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혹시 안 드셨으면…… 같이 먹지 않을래요?”
키리안의 말을 듣고 엘리야는 놀란 것 같았다. 엘리야는 꽤 오래 망설이다가 키리안을 향해 차분하게 말했다.
“키리안, 물론 요즘 회사가 천사들과 악마들 간 협력을 중요시한다는 건 나도 알아. 그런데 억지로 너무 애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네 말대로 우리는 그저 공적인 관계니까, 서로 선만 잘 지키면 충분할 거야.”
그 말을 듣자마자 키리안은 자신이 비비안을 배웅해 줄 때를 떠올렸다. 비비안이 엘리야와 잘 지내보라는 말에 자신이 저렇게 대답했다는 것도.
‘다 들으셨구나…….’
키리안이 아무 말도 못 하는 동안 엘리야는 방문을 열었다. 방에 들어가기 전에 그녀는 고갯짓을 하며 인사했다.
“좋은 밤 보내, 키리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키리안은 거실에 순식간에 혼자 남겨졌다. 그는 이런 찝찝한 기분으로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그의 머릿속으로 엘리야를 처음 만났던 장소, ‘바’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데. 기분 전환 겸 가볼까…?’
키리안은 옷가지를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Dei est risus(신의 웃음)’ 바에 들린 비비안은 믿을 수 없는 풍경을 목격했다. 바른 생활 사나이 키리안이 바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주변에 앉아 있던 키리안의 동기들도 비비안과 똑같이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비안은 키리안의 등을 가볍게 치며 자연스럽게 그의 옆에 앉았다.
“여기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키리안이 무슨 일이야?”
“제 실적 결과 보면 아실 텐데요….”
키리안이 씁쓸하게 미소를 짓고는 손에 쥔 잔을 마셨다. 비비안이 혀를 차더니 말했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실적이 너무 떨어지지 않으려면 엘리야와 잘 지내는 게 좋겠다고.”
“엘리야 선배는 지금 저하고는 말도 제대로 안 하는걸요.”
키리안은 얼굴이 붉어진 채 서운하다는 태도로 말했다. 비비안은 술에 취한 채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는 키리안을 바라보았다.
“엘리야가 요즘 너랑 어떻게 지내는데?”
“같은 숙소를 쓰는데 거의 없는 천사 취급하고. 방에 들어가서 안 나오시고. 식사도 같이 해본 적이 없어요.”
“내가 그랬잖아. 마음 잘 안 열거라고.”
눈이 풀려 있던 키리안이 그 말을 듣자 뭔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들며 그가 낮게 속삭였다.
“그렇게 된 어떤 계기라도 있는 건가요?”
키리안의 말에 비비안은 눈을 샴페인 잔으로 옮기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키리안은 비비안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듯 계속해서 비비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비비안은 남들에겐 거의 들리지 않을 만한 목소리로 키리안에게 말했다.
“네가 전에 물었지. 엘리야가 1위를 놓친 적이 한 번도 없냐고. 아슬아슬하게 1위를 자주 놓친 시기가 있긴 있었는데, 그게…….”
“비비안.”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비비안과 키리안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누구인지 확인한 키리안은 당황하여 몸을 뒤로 빼다가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미카엘은 팔짱을 낀 채 키리안과 비비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퇴근 후에도 상사를 만나는 건 누구도 절대 반가울 리가 없었다. 키리안은 미카엘이 자신의 옆에 앉자 사색이 되었다. 미카엘은 턱을 괴고 키리안에게 무심하게 말 한마디를 툭, 던졌다.
“쫄기는. 나도 어차피 너랑 술 마시러 온 거 아니야. 그러니 걱정 마.”
그 말을 들은 비비안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미카엘에게 말했다.
“그럼 나 보러 온 거예요?”
“너 보러 왔지. 그러면.”
비비안은 키리안을 향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키리안, 사실 내가 여기 온 게 미카엘님이랑 한 선약 때문이었거든. 먼저 갈게.”
“아, 네…… 어쩔 수 없죠.”
자리에 일어서기 전에 비비안이 키리안 귓가에 빠르게 속삭였다.
“앞으로 고민 있으면 여기로 또 불러. 들어줄 테니까.”
그 말을 듣고 키리안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키리안의 어깨를 토닥여주고는 미카엘에게로 돌아갔다. 키리안은 나란히 걸어가는 둘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미카엘님과 비비안님이 저렇게 친한 사이셨구나.’
물론 키리안도 둘이 몇 세기를 거쳐 함께 일해 온 사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미카엘과 비비안은 둘이 일적으로 합이 잘 맞는 관계라는 건 회사에서도 유명했다. 그런데 키리안은 저 둘이 저렇게 사적으로 약속 잡을 정도로 친한 줄은 몰랐다. 그는 술 한 잔을 더 시켰다.
그는 입사한 이래로 가장 늦은 시간에 자신의 숙소로 돌아왔다. 동거인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숙소의 모든 방의 불이 꺼져 있었고 조용했다. 키리안은 같이 살고 있는 이의 존재가 완벽히 지워져 있는 숙소에 위화감을 느꼈다.
키리안은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엘리야의 방문 앞에 섰다. 키리안은 문을 두드릴까 한참을 고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그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
“마이너스.”
“마이너스.”
키리안은 끊임없이 감점을 하는 엘리야를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새롭게 담당 받은 인간은, 하루 만에 태도 감점을 수없이 받고 있었다. 엘리야는 일반 악마 사원이라면 넘어갈 자질구레한 일도 빠짐없이 적었다. 키리안은 그런 엘리야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항의했다.
“아니, 선배님. 저는 제노 베인이 애인에게 잘해주는 행위가 어떻게 악행 리스트에 적힐 일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현재 키리안과 엘리야는 각자의 날개를 펼치고, 제노라는 이름의 남성을 뒤쫓고 있었다. 그는 놀이공원에서 자신의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즐기는 중이었다. 키리안의 눈에 제노는 예의 바르고 남들에게 친절을 잘 베푸는 훌륭한 사내였다.
엘리야는 적는 것을 멈추고 잠시 키리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호박빛 큰 눈이 키리안을 향하자, 그는 당황하여 시선을 살짝 숙였다. 엘리야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제노를 바라봤다. 제노가 여자친구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자 엘리야는 그것도 악행 리스트에 적었다. 그걸 본 키리안이 엘리야의 앞을 막아섰다.
“방금 일은 대체 왜 적으신 거죠? 어떻게 보면 그 행위는 제가 적으려 한 겁니다. 자신의 소중한 이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건 선행 아닌가요?”
엘리야는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은 채, 덤덤하게 말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적으면 돼. 심판은 신께서 하시겠지.”
“아니 그래도!”
말을 마친 엘리야가 키리안 옆을 지나쳐갔다. 키리안은 난처하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더니 엘리야를 빠르게 따라갔다. 키리안이 완고한 표정을 하고선 엘리야 앞에 섰다.
“악하지 않은 일도 적는 건 용납이 안 되어서 그럽니다. 본래 받을 벌조차 감형시키는 게 제 일인데, 하지도 않은 악행으로 벌을 뒤집어쓰게 하는 건 두고 볼 수 없어요.”
엘리야는 그런 키리안을 무표정으로 응시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제노의 인적 사항에 대해서는 당연히 읽어봤겠지?”
“네? 네, 그건 기본 중의 기본…….”
“제노에게 헤어진 연인들이 많다는 게 뭔가 마음에 걸리진 않았어?”
그 말을 들은 키리안은 당황하여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키리안 입장에서는 제노를 거쳐 간 애인들이 많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키리안이 대답을 망설이고 있을 때 엘리야가 말했다.
“다정한 거, 원래는 좋지. 근데 그게 결과적으로 누군가에게 악한 영향을 끼친다면 그게 결국 선한 걸까?”
“전, 선배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면, 제노의 전 애인들이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한번 조회해봐.”
엘리야는 더 이상 할 말 없다는 얼굴로 빠르게 뒤돌아섰다. 그녀는 패드 위에 제노의 행동을 속속들이 적었다. 그러다 엘리야가 고개를 들자 그녀의 바로 앞에 서 있는 키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키리안은 허리를 살짝 굽혀 엘리야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는 제노의 전 연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엘리야는 바로 자신 눈앞에 있는 키리안의 청회색 눈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에는 엘리야도 숨을 잠시 멈췄다.
“사랑하는 이가 있다면, 그 상대에게 그 순간만큼은 아낌없이 표현해주고 싶은 건 당연한 게 아닐까요? 사랑하는 건 숨길 수 없는 거잖아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키리안을 보며 엘리야는 ‘그’를 떠올렸다. ‘그’는 그녀의 옆에서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무엇보다 키리안의 말대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사랑을 숨길 수 없었다.
엘리야는 자신의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키리안 옆을 지나쳐갔다. 키리안은 그런 엘리야를 보고 생각했다.
‘내가 뭘 혹시 잘못 이야기했나…?’
키리안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엘리야 뒤를 황급히 쫓았다. 엘리야의 눈에 제노가 길을 가다가 귀여운 꼬마 아이에게 사탕을 건네는 게 보였다. 엘리야는 패드 위를 빠르게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탕은 이 건강에 좋지 않지……. 아직 이가 튼튼하지 않은 아이에게 사탕을 주었음.”
그걸 본 키리안이 엘리야를 말리기 위해 빠르게 뒤쫓았다.
“아니, 엘리야 선배!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죠!”
**
“일은 잘 되어가니, 키리안?”
놀이동산 벤치에 앉아 있던 키리안에게 상부에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이 왔다. 비비안의 메시지에 그가 한숨을 내쉰 뒤 답했다.
“아뇨. 비비안님. 엘리야 선배님은 정말 호락호락하지 않으시네요.”
그 말에 비비안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응. 키리안, 실적을 보니 그런 것 같더라. 내가 너희를 직접 호출해서 알아봐야 할 일이 생겼거든.”
메시지를 읽고 키리안은 놀라서 빠르게 답신을 보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그래도 정확한 최종 실적은 중간발표 이후에 나오잖아요?”
“음…….”
키리안은 비비안의 망설이는 메시지의 내용에 불길함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 어떤 안 좋은 일이 벌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비비안의 다음 답장이 도착했다.
“일단 엘리야를 불러줄래? 비상상황이 생겼으니, 너희가 내 사무실에 와줬으면 좋겠어.”
예정에 없던 호출에 엘리야와 키리안은 긴장한 상태로 비비안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비비안의 웃음기 없는 얼굴을 본 키리안은 생각보다 심각한 일이 발생했음을 짐작했다. 둘이 도착하자 비비안이 자신의 품속에서 패드를 꺼내 키리안에게 건넸다.
“키리안, 방금 10분 전에 우리 회사 전광판에 뜬 네 실적이야.”
패드를 받은 키리안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키리안의 실적은 거의 악마 사원들 중에서 바닥을 기는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마이너스 실적이었다.
한 마디로, 현재 키리안은 천사 사원들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의 실적을 받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