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울라는 우리에게 자신이 아는 보고 들었던 것들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샤울라의 부모는 노예이며 알 수 없는 병에 감염되어 죽고 혼자가 된 자신은 남작가의 가축을 돌보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나날을 보내던 중 어느 날 사다리에서 넘어져 다치며 다리가 부러지게 되고 일을 하기에 힘이 부치게 되자 마침 노예를 사들이던 자들에게 팔아넘겨졌다.
노예를 사들이던 자들은 그 노예들에게 자유를 줄 테니 보라색 눈을 한 자를 죽이라는 명을 내린다.
그리고 그 날로부터 칼을 사용하는 등의 작은 훈련들을 시키기 시작하고 특별히 빨리 익혀내던 샤울라는 그들의 눈에 띄었다.
그렇지만 문제는 샤울라의 다친 오른쪽 다리였다.
그런 상태로는 빨리 달려 적을 죽이기에도 전투를 하기에도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 그들은 세뇌시킨 샤울라에게 약물을 먹여 오직 목표물인 보라색 눈만을 쫓게 하고 버리듯 밖으로 내보냈다.
운 좋게 임무를 완수하면 좋은 것이고 실패해 붙잡힌 샤울라가 죽더라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샤울라는 그녀가 말한 대로 버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처지였다.
너무나 끔찍한 이야기들에 눈을 감고 귀를 막아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이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누가 이 아이를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을까.
나도 영생교에서 재물로 받쳐져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홀로 쓸쓸히 죽어간 인간이었으니 말이다.
샤울라는 눈과 입에 바짝 힘을 주더니 말했다.
“멜리사 아가씨를 위해서 저도 싸우고 싶어요.”
“안 돼.”
“샤울라! 너는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돼.”
이 어린 소녀를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고 싶었다.
이 아이만은 안 된다고.
하지만 샤울라 얼굴의 표정이 한 층 더 단단해 져있었다.
샤울라는 자신은 할 수 있다며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제가 원해서 하는 것이에요.”
하넨스는 묵묵히 나와 샤울라의 대치를 지켜보더니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럼, 어느 정도 각오는 됐겠지?”
샤울라는 한쪽 손은 책상을 짚고 한쪽 팔은 굽혀 몸 쪽으로 강하게 당기며 말했다.
“네! 치료해주신 덕분에 오른쪽 다리도 모두 나았어요. 저는 이렇게 보여도 싸움도 잘하고 무기도 사용할 줄 알아요.”
“하넨스 샤울라를 말려야지요!”
“......대신 내 지시에 따라라.”
“네! 하넨스 공작님.”
하넨스는 할 이야기는 모두 끝났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갔다.
샤울라는 기쁜 표정으로 하넨스를 보던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나의 얼굴에 당혹감과 참담한 심정이 비치자 샤울라는 웃음을 거두고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이미 그녀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마음을 추스르며 말했다.
“샤울라, 고개를 들어보렴. 네 마음은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단다.”
“멜리사 아가씨......”
“하지만 이 한 가지만 약속해 주겠니? 절대로 네가 위험해질 일은 하지 않기로.”
“......알겠습니다.”
샤울라는 힘이 빠진 듯 희미한 목소리로 내말에 대답했다.
샤울라가 약속을 정말 지킬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내 말에 잘 따르는 아이이니 최대한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말을 해둬야 했다.
이 아이에게 간섭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최선이다.
나는 샤울라의 검고 반짝이는 검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이야기 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푹 쉬고 있으렴.”
샤울라는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힘차게 말했다.
“네, 멜리사 아가씨도 안색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하하, 그래.”
나도 하넨스가 빠져나간 자리를 따라 방을 나갔다.
야속하게도 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하넨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힘이 빠져 쳐진 몸을 이끌고 2층의 내 방으로 돌아갔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침대에 눈을 감고 누워있어도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갑자기 문득 가면무도회에서 마셨던 술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머리가 지끈 거리며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던 술.
지금이 그 술을 마셔야 하는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른들은 술을 마시는 것일까? 괴롭고 힘든 일들로부터 잠시나마 도피하기 위해서.
술을 마시는 나는 현실에서 도망가는 비겁한 사람인 걸까?
하지만 지금 당장 마시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일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어두워진 복도를 따라 걸어 하넨스의 방문 앞에 서서는 작게 웅얼거렸다.
“하넨스, 저 술을 마시고 싶어요......”
막상 문 앞에 서니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 일부러 그가 듣기 힘들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말하고 얼마 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렸다.
하넨스는 이전에 함께 잘 때의 일로 신경써준 것인지 상의와 하의를 모두 입고 있었다.
의외로 하넨스는 나를 말리지 않고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들어와라.”
내가 의자에 앉자 하넨스는 책장에 세워져 있던 오래되어 보이는 병을 들고 와 자리에 앉았다.
하넨스는 먼지가 조금 앉은 병에다 대고 입으로 바람을 후 불고는 말했다.
“이건 스토크 황태자가 내게 선물이라며 주었던 술이다. 아마 꽤나 상급의 것이겠지.”
“그런 걸 지금 먹어도 되나요?”
하넨스는 내 말에 싱긋이 웃더니 장난스러운 투로 말했다.
“안될게 뭐가 있지? 내 것인데.”
“아, 그, 그렇죠. 하하.”
장난스레 웃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 멋있어서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어버렸다.
순간 화끈 거리는 얼굴에 손 부채질을 하자 하넨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더운가?”
“아, 아뇨. 얼른 마셔요.”
하넨스는 마시자는 내 말에 씩 웃으며 병을 열고서 테이블 위에 올려둔 금색의 잔에 천천히 따랐다.
병속에서 검붉은 색의 포도주가 자신의 피를 내어주듯 쏟아져 내렸다.
올려든 잔에서 찰랑이는 술을 가만히 보고 있던 중 문득 소름이 돋아 손에서 잔을 놓치고 엎질러 버렸다.
촤악-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테이블과 바닥에 쏟아진 술을 보고서 번뜩 정신이 들었다.
“하아...하아...!”
고개를 들자 하넨스와 시선이 맞닿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실수 했구나 라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하넨스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 점의 표정변화 없이 바로 웃옷을 벗었다.
벗어낸 흰 셔츠를 손에 쥐고선 아무렇지 않게 내 손등에 가져다 대고 묻어있던 술을 닦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만히 내 손바닥을 잡고서 그렇게 한동안 닦기만을 했다.
흰색의 셔츠는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그에게 나또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무거운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하넨스였다.
“......난 너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
“하지만 난 언제나 너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니, 말하고 싶을 때 말하면 돼.”
그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아마 모르겠지.
그런데도 나를 의심하지도 수상하게 여기지도 않고 곁을 지켜준다.
그리고 그런 그의 바보 같은 점이 나를 안심시킨다.
우리는 다시 천천히 잔에 술을 따르고 난 뒤 서로를 마주보았다.
챙-
잔을 맞대고 들이키는 동안 하넨스의 검고 푸른 올곧은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왠지 웃음이 새어나와 방긋 웃으며 눈을 감았다.
***
멜리사는 비어있는 잔을 흔들고는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으응......? 없잖아. 병이 어디 있지.”
멜리사는 눈을 반쯤 뜬 채 손을 휘적거리며 병을 찾았다.
그때 하넨스가 손을 뻗어 멜리사의 손을 잡아 저지하며 말했다.
“위험하다. 이제 그만 마셔라.”
“네에? 이제 시작인데!”
“......후우”
“지금 나보고 한 숨 쉰 거죠?!”
멜리사가 발끈하며 말하자 하넨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겨우 한 병도 채 못 마셨음에도 멜리사는 몇 잔 만에 완전히 술에 취해 몸의 중심도 못 잡고 앉은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하넨스는 더 이상 마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멜리사를 재우기 위해 그녀를 의자에서 일으켜 세웠다.
일으켜 세워진 멜리사가 비틀거리며 하넨스의 품안에 안겼다.
하넨스는 비틀거리는 멜리사를 안전하게 침대까지 옮기려면 안아 올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멜리사를 안으려 잡는 순간 멜리사가 그의 몸을 바짝 끌어안고는 놓지 않았다.
하넨스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을 꽉 붙잡아 놓지 않는 멜리사를 그대로 들 생각이었다.
바로 그때 멜리사가 하넨스의 흉부를 작은 손으로 더듬거리더니 말했다.
“이게 뭐야.......왜 또 옷을 안 입은 거예요! 내가 입으라고 했어요, 안했어요?”
하넨스는 갑작스런 멜리사의 외침에 잠시 당황한 나머지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그치던 그녀의 말에 천천히 대답했다.
“했다. 하지만 그건 조금 전 네가 엎지른-”
“변명하지 마세요!”
하넨스가 하려던 말이 멜리사의 말에 꼼짝도 못하고 다시 하넨스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하넨스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해 눈만 껌뻑이며 그대로 멈춰서있었다.
하지만 곧 멜리사가 눈을 감고 머리를 떨어뜨리며 이 상황은 끝이 났다.
그녀의 술버릇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버리는 것일까?
하넨스는 멜리사의 곁에 앉아 술에 취해 아무런 걱정근심 없이 잠든 그녀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를 사랑하는가?”
솨아아-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온 강한 바람에 하넨스의 머리카락이 나부끼며 흐트러졌다.
하넨스는 흐트러진 머리를 붙잡고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잠든 사람에게 뭘 묻는 거지 난.”
술에 취하면 솔직하게 말한다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미 잠든 사람이 대답해줄리 없었다.
하넨스가 침대에 기댄 손을 떼고 몸을 일으키려하는 순간 그의 목에 팔이 휘둘려 당겨왔다.
하넨스를 당긴 것은 멜리사가 두른 팔이었다.
멜리사가 몽롱한 눈으로 하넨스의 얼굴을 쳐다보며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할 때...뽀뽀뽀......”
“뭐?”
“뽀뽀뽀!”
쪽-
멜리사는 당겼던 하넨스의 머리이마에 그대로 박치기 하듯 입술을 붙였다 뗐다.
하넨스는 갑작스런 멜리사의 뽀뽀에 당황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멜리사는 또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하넨스의 목에 둘렀던 팔을 떨어트리며 다시 잠들었다.
“또 만나요 뽀뽀뽀......”
하넨스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와 어깨를 들썩였다.
“하하하!”
하넨스의 웃음이 점차 잦아들자 방안은 금세 고요해졌다.
다시 흐트러져버린 머리위에 큰 손을 얹고 웃는 하넨스의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