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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재 > 무협물
화공도담
작가 : 촌부
작품등록일 : 2016.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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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와 법을 익힘에 있어 느리디 느린 둔재.
법식에 얽매이기보다 마음을 다하며,
술을 익히는 데는 느리지만 누구보다 빨리 도에 이를 기재.
형식과 필법을 익히는 데는 둔하나 참다운 아름다움을
그릴 수 있게 된 화공 진자명의 강호유람기가 펼쳐진다.

 
2 화
작성일 : 16-07-13 11:47     조회 : 696     추천 : 0     분량 : 8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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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자명의 하루는 늘 똑같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간단히 소세하고 나면, 상준백 사부님께 운필법을 배우고 저녁엔 용묵법을 배운다. 그다음에는 혼자 낙서를 하며 놀다가 자러 갔다.

 며칠 전처럼 오늘도 회초리를 잔뜩 얻어맞아 팔이 퉁퉁 붓고 말았고, 며칠 전처럼 조운고 사부님은 혀를 끌끌 차며 무심하게 지나가 버렸다.

 자명의 하루는 분명히 평소와 똑같았다. 하지만 자명의 속은 시커멓게 멍들어가고 있었다. 새카만 먹처럼 쉽게 낫지 않을 아릿한 멍울이었다.

 오늘같이 동문수학하는 사형제들이 놀릴 때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너 아직도 붓 쥐는 법 모른다며? 쌍구법(雙鉤法) 해봐, 쌍구법.”

 덩치가 산만 한 소년 왕치가 히죽히죽 비웃으며 말했다. 비슷한 시기에 입문한 주제에 자명을 하인 다루듯이 하는 아이였다.

 “나 쌍구법 아는데…….”

 자명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붓을 쥐었다.

 엄지와 검지, 중지로 붓을 잡는 것이 쌍구법이다. 붓을 쥐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당연히 틀릴 리가 없다.

 상준백 사부님께 혼났던 것도 자세가 옳지 못하다고 혼난 것이지 붓을 잘못 쥐었다고 혼난 것은 아니었다.

 “그럼 단구법(單鉤法) 해봐.”

 “단구법도 알아.”

 자명이 고집스럽게 말하며 붓을 쥐어갔다. 단구법은 자주 사용하지는 않지만 작고 가는 글씨를 쓰기에 어울리는 것으로, 엄지와 검지로만 잡는 법이다.

 “아니, 잠깐. 이걸로.”

 왕치가 회심에 찬 미소를 지으며 붓을 내밀었다.

 자명이 당황한 듯 두 눈을 끔뻑였다. 왕치가 내미는 붓이 손에 비해서 너무 큰 탓이었다.

 “거 봐, 못하지? 못하지?”

 “할 수 있는데. 붓이 커서 그런 건데.”

 자명이 주눅 든 목소리로 변명을 하자 왕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거짓말하지 마! 못하면서!”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것에 짜증이 난 왕치가 자명의 가슴을 세게 밀쳐 버렸다.

 “아야!”

 “그만 하여라, 왕치야.”

 저만치에 서 있던 점잖은 얼굴의 소년이 준엄하게 왕치를 불렀다. 왕치가 머쓱한 듯 주춤거렸다.

 “어, 자언아. 나는 그냥…….”

 덩치가 산만 해 싸움을 하면 왕치가 틀림없이 이길 텐데도, 왕치는 점잖은 소년의 말에 기가 죽어버렸다.

 점잖은 소년의 이름은 이자언(李慈彦)으로, 새로 들어온 제자 중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아이였다.

 “자명이는 붓도 빨고 바닥도 닦아야 하지 않느냐. 혹시 다치기라도 하면 누가 일을 하겠느냐.”

 자명의 얼굴이 주눅 든 표정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그건 조운고 사부님께서 모두 같이하라고 하셨는데…….”

 “네가 해. 실력도 없는 놈이 하인 일이라도 잘해야지.”

 이자언이 한 말에 또래 소년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들이 자기의 농담에 웃어주자 신이 난 이자언이 짐짓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럼 수고해라. 참, 내 붓은 특별히 잘 관리해야 할 것이야. 노루의 꼬리털로 된 귀한 붓이거든.”

 “하지만 다 같이 하라고 하셨단 말이야.”

 자명이 무어라고 말하려 했지만, 이미 소년들은 듣고 있지 않았다.

 자명은 우진당을 벗어나는 동문 사형제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울적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이 사용한 붓이 여기저기 널려 있고, 파지가 된 화선지까지도 수도 없이 많다. 게다가 먹물이 튄 곳도 있다.

 이것저것 닦아내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것이다.

 “에휴…….”

 자명의 조그마한 입에서 한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우진당을 치우는 일은 제법 오래 걸렸다. 파지와 벼루를 정리하는 일은 쉬웠지만 먹물이 튄 바닥을 닦는 것은 어려웠다. 자명은 작은 손으로 낑낑거리며 열심히 바닥을 닦아야 했다.

 다 닦은 후엔 붓을 모아서 우물가에 가져간 다음 깨끗이 빨아서 널었는데, 손놀림이 서툴다 보니 옷이 잔뜩 젖고 말았다.

 자명은 축축해진 옷을 입은 채 자신의 붓을 챙겨 들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문득 하늘을 보니 어느새 주홍빛 노을이 예쁘게 지고 있었다.

 “에휴…….”

 자명은 노을이 지는 것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아이들이 저희들끼리만 놀고 끼워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명은 늘 혼자 놀았는데, 노을이 지면 꼭 느티나무 아래서 낙서를 하곤 했다.

 오늘도 바닥에 쭈그려 앉아 낙서를 할 참이었다.

 자명은 붓에 흙이 묻지 않도록 잘 챙겨둔 다음, 느티나무 아래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흙바닥에 한 획을 그어나갔다.

 “엄마.”

 인자하게 안아주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는 엄마. 엄마는 만날 웃는 얼굴이니까 웃는 걸 그려야지.

 자명은 아이치고는 제법 정성껏 그림을 그렸다. 마의를 입은 여인이 환하게 웃는 것을 삐뚤빼뚤 그려낸 자명은 코를 킁, 하고 삼켰다.

 “헤헤.”

 그려놓고 보니 엄마랑 꼭 닮았다.

 다음은 아빠를 그릴 차례다. 노을이 다 졌는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지만 자명은 그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커다란 아빠의 모습을 그려 나갔다.

 아빠의 팔은 두껍다. 수염이 꺼끌꺼끌해서 얼굴을 비비면 따갑다. 웃음소리를 들으면 덩달아 웃게 되는 이상한 점도 있다.

 마침내 아빠의 모습까지 다 그린 자명이 헤죽헤죽 웃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호오, 좋은 그림이로다.”

 바닥에 쓱쓱 낙서를 하던 자명이 고개를 빠끔히 들어 올렸다.

 자명의 앞에 한 노인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명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오, 오 화백 어른!”

 “어린 나이에도 이처럼 좋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니 네 재능이 몹시 출중한가 보다. 이름이 무엇인고?”

 인자한 노인이 재차 말했지만, 가슴이 쿵 떨어진 자명은 그것을 알아듣지도 못했다.

 노인은 자명의 놀란 표정을 보지 못했는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니, 말하지 말거라. 네 얼굴을 본 기억이 있어. 너는 아마도…….”

 자명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다독이며 눈을 끔뻑였다. 겁에 질린 표정에 몸까지 덜덜 떤다.

 “그래, 월산이 그 친구의 손자였을 게야. 이름이 진자명이라 했던가?”

 노인은 기억이 떠오른 것이 기쁜 듯 손뼉을 치며 환하게 웃었다. 자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저는 자명인데요, 오 화백 어른.”

 “화백이라니? 어린 녀석이 어른 흉내를 내는구나. 월산이와 나는 의형제나 다름없었으니 나도 네게 할아비가 되느니라. 그러니 너는 나를 할아비라고 부르면 된단다.”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명처럼 느티나무 아래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자명이 그린 그림을 보고 연신 감탄했다.

 “대단하구나, 대단해. 네 그림 실력이 정말 뛰어나구나.”

 “아, 아니에요. 저는 잘 그리지 못해서 만날 혼나는데…….”

 “이런 그림을 그리는데 누가 너를 혼낸단 말이냐? 이처럼 전신사조(傳神寫照)하기도 어려운데.”

 전신사조가 뭔지 몰랐지만 그것이 칭찬이라는 것은 알았다.

 자명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난생처음 칭찬이라는 것을 받아본 것이 기뻐서였다.

 그렇게 멍해져 있는데, 오채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올려다보려니 목이 아프구나. 너도 여기 앉아라.”

 “네에? 네.”

 자명이 후다닥 옆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두 노소는 그렇게 느티나무 아래에 쪼그려 앉아 바닥에 그려진 낙서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 부부는 누구인고?”

 오채문이 인자하게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낙서를 보자 조금 마음이 편안해진 자명은 헤죽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여자와 남자를 번갈아 가리켰다.

 “우리 엄마랑 아빠예요. 아빠는 힘도 세구요, 엄마는 되게 예뻐요.”

 “호오, 그렇구나. 한데 네 아비와 어미는…….”

 본래 네 아비와 어미는 귀천(歸天)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려 했다. 친우 진월산이 아들 내외를 잃었다며 술로 시름을 달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오채문이었다.

 하지만 오채문은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아이의 앞에서 부모의 죽음을 논하기는 몹시 어려운 일이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그림을 왜 흙바닥에 그리고 있는고? 들어가서 그리지 않고서.”

 노을이 다 져가는 시간에 홀로 앉아서 흙바닥에 그림을 그린다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다.

 그를 의아하게 여긴 오채문의 질문에 자명이 수줍게 대답했다.

 “아빠를 기다려요.”

 오채문은 입을 다물었다. 무어라 말하는 대신 그는 인자한 눈으로 한참 동안 자명을 바라보았다.

 잠시 뒤에야 오채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비를?”

 “네. 백 밤만 지나면 데리러 온댔어요.”

 똑같은 병에 걸려 버린 자명의 아비와 어미는 죽음을 맞기 직전까지 자명을 걱정했다. 천애고아가 될 자명이 이 험한 세상을 어찌 헤쳐 나갈까 하는 고민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죽음을 맞기 직전에 자명의 할아버지가 도착했다. 아비와 어미는 그제야 아이의 입에 낱알 몇 톨이라도 들어가겠다는 것을 확신하고는 안도했다.

 하지만 자명은 앙앙 울며 아비와 어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도 부모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찰싹 들러붙었다.

 ‘아비가 백 밤만 지나면 데리러 갈게’ 하고 한참을 달랬을 때에야 자명은 진정될 기미를 보였다. 자명의 아비는 ‘엄마도 같이 와?’라고 수줍게 묻는 자명을 그제야 떼어낼 수 있었다.

 자명의 할아버지가 자명을 데리고 갈 때, 아이는 고사리만 한 손을 흔들며 말했다.

 ‘엄마, 아빠, 안녕. 자명이 꼭 데리러 와. 꼭 와야 돼.’

 데리러 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자명의 아비와 어미는 데리러 가겠노라고 약속했다.

 훗날, 그 둘이 죽음을 맞은 후 자명의 할아버지는 홀로 돌아와 아들 내외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렀다.

 “근데 아빠는요, 백 밤 지났는데도 안 와요.”

 자명이 홀린 듯 낙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친우 진월산에게 들어 그간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오채문이 인자하게 웃었다.

 “그래, 예서 아비와 어미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래서 이리 전신사조할 수 있었던 게야.”

 오채문의 시선이 다시 그림으로 향했다. 아이의 절절한 마음이 그림에 배어 있었다. 획도 삐뚤빼뚤하고 구도도 엉망이지만, 아이의 진심이 배어들어 어미는 정말 인자해 보였고 아비는 정말 강인해 보였다.

 그림은 엉망일지 모르나 그리움만은 가득 담겨 있으니, 인물이 살아 있는 듯 생생했다.

 “본디 사람을 그릴 때에는 그 인물의 정신까지 그림에 깃들어져야 한다고 했단다. 그게 바로 전신사조의 의미지. 네 그림에는 아비가 있고 어미가 있구나.”

 오채문은 다시 한 번 그림을 바라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본래 그림이란 사물을 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담는 것이다.

 “이제 너를 돌봐줄 할아버지도 없으니 네가 많이 쓸쓸했구나.”

 자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채문의 목소리에 깃든 인자함이 자명이 꼭꼭 묻어두었던 슬픔을 건드리고 있었다. 오채문의 품에 안겨 엉엉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자명은 저도 모르게 울먹였다.

 “괜찮느니, 괜찮느니.”

 오채문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늙은 몸을 가누기가 버거운 듯 끙차, 소리를 내며 일어난 오채문은 허리를 굽혀 아이의 손을 움켜쥐었다.

 “해가 져가는구나. 날이 차다. 이만 들어가자꾸나.”

 “네에…….”

 자명은 울먹거리며 오채문의 손을 마주 쥐었다. 오채문의 손은 주름졌으나 참 따듯했다.

 “네 할아버지도 세상에 없고 네 아비와 어미도 돌아올 것 같진 않다마는, 걱정할 것이 없느니라. 저 봐라, 해가 지지 않느냐?”

 자명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사라지고 대신 어둠이 찾아와 있었다.

 “하지만 내일이면 또다시 해가 뜨지. 그것이 바로 순리고 이치란다. 생각해 보려무나. 봄이 지나가면 여름이 찾아오고, 가을이 가면 금세 겨울이 된단다. 하지만 겨울이 끝은 아니야. 다음 해에는 꼭 봄이 오지.”

 마치 자장가처럼 운율이 있는 소리로 오채문이 말했다.

 자명은 문득 가슴의 어딘가가 깨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빠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자명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는 오채문에게 질문했다.

 “오 화백 어른, 우리 아빠랑 엄마는 안 오나요?”

 “그럴지도 모른단다. 어쩌면 네 할아비처럼 네 아비와 어미에게도 겨울이 찾아왔을지 모르지.”

 “으아앙!”

 자명은 걸음을 멈추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어려운 소리인지라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는데도 아빠랑 엄마가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소리는 명확히 알아들었다. 오채문과 마주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오채문은 씁쓸하게 웃으며 자명의 손을 놓고는 번쩍 들어 안아 올렸다.

 “울지 말거라, 울지 말거라.”

 “엄마아! 으아앙!”

 “괜찮느니, 괜찮느니.”

 오채문이 자명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자명은 몸부림을 치며 울음을 터뜨렸지만, 인자한 손은 안정감있게 자명의 몸을 안고 있었다.

 얼마를 울었을까?

 “끅, 엄마… 아빠…….”

 한참을 울던 자명이 조금씩 울음을 멈추며 오채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안 그래도 다사다난했던 하루를 보낸 상태에서 앙앙 울기까지 하자 눈꺼풀이 절로 무거워진다.

 자명은 머리를 기대고 꺽꺽거리며 눈을 감았다. 울다 지쳐 잠이 드는 아이를 오채문이 따스하게 얼렀다.

 “걱정 말거라. 겨울이 가고 나면 봄이 오는 법이니.”

 잠이 든 상태에서도 그 말을 들었는지 꺽꺽거림이 사라지고 호흡이 한층 안정되었다.

 “네 할아비도, 네 아비와 어미도 봄이 되었을 게다.”

 오채문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자명은 이제 완전히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오채문은 아이의 등을 두드리다가 고개를 돌려 잠든 아이의 얼굴을 흘끔 바라보았다.

 “잠이 들었구나.”

 늙은 몸으로 아이를 계속 안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허어, 요 버릇없는 녀석. 잠들기 전에 어디서 머무는지는 알려주어야 할 것 아니냐? 월산이 머물던 화선당(畵仙堂)에 아직도 머물지는 않을 테고, 갓 들어온 제자들이 머무는 곳에 한데 있으렷다?”

 “오 화백님! 오채문 화백님! 여기 계시면 어찌합니까!”

 오채문을 구원해 준 것은 곽주였다.

 차기 채화당감공(彩畵堂監工)감이라 일컬어지는 곽주는 오채문에게 저녁 문안을 드리려다가 인기척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경기를 일으켰다.

 마음이 다급해진 곽주는 몇몇 화공들과 함께 채화당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다. 중병에 걸려 있으니 오채문 화백은 함부로 움직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여기 계시면 어찌합니까! 몸도 성치 않으신데!”

 곽주가 바람처럼 달려와 오채문을 보고 성을 냈다. 걱정하는 마음이 커서 일어난 울화다.

 “허헛, 심려를 끼쳤구먼.”

 “그 아이는 누구입니까? 무거울 터이니 제게 맡기십시오.”

 곽주는 오채문의 품에 안긴 자명을 빼앗듯이 안아 들었다.

 오채문은 속절없이 아이를 빼앗기고는 허탈하게 웃으며 변명을 했다.

 “허헛, 이것 참. 미안하게 되었으이, 곽 화공. 나는 그저 몸이 찌뿌드드해서 채화당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다녔을 뿐이라네.”

 “하면 말씀을 하셨어야지요!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습니까! 의원을 대동하고 함께 걸으시면 될 터인데.”

 “통증이 많이 가셨다네, 곽 화공. 의원이 뭐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오래 살긴 글렀지만 금방 죽지도 않을 걸세.”

 오채문이 허허롭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모습에 곽주의 화도 누그러졌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오 화백은 백수(白壽)를 누리다 가실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네, 곽 화공. 나도 그렇고 말이야.”

 오채문은 허허롭게 웃으며 뒷짐을 지고 자신이 머무는 본당으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아이를 안은 곽주가 그 뒤를 따랐다.

 오채문과 곽주의 대화를 들은 모양인지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오채문과 곽주를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중에는 상준백도 있었다.

 “앗, 자명이 저 녀석이 왜……?”

 상준백은 곽주의 품에 안긴 자명을 보자마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는 재빨리 다가와 자명을 받아 들었다.

 깊은 잠에 빠져든 자명은 깨어나지도 않고 새근새근 잘 자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곽주 화원. 혹여 이 아이가 오채문 대화백께 무례라도 끼친 건…….”

 상준백이 걱정스럽게 묻자 곽주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 아이를 안고 계시긴 했네만, 조손으로 보일 정도로 화기애애했으니 걱정 말게. 그보다 그 녀석이 작고하신 진월산 화백의 손자로군.”

 재능이 없다던 평가를 떠올린 곽주가 아이의 얼굴을 이채롭게 바라보았다. 천하의 오채문 화백의 품에서 잠이 들다니, 이 아이도 운이 참 좋다.

 곧 더 운이 좋은 일이 벌어졌다.

 “아, 그렇지. 이보시게, 곽 화공.”

 앞서 걸어가던 오채문이 고개를 돌려 곽주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 내가 좀 가르쳐 보려네.”

 “예? 이 아이를 말입니까?”

 곽주 대신 상준백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곽주가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냐는 듯 상준백을 바라보자, 상준백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 아니, 그게 아니오라, 이 아이의 재능은 하품입니다. 소일거리 삼아 가르치실 요량이라면 다른 재질 있는 아이여도 충분할 터인데…….”

 “그만하면 내가 본 기재 중 최고인걸.”

 오채문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준백의 얼굴이 멍하니 변해갔다. 가장 쉬운, 다른 아이들은 모두 깨치고 넘어간 현완법을 아직도 공부하는 아이인데 기재 중 최고라고?

 상준백의 표정처럼 곽주의 표정도 어두웠다.

 “아니 됩니다, 오 화백님. 몸도 편치 않으신데.”

 “걷지도 못하게 하는 것을 보니 앞날이 많이 답답하겠어. 그 아이가 내 답답함을 씻어줄 걸세. 부탁하네, 곽 화공.”

 오채문이 껄껄 웃으며 다시 몸을 돌렸다.

 곽주는 무어라 더 말하려 했지만, 오채문의 허허로운 태도에 눌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상준백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준백은 품에 안아 든 자명을 기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기재? 기재라고? 이 아이가?”

 상준백이 어떤 눈으로 보거나 말거나 자명은 새근새근 잘 자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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