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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흘러내림(제3권) - 꽃잎
작가 : 말레이
작품등록일 : 2020.8.20

이 소설 "흘러내림"은 언어의 시작 점인 창세 때부터 2040 여 년 대의 미래까지를 언어와 문자를 소재로 이어가는 소설로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언어 등의 모든 것이 오늘 우리모두에게까지 흘러 내려왔으며 이 흘러내려옴은 막힐 수 있는 강과 내처럼 수평적 흐럼이 아니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수직적인 흘러내림이고 그렇게 우리에게 주신 것 중의 귀한 우리의 문자(한글)와 언어(한국어)를 세계에 널리 알리며 그 배에 복된 소식도 나누어야 한다는 주제로서 제1권 - 뿌리, 제2권 - 나무, 제3권 - 가지, 제4권 - 광합성 중의 제3권이다.

 
새 문자의 진통
작성일 : 20-08-30 19:00     조회 : 280     추천 : 0     분량 : 1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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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문자의 진통!

 

 “전하!

 이번에 만드신 언문은 매우 신묘(神妙)합니다.

 이제까지 전하께서 지혜와 능력을 발휘하시어 만드신

 많은 기기들은 천고(千古)에 뛰어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좁은 소견으로는

 걱정되는 부분이 있어서 간곡한 마음으로 말씀드리옵나이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이렇듯 10여 년 간 문자 연구에 정열을 쏟은 끝에 세종은 드디어 문자를 완성하고‘훈민정음’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어느 날 세종은 집현전의 학자들을 모아 놓고 평소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포부를 이야기했다.

 

 “나에게는 예전부터 생각해오던 꿈이 하나 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하오.”

 

 학자들은 아무도 세종의 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 궁금한 얼굴로 서로 쳐다보았다.

 

 “나는 이 나라의 임금으로서

 백성들이 편하게 살아가게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오.

 우리에게는 말은 있으나 글이 없어 백성들이 불편해 하고 있소.

 자기 나라의 글이 없는 민족은

 그 나라의 문화를 가꾸어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여러분들이 나를 도와

 우리글을 만드는데 전념해 주었으면 하오.”

 

 이 말을 들은 집현전의 모든 학자들은 세종의 백성을 사랑하고 문화를 빛내고자 하는 투철한 염원에 놀랐다. 세종은 우리글을 만드는데 필요한 사람의 여러 가지 입 모양과 글씨가 적혀있는 두루마리 종이를 꺼냈다.

 

 “중국의 한자는 물건의 모양을 본 딴 글자이나

 우리글은 소리 나는 대로 적는

 표음문자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이 입 모양을 여러 개 만들어,

 이 모양을 본떠서 우리글의 기본을 정하면 어떨지

 오랫동안 생각하여 만든 것이오.

 이 원칙에 따라 모든 것이 순서 있게 진행되면 좋을 듯하오.”

 

 이러한 소문이 돌면서 모든 신하들이 비로소 세종이 새로운 문자를 만든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과 일을 벌여 가는 세종에게 일부의 학자들이 서운한 감정을 갖게 되었다.

 1444년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와 직제학 신석조 (辛碩祖), 그리고 직전 김문(金汶),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河緯之), 부수찬 송처검(宋處儉), 저작랑 조근(趙瑾)등이 연명하여 이른바 언문을 만드는 일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그들의 의견을 들어보고자 그들과 한 자리에 않아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먼저 세종이 입을 열었다.

 

 “내가 만든 훈민정음에 대해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러한 세종의 질문에 부제학이었던 최만리가 이렇게 답변을 하였다.

 

 “전하!

 이번에 만드신 언문은 매우 신묘(神妙)합니다.

 이제까지 전하께서 지혜와 능력을 발휘하시어 만드신

 많은 기기들은 천고(千古)에 뛰어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좁은 소견으로는 걱정되는 부분이 있어서

 간곡한 마음으로 말씀드리옵나이다.”

 

 “내 그대들의 생각을 들어 보고 싶으니

 말하도록 하시오.”

 

 “전하!

 우리 조선은 건국 이후 정성을 다해 사대(事大)를 하며

 모든 일에 중국의 제도를 기본으로 하여 왔고 중국과 같은 글을 쓰고

 같은 제도를 시행하는 문명국이라 여겨 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언문(諺文)을 만드셨으니

 이에 저희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는 하나

 훈민정음은 완전히 새로 만든 글자가 아니라

 모두 옛 글자를 토대로 모방하여 만들지 않았소?”

 

 “그러나 전하!

 글자는 옛 글자이나 그 소리로는 다르니 옛것이라 말하기가 어려우며

 이러한 사실이 중국에 알려져

 이를 비난하는 일이 생기면 큰 화를 자초 할 수도 있사옵니다.”

 “그대의 말은 옳지 않소!

 바른 음을 만든 것은 사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오.

 우리가 중국의 제도를 가져다 쓰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은

 이미 실정에 맞게 바꾸어 사용하지 않았소?

 한자로는 우리말을 쉽고 정확하게 적을 수 없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의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데

 이러한 우리의 실정을 고려하여

 말에 따른 바른 음을 만든 것일 뿐이오!

 나는 즉위 이래 사대모화에 대해 조금도 소홀히 한 일이 없고

 이러한 사실은 황제께서도 잘 알고 계시므로

 혹여 모함하려는 자가 정음을 만든 것을

 빌미로 문제를 삼는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뜻이 사대모화에서 조금도 어긋난 적이 없음을 밝히고,

 이것은 오로지 우리나라 백성들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한 것임을

 자세히 설명하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오!”

 

 “전하!

 예로부터 넓은 중국 땅 안에서 기후나 지역이 다르더라도

 방언에 따라서 따로 글자를 만든 일이 없사옵니다.

 오직 몽고, 서하(西夏), 여진, 일본, 서번(西蕃)과 같은 무리만이

 제각기 자기들의 글자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모두 오랑캐들의 일이므로 말할 가치조차 없사옵니다.

 

 옛 글에도 중국(中國)의 문화가 오랑캐의 문화를 변화시켜왔지

 오랑캐 문화가 중국의 문화를 변화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를 못하였사옵니다.

 이제까지 중국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우리나라에 대하여 기자(箕子)의 유풍(遺風)을 간직하고 있어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중국과 견줄 만하다고 인정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들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은 이른바 향기로운 명약인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쇠똥구리가 만든 쇠똥 덩어리를 취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오니 이 어찌 큰 해가 되지 않겠사옵니까?”

 

 최만리의 이야기를 듣는 세종은 이러한 최만리의 기준과 생각이 대단히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세종은 가슴까지 답답하여 왔다. 그래서 더 힘주어 이야기를 하였다.

 

 “부제학!

 대개 음(音)의 차이는 스스로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나고

 사람이 차이가 나는 것은 지방의 환경 차이 때문이니

 지세가 다르면 기후가 다르고,

 기후가 다르면 사람들이 발음이 달라지는 것을

 어찌 모른단 말이오.

 그러므로 온 세상의 문자와 제도가 통일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발음이나 말은 같아질 수 없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산과 강이 많아

 자연스럽게 서로 경계가 되니

 당연히 중국과는 지리와 기후가 확연히 다른데

 어떻게 말소리가 중국말과 같을 수가 있겠소!

 그러므로 언어가 중국과 다른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오.

 예악과 문물은 우리가 중국과 같아질 수 있지만

 언어는 그럴 수 없는 것이니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지 않고 정음을 만드는 것이

 오히려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이라고 하는

 그대들의 주장은 말이 되지를 않소!”

 

 “전하!

 신라의 설총(薛聰)이 만든 이두(吏讀)는

 비록 거칠고 촌스러울지 모르지만

 중국의 글자를 빌어다가 어조사를 적는 것이므로

 한자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옵니다.

 그러므로 하급 관리나 하인들이

 이두를 익히고자 하면 먼저 한문으로 된 여러 책을 읽어서

 한자를 대강이라도 익힌 다음에 비로소 이두를 사용해야 하며

 또 이두를 사용할지라도 반드시 한자에 의해서만 뜻이 통하게 되니

 이두 때문에 한자를 공부하고 알게 되는 사람이 상당히 많고

 따라서 학문을 진흥시키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옛날부터 문자가 없었다면

 임시로 언문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보다는 좀 시일이 걸린다 하더라도

 한자를 익힘으로 긴 안목을 가지려 할 것이옵니다.

  하물며 이두는 오랜 세월을 써오면서 생활에 문제가 없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이두를 두고

 천하고 유익이 없는 글자를 만들고자 하시옵니까?

 만일 언문이 사용되면 관리가 되려는 사람들이

 오로지 언문만을 익히고 한자를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오며,

 또한 관리가 되려는 사람이 언문으로써 벼슬에 오르게 되면

 다음부터는 28자의 언문으로써 족히 세상에 입신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힘들여 성리학을 배울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여길 것이며

 그렇게 되면 후에는 한자를 아는 사람이 매우 줄어 들 것이옵니다.

 비록 한글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성현(聖賢)의 문자를 알지 못하면

 마치 담벼락을 마주 대하고 있는 것과 같이

 사리(事理)를 판단하는데 어둡게 될 것이니

 장차 어디에 쓸 수 있겠사옵니까?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쌓아왔던 학문을 숭상하는 정책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까 두렵사옵니다.

 이전부터 써 오던 이두가 한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어도

 지식인들은 이를 속되게 이두를 이문(吏文)으로 바꾸려고 하는 형편인데

 하물며 언문은 한자와 전혀 상관이 없고

 오로지 시장과 거리에서 속되게 쓰일 것이며

 수준 높은 학문과 정치를 하고자 하는 후세에는

 반드시 이를 바로잡겠다고 논의하게 될 것이옵니다.

 오래된 것을 멀리하고 새로운 것만 좋아하는 폐단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잘못된 일이오며

 언문은 하나의 신기한 재주에 불과하오니 학문에서는 손실만 가져오고

 다스리는 데에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으니

 저희들이 아무리 거듭해서 생각을 해 보아도 잘못 된 일이옵니다.”

 

 “지금 ‘정음은 소리를 쓰고

 글자를 합성함에 있어서 모두 옛 것에 어긋난다고 하였소?

 그렇다면 설총(薛聰)이 만든 이두(吏讀) 또한 소리를 달리한 것이 아니요?

 게다가 이두를 제작한 본래의 뜻도

 바로 백성에게 편리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소?

 만일 이두(吏讀)가 백성에게 편리를 주기 위한 것이라면

 지금의 언문(諺文) 또한 백성들에게 편리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요?

  그대들은 설총(薛聰)이 한일은 옳다고 하면서

 군상(君上)이 한 일은 그릇 되다 고 하니 그 이유가 무엇이오?

 또 언문을 제작한 것이 신기한 하나의 기예(技藝)에 불과하다고 하였는데

 내가 늙어서 소일하기 어려워 책을 가까이 하는데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로운 것만을 좋아하여 정음을 만들었겠소?

 그러니 그대들의 말은 상당히 지나치오.”

 

 “전하!

 하나의 신기한 재주라고 말씀드린 것은

 말을 하다 보니 말이 그렇게 표현이 된 것이오니

 별다른 뜻이 있는 있어서 드린 말씀은 아니옵니다.”

 

 “그럼,

 내가 하급 관리들을 선발하는 데 정음을 넣도록 하였지만

 전적으로 정음만을 대상으로 시험 보는 것은 아니고.

 대과(大科)의 경우에는 정음을 시험 과목에 편입하지도 않았으니

 학문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올 것이라는

 그대들의 주장은 너무 과장된 것이며,

 또한 다스림에 있어 아무 이로움도 없다고 하는데

 이것 또한 옳지 않은 말이니 가령 형장에서 죄인을 다스리는 문서들을

 이두와 한문으로 써 왔는데

 그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한 글자 의 차이로 인하여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있는데

 만약 정음으로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적은 후 읽어 준다면

 아무리 어리석은 백성이라 하더라도

 모두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으므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오.”

 

 “전하!

 중국은 옛날부터 말과 문자가 동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다스리는 일이나 소송 사건에 있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매우 많았고,

 우리나라도 옥에 갇힌 죄인 중에

 이두를 아는 사람이 직접 자신이 진술한 내용을 읽어보고

 그 내용에 사실과 다른 점이 있음을 발견하더라도

 매를 견디지 못해 승복하는 일이 많았사옵니다.

 이로 보건대 글의 뜻을 몰라서

 억울하게 형벌을 받는 것은 아님이 명백하옵니다.

 고로 아무리 언문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이와 무엇이 다르겠사옵니까?

 다만 죄인을 공정하게 다스리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그 일을 담당한 관리가

 어떠한 자인가에 달려 있는 것이지

 말과 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사옵니다.

 그러므로 언문으로 죄인을 공정하게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은

 그 본질과 상관이 없는 내용이옵니다.”

 

 “어허!

 내 일찍이 어리석은 백성들이

 법률 조문을 몰라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가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아

  죄를 범하지 않게 되었으면 하는 바

 비록 백성들이 법률 조문을 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그 중에서 큰 죄의 조항을 뽑아 이두로 번역하여 백성에게 반포하면

  백성들이 범죄 함을 피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하교한 적이 있소.

  그때 이조판서 허조(許稠)가 말하기를 .

 백성 중 간악한 무리들이 법률 조문을 자세히 알게 되면,

 오히려 법을 악용하는 일들이 벌어질까 두렵다고 하였는데

 이에 내가 그렇다면 백성이 알지 못하도록 내버려 두어

 죄를 범하게 한 후 범법한 자를 벌준다면,

 그것은 조사모삼(朝四暮三)의 술책에 가깝지 않겠느냐.

 더욱이 선대의 임금들께서 재판 시에

 법률 조문을 읽게 하는 법을 세우신 것은

 사람마다 모두 알게 하고자 함이 아니냐고 꾸짖은 적이 있는데

 그대들의 말은 허조의 말과 같지 않소?

 죄인을 공정하게 다루는 것은 관리의 자질에 달려 있는 것은 사실이나

 공정한 관리도 착오를 범하여 억울한 죄인을 만들 수 있으므로

 죄인을 다스림에 정음을 사용하면 억울한 일이 다소라도 줄어들 것이오.

 죄인을 다스릴 적에 문서를 정음으로 작성하여 들려주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적어질 것이라는 것은

 정음이 쓰일 수 있는 한 예일 뿐인 것이오.

 가령 만약에 정음으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한다면 일반 백성들이 모두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니

  충신, 효자, 열녀가 많이 나오지 않겠소?

 

 세종과 부제학 최만리의 대화가 계속 이어지지만 결론이 나지를 않자 이것을 보고 있던 응교 정창손이 최만리를 거들었다.

 “전하!

 이미 백성들이 알기 쉽도록 그림으로 그려 삼강행실도를 반포하였으나

 비록 언문으로 번역하지는 않았다고는 하지만

 그 뒤에 충신, 효자, 열녀가 많이 나온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삼강(三綱)을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오직 그 사람의 자질에 달려있는 것이옵니다.

 그럼으로 언문으로 그 책을 번역, 배포하였다 하여

 백성들이 그 행실을 본받는 것은 아닐 것이옵니다.”

 

 “오호!

 그대의 말은 허조의 말보다 더욱 심하구려.

 이것이 어찌 학문의 이치를 아는 선비의 말이라고 할 수 있겠소!

 그러면 사람의 자질도 교화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인데

 교화나 가르침이 필요가 없다는 말이오?

 어리석은 백성들을 가르쳐 깨우쳐줄 생각은 하지 않고

 그들의 자질 탓만을 하는 것이 선비 된 도리라 할 수 없거늘

 그대야말로 참으로 쓸모없이 속된 선비가 아니오?”

 

 괜히 한 마디 끼어들었다가 정창손이 궁지에 몰리자 다시 최만리가 한발 물러나면서 말을 이어갔다.

 

 “전하!

 무릇 일을 이루고 공을 세우는 일들이

 빠르게 처리된다고 하여 귀하다 하지 않사옵니다.

 그런데 근래 나라의 모든 조치들을 보면

 모두 빨리 이루어지는 데에만 힘을 쏟고 있으니

 이는 다스림 의 근본이 아니라고 사려 되옵니다.

 비록 부득불 언문을 만들지 않을 수 없다 하더라도

 이는 풍속을 바꾸는 중대한 일이므로

 마땅히 재상들로부터 아래로는 하급 관리와

 백성들에게까지 함께 상의를 하시는 것이 마땅한 아옵니다.

 그리고 행여 모두가 다 옳다고 하더라도

 시행하기 전에 백성들에게 충분히 그 뜻을 거듭 설명하고

 또 다시 세 번을 더 생각하며

 역대 제왕들의 다스림과 비교하여 보아도 그에 어긋남이 없으며,

 중국에 통보하여도 부끄러움이 없으며,

 후세에 성인(聖人)이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그가 이를 보더라도 잘되었다고 사려 될 때

 비로소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할 것이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신지요?

 여러 사람의 뜻을 널리 묻지도 않았을 뿐더러

 다만 하급 관리 10여 인에게 명하여 정음을 익히게 하며

 또 옛 사람이 이미 이루어 놓은 운서(韻書)를 가볍게 고친 후

 그에 황당한 언문을 붙여서 공장(工匠) 수십 인을 모아서

 이를 인쇄하여 급하게 널리 유포시키려 하시니

 천하와 후세의 공론이 어떠하겠사옵니까?

 게다가 이번에 청주(淸州)의 초수리(椒水里)에 행차 하실 때에

 금년에 흉년이 든 것을 특별히 염려하시어

 국가의 행정을 처리함에 있어서

 중요한 일들도 모두 간략하게 시행하도록 모

 든 것을 대신들에게 맡기 시었사온데

 언문은 국가의 긴급한 일도 아니고,

 부득이한 기한이 있는 일도 아닐 찐대

 어찌 행재소(行在所)에서 까지 급하게 서두르시느라

 전하의 옥체에 해가 가도록 하시오니

 저희들은 더욱 그 일이 옳은 할 수 없사옵니다.”

 

 “그대들이 운서(韻書)를 아는가?

 사성(四聲)과 칠음(七音)을 알며 자모가 몇인지 아는가?

 우리나라의 한자음은 마땅히 중국의 음과 같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을 이어도는 동안 자음과 모음이 저절로 어음에 이끌렸으니,

 이것 또한 한자음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한 까닭이오.

 그러나 비록 그 음은 변했다 하더라도

 그 사용되는 뜻이나 억양은 전과 같을 수 있는데

 그에 대한 바른 것을 전해 주는 책이 없소.

 그래서 어리석은 스승이나 일반 선비들이 반절법도 모르고,

 자모와 운모의 분류 방식도 모르고,

 혹은 글자 모습이 비슷하다고 해서 같은 소리로 읽고,

 혹은 앞 시대 임금의 휘자이기 때문에 피하던 것으로 인해서

 다른 음을 빌려 쓰기도 하고,

 혹은 두 글자를 합해서 하나로 하기도 하고,

 혹은 한 음을 둘로 나누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전혀 다른 글자를 빌려 쓰기도 하며,

 혹은 점이나 획을 더하거나 빼고, 중국 본토 음을 따르고,

 우리나라 음을 따라서 자모와 발음, 뜻과 억양이 모두 변하였으니

 만약 내가 이 운서(韻書)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 누가 이를 바로 잡을 것이오?

 

 “전하!

 옛 선비가 이르기를

 무릇 모든 신기하고 보기 좋은 일들이 선비의 뜻을 빼앗아 가니

 편지 쓰기는 선비의 일에 가장 가까운 것이나

 전적으로 이것만을 좋아하면

 이 또한 저절로 뜻을 잃게 된다고 하였사옵니다.

 지금 동궁께서는 비록 덕성을 많이 성취하셨지만

 아직은 성학(聖學)에 깊이 마음을 써서

 모자라는 점을 더욱 닦아야 할 것이옵니다.

 언문이 설사 유익한 것이라고 하여도

 단지 선비의 육예(六藝)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임으로

 치도(治道)에는 조금도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인데

 동궁께서 이 일에 정신을 쏟고 마음을 기울여 하루의 시간을 보내니

  이는 현재 시급히 닦아야 할 학문에 손해가 되는 일이옵니다.”

 

 “내가 나이 들어 국가의 서무(庶務)를 세자에게 맡겨서 하는 까닭에

  비록 작은 일이라도 세자가 마땅히 참여하여 결정하는데

 하물며 정음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만약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이 이 일을 맡아서 해야겠소?”

 

 “전하!

 공적인 일이라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동궁께서 참여하여 결정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그리 급박하지 않은 일에까지

 하루 종일 마음을 쓰실 필요가 없지 않겠사옵니까?

 

 “정음을 만드는 일이 어찌 국가의 공적인 일이 아니란 말이오?

 그대들과 더 이상 말하기 어렵소.

 어찌 이리도 생각이 다를 수가 있단 말이오.”

 “전하!

 저희들이 모두 보 잘 것 없는 재주를 가지고

 외람되게도 전하를 모시고 있기에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감히 담고만 있을 수 없어

 삼가 가슴속에 가진 생각을 다 아룀으로

 전하의 어지심을 흐리게 하였사옵니다.”

 

 “그대들이 나를 가까이서 시종 하므로

 나의 뜻을 명확하게 알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행동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겠소?

 또한 이전에 김문(金汶)은 말하기를

 언문을 제작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 아니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는 반대로 불가하다고 주장하는 무리에 포함되어 있으니

  이 어찌 된 일이오?

 내가 그대들을 불러 이야기를 나눈 것은

 정음에 관한 그대들의 의견을 듣고자 했을 뿐 이었소.

 그런데 임금의 뜻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치에 닿지도 않는 말로 답하며 궁지에 몰리면

 오히려 말을 교묘하게 바꾸어 응답하니

 그대들에게 죄를 묻지 않을 수가 없겠소.

 여봐라!

 지금 당장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 부수찬 송처검,

 저작랑 조근을 의금부에 하옥시키도록 하여라!

 또 의금부에서는 김문이 전후에 태도를 바꾸어 말하게 된 사유를 조사하여

 어떤 처벌을 내려야 할지 아뢰도록 하여라!”

 

 세종은 나라의 임금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통치를 하는지 임금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고 앞뒤가 안 맞는 엉뚱한 주장을 하며 궁지에 몰리면 요리조리 내용을 바꾸며 자신들의 목적을 관철시키려고 한 이들을 감옥에 가두도록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세종은 그 다음 날 이들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는데 다만 속된 선비라는 꾸지람을 들었던 정창손은 파직시키고 처음에는 정음을 제정하는 것을 가하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말을 바꾸어 반대를 한 김문에게는 벌금을 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창손도 얼마 후 다시 복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최만리에 이어 부제학에까지 오르게 된다. 김문의 죄는 의금부에서 조사하여 보고하기를 곤장 100대를 맞고, 소금을 굽거나 쇠를 만드는 등의 노역을 3년 간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노역은 시키지 않고 곤장 100대도 직접 매를 맞지 않고 돈을 내어 속죄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최만리는 다음날 석방되어 복직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하여 살다가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최만리는 집현전이 새로 확장되던 때부터 지금까지 일해 온 것만을 보더라도 세종이 최만리를 얼마나 아끼는 신하였는지 알 수 있는데 세종과 최만리의 사이에는 이러한 일화도 있다. 최만리는 술을 좋아하였는데 어느 날은 취한 채로 어전에 들어가 임금을 뵈었더니 세종이 만리를 걱정하여

 

 “경은 몸을 생각하여

 앞으로 세 잔 이상씩은 마시지 마오.”

 

 이에 왕명을 어길 수 없었던 만리는 자신이 쓸 술잔을 스스로 크게 만들어 하루 세 잔씩만 마셨다. 후에 세종이 만리를 접견할 때 술을 많이 마셨음을 알고 나무라기를

 

 “경은 또 취기를 띄고 나왔으니

 어떻게 된 것이오.”

 옆에 있던 동료가 말하기를

 

 “만리는 어명대로 세 잔만을 마셨을 뿐이 온데

 단지 스스로 큰 술 잔을 만들어 마셨사옵니다.”

 

 이에 세종이 껄껄 웃으며

 

 “경이 왕명을 그토록 철저히 지킬 줄은 몰랐소.”

 

 바로 명하여 공관(工官)으로 하여금 은 술잔을 크게 만들게 하여 그 잔을 집현전 본관에 갖다 두고 수시로 만리를 접대하게 하였다. 세종이 최만리에게 신문(新門) 밖의 저택을 하사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이곳을 천 칸의 집이 들어설 만큼 넓다 하여 천간허(千間墟)라 불렀으며 그 고개 이름을 만리현(萬理峴)이라 불렀다. 최만리가 고향 땅으로 돌아가자 세종은 만리가 가고 없는 집현전 부제학 자리를 항상 비워둔 채 언제나 만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는데 만리의 부음(訃音)을 듣고서는

 

 “대쪽 같은 만리가!

 결국은 죽었구나!”

 

  세종은 침식을 잊은 채 오랫동안 슬퍼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세종은 1443년 12월에 한글을 완성한 뒤, 신숙주, 성삼문 등의 집현전의 신하들로 하여금 한글과 관련된 연구와 더불어 여러 책을 편찬하는 일을 하게 하였고 세종의 명을 받은 신숙주 등의 신하들이 훈민정음의 원고를 작성하여 1446년 9월에 완성하였는데 이 책은 그러한 책들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한글의 제자원리 및 사용방법을 해설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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