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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오리진
작가 : 시리홍
작품등록일 : 2019.9.23

세상의 상냥함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그 안에 숨어있던 세상의 진실을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깨달아버린 주인공은,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에게 갑작스럽게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116화 왕과 함께 (1)
작성일 : 20-08-29 20:06     조회 : 308     추천 : 0     분량 : 4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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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그 때 그...지긋지긋한 이야기에서 봤던 아저씨 아닌가요?"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던, 시은이의 기억력은 상당히 좋았다.

  천년의 대회가 막 시작되었을 때, 뷰란꽃을 소개하며 친근하게 다가왔던 사내.

 "기억하는구나! 맞아. 커피 한 잔 얻어먹으러 왔어."

  짧은 갈색머리칼을 위로 세워두었고, 머리카락 끝마다 물방울과 같은 조그마한 공이 화려하게 걸려있었다.

  이상적인 외모라고 할 수 있는 얼굴이었으나, 왼쪽 볼부터 오른쪽 귀까지 그어진 흉터가 그어져, 그가 마냥 순탄한 길을 걸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렇게 개성적인 외모를 잊을리가 없었다.

 '으음.. 바로 실운을 쫒으려고 했는데..'

  시은이는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실운을 먼저 죽이러 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 사내가 보였던 호의와, 커피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음에도 그리워했던 사실이 떠올라, 고민이 되었다.

 '시은씨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커. 실운과 카르탄처럼.'

  저렇게 멀쩡한 외모를 가지고, 커피를 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렇게 추측이 가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은이는 놀라고 있었다.

  그의 힘이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한대의 기력 구슬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게 된 시은이의 기력감응도는 거의 최고급이라고 할 수 있는 상태.

  고리온 드의 강함도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했는데, 여기 눈앞의 사내는 전혀 알수가 없었다.

  힘이 아예 없는 것인지, 아니면 너무나도 강대해 시은이가 느낄 수 없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걱정하지마. 네가 나와 적이 될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

  사내가 호쾌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시은이는 자신의 생각을 급하게 수정했다.

  힘이 아예 없는 건 절대 아니라고.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단보루와 시야카는 편하게 시은이의 곁에 다가왔지만, 시즌과 젠은 조금 떨어져 있었다.

  시은이는 그들이 그저, 처음보는 이에 대한 경계심을 가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곧 눈치챌 수 있었다.

 "..왜 그래?"

  걱정되는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시은이가 사내에 대해서 아는 건, 뷰란꽃을 알려주고 커피에 대해서 알고 있는, 혹시모를 옛 여주인의 지인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마치, 보아서는 안될 걸 본 것 같이 점점 창백해져가고 있었다.

  그러자 사내의 눈썹이 미묘하게 치켜올라갔다.

 "..음, 아는 얼굴이 보이는 군."

  단보루와 시야카에게 미소를 지어주던, 사내가 조금 앞으로 나아가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들에게 다가섰다.

  그러자, 그들의 얼굴이 더 창백해지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 조아리고 있었다.

  하지만 젠은 고개를 숙이면서도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지, 고개를 숙이자마자 창백해보였던 표정을 찡그리는 표정으로 바꿔냈다.

 '뭐지? 너무 저자세인데.'

  황금회에서 볼법한, 마치 자신보다도 더 높은 이를 맞이할 때 보이는 행동이었다.

 "..왕.."

  시즌이 어렴풋이 읊은 한 마디에.

  이곳의 공기가 단번에 달라졌다.

  숨막히는듯한 압박감이 전체에 내달리며, 그들의 행동을 제어하고 있었다.

  기력이 주변에서 피어오르지 않았고, 심지어 자신의 재능이라고 할 수 있는 재능조차 운용할 수 없었다.

  그저, 그 상태로 왕으로 보이는 사내를 바라볼 뿐이었다.

 "호오.. 역시.. 왠지 너라면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어."

  그 사이로 조금 편하게 움직이고 있는 시은이.

  그가 천천히 걸어와 사내의 앞에 섰다.

 "당신이 왕인가요?"

 "맞아. 내가 왕이야."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하는 본인이 왕이라고 하는 사내.

  시은이는 그렇게 바로 인정할지는 몰랐기에,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시즌하고 젠은 나와 만났던 적이 있어서 말이지..아이 참.. 이럴 줄 알았으면, 너만 따로 불러내는 건데.."

 "저만요?"

 "그래. 깜짝 놀래켜주고 싶었거든."

 "아..네."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겠다.

 "그럼 왜 절 찾아오신 거에요?"

  방금 전엔 그저 정말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어서 온 것 같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이젠 그런 생각은 싹 사라져버렸다.

  아까의 생각에 왕이 추가되고 나니, 이 자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의심과 경계심이 솟구쳤다.

  시은이의 시선이 달라진 것을 느낀 왕의 눈썹이 조금 추욱 쳐졌다.

 "..이래서 왕이란 거 말해주기 싫었는데.."

 '아니..방금 전엔 깜짝 놀래켜주고 싶었다며..'

  시은이의 불신이 조금 더 오른 순간이었다.

 "별 거 아냐. 그저 네가, 내가 아는 김시은과 이름이 똑같길래.. 뭐, 생김새도 상당히 비슷하고..게다가 커피도 내릴 줄 안다잖아. 내가 김시은의 커피를 못 마신지 벌써 400년이 넘어가는데...그래서 커피도 마시면서 얘기도 좀 나누고..뭐 이것저것.."

  나이에 비해 젊어보인다는 느낌은 있었는데 최소 400살이 지났다니.

  황금회에서 만났던 교황과 최고사제가 떠오르고 있었다.

 '400년이면..펠리온.. 그가 말한 시기와 똑같네.'

  400년전에 김시은 때문에 모든 것을 망쳤다고 했던 펠리온.

  실운이 말한 몇 백 년 전.

  이젠 거의 확실해져가는 것만 같았다.

 '그건 그렇고..이 사람..'

  아재의 정석을 보여주는 것 같은 왕의 모습.

  보는 이로 하여금 왠지 모를 측은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요. 커피 한 잔 드시죠."

  시은이는 어차피 잡아야 될 실운을 잠시 잊기로 하고, 실운에게 돌려받은 회색의 두꺼운 책과, 고리온 드가 넘겨준 색바랜 푸른색의 책을 먼저 읽어보기로 노선을 변경했다.

  시은이의 허락이 떨어지자, 왕은 그제야 얼굴을 밝게 피어냈다.

 "좋다! 그럼 장소는 내가 마련하지!"

  왕의 호쾌한 말과 함께, 그들의 주변에 하얀색 기력이 떠올랐다.

 '하얀 기력.'

  진그와 고리온 드에게서 보았던 기력.

 '그래서 왕을 만나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거였구나.'

  고리온 드가 왜 자신의 기력을 보고 왕을 만나봤냐는 식으로 물어봤는지 알 것 같았다.

  애초에 하얀 기력을 사용하는 이들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셋뿐일지도.'

  모든 기력을 합쳤을 때 나타나는 하얀 기력.

  기력의 끝을 본다면 그런 색을 띠지 않을까 하고 시은이는 생각했었다.

 '그렇다면, 시은씨도 하얀색이었을까..'

  지금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었을 때 보았던, 녹색빛의 눈동자.

  그것 때문에 옛 여주인이 녹색의 기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 봐선, 그녀도 하얀 기력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나."

  왕의 목소리에 시은이가 생각을 멈췄을 때는 이미.

 "..여긴 어디죠?"

  그들 모두가 어디론가 이동한 상태였다.

  전체적으로 적당한 크기의 너비에, 화려하게 장식이 된 커다란 의자가 한쪽끝에 조금 높은 위치에 올라가 있는 것이 보였다.

  이곳에다가 황금색을 조금 입히면, 바로 교황이 있던 곳처럼 바뀔 것만 같았다.

  이곳은 황금빛이 아닌, 은은한 은색으로 세련됨을 선보이고 있었다.

 "..여기는.."

  어느새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된 젠이 조용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자 또 언제 이동한 것인지, 아무런 기척조차 내지않은 왕이, 젠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넌 오랜만에 왔겠구나. 그러길래, 내가 조심히 다니라고 했지?"

  콩!

  가볍게 주먹을 쥐어 젠의 머리를 때리는 왕.

  마치 손주를 다루는 것 같이 매우 익숙한 행동에, 다른 이들은 할말을 잃었다.

 "아우우! 아파요! 뭐, 저도 나름 열심히 살았다구요!"

  머리를 빠르게 비비며, 볼을 잔뜩 부풀이는 젠.

  그런 모습을 보며 왕은 기분좋게 웃어젖혔다.

  그러다가 그런 광경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는 시은이네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내 손녀다. 음 자세하게 말하면 손자의 손녀의 손자의..."

 "됐어요! 어우!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젠은 곧바로 왕의 품에서 떠나 시은이네 쪽으로 재빠르게 이동했다.

  그리곤 시은이의 뒤에 숨어 왕을 향해 혀를 쭉 내밀고는 다시 그의 뒤로 몸을 돌렸다.

 "크크크..멀쩡한 거 같아 다행이다."

  그렇게 왕은 가볍게 자리에 앉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그대로 앉았는데, 자연스럽게 뒤에 의자가 생겨나 그를 지탱했다.

  그리고는 아무런 신호 따위는 없이, 그의 앞에 테이블과 커피를 내릴 수 있는 핸드드립 세트가 생겨났고, 그 주위로 시은이네의 수에 맞게 의자가 셋팅됐다.

 "와우.."

  애초에 하얀 기력을 감지만 할 수 있었던 시은이조차 보지못한 인과관계.

  시은이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이 과정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알리 만무했다.

 "자자, 편하게들 앉고. 시은, 넌 와서 커피 좀 내려줘. 그 뒤에 편하게 얘기 좀 나누지. 하하하!"

  생각보다 호쾌한 왕의 성격이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아직 시은이는 그를 온전히 신뢰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옛 여주인과 엮인 자들 중에서 애매한 위치의 고리온 드와, 카르탄 말고는 썩 좋은 사람들이 없었기에, 시은이가 취하는 행동은 무척이나 합리적이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왕은 다시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알았어요. 그런 표정 좀 짓지마요."

  시은이는 저런 표정을 짓는 아저씨한테 약했다.

  왠지 모를 동정심이 든다고나 해야 할까.

 '어차피, 위급상황시에 도망 정도는 칠 수 있을 테니까.'

  하얀 기력으로 둘러싸여 움직이지 못했을 때도, 시은이는 움직일 수 있었으니 가능할 것이다.

  어차피 그에게 궁금한 것도 있었다.

  방금 보았던 젠과의 관계도 그렇고, 옛 여주인과의 관계도.

  그것 말고도 여러가지.

  시은이가 커피를 내리러 왕을 향해 움직이자, 그제야 단보루나 시야카, 그리고 젠과 시즌도 시은이를 따라 왕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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