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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재 > 무협물
화공도담
작가 : 촌부
작품등록일 : 2016.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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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와 법을 익힘에 있어 느리디 느린 둔재.
법식에 얽매이기보다 마음을 다하며,
술을 익히는 데는 느리지만 누구보다 빨리 도에 이를 기재.
형식과 필법을 익히는 데는 둔하나 참다운 아름다움을
그릴 수 있게 된 화공 진자명의 강호유람기가 펼쳐진다.

 
4 화
작성일 : 16-07-13 11:55     조회 : 572     추천 : 0     분량 : 10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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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렇게 두 달의 시간이 흘렀다.

 언젠가부터 자명은 다음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보는 법이라는 신기한 술법을 배워서 꽃도 피울 줄 알고, 구름도 부를 줄 안다.

 그리고 모르는 게 없어서 꽃에 얽힌 전설이나 이야기도 알려주고, 같이 놀아주기도 한다.

 아침이 오면 벌써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후원을 구경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레는 마음에 씻는 둥 마는 둥 하고 본당으로 달려가면, 할아버지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이상한 점이 있다면 보는 법을 알려주신다고 해놓고 매번 후원만 산책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후원에 가득한 흙이 갈색과 흑색, 황색 등 여러 가지 색을 품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자그마한 식물조차도 싱그러운 초록색을 자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아쉬울 것은 없었다.

 오채문은 작은 미소를 지으며 자명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새벽에 비가 왔나 보다. 이슬이 방울방울 맺혀 있는걸.”

 “네.”

 조그맣게 대답한 자명이 할아버지의 손을 마주잡았다.

 할아버지는 자명의 손을 쥐고는 후원의 구석으로 이끌었다. 할아버지는 찬 바람 때문인지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는데, 걸음도 평소보다 훨씬 느릿느릿했다. 자명은 할아버지의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하고는 즐겁게 걸어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자명을 돌아보았다.

 “벌써 후원을 몇 차례나 돌아보는 것인데, 자명이 너는 지겹지 아니 하냐?”

 지난 두 달간 후원만 거닐었는데도, 자명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후원에는 숨겨진 것들이 수도 없이 많아, 보고 또 보아도 매번 새로운데 어찌 지겨울 수 있겠는가?

 아직 할아버지에게 보는 법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배우지 않더라도 후원을 거니는 것은 충분히 재미난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자명을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보통 아이였다면 오랫동안 한 장소에 있는 것이 지겨워 몸을 비틀었을 텐데, 자명에게서는 조금도 그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곽주 화공은 후원을 보고도 그 아름다움을 알아채지 못하고 엉망이라고만 했었지. 그에게도 세상천지에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해주었는데 그는 무슨 신묘한 깨달음인 줄로만 알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더구나.”

 자명은 할아버지의 말뜻을 쉽게 깨닫지 못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곽 어른께서는 차기 채화당감공 감이라고 불리는 영재이신데 어찌하여 알아듣지 못한 것일까?

 “사실 보려고 하지 않아 보지 못할 뿐, 마음으로 본다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는데 말이다.”

 “마음으로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자명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오채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세상천지가 아름답다는 마음을 가지면 된단다.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보는 법의 비결이랄 수 있지. 그보다 저기를 보아라, 자명아. 나비가 한 마리 노니는구나. 비가 그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외유를 나왔누.”

 할아버지가 가리킨 곳에는 과연 한 마리 나비가 빙글빙글 맴을 돌고 있었다. 자명은 나비를 보고 감탄하면서도 할아버지의 말을 되뇌어보았다.

 ‘세상천지가 아름답다는 마음만 가지면 된다니.’

 할아버지께서 말씀은 알쏭달쏭하기만 했다. 한참 동안 생각하던 자명은 할아버지의 손을 잡은 채로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렸다.

 “아아!”

 이름 모를 초록색 풀이 싱그럽게 빛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전에 할아버지가 보여주셨던 예쁜 보라색 꽃이 있었지만, 초록색 풀의 아름다움 역시 그에 못하지 않았다.

 어디 그뿐이랴? 무심히 스쳐 지나갔던 바위가 저렇듯 유려한 곡선을 지니고 있는 줄은 몰랐다. 때로는 날카롭게 꺾이기도 했지만, 동글동글한 면이 더 많아 부드럽고 매끄럽다.

 그 옆에 자라는 나무둥치는 어떠한가? 그저 한 그루 나무일뿐이지만 신비롭게 생긴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모두 할아버지와 후원을 거닐며 관찰했던 것들이었다. 그때에는 특별한 것을 알게 되었다며 기뻐했는데, 알고 보면 그것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었다.

 그저 보라색 꽃을 바라보느라 다른 것들을 보려하지 않았을 뿐이다.

 “와아!”

 후원에 놓인 모든 것들이 살아 있었다. 모두 그 자리에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는데, 그동안 자신이 보지 못하고 있었다.

 후원에 놓인 수많은 아름다움이 쏟아져 들어와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두 달 전에는 그저 엉망인 후원이었는데, 이제 보니 신비로 가득찬 낙원이 되어 있다.

 “할아버지, 후원에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나 봐요.”

 “내 그렇다고 하지 않았느냐. 마음으로 보면 세상 천지에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지.”

 할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하였다. 자명은 할아버지와 후원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문득 억울함을 느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처럼 쉬운 것일 줄 알았다면 진작부터 그런 마음을 품고 있을 걸 그랬다. 그랬다면 진작부터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을 텐데 말이다.

 그동안 아름다움을 모르고 지나쳤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분이 차오른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되었으니 괜찮다. 이제부터는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것이다. 후원에도 이처럼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는데, 다른 곳은 어떠할까? 자명의 가슴이 벌써부터 콩닥콩닥 뛰었다.

 “저쪽의 나무에 새로운 새순이 돋았나 보다. 저 나무의 새순의 녹빛은 유난히 짙지. 우리 저쪽으로 가보자꾸나.”

 “네.”

 자명은 신이 나서 할아버지를 나무 쪽으로 이끌었다. 할아버지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런 자명을 쫓아 걸어갔다.

 두 노소는 노을이 질 때까지 함께 후원을 거닐었다. 그날의 산책은 유난히 특별했다. 이제 자명도 할아버지처럼 후원의 이곳저곳에서 이름 모를 풀과 예쁜 돌멩이들을 찾아낼 수 있게 되었고, 그 재미에 도무지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한편, 본당에는 두 명의 화공이 서서 후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본당에 의원밖에 없었는데, 오채문의 건강이 조금이나마 호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곽주와 상준백이 찾아왔던 것이다.

 곽주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두 노소를 바라보았다. 오채문 대화백의 마음이 저처럼 편안해 보이니 입가에 절로 웃음이 맺힌다.

 “가르쳐 보신다더니,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일세. 손주 삼으실 마음이 더 컸던 모양이야. 자손이 없으셨으니 말년이 적적하실 법도 하지.”

 하지만 상준백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글쎄요.”

 상준백은 진지한 눈으로 자명을 주시했다. ‘내가 본 것 중 최고의 기재’라는 오채문의 말이 지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곽주의 말대로 조손지간으로 보일 뿐이지만, 어쩌면 두 노소 사이에는 자신이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곽주가 의아한 듯 상준백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린가?”

 “그분께서 자명을 기재라고 말한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오채문 화백쯤 되면 보는 눈도 저희 같은 범부와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실언을 하실 분이 아니란 것은 나도 아네. 하지만 지금 보니 무엇을 가르치는 것 같진 않구먼.”

 곽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상준백의 진지한 얼굴은 바뀌지 않았다.

 “어쩌면, 가르치는 중인데 저희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상준백의 말은 기이한 데가 있었다. 그러나 그 기이함의 꼬리를 잡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봐도 오채문 화백께서 손주 재롱에 기꺼워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곽주는 잠시 자명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쨌든 오늘은 이만 물러나세. 편안히 계신 것을 보았으니 되었잖은가.”

 “예. 그리하지요.”

 상준백이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곽주와 함께 본당을 벗어났다.

 걸음을 놀리는 가운데서도 상준백의 머릿속은 자명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간 자명이 엉망으로 그었던 수많은 획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너무 재주가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가르칠 때에는 꾸중만 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렇게까지 재주가 없다는 것이 이상했다. 운필법은 단순히 자세를 공부하는 것이니 재주가 있고 없고를 떠나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을 저 아이만 못한다는 것은 분명 평범함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화실로 돌아온 상준백은 깊은 상념에 잠겼다. 무엇이 자신의 마음을 끄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다른 화백들은 모두 대수롭지 않게 넘긴 일인데, 유독 자신만은 기재라는 말에 얽매여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갈 때까지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상준백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지 못하니 무례가 되더라도 오채문 대화백께 직접 여쭈어볼 참이었다.

 본당에 도착한 그는 잠시 서성이다가, 헛기침을 흠흠 내뱉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채문 화백 어른, 화공 상준백이 뵙기를 청합니다.”

 “들어오시게.”

 피곤한 음성이 들려오자, 상준백은 옷차림을 바로 하고는 본당 안으로 들어섰다.

 본당 안에는 간단한 마의 차림을 한 오채문이 기운없는 얼굴로 침상에 앉아 있었다.

 “상 화공이 나를 찾아오다니, 무슨 일인가?”

 상준백은 예를 따라 시립하여 머리를 숙여 보였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화공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붓을 잡지 못하게 되지. 이 보잘것없는 늙은이가 도움이 된다면 그뿐, 무례랄 것은 없으니 말해보시게.”

 오채문은 인자하게 웃었다. 젊은 화공의 안색을 보니 진심이 느껴졌다. 필시 오래토록 고민하였을 것이다.

 “외람되오나 오채문 화백 어른께서 하신 말씀이 마음에 걸립니다.”

 “음? 자네의 심마(心魔)가 나로부터 왔던가?”

 상준백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오채문은 허허롭게 웃었다.

 “허어, 내가 상 화공의 청정을 깰 줄은 몰랐구먼. 질문이 내게서 왔다면 답도 내게서 나올 터. 말씀하시게.”

 “지금까지 제가 자명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재주가 부족하여 뒤처졌던 아이이지요. 한데 오채문 화백께서 그 아이를 기재라 하시니 그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상준백의 음성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지만, 오채문은 도리어 그 소리를 듣고는 크게 웃어 보였다.

 “허허허! 그래, 그렇던가?”

 껄껄 웃은 오채문은 수염을 한차례 느긋하게 쓰다듬었다.

 “저는 본래 부족한 화공일 뿐이라 오 화백 어른의 뜻을 짐작하지 못하겠습니다.”

 “고화품록(古畵品錄)에 나온 육법(六法)에 대해서 모르지는 않을 걸세. 필법의 요체이자 그림의 요체지. 그중 제일로 치는 것이 무엇이던가?”

 오채문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준백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것은 화공들에게는 필생의 화두라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입문하자마자 그것의 이론부터 배운다.

 “기운생동(氣韻生動)입니다.”

 “그래, 천지만물이 그림 속에서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 바로 기운생동이야. 장언원(張彦遠)이 말하길, 기운을 얻으면 모양은 저절로 갖춰진다 했지.”

 오채문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탁상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차는 마시기 좋게 식어 있었다.

 “자네의 그림은 기운생동하고 전신사조하던가?”

 “그 아이의 그림이 그렇습니까?”

 오채문이 또다시 빙그레 웃어 보였다.

 상준백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아이의 그림을 본 적은 없지만, 자고로 화공이라면 획을 보고 그림을 짐작하는 법이다.

 “더더욱 이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그런 재능이 없었습니다. 아니, 있다고 해도 나이가 어리니 그 경지에 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오채문이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 짐작할 수 있겠구먼. 그 아이가 자네에게 운필법을 배우고 있다 했던가? 그렇다면 법식을 자꾸 틀렸을 게고, 배움이 느리며, 획을 긋는 속도 또한 느렸을 걸세.”

 “틀림없이 그러합니다.”

 “만인이 만 가지 팔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하나의 법식으로 묶겠는가.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려 법식을 배우는 것이지, 법식에 얽매이려 법식을 배우는 것이 아닐세. 그 아이는 법식을 체화하려 했으니 느리나 정도를 걷고 있었네.”

 오채문의 음성은 편안했지만, 상준백에게는 한없이 준엄하게 다가왔다. 그는 얽혀 있던 무언가가 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은 법식에 얼마나 얽매여 있었던가!

 “배움이 느린 것은 마음을 담기 때문일 터. 그 아이가 일 획을 긋는 데 마음을 담았다면, 술(術)을 익히는 데는 느릴지 모르나 누구보다 빠르게 도(道)에 이를 게야.”

 “마음을 담는다?”

 “영악하지 않고 순수하여 마음이 맑은 아이지.”

 오채문의 음성에는 숨길 수 없는 온기가 배어 있었다.

 반면 상준백의 얼굴은 붉어졌다. 순수한 아이라는 것은 자신도 안다. 하지만 그것을 어리석다 여겨 도리어 아이에게 매를 대곤 했다.

 “큰 지혜는 도리어 어리석게 보이는 법[大智若愚]이라네. 자네 말대로 그 아이의 실력은 형편없을 테지. 하지만 그 속에는 마음이 담겨 있으니, 자네는 그 아이의 획을 보고 자신을 반추해 보게나.”

 “큰 지혜는 도리어 어리석게 보인다…….”

 상준백이 혼잣말을 되뇌었다.

 법식에 얽매이지 않으나 꾸준히 연습하고, 느릴지 모르나 마음을 다한다. 정리하고 보면 이토록 간단한 것인데, 저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없었다.

 남들 만큼 하지 못한다고 아이를 꾸중했거늘, 알고 보면 남들이 아이만큼 하지 못한 것이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상준백이 엎드려 큰절을 했다.

 “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오채문은 대꾸없이 인자하게 웃고만 있었다.

 상준백은 그제야 자신이 화백의 청정을 깨고 있음을 알고 시립하여 머리를 조아리고는 뒷걸음쳐 본당을 빠져나왔다.

 수많은 별이 상준백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3

 

 

 

 상준백이 방문했던 지난밤, 오채문의 몸이 문제를 일으켰다. 자명은 몰랐지만, 오채문은 반위(反胃)로 인해 구토와 함께 신열을 앓았던 것이다.

 천만다행히 심한 증상은 아니었지만 의원은 당분간 실내에서만 머물러야 한다며 엄포를 놓았다.

 다음날, 오채문은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자명의 방을 찾았다.

 “자명아, 자명아.”

 귓가를 간질이는 인자한 목소리에도 자명은 이불을 발로 걷어차며 칭얼댈 뿐, 쉽게 깨어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다시 자명을 깨웠다.

 자명이 졸린 눈을 부스스 떴다.

 “할아버지?”

 “오냐. 그 녀석, 잠버릇도 고약하구나.”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진 자명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옷차림을 수습했다. 할아버지는 그런 자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소세할 시간도 안 주고 손을 잡아끌었다.

 “못된 의원이 오늘은 실내에만 있어야 한다는구나. 그러니 오늘은 이 할아비와 그림이나 그리며 놀자.”

 “네에.”

 외출할 수 없다는 말에 자명은 시무룩해졌지만, 의원이 안 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자명은 할아버지의 손을 꼬옥 잡고 우물가로 걸어갔다.

 새벽달이 어렴풋이 떠 있는 우물가에서 할아버지는 우물물을 한 바가지 길어 자명의 조그만 됫박에 부어주었다.

 “보아라, 자명아. 물이 참 맑지 않느냐?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바로 이 시각에 길어야만 이처럼 맑은 물을 얻을 수 있지. 그리고 이건 이 할아비만의 비밀인데, 이 시각에 물을 길으면 달을 담을 수 있단다.”

 할아버지가 눈을 찡긋하자 자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달을 물에도 담을 수 있었던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 됫박을 한번 보렴.”

 할아버지가 자신의 됫박에 물을 부으며 말했다.

 자명은 자신의 됫박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와아!”

 찰랑이는 물속에는 정말 새벽달이 담겨 있었다. 물결에 일렁이는 예쁜 보름달이었다.

 “보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달이 물에 비친 거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정말로 달이 담겨 있단다. 그럼, 가자꾸나.”

 할아버지는 커다란 됫박을, 자명은 조그마한 됫박을 들고 본당으로 걸어갔다. 자명은 물을 쏟기라도 하면 달도 같이 쏟아질까 봐 조심조심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본당에 도착하자 할아버지와 자명은 길어온 물을 조심스럽게 벼루에 붓고는 천천히 먹을 갈았다.

 “자, 보아라. 먹을 가는 곳을 묵도(墨道)라 하고, 갈려진 먹물이 모이는 이 오목한 곳은 연지(硯池), 혹은 연해(硯海)라 한단다. 먹을 가는 일은 마음을 닦는 일이니 열심히 해야 한다.”

 “마음을 닦는 일이요?”

 자명이 고개를 갸웃하자, 할아버지가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럼. 묵도가 울퉁불퉁하면 마음도 울퉁불퉁한 것이요, 묵도가 고르고 매끄러우면 마음도 그렇게 매끄러운 거란다. 한번 해보자꾸나.”

 할아버지는 경건한 몸짓으로 먹을 갈았다. 자명이 조심스럽게 할아버지를 따라 했다.

 조그마한 손으로 열심히 먹을 가는데, 먹물이 튀지 않도록 하는 것은 물론, 느리지만 정확하게 손을 놀린다. 마음을 다하는 법은 몰랐지만 자명은 먹이 고르게 갈리도록 온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자 할아버지처럼 평평하진 않았지만 나름대로는 평평하게 먹을 갈 수 있었다.

 자명은 연해에 담겨진 먹물에 아직까지도 달이 떠 있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먹물 안에 달이 있어요.”

 “달이 담긴 물로 먹을 갈았으니 당연히 달도 따라오지 않겠느냐? 풍류를 즐길 줄 안다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지.”

 할아버지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붓을 들어 올렸다. 자명은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할아버지, 풍류가 무엇인가요?”

 획을 그으려던 할아버지가 문득 고개를 돌려 자명을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의 눈은 평소보다 깊고 현현했기에 자명은 멍하니 그 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먹물에 달을 담아 즐기는 것이 바로 풍류지.”

 은은한 묵향이 자명의 코끝을 간질였다.

 할아버지는 어스름히 떠오르는 햇살을 즐기듯 눈을 지그시 감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어디 그뿐이랴? 산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 그 모든 것이 다 풍류지.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풍류를 즐길 수 있단다.”

 알 듯 모를 듯한 말에 자명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할아버지의 말뜻은 모르겠지만 왠지 중요한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았다.

 쉽게 알아듣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자명을 본 할아버지가 싱긋 웃어 보였다.

 “언젠가 너도 알게 될 게다.”

 그렇게 말한 할아버지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던 자명도 붓을 들었다. 그러더니 이번엔 미간을 좁히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댔다. 무엇을 그려야 할지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자명은 할아버지가 피워냈던 보라색 꽃을 그리기로 결정하고는 붓을 들어 올렸다.

 정오가 되기까지 둘은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할아버지의 붓놀림은 답답할 정도로 느렸고, 자명의 손놀림도 그다지 빠른 편은 아니었다.

 자명에게는 성급히 그리기보다는 최대한 정성을 다하여 그리는, 아이답지 않은 면이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야 그렇다 치고, 어린 자명이 꾀를 부리지 않고 그만한 집중력을 보인다는 것은 가히 신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의원은 다시 외출을 허락했다.

 자명과 할아버지는 후원을 거닐기도 하고, 본당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오래된 명화들을 모아놓은 고화당(古畵堂)에 가서 그림들을 구경했다.

 고화당의 관리자는 할아버지와 함께이니 특별히 들여보내 준다는 식으로 자명도 들여보내 주었는데, 거기엔 예쁜 그림이 참 많았다.

 할아버지는 가끔 이상한 말을 하곤 했다.

 ‘마음을 다하기만 하면 그리지 못할 것이 없느니라’라고도 하셨고, ‘마음을 다하지 않았다면 절대 그림을 그려서는 아니 되느니라’라고도 하셨다.

 ‘세상을 보는 것은 다름 아닌 너이니, 세상이 아름다운 것만큼이나 너도 아름다워야 하느니라’라고도 하셨는데, 그 말에 자명이 예쁘게 꾸미고 다녀야 하는 거냐고 물으니 껄껄 웃으며 고개를 저으셨다.

 그리고는 ‘너도 알게 될 게다’라고 하셨는데, 자명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뜻을 알 수 없어서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자명은 할아버지와 그림을 그리는 시간마저도 못된 의원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할아버지의 건강이 회복되는가 싶더니 이내 악화되어 버린 것이다.

 할아버지가 조금이나마 회복되었을 때에는 함께 저잣거리를 구경하기도 하고, 뒷산에 올라 이런저런 풍경들을 바라보기도 했었지만 꿈결같은 시간은 금방 끝나 버리고 말았다.

 의원은 할아버지가 아프다며 만나는 것조차 금지시켰는데, 자명이 크게 걱정하며 얼굴 뵙기를 소원해도 매몰차게 거절할 뿐이었다.

 자명은 이제 할아버지의 병증이 깊음을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얼굴에 핀 저승꽃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고, 할아버지가 점점 작게 보이는 이유가 자신의 키가 자랐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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