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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재 > 무협물
화공도담
작가 : 촌부
작품등록일 : 2016.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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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와 법을 익힘에 있어 느리디 느린 둔재.
법식에 얽매이기보다 마음을 다하며,
술을 익히는 데는 느리지만 누구보다 빨리 도에 이를 기재.
형식과 필법을 익히는 데는 둔하나 참다운 아름다움을
그릴 수 있게 된 화공 진자명의 강호유람기가 펼쳐진다.

 
3 화
작성일 : 16-07-13 11:54     조회 : 565     추천 : 0     분량 : 8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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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장 천지간에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1

 

 

 

 다음날.

 자명은 붓과 원통을 챙겨 들고 상준백 사부님께 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뭐가 그리도 이상한지 걸어가면서도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어제의 일은 꿈이었을까?”

 평소처럼 느티나무 아래서 낙서를 하며 놀고 있는데, 오채문 화백 어른이 나타나 좋은 그림이라고 칭찬을 해주셨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엄마랑 아빠 생각이 나는 통에 펑펑 울었는데, 깨어보니 자신의 침상이었다.

 도통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정말 꿈일지도 몰라.”

 자명은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 걸어가다 보니 벌써 상준백 사부님이 계시는 예화당(禮畵堂) 앞이었다.

 자명은 상념에서 벗어나 몸가짐을 바로 했다.

 “제자 자명이 상준백 사부님을 뵙습니다.”

 꼬물꼬물 시립해 머리를 숙여 보인 자명이 평소에 앉던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상준백은 자명이 도착한 것도 모르고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야. 암, 이상한 일이고말고.”

 자명이 원통에서 화선지를 꺼내고 문진으로 꾸욱 누를 때까지 상준백은 혼잣말만 주워섬기고 있었다.

 “기재, 기재라…….”

 그동안 먹을 다 갈고 붓을 적신 자명은 조심스럽게 상준백의 눈치를 살피고는, ‘도착했으면 침완법을 연마하지 않고 뭐 하느냐’는 꾸중을 듣기 전에 얼른 획을 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명은 왼손으로 오른손을 받치고 쓰는 침완법의 자세를 취했다. 시키기 전에 알아서 하면 어쩌면 칭찬을 들을지도 모른다.

 “음? 언제 온 게냐?”

 “앗!”

 획을 긋기 직전에야 비로소 자명이 왔음을 알아차린 상준백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레 말을 걸자 깜짝 놀란 자명이 허둥거리다 붓을 놓치고는 겁먹은 얼굴로 상준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상준백은 웬일인지 상냥했다.

 “괜찮다. 오늘은 내 꾸중하지 않으마. 걱정하지 말고 획을 그어보아라.”

 “네.”

 상냥한 상준백의 모습에 안심한 자명이 붓을 주워 침완법의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더니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일 획을 그었다.

 천천히 같은 속도로 신중하게 획을 긋는다.

 “자세가 틀렸구나.”

 “죄, 죄송해요.”

 현완법이니 침완법이니 하는 것들은 본래 몹시 쉬운 자세다. 따라 하려고 들면 언제든지 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화공이 되려면 그 자세가 무의식중에서도 나올 수 있을 만큼 버릇이 들어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익혔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자명은 수많은 연습을 했는데도 아직도 익히지 못하고 있었다.

 “한데 어찌하여 기재라는 걸까. 허참.”

 상준백이 혀를 차며 말했다.

 자명이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멀뚱멀뚱 바라보는데, 상준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는 이제부터 다른 분께 그림을 배우게 될 게다.”

 “예?”

 “오채문 화백께서 너를 어여삐 보셔 친히 가르치겠다고 하셨느니라. 그분께서는 천하제일의 화백으로, 가히 화선의 경지에 이르셨으니 너는 성심성의껏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야.”

 이해하지 못한 듯 머뭇거리던 자명이 눈을 크게 떴다.

 “오채문 화백 어른이라면, 그러니까 어제 뵈었던…….”

 “그래, 바로 그분이니라.”

 “하, 하지만 저는 아직 운필법도 제대로 모르는데요.”

 자명이 울상을 지었지만, 상준백은 엄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어허, 서두르지 못할까!”

 “아, 알겠어요.”

 자명은 서둘러 문진과 화선지, 붓과 벼루를 챙겨 들었다. 붓을 씻을 틈도 없었다.

 문방사우를 챙기고 깊이 시립해 보인 자명이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시선을 보냈지만, 상준백은 엄한 표정으로 얼른 가라고 재촉했다.

 “얼른 가보지 않고 뭐 하는 게야.”

 “네, 네에.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사부님.”

 자명의 표정은 거의 울 듯했다. 하지만 하늘 같은 사부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어서 결국 몸을 돌려 걸음을 놀렸다.

 걸어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는 것이 겁이 난 모양이다.

 마침내 자명이 모습을 감추었다.

 상준백은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일 획도 법식에 맞추어 긋지 못하는 아이가 기재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어쩌면 오채문 화백께서 틀린 걸지도 모르지.”

 상준백은 내심 그렇게 결정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불경하지만 그분도 사람이신데 어찌 실수가 없으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마음 한구석이 찝찝하기만 하다. 천하제일의 화백이라면 보는 눈도 남다르지 않겠는가.

 어쩌면 그분은 자신 같은 범부는 보지 못한 것을 본 것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자명이야말로 신비한 아이일 테지.”

 상준백은 아이가 그려놓고 간 일 획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알아낼 수는 없었지만 저 속에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천하제일의 화백을 감탄케 한 그 무엇인가가.

 

 한편, 자명은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

 상준백 사부는 혹시라도 오채문 화백을 뵙거든 공경에 공경을 다하라고 했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 보니, 앙앙 운 것은 물론 그 품에 안기기까지 했다. 꿈인가 했지만, 상준백 사부의 말을 들어보면 꿈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경을 칠 일이 아닌가!

 하늘 같은 대화백님께 무례한 벌로 매를 맞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걸음은 본당으로 가고 있건만, 마음은 본당에서 열심히 도망치고 있다. 하지만 최대한 늑장을 부려봐도 본당으로 가는 길은 점점 짧아져만 갔다.

 마침내 본당 앞에 도착한 자명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림 같은 고택이 햇살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하지?”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 자명이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고택을 기웃거렸다. 고택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덕택에 자명은 조금이나마 안심을 할 수 있었다. 꾸중을 할 거였다면 무서운 화백님들이 근처에 계실 텐데 아무도 없으니 어쩌면 벌을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명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고민을 하다가,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계세요?”

 “자명이냐?”

 고택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명은 화들짝 놀랐지만, 곧 상준백 사부에게서 배운 대로 예를 취했다.

 “제자 진자명이 부르심을 붙잡고, 어, 이게 아닌가? 아! 받잡고 왔는데요.”

 끼이이, 하고 본당 문이 열렸다. 문 뒤에서 인자하게 웃고 있는 오채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자 진자명이 오채문 대화백을 뵙습니다.”

 자명은 조심스럽게 시립해 보였다. 혹시 예에 어긋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어른 흉내 내지 말고 할아비라고 부르라고 했잖느냐.”

 오채문이 인자하게 자명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손수 자명의 손을 마주 쥐고는 본당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서 들어가자.”

 처음 받아보는 따듯한 환대에 자명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명은 이러다가 갑자기 꾸중을 하진 않을까, 겁먹은 얼굴로 본당 안으로 들어섰다.

 본당 안에는 문진이 놓인 화선지가 있었고, 거기에는 반쯤 그리다 만 그림이 있었다. 한줄기 외엽일란이었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나 마치 살아 있는 듯 아름다웠다.

 “와아.”

 “허허, 어떠하냐? 그럭저럭 괜찮지?”

 그때까지도 자명의 손을 붙잡고 있던 오채문이 자랑하듯 말했다.

 자명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문득 자신이 예에 어긋났다는 것을 깨닫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본래 스승을 찾거든 지체하지 말고 가르침을 구하라 했다. 상준백 사부님도, 조운고 사부님도 가르침이 끝난 후에야 담소를 나누었지, 가르침 이전에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자명은 손을 조금 비틀어 빠져나가고 싶다는 뜻을 전한 후 오채문이 손을 놓아주자 화선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예에 어긋나지 않게 경건하게 벼루를 놓고 화선지를 펼쳤다.

 준비가 끝나자 자명은 조심스럽게 오채문을 올려다보았다.

 “저는 지금 운필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자신의 배움을 말한 후에 가르침을 구하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오채문은 뚱한 표정을 지을 뿐, 말이 없었다.

 자명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해, 해볼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느니라.”

 오채문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자명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느티나무 아래서 취했던 자세와 비슷한 자세였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우냐?”

 “예?”

 뜬금없는 질문에 자명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화공은 본래 두려움을 품어서는 아니 된단다. 세상천지에 아름다운 것이 가득한데, 두려움은 그것을 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지. 한데 너는 두려움에 가득 차 있구나.”

 “저, 저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자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오채문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저 겁먹지 말라는 소리를 하는 거란다. 나는 꾸중하지 않을 생각인데 네가 공연한 걱정을 하고 있잖느냐.”

 혼내지 않는다는 말에 자명은 혼란스러워졌다. 엄사(嚴師)가 아니거든 가르침을 받지 말라는 말처럼, 여태 만났던 분들은 모두 엄사였다.

 오채문 화백쯤 되면 엄사 중에서도 엄사일 줄 알았는데 보니까 인자하기 짝이 없다.

 “겁이 많은 걸로 보아 너는 여태껏 꾸중을 많이 받은 모양이다.”

 “스승님들께서는 저는 아둔한 편이라 제대로 배우려면 엄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이번엔 오채문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쯧쯧, 네 스승이 못됐구나. 아이의 마음은 맑고 순수하여 오히려 그들이 가르침을 받아야 할진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네 맑음만 더럽히고 말았어. 내 상준백 화공에게 한소리 해야겠다.”

 “제, 제가 아둔해서 그렇지, 스승님들은 잘 가르쳐 주셨어요.”

 제 말 때문에 스승들이 손해를 볼까 싶었는지 자명이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채문은 아이의 마음을 알아채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그러하냐?”

 고자질했다고 스승들에게 혼나지 않을까 하는 속된 마음은 아이에게는 없었다. 스승에 관한 순수한 애정으로 자명은 결사적으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렇다면 되었느니. 하지만 벌써부터 운필법을 배운 것은 정말 잘못된 거란다. 잘못 배워도 한참 잘못 배웠어.”

 “그럼 뭐부터 배워야 하나요?”

 자명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려운 것을 배울까 봐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물론 보는[觀] 법부터 배워야지. 이리 와보아라.”

 오채문이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본당의 쪽문으로 걸어가 문을 드르륵 열었다.

 그러자 엉망으로 꾸며진 화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지치기도 안 했는지 수풀은 무성하게 자라 있고 기화요초 대신 온갖 잡초가 난잡하게 자라 있었다.

 자명은 스승의 뒤에 서서 화원을 바라보았다.

 “아름답지 않느냐?”

 들뜬 스승의 목소리에 차마 엉망인데요,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자명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하지만 오채문은 그것을 귀신처럼 알아챘다.

 “요 녀석, 거짓말을 하는구나. 엉망이라고 생각하는 게지?”

 “네? 그, 그게…….”

 자명이 빨개진 얼굴로 우물쭈물하자 오채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것 보아라. 보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앉아보아라.”

 오채문은 자명을 독촉해 앉게 하고는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저기 저 꽃이 보이느냐? 왼쪽 아래쯤에 보라색으로 핀 예쁜 꽃 말이다.”

 자명은 오채문이 가리키는 쪽을 몇 번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조금 전에 보았을 때에는 분명히 아무것도 없었는데 오채문이 손가락을 움직이자 보라색 예쁜 꽃이 피어올랐다.

 “어?”

 “보았느냐?”

 자명은 오채문을 보고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어떻게 저런 예쁜 꽃이 갑자기 피어난 것일까?

 “저쪽에는 노란색 예쁜 꽃도 있지. 한번 보아라.”

 이번에도 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오채문이 가리키자마자 노란색 예쁜 꽃이 피어나 바람에 흔들리는 게 아닌가!

 그런 현상은 꾸준히 일어났다.

 오채문이 가리키기만 하면 예쁜 꽃이 피어나고, 담쟁이넝쿨이 자라나고, 나뭇가지가 ‘안녕’하고 인사를 했다.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났고, 나비가 손가락을 따라 날아왔다.

 마치 신선들이 부린다는 술법 같았다.

 “와아!”

 자명이 감탄을 내뱉었다.

 이제 화원은 엉망으로 자란 수풀들의 화원이 아니었다.

 보라색, 노란색, 붉은색, 분홍색 꽃들이 손을 흔들고 나비와 이름 모를 예쁜 새가 날아다니는 낙원이 되어 있었다.

 흰 구름을 마지막으로 오채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떠하냐?”

 자명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오채문을 바라보았다.

 “오채문 화백 어른께서 신기한 술법을 부려 구름이랑 나비를 부르고 꽃을 피게 만드신 건가요?”

 “내가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저것은 본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보는 법을 몰라 볼 수 없었던 것뿐이란다.”

 “보는 법.”

 자명이 고개를 푹 숙이고 혼잣말을 주워섬겼다.

 이토록 예쁜 것들을 볼 수 있다면 그 보는 법이란 것은 얼마나 훌륭한 것인가! 보는 법만 배울 수 있다면 매일 이런 예쁜 것들을 보게 될 테니 그야말로 신나는 일이 될 것이다.

 “보는 법은 어떻게 배우나요?”

 “나를 할아비라고 부르면 가르쳐 주마.”

 오채문의 농 섞인 말에 자명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는 잠시 머뭇거리며 고민하더니 몹시 쑥스러워하며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하, 할아버지.”

 “허허허, 오냐. 내 가르쳐 주마.”

 오채문이 주름진 손으로 자명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아버지의 손은 아빠의 손 같기도 하고 엄마의 손 같기도 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잠시 할아버지의 손길을 즐기던 자명은 문득 할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조심스레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하, 할아버지는 편찮으시잖아요. 저는 할아버지께서 다 나으실 때까지 배우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직 할아버지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은 자명이 수줍게 말했다. 보는 법을 몹시 배우고 싶지만, 그걸 가르치다가는 할아버지의 몸 상태가 더욱 나빠질지도 모른다.

 오채문은 껄껄 웃어 보였다.

 “내 건강을 걱정하는 것이라면 그럴 것 없느니라.”

 오채문은 자명의 손을 잡고 후원으로 걸어나갔다. 자명은 걱정스럽게 할아버지를 바라보았지만 혈색도 좋고 편안해 보여서 걱정은 금방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보는 법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했지만, 할아버지는 금세 편안하게 느껴졌다. 할아버지는 사부님들처럼 꾸중도 하지 않으시고 화도 안 낸다.

 대신 이것저것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 이야기가 어찌나 재미있던지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지금은 두 노소(老少)는 후원에 쪼그려 앉아 노고초(老姑草:할미꽃)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죽었나요?”

 “그래. 할머니는 결국 손녀를 보지 못하고 얼어 죽고 말았지. 그리고 봄이 오자 그 자리에 꽃이 피었는데, 그게 바로 이 노고초란다.”

 노고초에 얽힌 슬픈 전설을 듣게 된 자명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허허, 할머니가 가여워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니 자명이의 마음이 참 착하구나. 어디, 조금 더 걸어볼까?”

 오채문이 자명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명은 소매로 눈물을 쓱쓱 닦으며 할아버지를 따라 걸었다.

 남들이 보기엔 그다지 크지 않은 후원이었지만, 자명에게 후원은 넓고도 넓은 세계처럼 느껴졌다. 이곳저곳에 꽃과 초록색 예쁜 식물이 가득하니, 도통 지루할 새가 없다.

 몇 걸음을 채 걷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손가락으로 덤불을 가리켰다.

 “저기 초롱꽃이 있구나.”

 “초롱꽃이요?”

 “그래. 먹어도 되는 꽃인데, 새콤달콤한 것이 일품이지. 아직 필 때가 아닌데, 뭐가 그리 급한지 벌써부터 피어올랐구나. 한번 먹어볼까.”

 오채문은 초롱꽃을 한 송이 떼어 자명에게 건넸다.

 자명은 조심스럽게 꽃을 오물거리고는 시큼한 맛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초롱꽃은 달게 느껴졌고, 자명은 얼른 몇 개를 더 따서 우물거렸다.

 오채문도 한 송이 먹어보려 했으나, 본당에서 오채문을 감시하던 의원이 번개처럼 달려와 그를 말렸다.

 “어흠, 흠. 저 의원은 심심하지도 않은가 보다.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걸.”

 오채문이 미간을 좁히곤 본당으로 돌아가는 의원을 바라보았다. 자명도 본당을 바라보고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저 의원은 못됐어요.”

 “그래. 그렇구나. 저 의원은 못됐어. 한 송이도 먹지 못하게 하다니, 참으로 야박하구나.”

 오채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자명과 더불어 무어라고 대화를 나누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는 조손지간이다.

 할아버지와 자명은 그렇게 후원을 돌며 흙을 어루만져 보기도 하고, 식물 잎을 뚫어져라 관찰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노을이 질 무렵, 할아버지는 흙투성이로 일어나 자명의 손을 마주 쥐었다.

 “이런. 우리 몰골이 엉망이로구나. 아무래도 좀 씻어야겠다.”

 “네에.”

 자명이 진흙이 덕지덕지 묻은 손을 보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어른을 대할 때 몸가짐이 단정치 못하면 꾸중을 받게 되니,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런 자명을 보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오늘 재미있었더냐?”

 문득 행복한 포만감이 찾아왔다. 하루를 재미나게 보낸 데 대한 포만감이었다. 자명은 오채문의 손을 꼬옥 쥐고는 신이 나서 앞뒤로 흔들었다.

 “네, 되게 재미있었어요. 예쁜 꽃이랑 나비를 많이 구경했잖아요.”

 자명이 행복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러면 내일도 이 할아비와 후원을 구경할까?”

 “네? 정말요?”

 “약속하마. 이 할아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단다.”

 자명은 신이 나서 오채문과 맞잡은 손을 더 열심히 흔들었다. 어느새 오채문도 자명을 따라 손을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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