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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재 > 무협물
화공도담
작가 : 촌부
작품등록일 : 2016.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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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와 법을 익힘에 있어 느리디 느린 둔재.
법식에 얽매이기보다 마음을 다하며,
술을 익히는 데는 느리지만 누구보다 빨리 도에 이를 기재.
형식과 필법을 익히는 데는 둔하나 참다운 아름다움을
그릴 수 있게 된 화공 진자명의 강호유람기가 펼쳐진다.

 
5 화
작성일 : 16-07-13 12:00     조회 : 591     추천 : 0     분량 : 7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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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장 그림 속의 할아버지

 

 1

 

 

 

 나뭇가지가 흙바닥을 스치고 지나갔다. 길게 획을 그은 나뭇가지는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좀 더 짧은 획들을 그어나갔다.

 길고 짧은 획들이 이어지자 노인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법 면에서는 모자랄지 모르나 흙바닥에 그린 낙서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훌륭한 그림이었다.

 그림을 완성한 키가 훤칠한 소년이 아이처럼 중얼거렸다.

 “뵙고 싶은데…….”

 소년은 얼핏 보기에는 평범했다. 이목구비가 뚜렷했으나 담담하였고, 기골이 장대하다기보다는 문사처럼 여려 보였다.

 하지만 소년에게는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분명히 평범해 보이는데 그 눈빛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맑고도 깊은 검은 눈동자는 분명히 특이한 것이었다.

 “에휴.”

 올해로 열여섯 살이 된 진자명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산에서는 저잣거리도, 채화당도 조그맣게만 보일 뿐이었다. 자명은 한참 동안이나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울적해져 몸을 돌려 산을 내려갔다.

 할아버지를 만나지 못한 날이면 자명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배웠다.

 오채문 화백의 제자라면 어느 정도 수준은 되어야 한다는 의견과 가만히 있으면 뭐 하겠느냐는 의견이 합치된 결과였다.

 매일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여 달라 조르는 통에 귀찮기 짝이 없었던 의원은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자명은 다른 아이들의 뒤를 쫓기도 급급했다. 준법(皴法)이니 묘법(描法)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까맣게 몰랐고, 갈필(渴筆)이니 파묵(破墨)이니 하는 기법도 몰랐다.

 배운 것이라고는 할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연습하던 운필법과 용묵법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 시진이 지나자 자명은 그림을 배우는 우진당 앞에 도착했다. 조금도 늙지 않은 조운고가 칠 년 전처럼 자명을 반겼다.

 “자명이 왔느냐?”

 조운고는 무심한 얼굴로 맨 뒤를 가리켰다.

 “그럼 뒤에 앉아서 모작하여라.”

 “예.”

 자명은 맨 뒷자리에 앉아 들고 온 원통에서 화선지를 꺼내어 문진으로 꾸욱 눌렀다.

 다른 소년들은 여사잠도(女史箴圖)의 삼단(三段)를 베껴 그리고 있었다.

 여사잠도는 궁정 여관의 직책을 경계한 여사잠을 그림으로 그린 것인데, 춘추전국시대 말기에 동진의 고개지(顧愷之)란 사람이 그린 것으로 고화(古畵) 중의 고화였다.

 아이들이 모작하는 것을 살펴보던 조운고가 왕치의 앞에서 혀를 끌끌 찼다.

 “왕치야, 왕치야. 너는 아직도 멀었구나.”

 “어? 왜 그러십니까, 사부님?”

 자명이 자라는 동안 왕치는 더 많이 자랐다. 덩치는 산만 하고 수염도 거뭇거뭇 자라 얼핏 보면 화공이 아니라 산적 같았는데, 생긴 것만큼이나 힘도 장사였다.

 “옆 자리의 자언이를 보아라. 느껴지는 것이 없느냐?”

 왕치는 둔한 눈으로 이자언의 그림과 자신의 그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별다를 것을 못 느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고개지의 여사잠도는 고고유사묘(高古遊絲描)의 방법으로 그려졌는데, 너는 철선묘(鐵線描)로 하고 있잖느냐. 내 그토록 가르쳤거늘. 쯧쯧.”

 조운고가 다시금 혀를 차자 왕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는 그제야 제 잘못을 알고 당황하여 허둥댔다.

 “아차! 그렇지. 고고유사묘로 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사부님. 이건 그러니까… 잠깐 잊어먹은 것에 불과……”

 “저기, 조운고 화백님.”

 왕치를 구원해 준 것은 바로 자명이었다.

 붓은 들지도 않고 여사잠도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자명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고고유사묘가 뭔가요?”

 “하하하!”

 조용히 그림을 그리던 이자언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다른 소년들도 와, 하고 웃어댔다.

 소년들이 왜 웃는지 몰라 자명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자명은 왠지 모를 부끄러움을 느끼고는 얼굴이 빨개졌다.

 소년들이 웃음을 터뜨린 것은 자명의 무식함 때문이었다. 소년들은 벌써 삼 년 전에 고고유사묘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어허, 이놈들! 웃음을 거두지 못할까! 배움에는 나이가 없으니 오로지 배우고자 함만이 중요할 뿐이야. 너희들은 배우지 않고도 고고유사묘를 알았다더냐?”

 인자하지만 예법에 어긋나면 불같이 화를 내는 조운고다. 소년들의 웃음소리가 삽시간에 잦아들었다.

 조운고는 못마땅하다는 듯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표정을 바꾸어 이번엔 자명을 바라보았다.

 “창피해할 것 없다. 너는 그저 궁금한 것을 질문했을 뿐이니.”

 “네에.”

 하지만 자명의 어깨는 움츠러들어 있었다. 자명은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운고의 설명을 들었다.

 “고풍스럽고 고상한 선묘를 고고유사묘라고 한단다. 선이 몹시 부드럽고도 가는데, 봄누에가 실을 토하는 듯하여 춘잠토사묘(春蠶吐絲描)라고도 하지.”

 자명은 ‘고고유사묘, 고고유사묘’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다시 잊어먹지 않기 위함이었다.

 자명이 다시 한 번 그림을 살피는 동안 왕치가 각(刻:운필이 조화를 잃고 딱딱해지는 것)하였다고 한 번 더 꾸중을 들었고, 가장 그림을 잘 그리는 이자언은 능품(能品)은 넘겠구나 하고 칭찬을 들었다.

 그렇게 여사잠도를 모작하는 시간이 끝났다. 그림을 보느라 정작 붓은 들어보지도 못한 자명은 몹시 당황했다.

 “오늘은 이만 마치마. 내일은 춘산서송도(春山瑞松圖)를 모작할 테니 준비하여라. 우진당을 정리하고 여사잠도도 고화당(古畵堂)에 가져다 두고.”

 “예, 사부님.”

 소년들이 일어나 시립하자, 조운고는 편히 쉬라는 듯 손을 한바탕 휘저어 보이고는 총총걸음으로 우진당을 빠져나갔다.

 소년들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 자신의 화선지와 벼루를 챙겼다.

 자명도 화선지와 벼루를 챙기고 있는데, 누군가가 자명을 불렀다.

 “이봐, 진자명. 넌 그동안 뭘 배운 거냐?”

 자명이 오채문의 제자가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극심한 질투를 느꼈던 이자언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고고유사묘도 모르고, 준법도 모르고, 삼원(三遠)도 모르고. 그동안 배운 게 도대체 뭐야?”

 자명의 얼굴이 부끄러움에 푹 숙여졌다. 그리고는 더듬더듬 변명을 했다.

 “그러니까… 아직 잘하지는 못하지만 나는 할아버지한테 보는 법도 배웠고, 마음을 다하는 법도 배웠고, 풍류하고 먹에 달을 담는 법도 배웠고…….”

 “보는 법도 따로 배우냐? 마음을 다하는 법? 달은 또 뭐야? 하늘에 있는 달을 어떻게 먹에 담는다고. 하하하!”

 이자언이 비웃으며 말하자 또래 소년들이 따라서 웃음을 터뜨렸다. 오채문 화백의 제자가 나타났을 때 모두들 긴장했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별것도 아니다.

 “하지만 정말로 달이 담겨.”

 자명이 고집스럽게 말했다. 달을 담은 먹이랑 담지 않은 먹은 그 색깔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할아버지랑 그림을 보면서 똑똑히 보았다.

 “흥!”

 이자언이 콧방귀를 뀌었다. 감히 말대꾸를 하는 것을 보니 속이 뒤틀렸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욱 비웃어줘야 하는 법이다.

 “오채문 화백 어른은 대화백이시니 돌아가셔서는 안 되지만, 만약 돌아가시면 너는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겠다. 하지만 걱정 마. 그때는 내가 이 채화당의 주인이 되어 너를 하인으로 써줄게. 그러면 굶어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할아버지는 안 돌아가셔.”

 자명이 고집스러운 얼굴로 말대꾸를 했지만,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자언은 속이 조금이나마 시원해졌다.

 “그래, 그렇겠지. 나는 만약을 말한 것뿐이야.”

 이자언이 야비하게 웃으며 우진당을 둘러보았다. 갓 연습이 끝난 우진당은 너저분했다.

 “나중에 하인이 되려면 미리부터 연습을 해둬야겠지? 이봐, 진자명. 너는 우진당을 정리하고 여사잠도도 제자리에 가져다 둬. 여사잠도는 고화 중에서도 고화니까 조심하고. 알겠어?”

 “으응.”

 매번 시키는 일이다 보니 이제는 거부감도 안 든다.

 사실은 살짝 기쁘기까지 하다.

 고화를 보관하는 고화당(古畵堂)에는 예쁜 그림이 엄청나게 많은데, 모작한 그림을 가져다주는 척하면서 몰래몰래 예쁜 그림들을 감상하는 것이 자명의 새로 생긴 취미였던 것이다.

 할아버지와 함께가 아니면 들여보내 주지 않는 고화당도 이처럼 그림을 돌려놓으러 갈 때에는 들여보내 준다.

 “흥, 하인의 일을 시켜줘도 좋다는구나. 자라 같은 놈.”

 이자언이 낄낄 웃으며 우진당을 벗어났다. 다른 소년들도 이자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둔한 왕치가 걱정스럽게 질문했다.

 “그런데 자언아, 자명이가 오채문 화백 어른에게 이르면 어떻게 하지?”

 “걱정 마. 그때는 우리는 시킨 적 없다고 발뺌하면 되니까. 다른 아이들이 증인이 되어주면 자명도 어쩔 수 없을 것 아니겠어?”

 왕치에게 대답하는 듯하지만 사실 자명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본래 이를 생각도 없었던 자명은 그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열심히 우진당을 청소했다. 머릿속에서는 얼른 가서 그림을 구경할 생각밖에는 없었다.

 

 천하에 그림이 가장 많은 곳은 황궁이다. 황궁에는 고서도, 악서도, 희귀한 공예품도 많으니 그림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다음으로 그림이 많은 곳이 바로 채화당이었다. 사정을 알지 못하면 놀라운 일일 것이나, 천하의 명화들이 황궁으로 이송되는 과정에 채화당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채화당은 그림이 오가는 길목과 같은 곳으로, 오채문을 어여삐 여긴 황상 폐하께서 가끔 고화 몇 점을 하사하기도 하는 그림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여사잠도나 춘산서송도 같은 고화가 채화당에 있는 것도 그런 연유였다.

 “자명이 왔느냐? 어째 요즘엔 너만 보이는구나. 다른 아해들은 오지 않고.”

 “안녕하셨어요, 모영찬(牟榮讚) 화원님?”

 “오냐, 안녕하고말고.”

 최근에 자주 보게 된 고화당의 모영찬이 인자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래, 오채문 대화백은 아직 뵙지 못했느냐?”

 “네. 의원이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들여보내 주지 않아요.”

 자명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하자 모영찬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어렸던 네가 오채문 화백 어른의 손을 잡고 들어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거동도 못하시다니 참 믿을 수 없는 일이야.”

 “이제 곧 나으실 거예요.”

 자명의 얼굴은 고집스러웠다. 그래서 모영찬은 어쩌면 돌아가실지도 모르지, 하는 말을 꿀꺽 삼켜 버렸다.

 “그래, 그래야지. 여사잠도를 가지고 온 것일 테니 얼른 들어가 가져다 놓아라.”

 “네.”

 자명이 여사잠도를 보물처럼 들고 고화당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모영찬이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술시까지는 내가 이곳에 있으니 그때까지만 가져다 놓으면 될 게다.”

 자명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림을 가져다두고 고화들을 구경하는 은밀한 재미를 모영찬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명은 괜히 걸음을 빨리 해서 고화당 안으로 들어섰다.

 곰팡내를 닮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자명의 코를 간질였다. 보통은 역겹다고 할 냄새조차 향기롭게 느껴진다.

 “응차.”

 여사잠도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은 자명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손을 가슴께에 올려놓고 두근거림을 즐기던 자명은 천천히 구석으로 걸어갔다.

 할아버지랑 왔을 때도 많았고, 혼자 그림을 가져다 두러 온 적도 많았으니 고화당이 아무리 넓다 한들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림도 대부분은 일견했는데, 자명은 봤던 그림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서 멍하니 구경하곤 했다.

 오늘은 동천산당도(洞天山堂圖)를 구경할 참이었다.

 동천산당도가 그려진 비단 족자는 제법 높은 곳에 있어서, 키가 훤칠한 자명조차도 발을 껑충 들어서 꺼내야 했다.

 족자를 두르르 펼쳐 물대(物臺)에 걸어놓은 자명이 몇 걸음 뒤로 걸어가 섰다.

 “휴우.”

 구름에 휩싸인 아름다운 고산(高山)이 자명의 가슴속을 간질여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자명은 홀린 듯이 동천산당도를 바라보다가 잠시 뒤에 혼잣말을 주워섬겼다.

 “그렇구나. 저게 피마준법(披麻皴法)이었어.”

 정말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 본령은 알고 있었으나 어찌 부르는지 이름을 몰랐던 것이다.

 자명은 새로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한참을 그 그림을 바라보다가 경건하리만치 조심스럽게 족자를 거두었다.

 “다음은 뭘 구경할까?”

 기왕에 동원(董源)의 그림을 보았으니, 같은 화공의 그림을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자명은 다음으로 한림중정도(寒林重汀圖)를 보기로 했다.

 족자를 다시 제자리에 올려다 놓은 자명은 그 옆 자리에 있을 한림중정도를 꺼내려고 손을 더듬거렸다.

 손도 잘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있으니 더듬거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마저도 잘 안 되어 자명은 물대를 붙잡고 낑낑거려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고를 치고 말았다.

 “앗!”

 물대가 흔들거리자 자명이 비명을 내뱉었다. 물대에 놓인 고화들도 따라 흔들거리는 것을 보고 얼굴빛이 새카맣게 변해 버렸다.

 수백 년을 묵어온 아름다운 고화들이 단번에 망가지게 생겼는데, 이런 아름다운 그림들이 망가지면 아직 보지 못한 사람들은 억울해서 어떻게 하겠는가!

 자명은 필사적으로 물대를 부여잡았다.

 “안 돼! 안 돼!”

 자명은 필사적으로 물대를 밀어 넣었다. 눈앞이 캄캄해져서 아무것도 느낄 새가 없었다.

 하늘이 자명의 노력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았는지, 물대는 곧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고화가 두세 점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후, 후아―”

 물대 전체가 넘어질 뻔한 것에 비하면 비교적 다행인 일이었지만, 고화당에 있는 그림은 모두 귀한 것으로 하나라도 망가지면 아니 된다.

 자명은 재빨리 달려가 족자들을 펼쳐서 그림이 온전한지 확인했다. 떨어진 것은 송대(宋代)의 장택단(張擇端)이 그린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와 서호쟁표도(西湖爭標圖), 그리고 이름 모를 그림 한 점이었다.

 청명상하도와 서호쟁표도는 멀쩡해서 자명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元) 황실에 귀속되었다가 이곳 채화당을 거쳐 다시 명나라의 황궁으로 가야 하는 귀한 그림이니 망가져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자명의 관심을 끈 것은 이름 모를 그림이었다.

 왼쪽 상단에 도원(桃園)이라는 글자만 있을 뿐, 시구(詩句) 같은 것은 적혀 있지 않고 낙관(落款)도 없는 그림이 자명의 가슴을 울렸다.

 “할아버지?”

 그림 속에는 구름에 휩싸인 계곡과 복숭아 화원이 있었고, 그곳에는 두 명의 신선이 서 있었다.

 한 명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 듯하고 한 명은 도화(桃花)를 어루만지고 있는데, 이야기를 하는 신선의 모습이 할아버지를 꼭 닮았다.

 자명은 청명상하도와 서호쟁표도를 잘 가져다 놓은 뒤, 무명도원도(無名桃園圖)를 챙겨 물대에 걸어놓았다.

 “할아버지.”

 괜히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림 속의 신선 할아버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채문 할아버지를 닮았다면 틀림없이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하고 있으리라.

 혹시 할아버지는 아파서 자는 척하면서 신기한 술법을 부려 그림 속의 세계로 놀러 가는 것이 아닐까?

 “하핫.”

 소매로 눈시울을 닦으며 자명이 웃어 보였다. 아무리 할아버지라도 그럴 리는 없었지만 정말 그랬다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본래 그림은 형상보다는 그 기운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산야의 허허로운 기운도 그렇거니와 할아버지의 기운이 너무도 닮았다.

 “언젠가 이 그림을 모작해 봐야겠다.”

 한참 동안 그림을 보며 마음을 달래던 자명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안타깝다는 듯이 그림을 바라보았다.

 사고로 어느 틈새에 끼어버렸는지 고화당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그림은 많이 삭아 있었다.

 송대(宋代)의 명화들 틈에 끼어 있었으니, 기껏해야 사, 오백 년 묵은 그림일 터인데 팔백 년이 넘는 다른 명화들보다도 낡아 있다.

 “자명아, 아직도 거기 있는 게냐?”

 고화당 입구에서 모영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자명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벌써 술시가 다 되었던 것이다.

 “네, 나갈게요!”

 자명은 족자를 최대한 빠르게, 하지만 조심스럽게 말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그림을 제자리에 놓는 것이 아쉬울 지경이었다.

 자명은 미련을 가득 안고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며 고화당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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