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떵떵거리고 살게 해줄께
토요일 오후 스튜어디스인 성희가 모처럼 맞은 쉬는 날에 맞춰 성은이와 함께 신촌으로 나왔다. 번화가 2층에 위치한 프렌차이즈 카페에 자리 잡은 둘은 창 아래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둘 사이에는 우울한 분위기가 완전히 가시진 않았지만 그래도 대학생이며, 연인들이 많이 다니는 신촌거리에 나오니 나름 기분이 풀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언니. 그 이상한 사람들한테는 연락 없는 거지?”
“그러게. 장례식때 온 이후로는 연락없네.”
“그 있잖아. 창식오빠가 해결한 걸까?”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자식이 무슨 일을 한다고.”
“그래도 그렇게 끈질기게 우리 괴롭혔는데 그 때 오빠가 해결하겠다고 한 뒤로 정말 연락 없잖아. 그래서 혹시 그런 게 아닐까 싶은 거지.”
성희도 사실 정말 창식이 해결한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쉽게 인정할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자그만치 10년동안 죽었는지 살았는지 연락조차 없던 인간이었다. 차라리 죽었다면 모를까 엄마 장례식에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10년 전에 사라졌던 군복을 입고 나타난 것을 보자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다. 게다가 아직까지도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왜 연락이 없었는지조차 명확하게 말하지 않고 있었다.
“근데 창식오빠가 왜 보자고 했을까?”
“그야 모르지, 뭔 헛소리를 할지. 아 근데 왜 이렇게 안오는거야! 짜증나게.”
성희가 막 짜증이 치밀어 오르려는 찰나 카페 문이 열리고 창식이 들어왔다. 혹시 또 군복을 입고 오면 어쩌나 했지만 다행히 평범한 면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고 한 손에는 종이가방을 들었고 있었다. 창식은 카페 안을 둘러 보다 동생들을 보고 반가운 표정으로 걸어왔다. 성희는 웃는 얼굴로 걸어 오는 창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고개를 창 밖으로 돌렸다.
“오셨어요?”
성은이는 성희 눈치를 보며 일어나 인사를 했다.
“어 잘 지냈어?’
“네.”
싸늘한 성희 모습에 쓴 웃음을 흘린 창식이 잠깐 일어서 음료를 사들고 와 다시 앉았다.
“다른 건 아니고 어쨌든 이제 내가 돌아왔으니 너희들을 챙겨야 할 거 같아서 이렇게 연락했다.”
“뭐? 누가 누굴 챙긴다고?”
“언니.”
“그래 내가 그 동안 연락 없었던 걸 생각하면 충분히 화날 수 있는 일이지. 저번에도 말했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는 거 밖에는 나도 말할 수 없고. 미안하다. 일단, 이거부터 받아.”
창식은 종이가방에서 비닐로 된 통장케이스를 내밀었다. 케이스 안에는 도장과 통장이 들어가 있고 비닐 윗면에는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일단 이걸로 지금 사는 곳부터 좀 편한 곳으로 옮겨. 그리고 내가 일이 정리되는 대로 다시 연락할게.”
“이게 뭐예요?”
“너네 둘이 살기에는 방이 좁더라. 그래서 돈을 좀 마련했어. 급하게 마련하느라 충분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나쁜 일로 번거 아니니까 걱정말고 써. 통장 위에 적힌 게 내 번호니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내가 있으면 불편할 테니 둘이 바람이나 쐬고 들어가라. 그리고 이건 사과의 선물이니 꼭 차고 다녔으면 좋겠다.”
창식은 목걸이가 든 악세사리 케이스를 내밀었다. 케이스 안에는 별모양의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가 들어가 있었다. 가운데 작은 큐빅이 박혀 있었는데 일반 큐빅이 아니라 사실 창식이 마법을 새겨 넣은 마정석이었다. 여동생들의 안전을 위해 위치추적과 도청마법을 새겨 넣었지만 여동생들이 알리 만무였다.
“참. 그리고 그 사채업자는 다시 찾아올 일 없을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케이스를 내민 창식은 먹던 커피를 들고 카페를 나섰다. 긴가민가 했는데 성희는 창식이 제 입으로 사채업자를 해결했다는 말을 하니 마음 한켠에 남아있던 불안감이 녹아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새삼 장례식장에서 자신의 앞을 가려주던 창식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뭐래. 체.”
일어서서 나가는 창식을 보며 성은이 말했다.
“언니 정말 오빠가 해결했나봐!”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언니는 그래도. 아직 연락 없는 거보면 그렇잖아. 근데 통장은 또 왠거래?”
가벼운 마음으로 케이스에서 통장을 꺼내 본 성은은 평생 처음보는 숫자에 자신의 눈을의심했다.
“천, 만, 십만, 백, 억. 오억!”
“뭐?”
“언니 이거 봐바!”
성은이 호들갑을 떨며 건네 준 통장을 열어본 성희는 통장 안에 오억이 예치된 것을 보고 마찬가지로 잠시 생각이 정지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창식이 나간 카페 문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