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리안, 방금 10분 전에 우리 회사 전광판에 뜬 네 실적이야.”
패드를 받은 키리안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키리안의 실적은 거의 악마 사원 중에서 바닥을 기는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마이너스 실적이었다.
한 마디로, 현재 키리안은 천사 사원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의 실적을 받은 것이었다.
충격에 비비안의 패드를 땅에 놓칠 뻔한 그가 말했다.
“전부터 제 실적이 하락세였던 건 맞지만, 단기간에 이 정도로 떨어지는 건 말도 안 돼요.”
키리안에게서 패드를 받아 들고, 실적을 확인한 엘리야가 말했다.
“키리안의 실적이 이 정도로 갑작스럽게 떨어졌다는 건 뭔가 이상이 있는 거예요. 그건 제가 확신할 수 있어요”
그 말을 들은 비비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맞아. 왜 실적이 이렇게 나왔는지 예상가는 일이 있긴 하거든.”
키리안과 엘리야가 진지한 얼굴로 비비안을 응시했다. 비비안이 차분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이 세상의 모든 천사와 악마는 신이 운영하는 회사의 사원이지. 그런데 가끔 신에게 저항해 회사로부터 탈출해서 무소속이 된 악마들이 있어. 이 악마들은 본능에 따라 저주를 분출해내고 싶어 하거든.
그런데 본래는 회사를 통해서만 인간을 담당 받을 수 있으니, 단독적으로 힘없고, 고립되어 있는 인간에게 접근해. 그리고 계약을 맺지.
문제는, 그 악마들이 저주를 일방적으로 내리면, 천사들과 악마들의 실적은 뒤죽박죽이 되는 건 물론이고 천계의 균형에 혼란이 와. 뭐랄까… 일종의 버그 같은 존재랄까.”
키리안은 말로만 들어본 무소속 악마의 존재를 실감하게 된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비안이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인간 ‘제노’ 담당인 키리안의 실적이 이렇게 폭락한 것은, 무소속 악마가 제노 베인에게 저주를 걸어서인 것 같아. 저주에 걸린 제노는 앞으로 심각한 불운을 겪을 수밖에 없지. 그래서 제노의 미래에 행운만을 불러와야 하는 키리안의 실적이 타격을 받은 거고.”
그 말을 들은 엘리야는 무언가 눈치를 챈 기색이었다. 엘리야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럼, 저희에게 부탁할 일이라는 게…….”
“사실, 엘리야에게 지령이 떨어졌어. 그 무소속 악마를 잡아줬으면 한다고.”
그 말을 들은 키리안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비비안님, 그건 수사대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요?”
비비안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기도하듯이 하나로 모았다.
“그 점에 있어서 정말 미안해. …수사대가 특히 인력 부족인 거 알지?”
“세상에…….”
“수사대는 천사들로만 이뤄져야 한다는 사내 규칙 때문이야. 이거에 대해서 내가 미카엘 님께 계속 건의를 드리고 있으니, 다음엔 이런 일 절대 없을 거야.”
“알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비비안 님.”
엘리야가 평상시의 차분한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 키리안은 엘리야의 말을 듣고는, 항의하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 왜 엘리야 선배에게만 지령이 떨어졌죠? 저도 파트너니까 같이…….”
이때 키리안의 등 뒤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꽂혔다.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파트너를 챙겼지, 키리안?”
모두가 뒤를 돌아본 곳엔 미카엘이 서 있었다. 미카엘은 은색 테 안경 너머로 차가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미카엘을 본 비비안이 놀란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미카엘 님? 여기엔 무슨 일로……?”
“확인차 들렀어. 지금 일어난 사건이 연관된 자가, 또 ‘엘리야’라는 소식을 들어서 말이지.”
미카엘의 날카로운 시선이 서슴없이 엘리야를 향했다. 엘리야는 입술을 꾹 깨물고 미카엘의 시선을 피했다. 미카엘이 느릿하게 운을 떼었다.
“엘리야랑 파트너가 되자마자, 키리안 실적에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 게 수상하지 않아, 비비안?”
미카엘의 말을 들은 비비안은 엘리야의 얼굴을 먼저 살폈다. 안색이 창백해진 엘리야를 본 비비안이 미카엘에게 말했다.
“하지만 엘리야라는 증거가 뚜렷하게 나오지 않는 이상, 용의자는 무소속 악마라는 게 더 설득력 있습니다.”
그 말에 미카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미세하게 떨고 있는 엘리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 당연히 그런 일은 또 일어나선 안 되지, 그렇지 않아?”
키리안의 눈에 엘리야가 힘껏 주먹을 그러쥐는 것이 보였다. 비비안이 일부러 미카엘 앞에 서서 엘리야를 가려주었다. 그녀가 미카엘을 향해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톡 쏘는 말투로 말했다.
“미카엘 님. ‘그 사건’에서 엘리야는 무고한 거 아시잖아요. 미카엘 님도 안 그래도 바쁘신데, 빨리 저랑 회의 준비하러 가시죠. 이제 회의 시간 얼마 안 남았잖아요.”
비비안을 보며 키리안은 역시 비비안이 괜히 팀장이 아니라고 속으로 감탄했다. 비비안이 키리안과 엘리야를 돌아보며 말했다.
“무소속 악마가 접근했을 거라고 추측되는 사람 용의자들 리스트를 둘 메신저에 보내놓았어. 무소속 악마를 생포하고 수사대에 연락만 넣으면, 수사대가 즉시 출동할 거야. 그리고 키리안은 엘리야를 도와서 같이 활동해 줘. 지령은 엘리야에게만 떨어지긴 했는데 네 말대로 둘이 파트너니까. 내가 상부에 보고해둘게.”
미카엘은 비비안이 내린 결정에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지만 딱히 반박하지는 않았다. 키리안은 비비안이 입 모양으로 ‘잘 부탁해’라고 말하는 걸 보았다. 회의에 필요한 서류를 챙긴 비비안이 앞장섰고 미카엘이 그 뒤를 따랐다.
*
“이 사람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야.”
엘리야는 한 여성의 사진이 붙어 있고 프로필이 적혀 있는 종이를 보며 말했다. 둘은 높게 날고 있는 채로 한 빌라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제노가 가장 최근에 헤어진 여자 친구가 사는 곳이었다.
엘리야가 말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성이 빌라 밖으로 외출을 하는 건지 집을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엘리야가 기회라고 생각하며 키리안의 한쪽 팔을 끌었다.
“지금 주인이 없을 때 방을 살펴볼 수 있겠어. 빨리 가보…….”
엘리야는 대답이 없는 키리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키리안은 어딘가 불만스러운 듯 굳은 표정을 풀지 않고 있었다. 엘리야가 무슨 일이냐는 눈빛으로 키리안을 응시하자 그가 말했다.
“사실……. 선배에게만 이런 다른 부서 일이 떠넘겨졌던 게 마음에 걸려요. 회사에 돌아가면 공식적으로 이의 제기를 해야 할 것 같아요.”
키리안의 말을 듣고 엘리야가 팔짱을 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진 엘리야가 덤덤하게 말했다.
“몰랐나 본데, 악마 사원들한테 이런 일은 되게 흔하게 일어났어. 다른 부서 업무 맡거나, 잡일 수행해야 하는 거. 네가 이의 제기를 하면 아마 천사 쪽 사원들에게 이런 일이 없도록 개선은 될 수 있어도 우리 쪽은 아닐걸.”
키리안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그걸 본 엘리야는 중얼거렸다.
“그동안 모르고 있었다니, 부럽네.”
“아니, 전…….”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빨리 업무 수행하고 복귀하자고. 저 여성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엘리야는 키리안의 말을 칼같이 잘라내며 여성의 집 쪽으로 날아갔다. 키리안은 엘리야의 뒤를 따랐다.
키리안은 엘리야가 현관문을 통과한 뒤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을 보고 의아했다. 여성의 방은 온통 암흑으로 잠겨 있었다. 허공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엘리야가 느릿하게 말했다.
“키리안, 피해.”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엘리야가 펄쩍 뛰어 현관문 윗부분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는 그 반동으로 허공에 발길질을 했다. 그러자마자 키리안은 억- 하고 내지르는 큰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엘리야는 날아오는 어떤 공격에 몸을 옆으로 피하더니, 앞으로 튀어 나갔다. 키리안도 엘리야를 따라 빠르게 방으로 들어갔다. 엘리야는 비틀거리는 무소속 악마가 쥐고 있는 총을 떨구게 했다. 그리고 그녀는 곧장 주먹으로 무소속 악마의 턱을 가격했다.
그 순간 엘리야는 자신의 복부에 맞닿는 차가운 총구를 느껴야 했다. 총구에서 총탄이 발사되는 동시에 엘리야는 날개를 펼쳐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총알이 연달아 쏴지고 엘리야는 귀신처럼 요리조리 피하더니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매우 당황해하는 상대를 향해 엘리야가 속삭였다.
“상급 악마를 상대로 총을 쏘다니.”
엘리야는 상대를 향해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악마의 입에서 왈칵 피가 터져 나왔다. 엘리야는 중얼거리며 한 번 더 팔을 휘둘렀다.
“상급 악마를 상대해 본 적이 없었나 봐.”
그 순간 무소속 악마가 엘리야의 주먹을 두 손으로 막아냈다. 자신의 주먹이 막히는 순간 엘리야의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상급 악마는 총이 안 통한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겠지.”
그는 엘리야의 주먹 쥔 손을 잡고 순식간에 으스러트렸다.
“아악-!!”
그리고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엘리야의 몸을 자신의 어깨에 둘러메더니 벽 쪽으로 돌진했다. 엘리야가 그의 어깨를 한쪽 주먹으로 내리쳤으나, 그의 어깨는 마치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놔! 이 미친놈아!”
엘리야의 외침을 무시한 그는 있는 힘껏 그녀를 벽 쪽으로 던졌다. 벽에 부딪힌 엘리야는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아냈다. 바닥에 패대기쳐진 엘리야는 자신의 이마에 뜨뜻한 것이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엘리야 선배!”
키리안이 경악에 찬 얼굴로 빠르게 엘리야에게 다가갔다. 그는 그녀의 몸에서 흐르는 상처를 향해 손을 뻗어 주문을 외었다. 엘리야는 그가 자신을 치료해 주고 있음을 알았으나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피해!”
상대 악마는 권총이었던 무기 대신에 다른 종류의 무기를 소환했다. 무소속 악마가 속으로 생각했다.
‘검을 소환해 봤자, 저 여자가 너무 빨라서 어차피 거리를 좁힐 수 없으니…!’
그래서 그가 택한 무기는 기관총이었다. 그가 장전을 끝낸 걸 본 엘리야가 키리안을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엘리야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했다.
‘나 혼자라면 피할 수 있지만, 지금은 내 뒤에 키리안이 있으니까….’
엘리야는 짧은 시간 안에 키리안 앞에 선 뒤 주문을 중얼거려 검을 소환해냈다. 마치 폭죽을 쏘아대듯이 연달아 큰 소리를 내며 총탄들이 엘리야에게 날아갔다. 엘리야는 빠른 손놀림으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모든 총알을 검으로 베어냈다. 그런 그녀에게서 키리안은 눈을 떼지 못했다.
키리안은 검을 휘두르는 엘리야의 어깨에서 선혈이 흐르는 걸 발견했다. 키리안은 그녀의 등에 자신의 손을 대서 최대한 그녀가 빨리 회복하도록 도왔다. 무소속 악마가 총알을 다 쓴 기관총을 다시 장전하기 위해 거리를 벌렸다. 그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비아냥거렸다.
“힐링 능력 말고는 쓸모없는 천사 파트너를 챙기느라 바쁘시겠어.”
“쓸모없는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힐링이 끝난 걸 직감한 엘리야가 한쪽 팔을 휘두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완벽히 회복된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검을 몇 번 가볍게 휘두르더니 말했다.
“아까까지 일부러 검은 안 썼는데. 네가 자초한 거야.”
엘리야가 눈을 들어 무소속 악마를 바라보자 그는 흠칫 몸을 떨며 뒷걸음질했다. 아까와는 완전히 달라진 엘리야의 살기가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