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8)
헬퍼(Helper). 신은 재미로 그랬는지 아니면 뚜렷한 철학을 가지고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피조물에게 ‘돕는 배필’을 지어주었다. 신은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그를 도울 수 있는 영혼을 마치 운명처럼 점지해 두었다.
천상계에서는 그런 존재를 헬퍼라고 불렀다.
헬퍼들은 자신이 도와야 하는 이의 기분을 본능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게다가 헬퍼는 자신이 도와야 하는 이와 손을 잡는 등 신체를 접촉하기만 해도 상대의 기분을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이 생겼다. 그 외에도 헬퍼는 상대의 곤란을 해결해 주려고 할 때, 집중력이나 힘 등이 자신의 평소 능력보다 더욱 뛰어나게 발휘할 수 있었다.
비비안은 그렇게 쓰여 있는 보고서를 최종 검토했다. 보고서의 마지막 줄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키리안이 엘리야의 헬퍼로 발현되었음을 보고드립니다.
확인을 마친 비비안이 검지를 튕기자, 보고서는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눈앞에 사라졌다. 신에게 잘 보고되었다는 증거였다. 비비안은 키리안이 엘리야의 헬퍼로 발현되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운명’이라는 게 있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엘리야의 새로운 파트너가 키리안이 된 지 며칠 만에 엘리야의 헬퍼로 발현하다니.’
이것만큼 운명적인 일이 있을까.
*
제노 사건이 일단락 된 지 이틀이 지났다. 퇴근한 키리안은 숙소로 돌아왔다. 늦은 시간에도 숙소는 불이 켜져 있었다. 키리안은 거실 소파 위에 쪼그린 자세로 누워 있는 엘리야를 발견했다. 키리안은 무릎을 굽혀 엘리야의 얼굴에 시선을 맞췄다. 그는 새근거리며 자는 엘리야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엘리야는 헬퍼가 된 키리안을 여전히 피했기에 얼굴을 이렇게 마주 볼 일이 별로 없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도 처음인 것 같다…….’
키리안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엘리야의 감겨 있던 눈이 천천히 뜨였다. 키리안과 눈을 마주친 엘리야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키리안은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 선배 깼어요? 깨우려고 하긴 했는데 너무 곤히 주무시길래…….”
“어, 어…….”
“그런데 선배 왜 방에서 안 자고, 왜 거실에서 자고 있었어요?”
“…….”
엘리야는 그 말에 답하기를 망설이는 눈치였다. 하지만 키리안은 마치 주인을 걱정하는 강아지 같은 눈망울로 엘리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런 키리안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악몽을 꿔서. 내가 악몽을 잘 꾸거든. 그럴 땐 방에서 잘 못 자. 거실 같은 데서 불을 켜둬야…….”
엘리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키리안의 큰 손이 엘리야의 손등을 감쌌다. 그 순간 엘리야는 자신의 몸이 부드럽고 푹신한 소파에 완전히 감싸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엘리야는 빠르게 뛰던 자신의 심장 박동이 차츰 느려지고, 숨쉬기가 편해지는 걸 체감했다.
이미 느껴본 적 있는, 헬퍼가 자신을 도울 때의 감각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에 엘리야는 입술을 깨물었다. 키리안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는 이런 식으로 도울 수 있으니까…….”
“…….”
“원한다면, 옆에 있어 드릴까요?”
엘리야는 키리안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괜찮아.”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향했다. 그런 그녀의 등 뒤로 키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 악몽 꾸면 그때 불러요. 언제든.”
엘리야는 고개만 약간 끄덕인 뒤 끝내 키리안의 얼굴을 보지 않고 자신의 방문을 닫았다.
*
‘엘리야,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지?’
방에 들어가 겨우 다시 잠든 또 엘리야의 꿈속에서 헬레네가 나타났다. 엘리야는 평소에는 헬레네를 다시 만나기를 그렇게 고대했건만 꿈에서는 아니었다. 헬레네가 나타나는 꿈은 엘리야가 절대 다시는 마주 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끔찍한 장면을 동반했다.
헬레네와 엘리야를 제외한 그 주변이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눈물을 흘리던 헬레네의 두 눈이 푹 꺼지며 검은 자리만 남고 그 구멍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상태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헬레네를 바라보던 엘리야는 몸부림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허억-!!”
잠에서 깨어났는데도 세차게 뛰는 심장은 쉽사리 진정되지를 않았다. 수척한 얼굴로 엘리야는 방에서 빠져나와 소파 위에 앉았다. 침대에서 편안하게 누워서 자봤자 악몽을 꾼 날엔 제대로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 엘리야는 소파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게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엘리야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거실에 햇빛이 가득히 들이차는 아침이었다. 순식간에 날이 밝은 걸 본 엘리야가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신기하게도 몸이 개운했다.
‘웬일로 이번엔 악몽을 또 안 꿨네?’
밝은 빛에 눈이 부셔 눈을 비비던 엘리야는 자신의 옆을 보고 깜짝 놀랐다. 키리안이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옆에 앉아있었다. 엘리야와 눈이 마주친 키리안이 햇살처럼 밝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아, 깨셨어요?”
엘리야는 상황 파악이 안 된다는 얼굴로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키리안…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새벽에 목이 말라서 부엌으로 나와 보니까 선배가 여기서 주무시더라고요. 그런데 식은땀을 흘리시면서 끙끙 앓으시는 것 같아서……. 저는 헬퍼잖아요. 푹 잠들 수 있도록 옆에 같이 있었어요.”
엘리야는 멍한 눈빛으로 키리안의 웃는 얼굴을 눈에 담았다. 그의 뒤에는 햇빛이 하얗게 쏟아지고 있었다. 엘리야는 키리안의 검은 머리칼과 대비되는 그의 흰 얼굴과 거기에 자리 잡고 있는 새벽하늘 같은 눈동자에 차례로 시선이 갔다.
키리안이 엘리야가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걸 알아차리곤 엘리야를 향해 눈빛을 맞추었다. 그 순간 붉게 달아오른 엘리야는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키리안도 헛기침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엘리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 쪽으로 걸어가는 키리안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면, 새벽부터 지금까지 옆에 있어 준 건가? 왜 그렇게까지 하지? 대체 왜…….’
아,
엘리야의 머릿속에서 과거 파트너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엘리야는 고개를 떨구며 생각했다.
‘그래, 쟤는 헬퍼니까.’
상념에 젖어있던 엘리야를 향해 키리안이 말했다.
“선배?”
“어?”
“아침 안 드실래요? 그… 제가 시간도 남아서 차려놨거든요.”
엘리야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키리안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살짝 달싹였다. 그러다 입을 다문 엘리야는 조금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미안. 지금은 생각 없어서.”
엘리야의 말에 키리안의 얼굴에서 실망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키리안이 시무룩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엘리야는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 쪽 식탁으로 다가가 키리안 앞에 앉았다. 놀란 키리안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엘리야는 그런 키리안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키리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드신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응.”
“그런데 왜…….”
“혼자 먹으면 외롭잖아.”
엘리야는 턱을 괴며 천천히 키리안을 응시했다. 엘리야의 시선에 키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엘리야가 눈이 반달 모양이 되도록 살짝 웃더니 낮게 속삭였다.
“잘 먹네.”
키리안은 얼굴이 빨개진 걸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는 것에만 집중해보려고 했다. 키리안은 일생에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식사를 끝냈다. 둘은 함께 출근 준비를 한 뒤, 숙소를 나섰다.
*
비비안의 일과의 시작은 미카엘에게 보고를 올리는 일로 시작되었다. 서류를 읽으며 내내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미카엘이,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오는 비비안을 보자 미소를 지었다. 비비안은 미카엘의 어두운 얼굴을 바로 알아채고는 말했다.
“미카엘 님 ‘그 사건’은 어떻게 할지 아직 고민 중이신가요?”
“응. 이 사건을 수사대에 맡길 수 없으니까, 여러모로 고민이 되네.”
미카엘은 읽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말했다.
“일단 이 사건은 그렇다 치고, 오늘의 보고를 들어야지.”
미카엘의 그 말에 비비안은 자신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패드를 꺼냈다. 비비안이 차분한 목소리로 보고를 시작했다.
“일단 회사 내에서 천사와 악마의 분리 구역을 없애려는 시도가 잘 안 이루어진다는 걸 보고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파트너로부터 알게 모르게 괴롭힘이 많다는 악마 사원들의 민원도 많고요. 며칠 전에는 악마를 상대로 집단 린치 사태가 있었습니다.”
“그건 수사관들이 할 업무 같은데.”
미카엘의 말에 비비안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상황을 설명했다.
“그동안 사건이 처리되는 과정을 보아왔을 때, 수사대 천사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일단 인력난도 문제고요.
가장 큰 문제는 수사관들이 다 천사들이다 보니 악마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수사가 진행될 때가 많다는 겁니다. 물론 수사관님들은 공정하게 수사하시려고 노력하시겠지만…….”
"비비안, 비비안.“
미카엘은 부드럽게 비비안을 부르더니 그녀의 손을 쥐었다. 미카엘이 비비안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수사관은 천사들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어. 애초에 신은 우리에게 악마를 지배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잖아. 우리에겐 악마를 다스려도 된다는 자격이 있다는 거야."
"……."
"그래도 일단 네 청원들 다 참고할게.“
잠자코 자리로 돌아가려는 비비안을 보던 미카엘이 말했다.
"넌 정말 모두에게 다정하구나.“
그 말에 비비안은 미카엘 쪽으로 돌더니 말했다.
"그래서 싫으세요?"
"아니.“
미카엘은 자리에서 일어서 비비안 앞으로 섰다. 비비안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미카엘을 올려다보았다. 비비안의 눈빛을 본 미카엘이 살풋 미소를 지었다.
"좋아서.“
미카엘이 비비안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렇게까지 웃는 미카엘의 얼굴은 유일하게 비비안만이 볼 수 있었다. 그런 얼굴을 하는 것도 잠시, 미카엘은 고민에 빠진 얼굴이 되었다.
미카엘의 탁자 위에 있는 보고서는 ‘극비’를 뜻하는 붉은색 도장이 찍혀 있었다. 끔찍한 사건을 생각만 해도 두통에 얼굴을 조금 찡그린 미카엘이 비비안에게 말했다.
“지금 해결해야 하는 사건 말이야. 신의 뜻이기 때문에 수사관에 맡길 수는 없어. 비밀스럽게 조사해줄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인력이 필요해. 비비안 네가 추천해줄래?”
비비안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미카엘에게 입을 열었다.
“저는……․”
출근하자마자 키리안과 엘리야에게 미카엘의 호출이 떨어졌다. 대천사님에게 호출을 받은 그들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미카엘의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그들에게 본론을 바로 말했다.
“너희한테만 맡기고 싶은 새로운 일이 있다. 물론 극비로 진행될 거야.”
최근에 떨어졌던 임무도 수행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새로운 임무를 추가로 받게 된다니 당연히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어두워지는 두 명의 표정을 보고 미카엘이 재빠르게 덧붙였다.
“둘이 새로운 일을 맡으면 평소에 하던 인간 업무는 잠시 맡지 않아도 좋아. 그리고 이 일을 해주면 보너스는 물론이고, 성공적으로 마칠 시 진급도 보장되어 있다.”
꽤 획기적인 조건에 키리안과 엘리야는 동시에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미카엘은 그런 둘 앞으로 서류를 내밀었다. 잠자코 서류를 훑어보던 키리안과 엘리야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키리안이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살인 사건이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