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자유연재 > 로맨스
망상 증후군
작가 : 빅터하이드
작품등록일 : 2020.9.5

잘못된 상상은 때로는 진실을 뒤집기도 한다.
여자로 오해 받는 남성.
남자로 오해받는 여성.
알아주지 않는 주변사람들의 시선은 점점 무서워져 가고
그런 그들 앞에 괴담 '얼굴없는 신데렐라'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사건은 12시 부터
작성일 : 20-09-12 07:52     조회 : 228     추천 : 0     분량 : 10559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아 진짜. 몰라! 괜한 참견 말라고!”

  쾅

  현관문이 부서질 듯이 닫힌다. 혜미는 묵직한 가방을 메고 도망치듯이 집에서 나왔다.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다. 혜미의 어머니는 동네에서도 굉장히 교육열이 높은 깐깐한 아줌마로 통했는데, 그 수식어가 고등학생인 혜미에게는 크나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오로지 1등만이 전부이며, 좋은 성적만이 진리이기를 바라는 어머니. 마치 광신도와 같은 불같은 어머니의 열정은 혜미의 모든 부분을 불사르며, 구속하고, 학대해왔다. 그 어떤 화려한 개성도, 멋진 재능도 성적과 관련되지 않는 이상, 어머니에게는 무의미한 공기와도 같았다.

  혜미는 어머니에게서 자유롭고 싶었다. 그런 그녀에게 가출이란 건 일상과도 같았다. 어차피 재워줄 친구는 많다. 집안에서 존재하는 파탄 날 정도로 좋지 못한 관계와는 달리, 학교의 교우관계는 무척 좋았으니까.

  그렇게 오늘도 혜미는 일상적인 가출을 했다. 가을이라 그런지 이번 가출은 조금 쌀쌀했다.

  “으 추워…….”

  몸이 추위에 눌러 부르르 떤다. 조금 더 두껍게 입을 걸 그랬나 싶지만, 그냥 들어가기엔 아무래도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혜미는 묵직한 가방을 한번 고쳐 매고는 어두운 밤거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뚜벅 뚜벅

  적막감 가득한 깊은 어둠속 골목길. 그녀의 구두소리만이 고양이조차 지나가지 않는 공허한 공간을 가득 메운다. 그래서인지 혜미의 귀에는 자신의 발자국소리가 평소보다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오늘은 누구에게 연락할까?’

  이렇게 기온이 쌀쌀하니 아무래도 가까운 쪽이 좋을 것 같았다. 혜미는 살며시 드러난 살결들을 중점으로 손바닥으로 비비며, 주머니를 뒤적거려 스마트폰을 찾았다.

  하지만 폰은 꺼져있었다.

  “이게 뭐야…….”

  한탄의 가까운 한숨소리가 폐부에서 흘러나와 하얀 공기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간다. 전원버튼을 계속해서 눌러 보았지만, 그녀의 가장 소중한 도구이자 친구인 스마트폰은 응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전원을 켤 수 있는 예비 에너지까지 모두 바닥을 드러낸 모양이었다.

  ‘어쩌지?’

  집에 들어가는 게 최선일 수도 있다. 이대로 집으로 향하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어머니께 사과의 말을 한다면 욕 좀 얻어먹는 걸로 끝날 수 있으리라.

  안돼!

  혜미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대로 집으로 가면 안된다. 뺨을 맞고, 욕먹기 이전의 문제다. 이대로 들어간다면 먼저 항복 선언을 하는 것과 같다.

  그건 죽을 만큼 싫었다.

  집으로 가는 건 역시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놓고 싶었다. 혜미는 시커먼 폰 액정을 멍하니보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지? 어디 부탁할만한 데 없으려나?

  할머니 집, 삼촌 집, 심지어는 찜질방까지. 최소한 하룻밤이라도 보낼 수 있으면 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 틀림없이 어머니에게 들킬 것이다. 혜미는 끊임 없이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 근처에 친구가 한명 하숙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어쩌면…….

  부탁만 잘하면 하루정도는 재워줄지도 모른다. 아니, 운만 좋으면 사흘은 같이 지내줄 수 있을지도…….

  그 생각이 머리에 미치자마자 그녀의 발걸음이 학교 쪽으로 향했다.

  학교는 멀리 있지 않았다. 도보로 뛰어서 이동하면 약 15분 거리 정도. 중간에 버스정류장이 4정거장 정도 있긴 하지만, 굳이 탈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다. 사람만이 지나다닐 수 있는 지름길도 있는데다가, 오히려 걸어 다니는 편이 왠지 모를 묘한 해방감이 느껴져, 주로 걸어서 등 하교를 하곤 했었다.

  혜미의 발걸음이 학교로 직행하는 골목으로 들어간다. 가로등 하나 켜지지 않는 오래되고, 거친 골목길이었지만, 혜미는 무섭지 않았다. 언제나 다녀온 익숙한 길목이다. 아예 보이지 않았다면 모를까, 환한 보름달이 드문 드문 길들을 비추고 있어서 크게 무섭지는 않았다. 무게 때문에 축 쳐진 가방끈을 고쳐매고는 서둘러 걸었다.

  몇 분 정도 되었을까? 짧으면 짧은 시간을 꾹 참고 걷자, 저 멀리 어슴푸레 학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눈에 익은 반가운 학교의 모습에 그녀의 발걸음이 보다 빨라졌다.

  조금 더,

  조금 만 더 가면 되.

  혜미의 가벼운 발걸음이 조용한 골목을 마음대로 누빈다. 친구 집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해야할지부터 생각한다. 일단 휴대폰 충전기를 먼저 꽂아두고, 친구의 냉장고에서 먹을 것을 털어 수다를 나눈다. 예쁜 분홍색 침대위에 걸터 앉아 밤새도록 이야기 꽃을 피우며, 친구를 곰돌이 인형삼아 껴안고 잘것이다.

  혜미의 즐거운 상상이 풍선처럼 부푼다.

  그리고,

  미로같은 마지막 골목을 돌았을때,

  즐거운 상상은 거짓말처럼 정지했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존재하는 시커먼 집들. 창문들이 전부 깨져있고, 페인트칠마저 거칠게 벗겨진 버려진 건물들이 일직선으로 늘어서 있었다. 그녀의 발이 저절로 걸음을 멈추었다.

  -꿀꺽

  혜미의 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커다란 소리를 낸다.

  무거워진 공기.

  질식할 것만 같은 질량감 있는 깊고 묵직한 어둠.

  마치 늪 속에 통째로 빠져든 것 같은 분위기에 그대로 압도되었다. 그녀의 시선이 조심스레 위를 향했다.

  하얀 페인트가 곳곳에 칠이 벗겨져 흉물스런 구조물과, 엉망진창으로 갈라져 본래 의미를 잘 읽을 수 없는 간판 [먹자 골목 입구에 어서 오세요.]가 눈에 들어왔다.

  혜미는 이곳이 어딘지 잘 알고 있었다.

  죽어버린 상가 시장.

  통칭 [흉가 마을].

  어둠의 침식당한 시장의 모습은 낮의 분위기랑은 조금 다른,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낮에도 꽤 조용하긴 하지만, 밤이 되니 풀벌레 우는 소리 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적막감에 휩싸여 있었다. 마치 어둠이 상가 건물들을 전부 먹어버린 듯 했다.

  기이한 중압감에 혜미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그 기묘한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문득 얼마 전부터 학교에 떠도는 괴담 하나를 떠올려 버렸다.

  [얼굴 없는 신데렐라]

  푸른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한 괴인이, 밤 12시, 또는 오전 0시에 등장해서 여고생의 외모를 질투해서 얼굴 피부를 뜯어가버린다는 무시무시한 괴담. 그러고 보니 여학생들 사이에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괴인이 자주 출몰한다는 장소가 하필 [흉가 마을]이라고 얼핏들은 것 같았다.

  ‘싫다. 정말…….’

  안 그래도 혼자서는 공포영화도 보지 못하는 겁쟁이다. 왜 하필 이럴 때 그런 이야기가 떠올랐는지 스스로의 머리를 원망했다.

  저 멀리 악마의 아가리처럼 쩍 벌린 입구가 보인다. 마치 어둠이 손을 뻗어 이리오라고 손짓하는 것처러 보여서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보다 기온이 더 떨어진 기분이 든다.

  괜찮아. 괜찮을거야.

  자기 세뇌에 가까운 단어 나열들. ‘괜찮아’라는 단어들이 억지로 [얼굴 없는 신데렐라]괴담을 마음 한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혜미는 억지로 시선을 돌려 앞쪽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걸음을 옮겼다.

  교문 앞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뚜벅뚜벅

  보지말자.

  -뚜벅뚜벅

  보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야.

  -뚜벅뚜벅

  워낙 조용해서 그랬을까? 자신의 발소리가 아까보다 더욱더 크게 들린다 생각했다. 혜미는 어둠속의 입구가 보다 확실한 형태로 보이자 조금 더 빠르게 발을 놀렸다.

  -뚜벅뚜벅

  -뚜벅뚜벅

  -뚜벅뚜벅

  -뚜벅뚜벅

  무시무시하게만 보였던 상가로 들어서는 입구가 시야 뒤로 빠르게 지나쳐간다. 공포로 긴장된 근육이 그곳을 지나쳐가자 이완되어 가는 걸 느꼈다.

  ‘뭐야. 간단하잖아.’

  이완되어 가던 근육은 돌처럼 굳어진 어깨에 힘을 빼고 가슴에 고여 있던 숨을 크게 토해내게 만들었다

  “하아…….”

  어깨가 뻐근했다. 긴장을 해 어깨가 저절로 힘이 들어간 탓이었다. 그녀가 안심이 되어 어깨를 주무르려고 손을 올리던 그때,

  툭

  무엇인가 혜미의 어깨를 건드렸다.

  “히이익!!”

  숨을 삼킨다. 이완되어 가던 작은 공포심이 어깨를 건드린 시점부터 순시간에 성장하며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발이 갑자기 퍼져나가는 공포에 자동으로 앞으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긴장했던 탓일까? 준비되지 안은 의욕만 앞세운 그녀의 발이 그대로 헛디뎌 중심을 잃었다. 혜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꼬구라졌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

  간절한 그녀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어이, 괜찮아?”

  걸죽한 남성의 목소리. 두껍고 환한 빛이 쓰러진 혜미를 비춘다. 혜미가 새하얗게 붕 뜬 얼굴로, 그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제일 먼저 그가 쓰고 있는 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딘가 본 듯한 익숙한 모습의 제복 모자. 잔뜩 굳어버린 머리를 억지로 굴렸다.

 “경찰…아저씨?”

  공포로 인해 꽉 막혔던 목이 그제야 제 기능을 한다. 제복을 갖춰 입은 서글서글한 인상의 경찰이 그녀를 보며 어색한 듯이 웃고 있었다.

  “그렇게 놀랄 것 까지야 없잖니. 이 아저씨가 다 놀랬다.”

  경찰이 장난스레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는 제스쳐를 취했다. 혜미는 비로소 안심이 되었는지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하지만 그런 얼굴을 보이긴 싫어 옷자락으로 대충 슥슥 닦았다.

  “그런데 학생이 이 시간에 왠일이지? 그렇게 큰 가방을 들고 말이야.”

  경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일상적인 어조. 혜미는 그제야 자신이 가출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그대로 끌려간다. 혹시나 두근대는 심장소리가 들킬까봐 놀랐던 가슴을 억지로 억누른다.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고 목을 가다듬었다.

  “친구 집에 가요. 다음 주가 시험이라,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성적 떨어지거든요. 그래서 친구랑 같이 공부하려고요.”

  거짓말은 아니다. 다음 주가 시험이라는 것도 사실이거니와 친구 집에 가는 것도 딱히 거짓말은 아니다. 단지 가는 목적이 조금 어긋났을 뿐. 경찰은 혜미의 얼굴을 찬찬이 뜯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이 근처는 조금 위험한데……. 이 아저씨가 데려다줄까”

  의무이지 가슴속에서 우러러 나오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친절한 말 한마디에 가슴이 울렁거린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걸맞은 자상한 어투.

  하지만 지금은 과도한 친절이다. 혜미는 애써 씩씩하게 일어나 가방을 고쳐맸다.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래도…….”

  “안녕히 계세요.”

  경찰이 뭐라 말하기 전에 혜미는 그 장소를 달음박질치 듯 재빨리 빠져나왔다. 가방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크게 흔들리며 묵직한 소음을 자아낸다.

  빨리. 빨리.

  경찰이 곧바로 뒤따라올지도 모른다. 혜미는 앞서 보이는 어두운 골목으로 잽싸게 꺽어 들어갔다.

  “하아. 하아.”

  짧은 거리임에도 묵직한 가방의 무게 덕분인지 숨이 찼다. 잠시 숨을 고르고는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자신이 달려온 길을 쳐다보았다. 먹먹한 어둠 때문인지 사방은 고요하기만 했다. 누군가 쫒아오는 기색 따윈 없었다.

  “하, 하하…….”

  웃음이 나왔다. 달려온 직후라 목소리가 메말랐지만 혜미는 왠지 뻥 뚫린 듯 한 기분을 맛보았다. 잘못한 범인이 경찰에게 무사히 도망쳤을 때, 기분이 이러할까? 아까보다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젠 이 어둠도 무섭지 않았다. 혜미는 무게 때문에 축 쳐진 가방을 다시금 고쳐매고는 옷을 투툭 턴 뒤 발걸음을 옮겼다.

  -뚜벅뚜벅

  제일 무서운 [흉가 마을]앞을 지나갔다. 이제 무서운 건 없다.

  -뚜벅뚜벅

  -또각또각.

  조금 있으면 친구 집에 도착하겠지. 거기서 열심히 방금 전 있었던 이야기를 소재로 열심히 수다를 떨것이다. 아마 무척 즐겁겠지?

  -뚜벅뚜벅

  -또각또각.

  그리고,

  -뚜벅뚜벅.

 

  -또각또각.

 

  생각이 멈췄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에 이질적인 소리 하나가 섞여 있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자신의 구두소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이질적인 소리. 언제부터 난 거지? 혜미는 자연스레 발걸음을 멈췄다.

  -뚜벅…….

  -또각…….

  그러자 그 특유의 소리도 같이 멈춘다. 마치 공기가 멈춘 듯한 정적. 혜미는 끊임없이 귀를 기울였지만 어째선지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침묵속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각.

  설마 아까 그 경찰이 쫓아왔나?

  희미한 불안감이 슬며시 가슴 한구석으로 들어온다. 만약 자신을 쫓아와서 그런거라면, 이대로 가만히 둘순 없었다. 확고한 거절의 말을 한다면 아마 그 아저씨 인상대로의 사람이라면 멋쩍은 대로 물러나겠지.

  혜미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짜증을 품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이봐요! 경찰 아…….”

 

  그리고 그 순간,

 

  생각이 정지되었다. 하려던 말이 문장화되기 전에 먼저 차가운 밤이슬처럼 녹아 허공에 스러졌다. 공포로 채색된 묵직한 공기. 시간마저 멈춘 듯한 무시무시한 감각에 혜미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혜미의 뒤에 존재하는 하나의 그림자.

  밤 바람에 그림자의 중세에나 입던 검푸른 드레스 치마가 한 차례 일렁 거렸다

 

 ------------------------

 

 “헉!!”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튕겨지 듯 상체를 일으켜 세운다.

 무시무시한 공포와 지독한 절망감이 한데 뒤섞인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소리는 목구멍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허억, 허억.”

 아현의 입안은 마치 사막에라도 다녀온 것처럼 바싹 말라붙었다.

 모래의 꺼끌꺼끌한 감촉만이 남아 있는 것 같은 입안.

 본능적으로 물을 찾았다.

 다행이도 머리맡에는 어젯밤 마시던 물병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아현은 물병을 통째로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댔다.

  꿀꺽꿀꺽

  미지근한 액체가 입안에서, 목으로, 그리고 몸속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 감각기관을 통해 전해져 온다. 시원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입안에 존재하는 찝찝함을 씻어내는 효과는 있었다.

 아현은 그제야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아, 하아…….”

 가만히 손바닥을 모아 얼굴을 쓸어내려보았다. 캄캄한 어둠속이었다가 빛이 눈꺼풀위로 쏟아져내린다. 마치 절망에서 희망으로 전환되는 감각. 방금 악몽에서 깨어난 감각과 비슷했다.

  “악몽인가……?”

 아현은 아직까지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은 공포의 잔향을 지우려 머리를 가로저었다.

 강렬하고 무시무시했던 악몽.

 하지만 아현은 그 악몽이 어떤 악몽인지는 기억해내지 못했다.

 지독한 공포감과 미칠듯한 우울함속에서 깨어나고,

 그것이 굉장히 무서운 꿈이라고 인식해도,

 도대체 무슨 꿈이었는지 지우개로 지워진 듯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냥 악몽이었다는 객관적인 기억만 되새길 뿐, 그에 대한 내용들은 모조리 하얀 페인트 통을 그대로 들이부어 버린 것만 같았다.

 그 사실이 무척 찝찝했다.

 멍하니 벽에 붙어있는 둥그런 시계가 아현의 시야에 들어왔다.

 큰 바늘과 작은 바늘이 사이좋게 아래 위로 수직으로 서있는 모습.

 아직 학교가기엔 조금은 모자라 보였다.

 아현은 애써 머릿속에 남아있는 한 줄기의 공포감을 억누르고 조금만 더 제정신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세수를 하면 괜찮을 지도…….’

  머릿속을 스쳐가는 한 문장. 아현은 조심스레 자리를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잘잤니……?”

  부엌에서 들리는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에 아현의 고개가 자동적으로 돌아간다. 졸린 듯한 힘없는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어제도 밤을 샌것 같았다. 좋아하는 미드라도 풀로 본 걸까?

  “아, 누나 언제 왔어?”

  “아아. 어제 새벽에 겨우 퇴근했지뭐야……”

  냉장고의 문을 열고 머리를 처박고 있는 한 여성. 손바닥만한 핫 팬츠를 입고 엉덩이만 쑥 내민 모습이 좀 민망해 보인다.

 “누나, 부탁이니 집안에서는 그 차림으로 안 다녔으면 좋겠는데? 나도 남자라고.”

 애초에 누나를 상대로 욕정이 일어날리 없었다. 그냥 보기 민망하니 예의상 해본 소리다.

  “거울 좀 봐라, 네가 무슨 남자냐. 그냥 귀여운 여동생의 얼굴을 한 주제에…….”

 “아 씨발 진짜! 자꾸 놀리지 말랬지!!”

 아현의 입에서 곱지 못한 육두문자가 튀어나온다. 하지만 누나, 민정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지, 여전히 냉장고를 뒤지고 있었다.

 “아 씨 진짜…….”

 늘 이런 식이다.

 아현의 누나인 유민정은 워낙 마이페이스적인 인간이라, 아현이 뒤에서 뭐라고 지껄여도 콧방귀 하나 뀌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신에게는 여동생 같다느니, 남자 같이 보이지 않는다느니 라는 소리밖에 하지 않는다.

 아현은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며, 얼른 세면실로 들어갔다. 민정이 좋은 걸 발견했는지, 오홋 오홋이라는 특유의 기쁜 신음과 함께, 텁 하는 냉장고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아현은 가만히 세면대 수도꼭지를 열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한 가닥의 물줄기. 그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 밑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물은 차가웠다. 늦장이 보일러가 물을 늦게 데우는 바람에 생긴 참사였다. 하지만 아현은 뇌가 얼어버릴 차가움속에서도 물줄기에서 머리를 빼내지 않았다.

  악몽으로 찝찝해진 머릿속을 개운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사실 그게 다는 아니었다.

  차였다.

  진짜로 차인건 아니다. 실제로 사귀지도 않았고, 그냥 처음 만난 남자 둘의 평범한 대화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제 수빈이 했던 대답은 아현의 가슴에 상처를 새기기엔 충분했다.

  수빈이 말해준 이상형.

 그것은 정말이지 아현과 같은 나이의 남자라면 한 번쯤을 꿈꿔볼 여성의 모습이었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누구나 사랑에 빠질 법한 그런 [여성].

  그랬다.

  아현과는 전혀 다른 말 그대로 [여성]이다.

  평범한 수빈의 대답은 아현을 절망으로 빠뜨리긴 충분했다. 남자와 남자의 사랑이라니 어디 가당키나 할까. 경멸 어린 눈으로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오늘 악몽을 꾼 이유도 그 잔재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감돌았다.

  사회적으로도, 인륜적으로도 인정해 주지 않는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감정.

 아현은 머리를 빼냄과 동시에 손바닥으로 흐르는 물을 받아 그대로 얼굴에 거칠게 쏟아부었다.

 -촤악!

 ‘차라리 말하지 말걸.’

 어제 수빈에게 이상형을 물었던 사실을 그대로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이렇게 흐르는 물처럼 그대로 씻어내리고 싶다.

 아현의 우울한 가슴이 흐르는 물이 되어 세면대에 떨어진다. 그것 또한 꼴보기 싫어져서 수건으로 거칠게 닦았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겁이나, 일부러 거울을 보지도 않았다. 그냥 이대로 얼어버린 상태로 시간이 정지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이 그게 뭐야. 혹시 남자에게 차였어?”

  밖으로 나가니 어느사이엔가 옷을 입은 민정이 농담조로 아현을 반긴다. 농담인줄 알지만, 묘하게 정답률이 높은지라 아현은 뜨끔하는 가슴을 애써 내리 눌렀다.

  “내가 남자랑 사귀겠냐?!”

  하지만 민정은 아현의 대답에 쉬이 수긍하지 않았다.

  “눈이 퉁퉁 부은거랑 뺨에 남아있는 눈물자국이 그대로 있는 걸.”

 ‘뭐, 뭣?!’

 분명히 씻었을 텐데.

 아현이 당황해서 두손 으로 얼른 얼굴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닦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물기도 무엇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느껴지는 건 뽀송뽀송한 피부뿐. 그제야 아현은 누나에게 놀림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흐응. 진짜구나. 차인거…….”

  “그러니까 그런거 아니래도!”

  목소리가 절로 높아진다. 거짓은 아니다. 다만 비슷하게 느낄 뿐. 민정은 ‘흐응’이라는 수긍한건지, 아닌건지 헷갈리는 반응을 보이며 다시 거실로 향했다.

 반응은 별볼일 없었지만 아현은 민정이 틀림없이 자신이 차였다고 생각하고 있을게 분명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뭐라 말하든 안 믿을게 분명해.’

 민정을 설득하는 것은, 원숭이를 앞에 놓고 기역 니은을 가르쳐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아현은 포기하고는 식탁에 앉았다.

 오색의 예쁜 상보가 그를 반긴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 지는 걸 느끼며 상보를 조심스레 걷어냈다. 김이 모락모락 나오는 따뜻한 밥과 된장찌개가 아현의 식욕을 자극한다.

 아현은 고개를 돌려 방에서 옷매무새를 고치고 있는 민정에게 말을 던졌다.

  “누나. 엄마 오늘도 아침 일찍 일 나가셨어?”

  “당연하지. 안 그래도 요즘 바쁜 시기라시더라. 오늘은 특별히 새벽 일찍 나가셨어.”

  “그래?”

  민정의 대답에 차려진 밥상위로 시선을 던졌다. 늘 바빠서 얼굴도 제대로 본적도 없는 엄마. 그래도 자식새끼들 잘 먹으라고 새벽부터 부엌에서 혼자 칼질하시던 엄마의 모습을 가만히 상상해 보았다.

  “잘먹겠습니다.”

  숟가락을 들고 하얀 밥알들 위에 그대로 푹 꽂아 넣었다. 가볍게 들어가는 숟가락 머리. 그것을 삽처럼 떠 입에 넣는다.

 고소한 쌀밥의 향기가 입속을 가득 메웠다.

  평범한 쌀밥이었지만 아현은 그것을 천천히 오래오래 씹었다. 엄마가 만들어주신 밥을 대충 씹고 목구멍으로 넘기긴 아까웠다. 된장 찌개도 그렇고, 동시에 깔린 밑반찬 들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의 향기, 엄마의 손맛을 빨리 지우기 싫어서 천천히 음미하듯이 씹고 맛보았다.

  “아, 그러고보니 너 방과후에 집에 좀 일찍 들어와.”

  “응?”

  고개를 돌리니 출근 채비를 끝마친 민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절도 있게 각을 맞춘 푸른 정복의 모습. 경찰모를 쓰니 더욱 그럴듯해 보인다.

  “어제 이 근처에서 사건 하나 터졌거든.”

  “사건?”

  어째서일까? 민정이 사건이라고 말하는 순간 아현의 머릿속에는 [얼굴 없는 신데렐라]괴담이 문득 떠올랐다.

 최교수가 알려준 학교에 유행하고 있는 잔인한 괴담. 민정은 신발장에 걸린 대형거울 앞에서 마지막 마무리를 하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응. 너네 학교 근처에 상가 하나 있는 거 알지? 거기서 여학생 하나가 변사체로 발견 됐어. 그러니까 너도 왠만하면 집에 일찍 들어오라고 알았지?”

  그 말을 끝으로 민정은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폼을 보니 꽤 급한 것 같았다.

  [흉가 마을]에서 나타난 변사체.

 허파를 콕콕 찌르는 소름.

 아현은 심호흡을 해보았지만, 기분 나쁜 느낌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자연스레 연산작용이 일어나 머릿속의 네 개의 단어가 떠올랐다.

  [얼굴 없는 신데렐라.]

  [흉가 마을]

  변사체.

  수빈을 습격한 괴인.

  어쩐지 불길했다.

 전혀 다를 것 같지 않던 네 개의 단어가 무언가 가리키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진짜 [얼굴없는 신데렐라]가 나온 건 아니겠지?’

  아현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억지로 지워냈다.

 

 
작가의 말
 

 오버..인가?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13 낮선 조우 2020 / 9 / 20 220 0 7592   
12 한밤중의 데이트 2020 / 9 / 19 218 0 8205   
11 심령사진을 찍는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2020 / 9 / 17 231 0 9991   
10 운명적인 만남은 외나무다리에서 2020 / 9 / 15 228 0 7072   
9 사건은 12시 부터 2020 / 9 / 12 229 0 10559   
8 네 이상형은 2020 / 9 / 11 236 0 11776   
7 얼굴 없는 신데렐라 2020 / 9 / 10 216 0 5577   
6 저는 왜 남자를 좋아하게 된걸까요? 2020 / 9 / 10 219 0 6014   
5 이야기는 여기서 부터 2020 / 9 / 9 204 0 8524   
4 그 여자의 사정 2020 / 9 / 8 213 0 9600   
3 빌어먹을 집사 2020 / 9 / 7 216 0 6107   
2 도망 치자! 2020 / 9 / 6 218 0 6977   
1 이 빙다리 핫바지 같은 새끼야! 2020 / 9 / 5 358 0 6506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와룡과 봉추의
빅터하이드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