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미야. 너 요즘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왜 이렇게 어두워?”
“아무것도 아니야.”
“말해봐. 왜 그래.”
“나 먼저 가볼게.”
효미가 황급히 자리를 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런 효미를 보던 수아는 효미 얼굴의 그림자가 창윤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잘 안 됐나 보네.’
효미의 반응만 봐도 창윤의 답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아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냉정하게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준민은 창윤과 부쩍 가깝게 지내는 수아가 걱정됐다. 사람들은 창윤을 착하고 밝은 성격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준민의 눈에는 달랐다.
창윤이 수아를 보는 눈빛이나 행동이 친구로서의 선은 진즉에 넘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수아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고, 창윤은 수아의 틈을 찾아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 보였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
“너 요즘 이창윤하고 부쩍 친하다?”
지은이 음흉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친한 건 맞는데 그런 건 아니다.”
“누가 뭐래? 너 되게 좋아 보인다고.”
“그래?”
“누가 그러더라. 사랑에 빠진 여자는 아름답다고.”
이 무렵의 수아는 빛났다. 원래도 은은하게 눈길을 끌었지만, 반짝거리며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아 아니라고.”
사실 지은의 말이 장난뿐인 것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즈음 창윤과 부쩍 친해진 수아는 집에 같이 가는 날도 많았고 따로 만나서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함께 쇼핑하는 때도 있었고, 둘은 향수도 공유할 만큼 가까워졌다.
“수아야. 이거 너한테 잘 어울리겠다.”
창윤이 연보랏빛 하트 귀걸이를 수아의 귀 쪽에 대보면서 말했다. 귀걸이는 정말 예뻤다. 창윤은 기가 막히게 수아에게 잘 어울리는 것들을 찾아냈다. 수아가 그냥 웃기만 하자 창윤이 말했다.
“일단 더 구경해보자.”
수아의 어깨를 감싸며 창윤은 수아를 반대편으로 보냈다.
“넌 저쪽 더 보고 와. 난 여기서 구경할게.”
“이거.”
버스에서 창윤이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네가 하면 예쁠 것 같아서.”
아까 그 연보랏빛 하트 귀걸이였다.
“고마워.”
“너 저번에 입고 온 그 원피스에 하면 진짜 예쁠 것 같아.”
“응.”
왜 사줬냐고 무슨 뜻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가방 이리 줘.”
“괜찮아.”
“얼른.”
창윤이 수아의 가방을 뺏다시피 들었다. 이렇듯 가끔은 정말 여자친구가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창윤은 수아에게 잘해주었다.
*
“진짜 똑같네.”
창윤이 사준 귀걸이 색은 예뻤지만, 수아의 다리에 든 멍 색깔과 똑같았다.
‘이거 기분 묘하네.’
창윤의 선물은 고마웠다. 하지만 수아는 마음이 복잡했다. 지금의 이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수아야. 자?]
[아직. 오늘은 잠이 안 오네]
그러자 바로 창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 잠 안 온다길래.
“심심한가 보네.”
- 잠깐만. 요즘 내가 연습하는 곡인데 한 번 들어봐.
‘노래를 들려준다고?’
담담한 척했지만, 수아는 콩닥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기대감에 휴대폰에 무선 이어폰을 연결해서 창윤의 연주를 기다렸다. '음음’하면서 목을 가다듬는 소리를 시작으로 창윤의 깨끗하고 맑은 목소리와 아름다운 기타 연주가 시작되었다. 어쿠스틱 기타 소리와 창윤의 목소리가 잘 어우러졌다. 기타의 현을 스치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타고 더욱 몽환적으로 들렸다.
There's a song that's
inside of my soul
나의 영혼 속에 있는 노래가 있어요
It's the one that I've tried to write
내가 쓰려고 했던 그 노래
over and over again
몇 번이고 다시 되풀이 했었죠
I'm awake in the infinite cold
나는 끝없이 추운 곳에서 깨어났어요
But you sing to me over
and over and over again
하지만 당신이 몇 번이고 나에게 노래를 불러줘요
So I lay my head back down
그래서 난 긴장을 풀고
And I lift my hands And pray
손을 들어 기도해요
To be only yours I pray
내가 오직 당신의 것이 되게 해달라고
To be only yours
당신의 사람이 되기를
I know now you're my only hope
나는 알고 있어요 당신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란 걸
Sing to me of the song of the stars
내게 별들의 노래를 불러줘요
Of your galaxy dancing and laughing and laughing again
당신의 우주 같은 춤과 웃음을 다시 보여주고 들려줘요
When it feels like my dreams are so far
만약 꿈들이 너무나 멀게 느껴질 때
Sing to me of the plans
계획들에 대한 노래를 불러줘요
that you have for me over again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계획들에 대한 노래를 다시 불러줘요
So I lay my head back down
그래서 난 긴장을 풀고
And I lift my hands and pray
손을 올려 기도를 해요
To be only yours I pray
오직 당신 것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요
To be only yours
오직 당신의 것이 되게 해달라고
I know now you're my only hope
당신만이 내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알아요
I give you my destiny
당신에게 내 운명을 맡겨요
I'm giving you all of me
당신에게 내 모든 걸 주겠어요
I want your symphony
당신의 심포니가 되고 싶어요
Singing in all that I am At the top of my lungs
목청껏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노래를 부를게요
I'm giving it my all
So I lay my head back down
And I lift my hands
And pray to be only yours
I pray to be only yours
I pray to be only yours
I know now you're my only hope
노래의 가사가 호소처럼 들렸다. 창윤의 바람을 담은 호소. 진정성 있게 와 닿는 가사에 수아의 가슴이 뭉클했다. 이 노래의 당신이 되고 싶었다. 창윤을 정말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제 더는 부인할 수 없었다. 아니 사랑하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수아는 지금 자신의 기분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몸이 붕 뜬 기분이었다.
- 수아야? 자?
“아니. 미안. 너무 좋아서 할 말을 잃었어.”
- 진짜? 되게 기분 좋다. 니가 칭찬해주면 다른 사람한테 듣는 거보다 열 배는 더 좋아.
아이처럼 기뻐하는 창윤의 목소리에 수아도 즐거웠다.
- 수아야.
“응.”
- 처음부터 너는 어색하지가 않았어.
“아.”
- 너 진짜 멋진 사람이야. 동갑이긴 해도 가끔 너 존경스러울 때가 있어.
“무슨 소리야 갑자기.”
- 표현하긴 힘들지만 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어.
“민망한데, 기분은 좋다.”
- 내 주변에 너 같은 애는 없어. 그러니까 우리 평생 가자.
“평생?”
- 응. 평생.
수아는 평생이라는 단어를 창윤에게 들리지 않게 곱씹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할까? 평생이라는 이 단어가 어쩐지 수아의 마음에 깊이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창윤의 다정한 말에 그간 힘들었던 수아의 마음이 녹아내렸다. 사람으로서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창윤은 정확하게 수아가 듣고 싶었던 말들을 해주었다. 자기 마음을 훤히 읽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알아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너무 늦었다. 얼른 자.”
- 빨리 만나고 싶다.
“나도.”
- 하하. 잘자. 좋은 꿈.
“너도 잘 자.”
*
“수아야. 잠깐.”
“네. 선배님.”
“오늘 효미한테 연락이 왔는데 동아리 활동 어려울 것 같다고. 죄송하다고. 혹시 뭐 아는 거 있어?”
수아는 예상이 적중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제가 직접 듣지 못해서 저도 잘은 몰라요. 그냥 마음이 여러모로 힘든 것 같더라고요.”
효미의 사생활을 떠들 순 없었다. 준민도 그만한 눈치는 있었다. 동아리 모임에 나와서도 효미는 수아와 어울리지 않았다. 창윤의 곁에 있거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다. 수아는 혼자 있거나 준민과 있는 경우가 많았다.
“혹시 인원 충원할 만한 추천해 줄 만한 사람 있어?”
수아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아주 활달하고 적극적인 친구가 있어요.”
“안녕하세요. 박지은입니다.”
“마침 옆에 있었네요.”
항상 밝고 의리 있는 친구인 지은이 동아리에 들어온다는 사실에 수아는 기뻤다. 미진은 은근히 수아를 갈구고 다른 남학생들은 미진 옆에 붙어 있느라 정신없고 효미도 창윤 옆에 수아가 오지 못하게 하느라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동아리 모임이 수아에게는 너무 피곤했다. 그나마 친한 창윤은 모임에 자주 빠졌다.
지은이 오자 활발해진 수아를 보면서 준민은 내심 미소를 지었다. 준민 역시 동아리 내의 분위기를 알고 있었다. 수아를 챙겨주고 싶어서 티가 나지 않게는 챙겼다. 너무 표를 내면 수아가 불편하거나 사람들이 더 수아에게 피곤하게 굴 수 있을 것 같아 준민은 최대한 자제했다.
그러나 최근 수아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며 아무래도 동성의 친구가 있는 것이 좋으리라 판단해서 효미가 빠진 후 굳이 충원이 필요 없음에도 수아에게 추천을 받은 것이었다.
“선배. 감사합니다.”
직접 충원할 멤버 찾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아는 자신을 배려해서 제안해준 것이 고마웠다. 생각이 깊고 배려심이 있는 준민이 참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고마울 건 없어.”
보통 눈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준민이 분위기를 바꿔 말했다.
“영화제 얼마 안 남았어. 시나리오나 빨리 써라.”
“와. 언제는 천천히 쓰라고 하더니만 이제 얼굴 바꾸시네요. 알겠습니다.”
최근 들어 준민이 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수아가 장난을 쳤다. 편안하게 웃고 장난치는 수아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러나 창윤이 문제였다. 창윤이 수아와 효미 사이에서 하는 행동이 준민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효미가 쩔쩔매며 창윤을 따라다니는 모습을 몇 번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
효미가 동아리를 탈퇴하고 나서는 수업에도 잘 나오지 않고, 마주칠 일이 없어서 수아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자기 일에 집중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마음의 짐을 털어버렸다. 효미의 휴대폰이 ‘드르륵’하고 몸을 떨었다. 어두운 표정으로 폰을 확인한 효미가 조금은 밝아진 얼굴로 자신의 친구들에게 말했다.
“나 일이 생겨서 먼저 간다. 나중에 연락할게.”
“또? 요즘 바쁘다. 너.”
“나중에 연락할게.”
“효미 우리 모르게 연애하는 거 아냐?”
“그게 가능하겠냐?”
“근데 효미 요즘 이상해. 멋도 갑자기 많이 내고 분위기도 좀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확실히 얼굴도 예뻐졌어.”
“그러게. 길 가다 보면 남자들이 효미 많이 쳐다보더라.”
“근데 너무 조수아 스타일 아냐?”
“뭐래. 조수아보다 지금은 효미가 훨씬 예쁜데.”
“하긴 그렇긴 해.”
친구들이 달라져 가는 효미의 모습을 보며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