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강이는 혁의 집으로 향했다.
‘뭔 사람이 이렇게 많아?’
동네 사람들이 무슨 구경이라도 났는지 혁의 집 앞에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대문을 두드려봤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혁이 혼례를 안올렸으면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이건 아니었는데...!’
색시, 색시하며 혁이 색시를 입에 달고, 색시 보러 매일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부러움이 더 컸다.
‘좋아하는 사람과 평생 함께 할 수 있는 니가 부럽다 혁아’
‘그래, 니가 그렇게 좋음, 나도 좋아해줘야 하는 거지? 우린 친구니까...’
혼례 전날까지 색시를 보러 쫓아가는 혁의 뒷모습을 보며
‘그래, 이젠 마음을 비워야 해. 너를 내려놓을게.’
강제적으로라도 마음을 비워야 한다, 내려놔야 한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대체 왜, 혼례를 뒤집었어?’
월담이라도 해 묻고 싶었지만, 강이는 그냥 돌아섰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때가 되면 말해주겠지..’
‘지금은 혼자 있고 싶을 거야. 혼자 두는 게 맞아.’
집으로 돌아온 강이는 활을 쏘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마음이 심란하면, 활을 들었다.
‘차라리 혼례를 보는 게 낫지.... 맞은 덴 괜찮을까?’
자기 가슴이 찢어지면 찢어졌지, 혁이 죽도록 맞았단 말이 가슴에 콕 박혀 손가락에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강이는 그렇게 활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 * * * *
혁은 온몸이 아팠다. 등이며 어깨며, 다리며 온몸을 맞은 터라, 온몸이 퉁퉁 붓고 피멍이 들었다.
“어디 좀 봐요. 이거라도 바르면..”
“괜찮아 나가.”
“대체, 오라버니 무슨 일이길래,”
“나가줘.”
“혼례 올려 달랄 땐 언제고... 뭐예요 예?”
“......”
“아버진 술만 드시고 계세요..”
“........”
“대체 왜 그랬는지, 나한테만 말해 봐요 예?”
“나가라구!”
좀처럼 화를 안내던 혁이 버럭 화까지 내자, 미영은 할 수 없이 일어섰다.
“뭐라도 먹어요. 그래야 상처도 빨리 낫지. 에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미영이 나가자, 벽을 향해 뒤돌아 누웠던 혁은 일어나 앉았다.
‘아얏~~!’
하지만 엉덩이가 아파 앉아있기도 힘들었다. 온몸에 멍이 들어서 앉아있기도, 누워있기도 아픈 혁은 무릎을 쥔 채 쭈그리고 앉았다.
‘대체 강이는 왜 남자로 살고 있을까?’
처음엔 강이가 여자여서 좋았다.
강이가 여자인 것을 알고 자기가 미친놈이 아니란 사실도 좋았다.
파혼을 할만큼, 죽도록 두드려 맞았어도 괜찮았다.
그런데, 이젠 궁금해졌다.
대체 왜 남자로 살아가고 있는지.
모두가 강이를 남자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남자로 키워진 것인데...
아님,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일까?
강인 남자인데, 내가 여자라 믿고 싶은 것인가?
내가 미쳤나?
아냐, 강이는 여자야.
그렇다면, 왜 숨기고 남자로 사는 거야, 대체.
그동안 알고 있던 강이가, 강이가 아닌가?
그렇다면 강이는 누구지?
쭈그리고 앉은 혁은 끝없는 생각에, 답 없는 생각에, 도돌이표 물음에 빠져있었다.
‘강이야 대체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 * * *
닷새가 지나가고 있었다.
‘더 이상 못참아!’
강이는 혁이 궁금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집으로 찾아갔다. 혁은 지난번처럼 방에서 꼼짝도 않고, 누워있었다.
“나 왔어.”
“............”
예상대로 혁은 누운 채 대꾸도 없었다. 웅크리고 누운 혁의 반대편 벽에 강이는 쭈그리고 앉았다.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혁아...”
“.............”
“그냥 훌훌 털고...다시 살아보자.”
“....??”
“나도 갑자기 어느 날 세상이 끝난 것처럼, 그런 때가 있었거든.”
‘내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인 걸 알았을 때’
“근데 살다보니, 그게 또 별 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그러다 또 어떤 날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왜 살고 있나 싶을 때도 있었고...”
“...........”
“근데 또 살다보니, 그냥 참을 수도 있을 거 같고...”
“..............”
“사는 게 그렇더라, 똑같은 일인데도 어느 날은 버겁고, 어느 날은 괜찮고...”
“.............”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혁이 너는, 너 삶을 살아.”
‘뭐, 내 삶을 살라고?’
“색시가 무슨 거짓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
“그냥 각자 자기 인생 사는 거야. 색시는 색시 삶을 살 거고, 너는 너 삶을, 나는 내 삶을,”
“................”
“그냥 그렇게 살아보자 혁아. 나도 사는데...”
‘내 삶을 살라고? 내 속엔 강이 너가 가득한데, 어떻게 내 삶을 살아? 어떻게 사는 게 내 삶인지 모르겠어 강이야.’
강이가 한 말들을 곰곰이 되씹는 혁은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더 복잡한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넌? 니 삶은 어떤데? 여자면서, 남자로 사는 삶이?’
혁은 궁금해 묻고 싶었다.
‘그래, 물어보자. 대체 왜 남자로 살고 있는지.’
혁은 조용히 일어나 강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온몸에 상처들이 욱신욱신거리기 시작했다.
피식!
혁은 강이를 보고 웃고 말았다.
몇날 며칠 혁 걱정에 잠을 제대로 못잤던 강이는 자기도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아이구!”
옆으로 쓰러지려 하자, 혁이 얼른 기어가 강이 옆에 앉아 어깨를 내밀었다.
“윽!”
강이 머리가 혁 어깨로 기대오자, 혁은 통증이 두 배로 밀려왔지만, 참았다. 참을 수 있었다.
‘잠 하나는 정말 잘 잔다. 산에서도 지금도.’
혁은 강이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그래, 내 삶을 살아볼게. 고마워 강이야.’
혁의 입에서도 하품이 쏟아졌다.
방안에 어둠이 서서히 내리고 있었고, 자고 있던 강이가 눈을 떴는데,
‘엄마야!’
강이가 혁과 뒤엉켜 자고 있었다. 놀란 강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슬그머니 일어서다 혁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래 자고 일어나. 푹 자고 나면 기분도 한결 나아질 거야.’
혁의 얼굴이라도 본 강이는 마음이 놓였다.
* * * * *
“뭐어? 야반도주?”
“예에.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요.”
“......”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지체 높은 양반 댁에서 몰락한 무사 집안과 왜 혼례를 올리겠어요?”
분녀는 세상 신난 것처럼 떠들어대고 있었다.
“소문엔 곧 원나라에서 사신이 온대요. 그럼 공녀 선발이 이뤄질텐데, 그 나리께서 나랏님한테 미운 털이 박혔대요. 그래서 따님이 공녀로 팔려가기 전에 그렇게 혼례를 서둘렀다고....”
“........”
“근데, 사실 그 전부터 머슴하고 그 집 아씨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지 뭐예요. 그걸 혁이 도련님이 알고 혼사를 깨버린 거구요.”
강이는 혁이 색시를 보러 갔을 때, 그날 잠시 봤던 그 머슴을 떠올렸다.
‘그래 처음 봤을 때부터 아주 건장하고, 젊고 잘생긴 머슴이다 했어.’
“내가 오늘 아주 깜짝 놀랄 일을 알았거든. 그동안 나를 감쪽같이 속인 거야.”
‘색시와 머슴 관계를 알고 그날 밤 그렇게 괴로워했었구나.... 그 속이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찢어졌을까. 에휴...’
강이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도련님이 왜 한숨이세요? 잘된 일인데.”
“뭐?”
“어찌됐든 혁이 도련님, 혼례를 안올렸잖아요. 전 오히려 고마운데요.”
“그런 소리가 나와? 혁이 지금 얼마나 힘든데..”
“예...”
“....”
“도련님, 전 그 아씨가 한편으론 부럽기도 해요.”
“... ???”
“서로 좋아서 도망까지 치니, 얼마나 좋아요. 저도 정남이랑 살수만 있다면, 보쌈이라도 하고 싶은데, 근데, 정남이는 아무 말이 없어요. 칫.”
“.......”
강이는 혁이 걱정돼 분녀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혁은 그날 이후, 집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고, 강이도 잠깐 보고 온 뒤론, 따로 찾아가지 않았다. 때가 되면 혁이 세상으로 나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에휴, 혁이 속이 새까맣게 탔겠다...’
* * * * *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냐? 정말, 흉측하게 도는 소문이 사실이냐?”
도균은 혁을 불러 앉혀놓고 물었다. 하지만 혁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혁은 색시한테 정 붙이기 위해 매일 그 집을 찾아갔었다. 그런데, 그 집 머슴과 처자가 서로 좋아하는 사이란 걸 알게 됐다. 하지만, 혁한테 문제될 게 없었다.
‘어차피 내 마음 속에도 강이가 있는데, 어쩜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어.’
그런데, 강이가 여자라는 사실을 안 이상, 그대로 혼례를 치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혼례식 전날 밤 그 집을 찾아간 거였다. 그런데, 그날 밤에도 그 처자의 방에서 머슴이 나오는 걸 목격했다.
“이 혼사는 서로에게 좋을 게 없습니다. 여기서 멈추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처자의 아버지는 죄스런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혼례를 올리려 했습니다. 사실, 저도 마음에 둔 이가 있어 오히려 잘됐다 싶었습니다.”
“............”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거 같습니다. 모든 것은 저의 잘못으로 하겠습니다. 허락해주신다면, 이 혼사를 멈추고 싶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정중하고 정중한 혁의 태도에, 처자의 아버지는 혁이 더욱더 탐이 났다. 하지만, 혁이 딸과 머슴 사이를 모르면 몰라도, 자기 욕심에 혼례를 성사시키는 건 서로에게 몹쓸 짓이 분명했다.
“왜 대답이 없느냐?”
도균은 혁한테 재차 소문에 대한 진상을 물었지만, 혁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말이 없다는 건 소문이 진실이란 말이냐?”
“아버지!”
“그래, 말해 보거라!”
“세상 구경 좀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내 속이 이런데, 니 속은 오죽할까”
“...........”
“미안하다 아들아. 널 믿지 못하고....”
“.........”
“그렇게 하려무나. 넓은 세상 보고, 훌훌 털고 오너라.”
그렇게 해서 혁은 봇짐 하나 짊어지고 집을 떠났다.
‘강이를 보고 갈까? 아니야, 아니야. 강이를 보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
혁은 그냥 출발했다.
“뭐 혁이 집을 떠나?”
뒤늦게 혁이 떠난다는 사실을 안 강이는 혁의 집을 향해 달려갔다.
“오라버니 방금 떠났는데요?”
마을 어귀를 향해 강이는 달려갔다. 저 멀리 언덕 너머에 점점 작아지는 혁이 보였다.
“혁아!!! ”
하지만 혁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쁜 자식! 인사도 없이... 나쁜 자식!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야 최혀어억~~~!”
강이 목소리가 들리는데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강이야. 내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지만, 돌아오는 날이 되면, 니가 왜 남자로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뒤돌아보면 떠나지 못할 것 같아, 더 빠르게 걷고 있었다.
‘너는 너 삶을 살고 있어. 나도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내 삶을 찾아올게. 니가 많이 그립고 보고 싶겠지만, 나 잘 견뎌볼게. 잘 지내고 있어 강이야.’
강이는 털썩 주저앉아 혁이 사라지고 없는 곳을 허망하게 바라봤다. 강이 어깨 뒤로 어둠이 서서히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