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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꿈결별리
작가 : 화산호
작품등록일 : 2020.9.13

신데렐라 보단 제인에어가 꿈이었던 흙수저 여대생.
기적처럼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호텔 체인을 가진 자산가의 눈에 들어 결혼에 골인?
인줄 알았는데
아빠 결혼 절대 반대를 외치는 약혼자의 초딩 딸이 내린 저주로
다른 시공간으로 강제추방 당하다!
눈을 떠보니 사로국 공주 별리가 된 여대생.
공주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잠시.
그러면 그렇지. 내 팔자에 공주는 개뿔!
풍전등화 위험천만 볼모 생활 시작이었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재벌 사모님인데!
공주라 쓰고 볼모라 읽는 이 저주에서 무조건 벗어나야만 해!

 
2. 화염
작성일 : 20-09-13 00:30     조회 : 228     추천 : 0     분량 : 9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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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다은이 마음은 좀 풀어졌어?”

 오후에 아이와 만났다고 이야기하자 나의 예비신랑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아니요. 전혀요. 오히려 더 기분을 상하게 한 거 같아요.”

 나는 오후의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어린 아이를 상대로 너무 정색을 했던 내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거짓말쟁이라는 말에 그만 발끈해버린 것이 후회되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가 마지막에 내뱉었던 말이 찜찜했다.

 

 언니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으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나랑 우리 아빠 앞에서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멀리 멀리 쫓겨나서 나 보다 더 슬프고 힘들었으면 좋겠어.

 내 소원이야. 제발 꺼져버려.

 결혼식은 없을 거야. 언니는 이곳에 없을 테니까.

 

 “너무 급할 거 없어. 다은이가 적응할 시간을 주면 조금씩 좋아질 거야. 원래 둘 사이가 좋았으니까 걱정 마.”

 내 표정이 어두워 보였는지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달랬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와 보내는 짧은 데이트를 그런 논쟁으로 허비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기에는 호텔 라운지에 흐르는 음악이 로맨틱했고, 창밖으로 펼쳐진 야경이 너무 예뻤다.

 “다은이 만나고 나서는 뭐했어?”

 나의 하루 일과를 하나하나 물어보는 그를 찬찬히 뜯어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바쁘고 피곤했을 텐데도 그에게서는 방금 샤워한 듯 은은한 향이 났다. 가볍게 앞머리를 넘긴 이마가 부드러워 보였다. 언제나 입는 어두운 그레이 톤의 정장이었지만 여유 있고 멋져 보였다. 이제 중년이 되는 남자지만 그래서 더욱 진지하고 안정적인 분위기가 넘쳤다.

 “내가 너무 꼬치꼬치 캐물었나?”

 내가 대답 없이 그저 바라보고만 있자 그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맥주잔을 들어 반 쯤 남은 맥주를 마저 마셨다.

 나는 그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내 손 보다 훨씬 크고 단단하고 주름도 많은 그의 손이 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그게 아니라 좋아서요. 하루 일과를 묻고 대답하고. 이런 별것 아닌 것이 참 좋아서요. 행복한 느낌?”

 내가 배시시 웃으며 말하자 그는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욕심도 없네. 당신은.”

 “제가 왜 욕심이 없어요? 욕심 덩어리인거 알면서.”

 나의 말에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랑 결혼하는 거 후회하지 않을까? 나중에라도 뭔가 굉장한 사랑을 해보고 싶어 질 수도 있잖아. 인생을 뒤흔드는 그런 사랑 말이야.”

 그의 어린 아이 같은 말에 나는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인생을 뒤흔들어요? 불꽃같은 사랑 그런 거 말하는 거예요? 로미오 줄리엣?”

 “그래. 뭐 그런 비슷한 거. 그런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나 같은 아저씨랑 살다가 후회되면 어쩌지?”

 누가 이 사람을 냉정한 사업가라고 생각할까 싶었다. 사람들 눈에 그는 빈틈없는 사업가다. 부친에게 물려받은 도심의 작은 호텔로 시작해서 해외진출에 성공하고, 외국계 호텔과 국내 호텔들을 인수 합병하여 아시아 최대의 호텔체인을 이룩한 독하고 무서운 일중독자다. 그런 그가 내 앞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 그냥 당신이 좋아요. 당신과 있으면 편안하고 행복하고 마음이 따뜻해져요. 전 그런 우리가 좋아요.”

 나는 그에게 조용히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 장난치듯 그에게 물었다.

 “선우 씨는요? 선우 씨는 인생을 뒤흔드는 그런 사랑 해보고 싶어요?”

 내 물음에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난 그런 사랑 해봤어.”

 의외의 대답에 난 놀라서 그를 바라봤다.

 다은이 엄마인가? 아니면 학교 다닐 때 첫사랑?

 누구냐고 물어봐야 하나 하고 내가 고민을 하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인생을 뒤흔드는 것 같은 사람, 한 눈에 저릿하게 다가온 사람, 그게 당신이야.”

 그의 뜬금없는 고백에 난 청혼을 받았을 때보다 더 당황했다. 날 곧게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이런 나의 행동이 거북스러움이 아니라 부끄러움에서 나온 것이라고 그에게 비쳐져야 할 텐데 라는 뒤늦은 불안감이 덮쳐왔지만 딱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나한테도 당신이 그런 사랑이라고 말해야 하나.

 아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틈 없이 당연히 바로 말했어야 했나.

 생각을 하면 할수록 시간만 흘러가고 호텔 라운지에 흐르는 감미로운 재즈 여가수의 목소리는 더욱 애절하게 들릴 뿐이었다.

 어서 말해. 내게도 당신이 그렇다고.

 내 마음 속에서 여러 다그침이 한꺼번에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저 한 마디. 저도 그래요. 이 간단한 한 마디면 전혀 어색해질리 없는데도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난 운명적인 불꽃 튀는 사랑 같은 건 믿지 않으니까.

 그가 내게 평생 의리를 지키라고, 마음을 다하여 변치 말라고 하면 지체 없이 바로 그러겠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사랑 고백은 내게 반칙이다.

 “놀란 표정인데?”

 그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이렇게 놀라는 모습 처음 봐.”

 나는 그를 따라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알아. 당신이 어떻게 살아왔고, 사랑이나 사람과의 관계를 잘 믿지 못한다는 거.”

 나를 다독이는 그의 말투가 느껴졌다.

 “전 선우 씨가 좋아요. 선우 씨를 사랑해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때문에 마음 아팠던 적 있어?”

 그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선우 씨 때문에 아픈 마음이 위로 된 적 많았어요.”

 “내가 시도 때도 없이 계속 생각나서 곤란한적 있었어? 뱃속이 간질간질하고 뭘 해도 집중이 안 되고 계속 보고 싶었는데 막상 보면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선우 씨 생각나면 그냥 선우 씨 생각했어요. 하던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그러면 선우 씨 생각하면서 기운내곤 해요. 그러다 만나면 정말 즐겁고요.”

 스무 고개 같은 질문과 답이 오고 갔다.

 “나 때문에 펑펑 운 적 있어?”

 “선우 씨 때문에 크게 웃은 적은 많죠.”

 나는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날 안 보면 죽을 거 같아?”

 내가 그에게 다가가기로 결정하고 나서 한 가지 다짐한 것은 그에게 절대로 거짓말 하지 않겠다는 거였다. 그의 인생에 내가 들어가고 나의 인생에 그가 들어 올 텐데 숨겨봐야 들켜버릴 것이 뻔하니까. 나의 가난과 자격지심, 우울함을 결코 추해보이지 않도록, 오히려 당당하게 보이게 포장을 해서 그에게 솔직함을 무기로 다가갔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을 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선우 씨 보는 시간을 항상 기다리고 또 고대해요.”

 사랑이라는 것은 모두 같은 모양이 아니라고 했다. 조용하고 안정적인 감정은 사랑이 아닌 것일까. 격정적이고 감추지 못하며 미칠 듯 충동적인 감정만 사랑인 건 아니잖아. 난 충분히 힘들고 고되게 살아왔다. 그러니 사랑은 날 지켜주고 쉬게 하는 보금자리였으면 했다.

 그러니 그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이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결론지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나의 이런 마음이 전해졌는지 그는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그의 마음이 상하지 않았는지 눈치를 보며 나는 급히 다른 화제를 꺼냈다.

 “이것 봐요.”

 나는 두 손을 모아 손톱을 내밀었다. 은은한 진주빛깔 매니큐어에 작은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큐빅으로 손톱을 장식했다. 웨딩용 네일아트라고 했다.

 “응, 봤어. 이런 거 안 해도 예쁜데.”

 “남자들은 이런 거 안 좋아한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네일아트의 역사가 기원전으로 까지 넘어간다고 하던데요? 고대 이집트와 중국에서도 식물에서 추출한 염료를 이용해서 손톱을 화려한 색으로 장식했데요. 일종에 높은 신분을 과시하는 행위였다나?”

 “그래? 당신이 그런 것에도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어.”

 그는 의외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도 오늘 에스테틱 숍에서 들은 이야기예요.”

 “드디어 하나는 시작하는군. 당신이 웨딩드레스 치수 재는 것 말고는 결혼식 준비도 잘 안하고 예약 해둔 것들도 억지로 간다고 박 실장이 신경 쓰던데. 스파나 마사지를 좋아했었나?”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그런 곳은 사실 처음이라 호기심이 생겼어요. 그런데 거기서 신부님, 신부님 하고 저를 부르니까 제가 결혼한다는 것이 확 실감났어요. 그리고 그렇게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뭔가를 쉼 없이 바르며 마사지 해주는 거, 기분 괜찮던데요?”

 고급 에스테틱 숍에 늘어지게 누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른 사람의 손길로 가꾸어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알 수 있는 기회였다. 내가 귀족이나 상류층이 되어 부유함을 누리고 있다는 느낌을 온전히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육체적인 편안함을 넘어서서 정신적 충만함을 주었다.

 “당신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야. 그럼 앞으로 계속 그곳으로 예약해 두라고 할게. 이제 2주일 남았군, 우리 결혼식. 라일락도 피기 시작했어.”

 그는 이렇게 내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현실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남자다. 그것이 마사지 같은 사소한 것이든 4월의 라일락처럼 뜬구름 잡는 이야기든 무엇이든 말이다.

 어렸을 때 난 내 인생에 결혼은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만약에 결혼을 하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구경거리가 되는 것 말고 조촐하게 4월의 햇살과 라일락이 가득한 정원 같은 곳에서 하고 싶었다고 그에게 지나가듯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나의 이런 말을 기억하고선 작년 가을부터 그는 정원에 라일락을 가득 심었다. 그리고 겨울, 내게 4월에 결혼을 하자고 청혼 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이런 남자를 놓칠 수 있느냔 말이다.

 결혼식은 없을 거야. 언니는 이곳에 없을 테니까.

 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아. 결혼식은 예정대로 이루어질 거야. 미안하지만 양보할 생각 전혀 없어.

 나는 내게 행복만을 주기 위해 나타난 것 같은 눈앞의 남자를 보며 그의 딸이 더 이상 나의 결혼을 반대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투지를 불태웠다.

 “그나저나 이사는 언제 들어올 거야? 2층 안방 정리가 끝난 게 벌써 한 달이 되간다고 하더군.”

 “모레 오전 쯤 들어 갈 거예요. 짐정리랑 계약서 정리도 해야 해서요.”

 사실 1년 넘도록 과외선생으로서 드나들던 그의 집에 이제는 안주인으로 아예 들어가 살게 된 것이 조금 어색해서 이사를 미루고 있었다.

 “그래. 그럼, 이사 기념으로 그날은 다 같이 식사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비워둬야 되겠어. 다은이도 당신과 함께 살게 되면 마음을 정리하는 게 빠를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처럼 되길 진심으로 바랐다.

 

 혼자 살던 좁은 원룸을 정리하고 단출한 짐을 싸서 그의 집으로 들어 온지 하루가 지났다.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그의 아름다운 집은 언제나 나를 주눅 들게 했었다. 이제는 내가 살게 된 집이니 처음보다는 덜하지만 아직도 높은 담장과 육중해 보이는 대문은 내게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 보였다.

 대문을 지나면 하얀 외벽의 세련된 저택이 보이지만 나무와 잔디로 잘 가꾸어진 앞마당을 한 참 걸어야 현관에 도착할 수 있다. 어딘가 소규모 미술관 같은 분위기의 1층에는 손님을 맞이하는 거실과 이 집 살림을 돌봐주시는 아주머니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주방이 있다. 2층으로 올라가서 오른편에는 아이들의 침실이 있고, 중앙에는 넓은 발코니가 있는 침실이 있는데 그는 이곳을 우리들의 신혼 방으로 정했다. 그리고 2층 복도 끝에는 저택 뒤쪽 별채와 연결된 통로로 이어졌다.

 별채는 1층부터 2층 천장까지 뻥 뚫려 있는 복층 형식이었다. 오래된 책과 물건들이 가득한 도서관 같기도 하고 박물관 같기도 한 별채는 햇볕에 하루 종일 잘 말린 이불 냄새가 났다. 그의 집에서 그나마 편안하게 느껴지는 곳이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었다.

 작년까지는 아이와 함께 이곳에서 자주 놀았었다. 골동품 같은 물건들을 하나하나 구경하며 시답잖은 장난을 치고, 오래 된 양장본 책들 속에서 익숙한 이야기책을 골라내기도 했었다.

 나는 아이가 가장 좋아했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찾아보았다. 물고기 모양의 찻잔과 빛바랜 촛대, 그리고 손바닥만한 크기의 시커먼 청동거울. 아이는 그런 것들을 죽 늘어놓고서 내게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 물건들 정리하게요?”

 나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조용히 서있었다.

 내가 이사를 들어오고 나서도 아이는 나란 존재나 결혼식 준비로 시끌벅적한 집안을 무시하며 조용히 지냈었다. 나와 마주치는 일을 피하는 듯 자기 방에서만 있었다.

 그런 아이가 먼저 나를 찾아와서 나는 살짝 기대를 하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것들 네 물건이잖아. 너 생각나서 그냥 보고 있었어.”

 아이는 내 곁으로 와서 그 물건들을 바라봤다.

 “언니 갖고 싶으면 가져요.”

 나는 아이의 뜻밖의 말에 놀랐다.

 마음이 풀어진 건가. 이제 나의 결혼을 인정하는 것인가.

 “아니야. 이거 전부 너희 할머니랑 할아버지께서 너한테 주신 선물이잖아.”

 별채에 있는 고풍스러운 가구와 물건들은 아이의 할머니가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리고 이국적이고 특이한 물건과 책들은 아이의 할아버지가 외국에 나갈 때마다 사온 선물이라고 했었다.

 “언니한테 주고 싶어요. 받아요.”

 아이는 청동거울을 집어 들며 말했다.

 나는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 오래된 냄비 받침인가 했었다. 그런데 아이는 그것을 청동으로 만든 거울이라고 했다. 아주 아주 오래전부터 할머니의 어머니, 또 그 어머니의 어머니가 계속 딸들에게 물려 준 것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딸이 없어 그것을 돌아가시면서 어린 손녀에게 주셨다고 아이는 설명해 주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청동거울이 푸르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평소엔 그저 시커멓게 변한 고물로 보였었는데 오늘은 거울 뒤쪽에 조각된 꽃잎 하나하나가 수레바퀴처럼 빙글빙글 돌며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내 눈이 어지러운가 싶어 눈을 비비고 깜빡였다.

 그러자 아이는 청동거울을 뒤집어 밋밋한 면을 내게 향하여 내밀었다. 반질반질한 거울의 표면에 시선을 모으자 마치 호수처럼 깊고 잔잔해 보였다.

 나는 아이가 내미는 거울에서 눈을 떼려고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나한테 왜 이걸 주려고 하는 거야?”

 “아빠랑 결혼 할 거죠?”

 나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고 아이는 나에게 질문했다. 꼭 이제 마지막으로 물어본다는 말투였다.

 “그래. 난 선우 씨랑 결혼 할 거야.”

 아이는 입술을 꼭 다물더니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내가 죽어버린다고 해도 할 거라고 했죠?”

 아이의 표정이 괴로워 보였다.

 “그래. 이런 거 나한테 줘도 내 결심은 변하지 않아. 그러니까 주지 마.”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아이의 손을 뿌리쳤다.

 아이는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균형을 잡으려다가 탁자를 넘어뜨렸다.

 나는 깜짝 놀라 걱정되는 마음에 급히 아이에게 다가갔지만 화가 난 아이는 2층으로 뛰어 올라가 자신의 방으로 가버렸다.

 혼자 덩그러니 남은 내 손에는 아이의 청동거울이 들려있었다. 분명히 받은 기억이 없었는데 어느새 내 손에 들려 있는 거울을 보며 나는 한 숨이 나왔다.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이사를 하고 사실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단출한 살림이었지만 정리하는 것이 피곤하긴 했었다. 결혼식 준비는 대부분 그의 비서와 집안일을 맡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했지만 최종 결정은 나의 몫이기 때문에 하객이나 음식, 꽃 장식 같은 시시콜콜한 것들을 고민해야 했다.

 그런데 아이는 아직도 저렇게 나의 결혼에 반감이 높았다.

 나는 한꺼번에 모든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당장 눕고 싶다는 생각에 나는 별채를 나와 내 방으로 갔다.

 지나치게 편안하고 커다란 침대에 비스듬히 누우니 좀 살 것 같았다. 발끝에는 발코니 창으로 들어온 오후의 포근한 봄 햇살이 닿았다.

 문득 그에게 기대어 우는 소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평소에도 늘 바빴던 사람인데 결혼식을 앞두고 미리 처리할 일이 산더미라고 그의 비서에게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결혼식 당일이 되어서야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혼자서 견디고, 해결하는 것은 내겐 익숙한 일이었다. 그러니 괜찮다.

 저녁 식사 때 아이를 만나 거울을 돌려주며 다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진심으로 아이에게 이야기를 하면 아이도 거울과 함께 내 마음도 원래 자리에 두려고 할지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니 다시금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아이가 쥐어 준 거울을 만지작거리며 스르륵 잠이 들었다.

 

 뜨겁다.

 숨을 쉴 때 마다 코와 입으로 불길이 들어오는 듯, 콧구멍과 목구멍을 타고 내려오는 열기에 난 눈을 번쩍 떴다.

 뭐지? 화염?

 눈앞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깜빡 잠이 든 사이에 불이 났단 말이야?

 나는 튕겨 오르듯 일어나 바로 문을 열고 방에서 나가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문은 마치 벽에 그려진 그림처럼 느껴졌다.

 나는 문을 여는 대신에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나의 앙칼진 비명은 들리지 않고 주변엔 정적만 흘렀다. 촛농으로 목구멍을 막아 버린 것처럼 답답하기만 하고 아무런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불은 침대를 지나 벽을 타고 천장까지 번졌다. 나는 무릎을 꿇고 기어서 발코니를 향해 갔다. 2층이니 발코니에서 뛰어내려도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꾸역꾸역 기어가 발코니 창을 밀었다. 하지만 방문과 마찬가지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때 창밖으로 대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약간 피곤해 보였지만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 무척 행복한 표정이었다. 나는 있는 힘껏 창을 두드렸다.

 나를 보라고 나를 구해달라고.

 그는 빠른 걸음으로 정성스럽게 꾸며진 앞마당을 가로질렀다.

 하지만 나를 본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창을 두드렸다. 불길이 천장을 타고 발코니 창의 커튼으로 옮겨 붙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현관까지 오기도 전에 아이가 아이의 동생과 함께 자기 아빠를 향해 뛰어가 안겼다. 그는 자상한 아버지의 얼굴로 기쁜 듯이 두 딸을 안아 올렸고 아이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저녁 하늘은 연분홍빛 구름을 걸친 노을로 물들어 가고 있었고, 이제 피기 시작하는 라일락들은 바람에 한들거렸다.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불길 속에 갇혀 죽음을 대면하고 있는데 창밖은 너무나 평화롭고 세상은 아름다웠다. 나완 상관없이 노을은 졌고 꽃은 폈다. 그리고 어느 가족들은 웃음을 지으며 서로 껴안았다.

 나는 왠지 더 이상 창을 두드리거나 소리를 지르고 싶지 않아졌다.

 그 순간.

 아이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에게 안겨 2층 발코니를,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불길 속에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을 텐데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언니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으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나랑 우리 아빠 앞에서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멀리 멀리 쫓겨나서 나 보다 더 슬프고 힘들었으면 좋겠어.

 내 소원이야. 제발 꺼져버려.

 결혼식은 없을 거야. 언니는 이곳에 없을 테니까.

 차갑게 속삭이던 아이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불길이 결국 나를 넘어뜨렸다.

 불꽃은 열정적이고 거침없고 빨랐다. 그리고 무서웠고 고통스러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로?

 사방이 불길로 막혔는데.

 나는 엎드려서 도망갈 곳을 찾았다. 그러다 아이의 할머니가 손녀에게 주었다던 청동거울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거울은 아까 오후에 봤을 때처럼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반질반질했던 거울의 표면은 진짜 호수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거울을 향해 기어갔다. 거울을 잡으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불길이 거세지며 거울 앞을 가로 막았다. 난 잠시 망설이다가 뜨거운 화염을 각오하고, 있는 힘껏 팔을 뻗어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끝이 거울에 닿는 듯했다.

 콰르릉 콰광.

 엄청난 폭음.

 그리고 뒤이어 덮친 고요와 암전.

 아이의 말처럼 나의 결혼식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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