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소림사로 가기 전에
“약 짓는 시간을 얼마쯤 주시겠어요?”
“한 시진 반(약 세 시간)이다.”
물러가는 당영영에게 상관욱이 지시사항을 덧붙였다.
“그 전에 너는 먼저 구궁대진(九宮大陣)을 발동해라. 상관보를 닫아!”
“네?”
“말 했잖느냐? 나는 귀식대법을 펼쳐 회복의 수단을 만들겠다고. 방해받으면 안 된다.”
“빈틈없이 손을 쓰겠습니다.”
당차게 대꾸한 당영영이 물러가자 상관욱이 즉시 말했다.
“너는 이제 두 가지 일을 해야 한다. 내가 이 고통의 세월을 견딘 까닭도 이 일 때문이었다.”
“그게 무엇이든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먼저 내가 전수하는 무예 한 수를 당장 익혀라.”
“당장이요? 아, 네. 알겠습니다.”
“또 하나는 내 부탁을 장차 반드시 실행해다오.”
“그 또한 백부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심려하지 마소서.”
“좋다. 그럼 무예부터 구전(口傳: 말로 전해 줌)하겠다.”
“소질은 단단히 새겨듣겠습니다.”
“오냐, 앞으로 이 수법을 번천일수(飜天一手)라 칭해라.”
“네? 아, 정말 어마어마한 명칭입니다. 하늘을 뒤집을 만한 수법이라니요.”
“이 호칭은 과장이 아니야! 실제의 위력이 그러하다. 펼쳐보면 알 것이다.”
주유곤은 학이지지(學而知至)의 재질을 타고난 몸이었다. 한번 배우면 곧 깨달아 익힐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상관욱이 가르쳐주는 수법을 연습하면 할수록 점점 더 많이 놀라고 있었다. 이 초식은 과연 여태 듣도 보도 못했던 절기였다.
신기한 일이 함께 일어났다.
진진설이 가르쳐준 현환보법(玄幻步法)이 같이 발동했다. 초식에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뜻밖의 사건이었다.
상관욱이 구술하는 번천일수의 초식과 칠음절맥의 몸으로 태어난 그 가냘픈 천재 소녀가 전해준 현환보법의 조합은 절묘하기 짝이 없었다.
“그만! 잠깐 사이에 만족스러울 정도로 익혔구나. 장하다!”
“백부께서 이끌어주심을 따랐을 뿐입니다.”
“그런데 네 보법은 어찌 된 것이냐?”
“아, 네. 이 보법은 질곡(桎梏: 심신을 속박하여 억누르는 고통)을 끌어안고 검왕부에 찾아든 소녀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그랬구나. 네 복이다. 앞으로도 그게 계속되면 좋겠구나.”
“네? 이게 제 복이라고요? 계속 이어지면 좋으시겠다고요?”
“지금은 긴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다. 앞으로 그 보법에 곁들여서 이 수법을 꾸준히 연마해라. 대성(大成: 크게 성공하게 됨)하게 되리라.”
“백부님께 큰 은총을 입었습니다. 소질의 무예가 급상승한 것 같습니다.”
“묘리(妙理)를 깨우쳤다는 말이겠지?”
“어렴풋하게나마 느낌이 왔습니다.”
“다행이다. 나는 도리를 다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건 왕년에 네 가친이 보여준 비급에서 내가 깨우친 것이다.”
“그러셨습니까?”
“우리는 서로 감추는 게 없었다.”
“아무것도 감추는 게 없으셨던 두 분의 관계가 아름다우십니다.”
“오냐.”
당연하다는 듯 대꾸한 상관욱이 이어서 말했다.
“너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련?”
“네, 들려주소서.”
“이 번천일수는 그가 보여준 교탈조화라는 비급에 들어있던 초식이다. 그 한 벌의 검법과 장법 중에서 장법의 기수식(起手式: 처음의 수법)이야.”
“아, 그런 거였군요.”
“묘하게도 네 부친은 검법에 치중했고 나는 장법에 매달렸다.”
“두 분은 그런 면에서도 조화롭습니다.”
“너는 장차 이 검법과 장법 한 벌을 모두 대성해야 한다. 너는 그 활달한 심성을 가진 검왕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생각해보아라. 자신이 검법은 통달했으나 장법에는 진척이 늦다. 그렇다고 이런 상고(上古)의 절기가 적힌 비급을 선뜻 보여줄 수 있겠느냐? 내가 아무리 자기의 의형이라 할지라도 그게 쉽게 가능하겠느냐?”
“존부의 대범한 아량을 새삼 실감합니다.”
“그렇다. 그런 활달한 심성이 내게 그 비급을 살펴보게 했다. 또 내가 작은 깨우침을 얻어 그의 아들에게 다시 전달하게 됐구나.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두 분의 뜻이 어우러져서 제게 환한 빛이 됐습니다.”
“다시 살펴보면 이렇다. 네가 익혔던 수법들은 맥락이 끊겨 있었을 것이다. 네 공력도 막혀있었고.”
“백부님께서는 정확히 보셨습니다.”
“이 기수식에 익숙해지면 그다음 초식의 연결고리도 찾을 길도 생길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이 기수식만으로도 강호에 네 적수는 많지 않을 것이다. 내공만 뒷받침되면 소림사의 백팔나한진도 반 시진 안에 너를 제압할 수는 없으리.”
“경악스러운 말씀입니다.”
삼음절맥의 질고(疾苦)를 끌어안고 검왕부에 찾아왔던 서문옥연이 말한 게 있었다. 반 시진 안에 이 수법을 제압할 고수는 강호에 많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지금은 소림사의 백팔나한진도 반 시진 동안은 자신을 제압하지 못한다니.
엄청난 말이었다. 수법으로는 누구든 자신을 찍어누를 수 없고, 지쳐서 나가떨어졌을 때야 억누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때 상관욱의 부추기는 음성이 이어졌다.
“너는 나를 무척 놀라게 했다. 네 자질이 그 정도일 줄이야! 이제 절정고수의 길에 발걸음을 얹었구나.”
“네? 소질의 내공은 아직 턱없이 부족한데요?”
“모르겠느냐? 네 미흡한 내공의 약점을 그 보법이 잘 보완해준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소녀를 만났음은 천우신조(天佑神助: 하늘이 보살피고 신이 도우심)다. 앞으로 네게 닿을 기연이 얼마만큼일지. 이미 이런 보법까지 익혔으니 큰 복이 아니겠는가!”
주유곤은 진진설이 자기에게 했던 조치들을 떠올리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소질의 신체에는 아직도 몇 개의 풀지 못한 올무가 남았습니다.”
“알고 있다. 그런데 방금 초식을 펼칠 때 네 장문혈과 영태혈이 여전히 막히더냐?”
“아!”
깜짝 놀랐다. 전혀 의식하지 않고 초식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공력이 자연스럽게 운용되고 있었다.
“그건 영아의 도움이었을 것이다.”
당영영의 매화꽃 피는 것 같던 얼굴을 묵묵히 떠올렸다.
그때 돌연 분위기가 바뀌었다. 상관욱의 침울한 음성때문이었다.
“이곳이 좀 쓸쓸하다고 느끼지는 않았느냐?”
주유곤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느꼈습니다.”
“까닭이 있다. 안주인이 없기 때문이야.”
“네? 하오면?”
“그렇다. 나는 아내를 일찍 잃은 몸이다.”
차마 대꾸도 할 수 없는데 담담한 음성이 이어졌다.
“내 딸을 낳다가 죽었지.”
“아, 안타깝습니다.”
“치워라! 그런 말은 필요 없다!”
상관욱의 반응이 의외였다. 얼른 수습했다.
“백부께서는 제 같잖은 말에 노여워하지 마소서.”
“오냐. 그 말은 그만하자. 다만 너는 이걸 알아 두어라.”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그동안 하루에 일각(一刻: 약 15분)밖에 깨어있지 못했다. 하지만 그 당문일절 당진진 여협과 영아를 통해서 무림의 소식을 다 듣고 있었다.”
“네. 그러셨군요.”
상관욱이 차분하게 다시 말을 꺼냈다.
“네 아우를 그 현의용녀가 데려갔느냐?”
“아니? 백부께서는 그것도 벌써 알고 계셨습니까?”
“내 의식이 혼미할 때도 나는 미물들을 통해서 밖의 소식을 받아보는 수단이 있다.”
“놀랍습니다. 신기하고요.”
상관욱이 눈을 깜빡거리며 대답했다.
“영웅대회가 열리기 전에 그 수단을 가르쳐주겠다.”
“그보다는 영웅대회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서두르지 마라. 이번 영웅대회는 예전과 다르다. 너도 곧 알게 될 테고, 거기서 건곤일척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떠맡겨질 것이다.”
“제 목숨이야 아깝지 않지만, 그렇게 엄중한 일입니까?”
“이게 다 네 부친과 이 못난 큰 아비 때문이다. 대의명분이나 앞세우고 오지랖만 넓었을 뿐, 제 곁의 사람들은 챙기지 못했어.”
“무슨 말씀인지는 모르오나 너무 자책하지 마소서. 듣기 민망합니다.”
“너희의 한(恨)이 얼마나 컸으랴? 아비의 부재로 맛보았을 너와 자운궁에 있는 내 딸의 결핍감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소질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렇겠지.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일 년 후에는 네 등골이 빠질 정도의 고초까지 겪게 생겼다.”
주유곤은 더 대꾸하지 않았다. 새로 알게 된 사실에 대해서만 질문했다.
“그런데 백부님. 제게도 의매가 있었군요? 기쁩니다. 누님입니까? 누이입니까?”
상관욱의 눈동자에 아련한 그리움이 피어올랐다. 대답해주는 음성에도 그게 그대로 드러났다.
“너보다 다섯 살 많은 누님이다.”
“아, 누님이 계셨군요. 어서 뵙고 싶습니다.”
“그런데 너희는 실제로도 혈육이다. 명분뿐인 의남매가 아니야.”
“네?”
“이런 일이 있었어.”
“어떤?”
“그 만력제의 딸 경순 공주 주약용(朱蒻蓉)이 어찌어찌하다가 내 아내가 됐었다.”
매우 놀라운 말이었다. 반문하는 주유곤은 음성에서도 그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입니까?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이해타산으로 결정된 혼사를 거부하고 황실에서 뛰쳐나왔던 사람이다.”
“놀랍습니다. 그런 결기를 지닌 분이셨군요.”
“그 사람이 이 세상의 세계에 있는 동안 우리 부부는 늘 같이 먹고 같은 침상에 누웠다.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어. 비록 황후 소생의 황녀는 아닐지나 공주의 신분인데도 나를 정성껏 섬겨줬다. 꼭 삼 년 동안 그랬느니.”
“사무치는 사연입니다. 천상 배필의 모범이셨고요.”
그 말을 듣는 상관욱의 얼굴에서도 보람과 긍지가 내비쳐졌다. 이어지는 음성에도 기꺼운 정서가 물씬 풍겨 나왔다.
“또 황실의 암투가 싫어서 강호에 나온 네 부친과는 뜻이 너무나 잘 통했던 남매였다.”
“듣고 보니 제게도 의미가 새롭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후손인 너희가 혈육이 아니라면 누가 진정한 혈육이랴?”
“그래서 이십여 년 전, 그 독룡신군의 침략이 벌어지자 백부께서 선두에 달려오셨군요.”
그런 것까지 헤아릴 줄 아는 주유곤을 상관욱이 쓰다듬듯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에 검왕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나중에 그 경순 공주가 내 딸 상관청혜(上官淸惠)를 낳다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이런!”
거기까지 말하다가 목이 메었다.
주유곤은 그 심경을 알 수 있었다. 위로하듯 다정하게 말했다.
“존부께서 백부님께 정감을 보여주셨군요?”
“그렇다. 검왕 주상길은 황재(皇材: 황제가 될 만한 재목)로도 손색이 없던 인물. 그런 대장부가 내 말을 듣고는 이 손을 잡고 눈물을 떨어뜨리며 울었다.”
주유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다가서서 상관욱의 손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상관욱의 간절하게 발성했다.
“너는 이제 내 청을 들어다오.”
“청이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그냥 분부하소서. 따르겠나이다.”
“좋다! 그러면 묻겠다! 네 아우는 네게 얼마만큼 귀한 존재냐?”
“그 귀중함을 어찌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이 천애(天涯: 이 하늘 아래에서 저 땅끝까지)에서 제가 기대고 의지할 단 한 사람입니다.”
“그렇구나. 그랬어.”
“무슨 뜻이시온지?”
“너는 내 말을 들어라.”
“말씀하소서.”
“비록 등운룡이 네게 그런 존재일지라도, 나는 네가 그 아이를 내게 주기 원한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