만 충실하도록 해.”
“뭐?”
“라파엘 자리가 공석이라 안 그래도 남은 대천사가 해야 업무가 많은데. 너는 인간 하나를 추가로 담당할 정도로 여유로운가 보지?”
“……. 내가 새로운 일을 하나 더 한다고 해서, 대천사로서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걸 알 텐데.”
“물론 지금은 그렇지. 하지만 앞으로 어떤 일에 힘쓰고, 어떤 일에 소홀해질지는 모르는 거 아닌가?”
미카엘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브리엘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가브리엘을 똑바로 바라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네 사적인 감정으로 대천사 업무를 소홀히 하는 걸 난 볼 수가 없는 성격이라.”
가브리엘도 표정을 굳힌 채 미카엘의 기 싸움에 밀리지 않았다.
“앞으로 해야 할 대천사 업무에는 지장 없게 할 거니까, 사서 걱정하는 성격 좀 고쳐.”
가브리엘은 더 할 말 없다는 듯이 문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브리엘이 문고리를 잡을 때, 그의 등 뒤에다 미카엘이 외쳤다.
“‘그 아이’ 때문에 인간 업무 새로 맡은 거잖아? 아예 파트너로 지정하기까지. 아주 숨길 생각이 없던데.”
가브리엘이 고개를 돌려 미카엘을 응시했다. 미카엘은 가브리엘과 시선을 부딪친 채, 차디찬 목소리로 말했다.
“걔가 여전히 같은 존재라고 자신할 수 있어? 네가 알던 그 아이가 맞을까?”
미카엘의 말을 들은 비비안이 슬픈 기색으로 고개를 약간 떨궜다. 그 아이가 과거 비비안과 친했던 걸 떠올린 미카엘은 더 말하기를 멈추었다. 가브리엘은 등을 돌려 무표정을 한 채로 미카엘을 향해 걸어왔다. 그가 평상시와 같은 목소리로 미카엘에게 말했다.
“정말 쓸데없는 소리 하려고 부른 거였군.”
“…….”
그런 가브리엘이 눈에서 살기를 내뿜으며 낮은 목소리로 엄포를 놓았다.
“그런데 한 번 더 이런 일로 부르면 그땐 나도 참고만 있지 않아.”
가브리엘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미카엘 옆에서 잠자코 서 있던 비비안이 입을 열었다.
"가브리엘 님께 좀 잘해주세요.“
미카엘은 서류를 내려놓고 비비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가브리엘한테 굳이 왜?"
"아까 미카엘 님 말씀대로, 이젠 삼 대 천사 중엔 두 분밖에 안 남으셨으니까요. 그리고 라파엘 님 계실 땐 미카엘 님은 분명 더 부드러우셨어요.“
그 말을 듣자 미카엘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침착했다.
"기억 안 나. 너무 오래전 이야기라.“
미카엘은 서류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게다가 어차피 난 한 천사만 잘해주면 되는데 뭐…“
그 말의 뜻을 파악한 비비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뒤에서 미카엘의 어깨에 두 팔을 둘렀다.
"못 말린다니까!“
미카엘은 비비안을 따라 웃다가 비비안의 팔을 잡고 자신 앞에 세웠다.
"그래서 아직 네 자리로 안 간다는 건 나한테 청원할 게 있다는 거겠지? 천사·악마 간 중재팀 팀장님?“
비비안은 활짝 웃으면서 양 손바닥을 쳤다.
“네. 역시 저를 잘 아시네요.”
비비안이 패드를 꺼내 들고 미카엘은 비비안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 자세를 고쳐 잡았다. 패드에 적힌 내용을 읽어야 할 비비안의 입에서, 미카엘이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일주일 전에 제가 길에 버려져 있는 토끼를 발견해서 숙소에 데려왔다고 분명 보고를 올렸죠. 그때 분명 미카엘 님이 보러 오겠다고 약속해놓곤 아직도 제 숙소에 얼굴도 안 비치셨다는 소식입니다!”
정식 보고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미카엘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미카엘이 웃자 비비안이 도끼눈을 뜬 채로 미카엘을 쳐다보았다. 그걸 본 미카엘은 뜨끔한 얼굴이 되더니 두 눈을 굴렸다.
"미안해. 라파엘 자리가 공석이 된 후로 일이 끊이질 않다 보니… 아니, 어차피 우린 곧 같이 살 거잖아?"
"갈색 토끼고 얼마나 귀여운데요! 그 토끼 이름은 기억하세요?“
“네 이름을 땄던 건 기억이 나는데… 비… 비…”
당황한 낯빛으로 비비안의 시선을 피하던 미카엘의 눈빛이 갑자기 또렷해졌다. 갑자기 미카엘이 여유로운 미소를 씨익 지었다. 그녀가 당당한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비나’네.”
정답을 말한 미카엘의 눈빛엔 승자 특유의 여유만만함이 가득했다. 비비안은 미카엘에게 순식간에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미카엘의 어깨를 주먹 쥔 손으로 약하게 치기 시작했다.
“혼약(魂約) 이용한 거죠! 다 알아요.”
비비안의 주먹을 받아내면서도 미카엘이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혼약을 하면 기본적으로 상대의 기분이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시간이 쌓이고 절대적인 신뢰 관계가 되면, 그 둘은 혼약을 통해 상대의 생각마저도 다 읽어낼 수 있었다. 미카엘을 때리던 비비안이 무게 중심을 잘 잡지 못하고 순간 몸을 휘청였다.
“어이쿠.”
미카엘이 그런 비비안의 팔을 잡고 넘어지지 않도록 받쳐주었다. 얼떨결에 허리를 굽힌 비비안의 얼굴이 미카엘의 시야 안에 가득히 찼다. 비비안의 레몬 빛 눈을 바라보던 미카엘이 손을 내밀었다. 미카엘은 자신 쪽으로 물결치는 비비안의 금빛 머리칼을 손으로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가브리엘 걔는 왜 ‘그 아이’한테 집착하는지 모르겠어. 걔를 잊는 건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리처럼 혼약한 사이면 모르겠는데 말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