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코 서류를 훑어보던 키리안과 엘리야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키리안이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서류를 본 엘리야는 한쪽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는 둘에게 미카엘이 침착하게 말했다.
"얼마 안 되었어. 지금은 천사들이 공포에 떨까 봐 아직은 쉬쉬하고 있다. 수사관에게 안 맡기고 너희한테 맡길 수밖에 없는 데에는 사정이 있어.“
키리안은 서류에 보고된 천사의 시체 사진을 미카엘 쪽으로 보이며 말했다.
"천사를 이렇게 잔혹하게 살해할 수 있는 건 애초에 적지 않나요?"
“그렇지… 이 정도의 잔혹성이라면 보복 살해라는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악마 쪽일 확률이 높다고 보고 있어. 악마들은 흥분을 쉽게 하니까.”
“속단은 이르죠.”
미카엘의 말을 듣고 키리안이 바로 반박했다. 묘하게 날이 서 있는 키리안의 얼굴을 미카엘은 조용히 응시하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미카엘이 비웃는 듯한 기색으로 차갑게 말했다.
“키리안,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더니. 태도가 눈에 띄게 변한 것 같구나.”
미카엘의 시선이 엘리야에게로 잠시 향했다.
‘뭐 악마들은 상대를 홀리는 능력으로 역사를 이어왔으니 어쩔 수 없나.’
미카엘은 가볍게 생각하고 넘긴 뒤 아무렇지 않게 본론으로 돌아왔다.
“이 일을 맡게 되면 너희는 비밀리에 이 사건의 용의자를 찾아주면 돼. 피해자와 피해자 주변 인물들에 대한 정보는 바로 보내주도록 하지. 어때, 이 일을 하겠어?”
“네. 하겠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단호하게 말한 건 엘리야였다. 그런 엘리야의 모습에 미카엘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엘리야는 놀란 얼굴을 한 미카엘을 당당히 올려다보았다.
엘리야가 하겠다 하자 키리안도 승낙의 의사를 표했다. 둘은 미카엘의 허락을 받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화려하게 조각된 문을 열려는 키리안과 엘리야의 등 뒤에서 미카엘이 말했다.
“희생자에겐 ‘혼약자’가 있었어.”
“…….”
“혼약을 맺은 상태에서 상대를 잃었으니, 남은 혼약 상대는 지금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고.”
키리안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간결하게 대답했다.
“수사하는데, 참고하겠습니다.”
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미카엘의 집무실에 크게 울렸다.
엘리야와 키리안은 천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사건 현장으로 이동했다. 이 사건에는 비밀로 감추어져 있는 것이 너무 많아서, 사건을 파헤칠 수 있는 길들은 거의 다 막혀 있었다.
현재로서는 그들이 단서를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은 현장을 수색하는 것밖엔 없었다. 키리안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엘리야에게 말을 걸었다.
“이상하지 않나요? 악마 파트너를 만나보려고 했는데, 그 악마가 누구인지조차 극비고. 그 천사가 담당한 인간이 누군지도 알려 했는데 그거마저 극비.”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이래서 수사관들에게 수사를 맡기지 않은 걸까요?”
“그럴 가능성이 큰 것 같아. 가장 중요한 참고인들이 누구인지 알려줄 수 없으니. 그래도 수색은 해야 하고.”
둘은 침묵에 휩싸인 채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살해당한 천사는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 봤을 때, 보복을 당할 일이 전혀 없는 천사였다. 그는 항상 정시에 출근하고 맡은 일을 다 끝내야 퇴근하는 아주 모범적인 회사원이었다.
그것 외엔 특별한 게 없을 정도로 평범한 인물이기도 했다. 키리안과 엘리야는 피해자의 혼약자를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지만, 병동에서 현재 혼약자는 절대 안정이 우선이라는 답을 보냈다.
혼약(魂約). ‘영혼을 묶는다’라는 의미로,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천사들이 또는 악마들이 치르는 천상계의 영혼을 묶는 의식이다. 혼약을 하면 영혼이 묶여 있기 때문에 서로의 컨디션이나 감정 상태를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다.
혼약자는 혼약 상대가 살해당했으니, 지금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만날 수 없는 건 이해했지만, 키리안과 엘리야의 입장에서는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의 주변인을 알지도 못하고, 만날 수조차 없으니 조금의 단서도 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살해당한 천사가 발견된 곳은 회사의 쓰레기 소각장이었다. 천사와 악마들이 자주 다니지 않을 정도로 으슥한 곳이었다. 엘리야와 사건 현장을 둘러보던 키리안은 바닥에서 뭔가 반짝거리는 걸 발견했다. 그는 허리를 굽혀 은빛으로 반짝이는, 작은 장신구처럼 보이는 걸 주웠다.
“이게 뭐지?”
키리안이 중얼거릴 때였다. 그런 키리안의 뒤에서 누군가 날아올라 키리안의 뒤통수를 발로 가격하려고 했다.
“키리안!!”
멀리서 사건 현장을 관찰하던 엘리야가 그걸 발견하고 두 날개를 펴 빠르게 키리안에게 날아갔다. 엘리야가 재빠르게 키리안의 손을 잡고 자신 쪽으로 이끌었다. 키리안은 자신의 귓가 옆으로 엄청난 바람과 함께 스쳐 지나가는 발차기를 느낄 수 있었다.
키리안을 공격한 이는 로브를 써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로브를 덮어쓴 자가 도망치려 하자, 엘리야는 주변 나무 기둥 위로 빠르게 달린 뒤 그대로 방향을 틀어 그자가 있는 쪽으로 내리꽂혔다. 검을 소환해 자신 쪽으로 날아오는 엘리야를 본 로브를 쓴 자는 이를 악물었다.
챙-!!
로브를 쓴 자는 아슬아슬하게 품에서 검을 꺼내, 자신에게 날아오는 검을 막았다. 두 칼이 교차하고, 팽팽한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그 상태에서 엘리야는 날개를 펴 땅에서 발을 뗀 뒤 한쪽 발을 그대로 로브를 쓴 자의 얼굴을 강타했다. 로브를 쓴 자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크윽……!”
로브 아래 그의 콧날 아래에서 검붉은 피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엘리야가 그대로 주저앉아 있는 그에게 날아가 그의 몸을 검으로 그어버리려 할 때였다. 남자가 믿을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왼손에서도 검을 꺼내 엘리야의 날아오는 검을 막았다. 엘리야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양손잡이……?’
그 생각을 함과 동시에 남자의 검을 쥔 오른손이 엘리야의 목덜미로 향했다.
“엘리야 선배!”
이때 키리안이 두 날개를 펼치고 날아와 로브를 쓴 남자의 얼굴을 가격했다. 얼굴에 두 번이나 큰 충격을 받은 로브 쓴 그가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상대가 쓰러진 걸 확인한 키리안이 엘리야의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괜찮으세요?”
“어…… 덕분에.”
키리안이 허리를 굽혀 남자의 로브를 벗기려고 할 때였다. 로브 안에서 붉은 눈이 번뜩였고, 그 순간 주먹이 키리안의 얼굴을 세게 치고 지나갔다.
“윽!”
“키리안!”
엘리야는 분노한 눈빛으로, 도주하려는 로브를 쓴 남자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그 남자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순식간에 엘리야 눈앞에 뿌렸다. 고운 입자로 흩어지는 회색 가루들은 연기처럼 보였다. 매캐한 냄새가 눈과 입에 몰려오자 엘리야가 기침을 쏟아냈다. 키리안이 빠르게 엘리야에게 다가갔을 때는 그 남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선배, 괜찮아요?”
키리안이 양쪽 눈을 감고 괴로워하는 엘리야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러자 엘리야는 실이 끊긴 인형처럼 힘없이 옆쪽으로 쓰러졌다. 그런 엘리야를 키리안이 받아 안았다.
*
‘흑주술이 걸린 가루군요. 오래가진 않고 반나절 정도 이렇게 쓰러져 계실 겁니다. 문제는 저주가 걸려있어서, 이 가루를 들이마신 사람은 꿈에서 괴로운 과거를 계속해서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무슨 소리지?’
엘리야는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들었지만, 그 말의 의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엘리야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공포에 숨을 들이마셨다.
연갈색의 곱슬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헬레네가 자신 앞에 서 있었다. 헬레네는 고문을 당한 흔적이 역력한 채로, 원망의 눈을 하고서 엘리야에게 말했다.
“대체…… 왜?”
헬레네가 한 발자국 엘리야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엘리야는 한 발자국 뒷걸음질했다.
“엘리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헬레네의 뒤로 붉은 불들이 일제히 솟아올랐다. 모든 걸 집어삼키는 불들이 입이 찢어지라 웃고 있는 표정으로 변했다. 엘리야는 자신을 덮치려는 불들을 뒤로하고 앞만 보고 도망쳤다. 그렇게 도망치던 엘리야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자신 앞에는 엘리야가 평생을 그리워하면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이가 서 있었다. 자신 앞에 선 상대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엘리야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라파엘 선배…….”
백금발의 머리칼에 금안을 가진 그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빙긋 웃었다. 그는 신이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아름다운 존재였다. 웃는 그의 두 금안이 반짝이는 걸 본 엘리야는 자신의 심장이 죄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라파엘의 사지가 쇠사슬에 휩싸여 구속되었다. 크림색으로 빛나던 그의 큰 날개도 쇠사슬에 갇혀 힘없이 꺾였다. 쇠사슬에 사지가 구속된 라파엘이 고통으로 신음하며 온몸을 뒤틀었다. 그걸 본 엘리야가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안 돼! 멈춰, 당장 멈추라고!!”
엘리야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라파엘에게 다가갔다. 상처투성이가 된 그의 얼굴을 보고 엘리야가 자신의 한쪽 손을 그의 뺨에 대었다. 그러자 라파엘이 두 눈을 치켜뜨더니 엘리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가 증오에 찬 무시무시한 음색으로 말했다.
“엘리야 너는 나도, 헬레네도 구하지 못했어.”
엘리야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녀는 자신이 일생에서 가장 아끼는 이들을 구하지 못했고, 도망쳤다. 앞에는 라파엘이 뒤에는 헬레네가, 그녀를 가로막고 있어 그녀는 더 이상 도망칠 수도 없었다. 엘리야는 좌절감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느새 쫓아오던 붉은 불길들은 엘리야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때였다.
엘리야는 자신의 두 손을 누군가 따뜻하게 잡아주는 걸 느꼈다. 그 따스한 느낌에 엘리야는 눈물을 흘리던 것을 잠시 멈췄다. 그 온기는 엘리야를 온 힘을 다해 위로해주고 있었다. 대화하지 않음에도, 엘리야는 누군가가 자신을 위로하는 마음이 투명하게 전달되어 오는 걸 느꼈다.
엘리야는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이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엘리야의 앞에 키리안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두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키리안과 눈을 마주치자, 엘리야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별똥별처럼 흘러내렸다. 그러자 그 즉시, 마치 비 온 어두운 하늘이 개는 것처럼 불길도, 헬레네와 라파엘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얗게 변한 공간에 오로지 두 손을 잡고 있는 엘리야와 키리안만 존재했다. 엘리야는 햇살처럼 눈부시게 웃는 키리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 순간 엘리야는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