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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추리/스릴러
안의 너
작가 : 녹슨등잔
작품등록일 : 2020.8.18

과거의 악몽이 되는 3인방의 잔재를 떨치지 못한 부식이란 남자가 있다. 우연찮게 박나리라는 미스터리한 남자와 친구가 된 고독한 사람이다. 나리는 신비스런 힘의 소유자로,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객체로서 마주 보게 한다.
나리는 씻지 못한 죄를 저지른 자들로 하여금 낙인을 먹인다. 그가 모르는 곳에서는 X교라는 사이비 종교의 신봉자들이 세상을 잿빛으로 만들고 있다. 나리가 그들의 소굴로 흘러 들어간 건 순전히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 모두 지독한 악인들임에는 부정할 수 없고 부식의 소용돌이 또한 거기서 소멸되어야 한다.

 
26. 도시
작성일 : 20-08-30 08:20     조회 : 241     추천 : 0     분량 : 7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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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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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판을 바꿔 단 승합차가 안개비를 뚫고 달렸다. 와이퍼가 앞유리창을 두들기는 물방울을 쓸고 지나갔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떨어지는 빗방울의 단조로운 리듬.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와이퍼. 용범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입은 마치 쪼갠 수박처럼 보였다. 와이퍼에 한 번 신경을 뺏기고 나니 마치 눈앞에서 흔들리는 추를 보는 거 같았다. 금방은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그는 차를 갓길에 댔다. 잠깐 졸기로 했다. 이렇게 업그레이드된 신체도 기본적 욕구 앞에서는 무력했다. 그는 하품을 크게 하면서 좌석을 뒤로 젖혔다. 시체가 있었던 조수석에서는 샴푸 냄새만 가득했다. 수건으로 얼마나 박박 닦았는지 모른다. 마을을 바로 벗어나지 못했었다. 시체 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무튼 마을을 기점으로 도시에서 가장 먼 조부의 집에다가 시체를 집어넣었다. 마스크, 장갑, 머리 덮개, 덧신이 이럴 때는 매우 유용하다.

 귀중품을 챙겨야 했다. 당연히 돈과 관련된 것들이다. 혹여 누군가와 마주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걱정도 했었다. 호문쿨루스를 내보내야 할까 아니면 함께 하자고 거래를 해야 하는 것인가. 다행히 그를 잡는 손은 없었다. 그 이후 목적도 없이 수 시간을 달리기만 했다. 아마도 모두 현호 집에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의 안녕을 빌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은 아니었다. 그들은 너무도 멀리 있었다. 그의 내면에서든 어디에서든.

 

 그는 차 안에서 4시간을 넘게 잤다. 한 20, 30분 잔 거 같은데 싶어 그도 놀랐다. 그는 우렁찬 소리를 내면서 시동을 걸었다. 눈앞이 맑아지면서 다시금 기분이 좋아졌다. 차가 움직이고 얼마 후에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찬 기운이 들어오는 것이다. 돌아보니 뒷문이 열려 있었다. 호문쿨루스가 없었다.

 “이젠 차 문도 열 줄 아네? 어? 하하하!”

 그는 망나니가 쓴 하회탈 같은 얼굴을 한 채 배가 꺼질 때까지 웃었다.

 

 “여?”

 나리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깨를 일자로 들고 있었는데 부식이 보기에 눈이 좀 피곤해 보였다.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거리고 있는 모양으로 보건대 거짓은 아닌 듯했다.

 “벌써 나왔어? 15분 전이면 꽤 선방했다고 생각했는데 훨씬 빠르네.”

 나리는 자주색 티셔츠를 입은 부식을 향해 엄지를 들었다.

 “변화가 있는 듯도 하네요.”

 그들은 육교 앞에 있었다. 육교에서 사람들이 오르내렸다. 하늘에 뜬 해는 뜨거웠다. 나리도 그렇고 부식도 땀을 꽤 흘렸다. 인도의 사람들은 햇볕 때문에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웃기도 했다. 젊은이들이 즐겨 찾을 법한 가게들이 즐비했다. 도로는 차로 가득했다. 금방에라도 사고가 날 듯 빵빵거리며 엎치락뒤치락했으나 평화는 유지되었다.

 나리가 얼굴 땀을 손바닥 날로 쓸어내렸다. 주름살을 만들면서 짝짝이 눈으로 파란 하늘을 흘깃 보았다. 여고생들이 지나가면서 꺄르륵 거렸다. 뒤늦게 그 소리를 들은 나리가 환한 미소를 되찾고 머리를 크게 움직였다.

 “팬 서비스가 늦어버렸네.”

 “인기 많아서 좋겠네. 완전 연예인이잖아?”

 “이야 살아 있는 좀비한테서 그런 소리를 들게 될 줄이야! 하긴 좀비 남의 인기는 그런 인기가 아니었지. 별수가 없군요. 상처를 드렸습니다.”

 “뭘. 아무렇지도 않은데.”

 둘은 약속 장소인 빙수 가게로 가서 과일이 많이 얹어진 걸로 주문했다. 부식은 시럽이 섞인 얼음만 먹었다. 나중에 종류별로 입에 넣은 과일 조각은 나리의 성화 때문이었다. 나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듯했다. 특히 여자들의. 그만큼 잘생긴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뿐 다른 건 없었다. 즐긴 걸 속에 담지 않고 그대로 뿌려둔다고 해야 맞을 것이었다.

 “근데 팔에 문신은 뭐죠? 무슨 의미가 있을 거 같은데?”

 “아, 이거……?”

 부식이 머뭇거리는 사이 나리가 큰 얼음덩이 하나를 입에 넣었다가 실수로 삼켜버렸다. 십년감수한 그는 후 하고 안도했다.

 “여자 친구에게 있던 거야.”

 나리가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무심코 물은 거였다. 해코지할 의도는 결코 없었다. 눈 밑 살이 도톰했으나 경직된 것이지 다른 의미가 아니었다. 그는 눈을 빠르게 깜박거리며 수저를 흰 그릇에 놓았다. 쓴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미안해요.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어서 그만…….”

 “네겐 아무것도 아닌 거니까 그랬겠지. 알고 보면 페이크가 좀 있었지.”

 “페이크라니요?”

 “/././. 라고 착각했었거든. 나도 모르겠는데 그렇게 보였어. 그래서 했지. 물론 나 역시도 문신에 관한 의미를 만들었지만. 나와 그녀 그리고 언젠간 태어났을 2세를 상징한 거야. 세 개의 패턴이 반복되는 거 보이지? 왼팔에 새긴 건 손목 때문이지. 삶을 위한 거야.”

 “우와 진짜 머리 아프다. 아씨 진짜 이건 어떻게 변명도 안 나오네……!”

 나리가 양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다가 세게 쓸어내렸다. 자연히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지?”

 “애인보다는 돈을 좋아한 사람이었죠. 일부러 비꼬는 겁니다. 나도 살아야죠.”

 “이런 내가 어떻게 살아 있지?”

 “그야 본인이 잘 알겠죠.”

 뻔뻔함을 되찾은 나리였다.

 

 우주에서 흘러내린 적막을 바라보면서 부식은 유리에 손을 갖다 댔다. 영혼이 유리창으로 옮겨 가려는 듯 육체에서 한 꺼풀은 벗겨져 나와 있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용케 따라붙었다. 간신히 붙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유리를 만져대다가 어떤 글자를 썼다. 손장난을 멈춘 후에야 무슨 말을 썼나 굳이 집착하게 되었다. 생각나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가 떠올린 여러 개의 후보는 모두 오답이었다. 그도 알고는 있었지만 되도록 좋은 것을 정답으로 삼고 싶었다.

 그는 어깨 너머를 힐끗 보았다. 전화기만 시야 가까이 다가왔다. 이상하게 아버지만 생각하면 전화기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스마트폰에도 입력되어 있는 전화번호지만 돌아다니면서 통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연락이 없었는지 꽤 된 거 같았다. 그는 무기력하게 전화기로 가서 무심한 얼굴로 수화기를 들었다. 다이얼을 누르려다가 동작을 멈췄다. 010-81. 다음 숫자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스마트폰을 가져와서 연락처를 뒤졌다. 얼마나 성의 없어 보이는지 모른다. 몇 개 되지도 않는 숫자건만 액정과 다이얼을 번갈아 보면서 숫자 키를 삐삐 눌렀다. 연결 음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전화가 꺼져 있었다. 배터리가 다 되었거나 전원을 끈 것일 터였다. 그는 수화기를 바로 내려놓았다. 그가 몸을 움직이자 움푹 꺼져서 뼈와 내장에 달라붙어 있는 살결이 목 늘어난 티셔츠에 사구를 만들었다. 마치 살모사가 지나간 자리 같았다.

 “어디 간 거야.”

 부식이 말했다. 마치 남의 일인 양.

 

 삑. 카운터에 인스턴트식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하나씩 가져와 바코드를 찍는 은샘의 얼굴이 어두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손님이 가게로 들어오거나 나갈 때는 친절한 인사를 잊지 않았다. 편의점 일을 하다 보면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난다. 미성년자임을 숨기고 술, 담배를 사려는 청소년. 다짜고짜 외상을 하겠다는 막무가내 손님. 올 때마다 사사로운 얘기를 하면서 괴롭히는 손님. 아가씨를 애인 삼으려는 아저씨, 할아버지. 그리고 용범.

 그녀는 용범을 바로 알아보았다. 출입문 소리를 못 들은 건 놀랄 일이 아니었다. 컴퓨터 모니터가 있는 측면에 팔짱을 낀 채 엎드려 있는 그의 모습만 봐도. 언제부터였을까? 그녀는 빨개진 얼굴을 추스르지 못하고 용솟음치는 낱말들을 삼켰다. 입을 열 수 없었다. 열었다간 바보 같은 짓을 해버릴 거 같아서였다. 용범은 웃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그것만 보고 그의 기분을 파악하긴 힘들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웃을 사람처럼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말이다.

 그녀는 눈을 어디다 둘지 몰라서 헤맸다. 그는 사형수가 입을 법한 스타일로 옷을 입고 있었다. 마치 양팔이 옷으로 도포된 듯 헝겊 대기를 둘둘 감고 있었다. 이 더운 날에 그런 차림새니 땀범벅이 된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얼굴은 거의 물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었다. 줄줄 흐르는 땀도 개의치 않는 그의 눈웃음이 그녀는 소름 끼쳤다. 90세 노인의 주름처럼 깊게 갈라진 눈웃음에 땀방울이 개울을 이루고 있었다. 에어컨 바람이 아니었으면 저렇게 편안한 자세로 있을 순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그들 일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다. 또한 숨겨진 내막이 대중매체에서 보고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러니 어찌 김씨 일가인 용범을 보고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그녀는 그들 일가와 일정 부분 연관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찾아온 것만 봐도 안다. 그는 큰 머리를 갸우뚱거리면서 해맑게 웃었다. 입술이 열리면서 단단한 과실도 곧바로 으깨 먹을 거 같은 큼직큼직한 치열이 드러났다.

 “은샘 씨 어떻게 지냈어요?”

 그의 눈이 은샘의 이름표에 가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 저질스럽게 느껴져서 그녀는 오싹하기까지 했다. 살에 덮여 있어서 눈동자를 찾을 순 없지만 자신의 가슴을 훑고 있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보이지도 않는 눈짓도 느껴졌다. 그러니 흉흉한 눈빛도 느낀다.

 “네? 아, 전 그럭저럭인데…….”

 “아? 그래요? 그때 기억나세요? 현호 핸드폰으로 전화했었잖아요?”

 “네? 네…….”

 “나중에 같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거든요? 모르는 녀석이었는데 음, 혹시 아세요?”

 “아뇨.”

 그녀가 도리질을 했다.

 “집에 불이 났어요. 제법 컸는데, 그만 다 죽어버렸어요.”

 “네?”

 “혹시 불나서 제 가족이 다 타죽은 거 아세요?”

 “……그게 저는 그게…….”

 용범이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가 건들지만 않으면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으며 화장실도 가지 않을 거 같았다. 그 상태로 백 년도 버틸 수 있을 거 같은 사람이었다. 정말이지 평온하고 티끌 하나 해가 안 될 거 같은 인상이었다. 하지만 투시가 되는 안경을 쓰고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허공에 떠 있는 식칼을 발견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살과 근육을 뚫는 걸 즐기고 창자와 생명을 파괴하며 신경을 예리하게 베는 식칼. 칼잡이는 빨갛고 양쪽으로 나사가 박혀 있을 것이다. 손잡이에는 미끄럼 방지가 되어 있고 칼날의 이는 시종 빛을 낼 것이었다. 차디찬 칼날과 온기가 스며있는 플라스틱 손잡이. 그녀는 다리를 후들거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어쩌지? 어쩌지……?’

 “이리 와요.”

 “네?”

 “이리 와요.”

 그녀는 뻣뻣하게 다가갔다.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그가 팔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다른 손은 아직도 도포되어 있었는데 그녀는 거기에 칼 같은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손이 뽑혀 올라온 순간 오해라는 걸 알았다. 어떻게 한 건지 뼈만 있는 팔을 단 시커먼 손이 그녀의 목을 졸랐다. 두 손으로 그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곧 기절했다.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던 나리는 하마터면 입에 있던 걸 뱉을 뻔했다. 벽에 붙은 TV가 전하는 내용이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아침부터 비슷한 뉴스가 있었다. 하지만 저녁때인 지금은 그 내용이 달랐다. 원래는 인가에 불법 침입하여 돼지를 먹어 치운 노숙인에 관한 엽기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데드맨워킹’이라는 참신한 제목을 뽑은 뉴스였다. 확실히 방송 3사보다는 케이블 쪽이 새 시대와 접목을 잘하는 듯했다. 재밌는 재목이다.

 “방금 들었어요? 생명 반응이 없는 사람이래요! 봤어요?”

 분식집 주인 여자가 말했다. 딱히 누구를 지목하고 말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두루 잘 지내는 타입이었다.

 나리는 튀김을 떡볶이 양념에 적셔서 입에 넣었다. 공영 방송에서는 저 사건을 두고 뭐라고 말하는지 궁금했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했다. 비슷한 말을 하긴 했다. 생명 반응이 없는 사람이라니 무슨 말일까 싶어 궁금증이 증폭했다. 죽칠 요량으로 순대 1인분을 시켰고 떡볶이도 좀 더 주문했다. 이로써 든든한 저녁이다.

 정보의 결과는 이랬다. 영락없이 죽은 사람이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처럼 움직인다. 원시인과 비슷한 남녀다. 3살 때부터 개에게 길러져 21살인 지금도 언어를 익히지 못하는 유럽의 누군가보다 심각하다. 이들은 분명 좀비다. 검사가 필요하다.

 “모자이크가 없어야 좀비인지 뭔지 알지. 하! 좀비라…….”

 좀비 남을 생각하면서 그는 픽 웃었다.

 

 문화예술회관이 보였다. 웅장하고 현대적인 건물이었다. 문화예술회관의 앞마당에는 금속으로 된 각종 전시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부식은 고대 그리스의 신전과 같은 계단을 보았다. 그는 거침없이 올랐지만 지나가는 관람객들은 걱정 섞인 눈이었다. 딴생각을 하느라 헛디뎠을 뿐인데도 에구구 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뒤따랐다. 그렇다고 따로 도와줄 마음은 없어 보였다.

 그는 팸플릿을 들고 5층 미술 전시관으로 갔다. 복도부터 시작해서 미술품이 걸려 있었다. 미술전시실 내 카운터에 혹시 비용이 드느냐고 물었다. 무료라는 답을 듣고 그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는 우측을 시작으로 빙 돌기로 했다. 미술품의 배치는 지역을 구분하고 있었다. 전국의 화가, 일반 시민의 그림들이 한 데 걸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의 편차가 심했다.

 어떤 건 문외한이 보기에도 대단해 보였다. 또 어느 건 학교 미술 시간에 그린 것 같은 것도 있었다. 액자도 형편없었다. 출품자의 이름을 보니 너무 옛날식이었다. 할머니가 그린 거 같았다. 그러자 그림이 달라 보였다. 구리색을 입은 액자에서도 낡은 느낌이 났다. 낡다는 느낌은 시절이었다. 그는 턱을 긁적거리면서 지나갔다. 간혹 사람들이 몰카를 찍는 게 느껴졌다. 사진을 찍는 김에 기분 나쁜 인간도 찍는 거 같았다. 흔한 일이라 그는 제 할 일을 했다. 그림 감상. 정말 감미로운 기분이었다. 여기서 이불을 깔고 자면 10초 안에도 잘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미술전시실을 나가면서 그는 안내원의 얼굴에 새겨진 낙인을 발견했다. 하지만 눈을 깜빡거리는 사이 사라졌다. 잘못 본 걸 알지만 마음에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그도 낙인을 볼 줄 알았다. 하지만 빈도수가 현저히 낮았다. 그도 그걸 바랐다. 더 이상 누군가가 눈앞에서 험하게 죽는 꼴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정신이 피폐해진 생태라 견딜 수 있는 것이었다. 확실히 낙인으로 보자면 용범의 반밖에 보지 못하는 그였다. 그들 일가에서 가장 낙인을 잘 확인하는 건 현호였다. 개념이 없다고 무시만 받다가 이젠 죽고 없지만.

 버스를 타려고 버스정류장에 있고 나서야 소변 생각이 난 그였다. 걷고 싶어서 몇 정거장 지난 터라 문화예술회관까지는 거리가 있었다. 하는 수 없으면 그리로 가야 했지만 마침 공설운동장을 발견했다. 화장실에 가는 김에 운동장 구경을 할까 했다. 밖에서 보면 스타디움 못지않은 장소였다. 운동장 뒤로 돌아가니 대숲이 나왔다. 공원처럼 구성해 놓은 곳으로 표지판을 보니 몇 개의 구획으로 되어 있었다.

 실외 화장실이 보였다. 실수로 여자 화장실에 들어갈 뻔한 그는 웃었다. 마디 하나는 더 는 듯한 가녀린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화장실 안에는 중년 남자가 입을 헹구고 있었다. 물이 찬 세면대 위가 고춧가루로 끔찍하게 되어 있었다. 부식은 끝에 있는 소변기 앞에 서서 막 지퍼를 내리려 했다.

 “이 씨팔 새끼 어딨어? 아직 여깄지?”

 눈이 휘둥그레진 부식이 화장실 입구를 봤다. 멀대같은 남자가 샐쭉하게 입술을 비튼 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손에 있는 과도 탓에 부식이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부식 쪽은 관심이 없었다. 눈이 화장실 칸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 부식의 시선을 확인하고 세면대 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이 씨팔 새끼야?”

 그다음에 조용했다.

 부식은 덜덜 떨면서 기다렸다. 잠시 후 멀대가 화장실을 나섰다. 부식은 조금 더 있다가 용기를 내서 입구를 향해 걸었다. 얼핏 세면대 쪽에서 배를 부여잡고 쓰러진 시체를 본 것도 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돌렸을 때 검은색 대리석으로 된 젖은 세면대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욕 좀 했다고 지랄이잖아. 좆같이.”

 중년 남자가 맥 빠진 음성으로 말했다.

 화장실을 나서면서 부식은 얼마나 안도를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화장실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멀대와 마주치자 다시금 공포가 살아났다. 멀대는 슬쩍 볼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식은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멀대의 왼쪽 눈 밑에 낙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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