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 이젠 죽는구나’
강이가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천동이 얼떨결에 놓친 화살이 정확하게 강이를 얼굴, 목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이젠 죽었구나 두 눈을 꼭 감은 강이 얼굴에 화살이 날아와 박히려는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혁이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 그 순간에 맞춰 강이 몸을 밀어버린 것이다. 아슬아슬 화살이 강이 몸을 빗겨갔다.
“똑바로 못쏴?”
벌벌 떠는 천둥은 눈을 질끈 감더니, 화살을 다시 쏘았다. 강이와 혁은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보려고 했지만, 이번엔 역부족이었다.
‘이젠 정말로 죽는구나~~~’
강이는 또다시 눈을 감았다.
탁!!
순간, 탁 소리와 함께 화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 멀리서 누군가 화살을 날려, 날아오는 화살을 맞힌 것이다.
“비겁한 놈들! 부끄럽지도 않느냐!”
어둠 속에서 대찬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 이 목소리는? .... 사부?’
“사부~!”
강이는 반가움에, 소리를 질렀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
강이는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억지로 참고 참았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금방 가겠습니다.”
윽! 윽! 윽!
정남의 목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도적떼들이 화살에 맞아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도적떼 대장은 강이를 끌어내려 볼모로 잡았다.
“얼굴을 보여라, 안그럼 니 잘난 도련님 목이 날아갈 것이다.”
어둠 속에서 저벅저벅 발소리가 나더니, 정남이 나타났다. 그을린 구릿빛 얼굴에, 상대방을 쏘아보는 그윽하면서도 매서운 전사의 눈빛!
“그 손 놔라. 니 같은 놈이 함부로 해도 되는 분이 아니다.”
“어디 한번 또 쏴보시지.”
정남은 들고 있던 화살을 내려놓았다.
“난 니들을 죽일 생각이 없다. 도련님만 안전하게 모시고 가면 된다.”
“오호 그러셔. 그럼 어디 한번 모셔가 보시지.”
“이제부터 나에게 자비란 없다. 도련님 하나 두울, 셋입니다.!”
강이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정남은 강이 눈빛을 보면서 소리쳤다.
“하나 두울, 셋!
셋과 동시에 강이가 있는 힘껏 팔꿈치로 두목을 쳤고, 두목이 살짝 휘청! 하는 순간에 강이는 주저앉았다. 그리고 정남은 단도를 날려 두목의 목에 정확하게 꽂았다.
“윽!”
두목은 찍소리도 못하고 쓰러졌고, 정남은 얼른 달려가 강이를 잡았다.
“괜찮으세요 도련님?”
“응 괜찮아.”
예전에 정남과 산에서 무예를 익히던 중이었다. 강이가 나무 아래 서 있는데 큰 뱀이 나뭇가지에서 몸을 길게 내리더니, 강이 얼굴 앞에서 입을 크게 벌린 적이 있었다.
“도련님, 제가 둘을 세면 그냥 앉으세요. 하나, 둘!”
벌벌 떨던 강이는 그 순간 눈을 질끈 감으며 주저앉았고, 정남의 단도가 뱀의 머리에 정확하게 꽂혔었다.
“사부 쟤 좀 내려줘.”
정남이 혁을 내리는데, 겁먹은 도적떼들이 활을 쏘기 시작했다. 정남은 혁과 강이를 나무 뒤로 숨게 만들고, 날아오는 화살을 칼로 다 막아냈다.
“도련님, 저 위에 말이 있어요. 먼저 가세요.”
정남이 한발 한발 다가갈수록 도적떼들은 두려움에 큰소리를 질렀다.
“어디 와봐. 와봐!”
그 사이 강이는 혁을 부축해 요새를 벗어나고 있었다.
“니네 사부는?”
“걱정마. 내 사부는 고려 제일의 무사거든.”
* * * * *
강이와 혁은 말에 같이 타고 산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휘청~ 그런데 혁의 몸이 자꾸 휘청거리면서 말에서 떨어지려했다.
“정신 좀 차려봐!”
긴장이 풀린 혁이 졸고 있어서 강이는 말에서 내려 혁을 말에 엎드리게 했다. 하지만 말고삐를 잡고 걷는 강이도 점점 잠이 쏟아져 걸음이 느려졌다.
결국 강이도 말고삐를 꼭 쥔 채, 장승에 기대 잠이 들었다. 한참동안 서있던 말이 지루했던지 히잉~~ 울며 앞발을 들자, 혁이 말에서 떨어졌다.
“아야!”
혁은 아픈 머리를 긁적이며, 주위을 두리번거렸고, 자고 있는 강이를 보았다. 강이가 자면서 고개를 자꾸 떨구자, 혁은 순간적으로 양손으로 강이의 턱을 받쳤고, 저절로 강이 얼굴을 코앞에서 보게 됐다.
‘자는 모습도 영락없는 기지배라니까.’
혁은 씨익 웃는데, 말이 움직여 고삐가 당겨지자 강이가 눈을 떴다. 이전 상황을 모르고 지금 상황만 딱 봤더라면, 혁이 강이한테 키스를 하려고 양손으로 턱을 잡은 것처럼 보였다.
강이가 뭐지? 하는 눈빛으로 혁을 바라봤고, 아주 잠깐 두 사람의 눈빛이 묘하게 흔들렸다. 그 순간, 혁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아 배고파. 빨리 가서 밥 먹어야겠다. 우리 집은, 저기 저기야.”
강이도 이 감정이 뭔지 모르나, 뭔가 묘하고 이상한 느낌이 들긴 했다. 그러면서도 상처투성이인 혁이 걱정됐다.
“혼자 갈 수 있겠어? 몸이 많이 상했는데.”
“이까짓 거 뭐....”
“그럼 잘 가. 난 저쪽으로 가.”
“참, 강이야, 우리 오늘부터 친구다!”
“그래. 친구하자.”
“고마웠다 친구!”
피투성이가 된 혁은 씨익 웃더니 집으로 향했고, 강이가 말에 올라타려는데,
“야 이강이!”
혁이 가다 말고 뒤돌아서서 소리쳤다.
“기지배같이 생겼지만 너 사내 중에 사내다. 인정!”
“다음에도 기지배라 놀리면, 니 코가 안남아 날 거야.”
혁이 메롱~ 혀를 날름거렸고, 강이는 치~하며 웃었다. 집으로 향하던 강이는 혁을 다시 되돌아봤고, 뛰어가던 혁도 강이를 되돌아 봤다.
“잘 가!!”
“또 봐!!!”
못내 아쉬운 두 사람은 손을 흔들었다.
“도련님!”
어느 새 쫓아왔는지 정남이 달려왔다.
“사부! 다친 덴?”
“없습니다. 도련님은요?”
“괜찮아. 저 애가 많이 다쳤어. 내 대신.”
“누구에요? 처음 본 도련님인데?”
“친구.”
“친구요?”
“저 애 동생도 잡혀갔었어. 같이 구해냈고.”
“다행입니다. 근데 다음부턴,”
“사부 나 졸려.”
“업어드릴까요?”
“아니, 타고 갈게.”
강이는 혁처럼 말에 엎드리더니, 금세 잠이 들었다. 정남은 자는 강이를 잠시 쳐다보며 오빠미소? 아빠미소? 연인미소 같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었다.
* * * * *
“도련님, 나으리 친구 분 오셨다고 인사드시래요.”
광재는 좀처럼 사람들 앞에 강이를 소개시키지 않았다. 남자로 키우고 있는 걸 혹시나 누가 눈치라도 챌까 싶어 아예 노출시키는 걸 꺼려했다.
‘나를 다 부르시고, 아버지한테 아주 소중한 분이신가 보네.’
“안녕하십니까. 이강이입니다.”
강이가 인사를 하며 방으로 들어섰는데, 광재의 죽마고우인 도균과 그 옆에 반가운 얼굴이 앉아있었다.
“너는 강이?”
혁이 강이를 보며 불렀다. 산적들 요새에서 돌아온 지 사흘만의 일이었다.
“혁?”
“둘이 벌써 아는 사이더냐?”
“예, 미영이가 잡혀갔을 때 도움 받았던 친구가, 바로 강이입니다.”
“아니, 기지배처럼 곱상하게 생겼다던 그 아이가, 이 아이더냐?”
도균이 강이를 다시 한번 훑어봤다.
“어디가 곱상하게 생겼느냐, 아주 늠름하게 잘 생겼는데.”
“나도 얘길 들었다네. 어떤 아이가 그리 무예 실력이 뛰어난가 궁금했는데, 자네 아들이었어? 역시 피는 못 속인다더니.”
광재와 도균은 서로를 보며 하하하 웃었다.
“혁은 열한 살이고, 강이는 아홉 살이니, 혁이가 형이 되겠구나!”
광재가 서열을 정리해주자, 강이는 혁을 한번 힐끔 보더니 얘기했다.
“아버지, 저희는 그날 이미 친구가 되었습니다.”
혁이 조금 억울한 빛을 내보였고, 도균은 강이를 보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그랬더냐? 하하하하. 사내들 사이에 두세 살은 나이도 아니지. 안그런가”
“그렇지...하하하.”
광재와 도균은 흐믓하게 웃었지만, 혁은 왠지 계속 억울한 표정이었다.
* * * * *
“됐어. 난 벌써 이 동네 다 꿰고 있어.”
강이가 혁한테 동네 구경 시켜주겠다고 데리고 나왔는데 혁이 거부했다.
“그럼 내가 자주 가는 산에 가볼래? 아주 멋진 데야. ”
“멋져봤자, 산이지.”
“너 혹, 나한테 형 소리가 듣고 싶은 거야”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했다. 내 입으로 친구하자 했으면 친군 거지.”
“아니 근데, 아까부터 왜 그렇게 기지배처럼 입이 쭉 나와 있어?”
“내가 언제 기지배처럼...”
혁은 자기가 강이를 놀릴 때 썼던 ‘기지배처럼’이란 말을 듣고는 발끈했다.
“너, 나 지금 놀린 거지?”
“그래, 놀린 거다. 기분이 어떠냐! 기지배 소리 들으니. 메롱~~”
하하하 강이는 재밌다며 웃어댔다.
‘어쩜 웃는 것도 저렇게 기지배 같은지! 누이보다 예쁘잖아.’
혁은 잠시 강이가 웃는 걸 쳐다보다 정신을 차렸다.
‘뭔 생각하는 거야 지금.’
“너 지금 나 또, 놀리려 했지?”
강이가 혁 표정을 보며 캐묻자, 화난 척 앞서 걸어갔다.
“어디야, 다리 아프게. 멋진데 아니기만 해봐.”
얼마나 올라갔을까. 어느 덧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중턱에 올라섰다.
“여기야!”
‘와 좋긴 좋구나!’
혁도 너무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탁 트인 게, 발 아래로 나무는 푸르고, 꽃들도 예쁘지? 이곳에 오면 잡생각이 다 사라지고, 그냥 좋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야.”
“기지배처럼 좋아하는 곳은 무슨!”
그렇게 말하면서도 혁도 이 장소가 참 마음에 들었다.
‘또 기지배래!! ’
강이는 자신이 연습할 때 쓰던 목검을 혁한테 던졌다.
“누가 기지배나 한번 겨뤄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칼싸움이 시작됐다.
“오 제법인데!”
“내 말 안했었나? 내 사부가 고려 제일의 무사라고!”
혁은 강이의 칼을 몇 번 받아줬지만, 바로 강이의 칼을 날려버리고, 강이 목에 목검을 들이댔다. 강이의 무예실력도 좋았지만, 혁한테는 하룻강아지 수준이었다.
“사부가 고려 제일의 무사라고, 너까지 고려 제일은 아니지?”
혁이 우쭐대며 강이를 향해 씨익 웃자, 강이는 자존심 상했다. 그동안 갈고 닦은 무예가 이리 허무하게 무너질 실력이 아닌데, 하지만 자존심 세울 일이 아니었다.
“인정 인정! 좋아! 오늘부터 넌 내 부사부다.”
“부사부?”
“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 장소를 제공할게. 넌 나한테 니 무예를 하사해. 내가 아무나 사부로 모시진 않아.”
당돌한 강이의 말에 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근데, 내가 왜 부사부야? 사부면 사부지.”
“사부는 있잖아.”
그렇게 해서 혁은 강이의 부사부가 됐고, 두 사람은 이날부터 단짝이 되어 늘 함께 해왔던 것이다.
“앗 뜨거~~!”
강이와 혁은 갓 구어낸 은행을 먹느라 바빴다. 어느 새 두 사람 손은 물론이고, 입 주변으로 까매졌다.
“강이야 너 여기 뭐 묻었어.”
“어디?”
“여기!”
혁은 일부러 ‘여기’ 하며 강이 얼굴을 시커멓게 만들었고,
“이씨! 너~~”
강이는 두 손으로 혁의 얼굴을 비벼대 아주 까맣게 만들어버렸다.
“푸하하하 니 얼굴... 하하하!”
복수하러 혁이 달려들자 강이는 도망치려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강이를 잡으려던 혁도 같이 넘어지며 두 사람은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으악!!!”
강이가 밑에 깔리고 혁이 위에 올라탄 격이 됐다. 두 사람 아주 눈이 짧은 순간 마주쳤는데, 또다시 묘하고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혁은 이 감정이 뭔지 몰라, 얼른 강이 얼굴을 손으로 막 비벼댔다.
“나만 씨커멀 순 없지!”
둘 다 씨커멓게 돼서 누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깔깔대고 웃어댔다.
* * * * *
‘그때부터 내가 혁을 좋아했던 건가?’
“아니 근데, 도련님, 왜 얼굴이 갑자기 그리 붉어지세요?”
신나게 말을 해주던 강이가, 생각에 잠겨 있자, 분녀가 강이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내 얼굴이 왜 붉어져?”
“봐요, 도련님 얼굴 뜨겁지 않아요?”
“이상한 소리 한다. 피곤해 잘 거야. 그만 나가봐.”
“얘기 더 듣고 싶은데...”
“피곤해.”
그날 밤도 강이는 혁을 그리워하며 잠에 들었다.
‘꿈에 한번만 찾아와줘. 보고 싶어 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