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최원은 왕명에 따르기 위해 성리로 떠나는 길에, 춘향의 집에 들러 월매를 만났다.
“미안하네. 춘향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죽음을 맞이한 곳을 찾아주겠다고 한 약조를 지키지 못할 듯하네. 이몽룡 그 자에게 나머지 죗값이라도 치르게 하고자 하였으나, 그 마저도 여의치 않을 듯하네. 허나 포기하진 않겠네. 시급한 공무가 있어 잠시 이 마을을 떠나나, 돌아오는 대로 다시 애써보겠네.”
“그만하셨으면 충분하십니다.”
“부디 포기하지 마시게.”
“자식을 죽인 원수를 어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니, 제 딸년이나 소인이, 다른 이들을 괴롭히거나 죽이는데 일조한 죗값을 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몽룡 그자도 곧 그가 저지른 죄에 합당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천벌을요.”
원은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월매의 복수심이, 갑자기 식어버린 것이 조금 이상히 느껴졌다.
“그럼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원은 월매에게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하고 발길을 옮겼다.
성리에 도착한 원은 연흥부라는 사람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계획을 세우기 위해, 일단 그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아이고, 세상에 그렇게 훌륭한 분이 없습니다.”
“그 분 덕분에 우리 마을엔 굶어 죽는 자가 없습니다요.”
“덕이 아주 부처님 같은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마을에 사시는 건 우리가 천복을 받은 겁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한결같이 흥부에 대한 찬사 일색이었다.
흥부라는 자가 음흉한 사람은 아닌 듯하나, 그렇다고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도 위험했다.
그가 거울 조각의 존재를 모른다면, 오히려 거울의 존재를 알려주는 꼴이 될 것이었다.
그의 부가 거울 조각의 신비한 힘에서 비롯된 것이 맞다면,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돈줄을 순순히 줄 리 만무하고, 빼앗길까봐 더욱 꽁꽁 숨길 것이 뻔했다.
그래도 일단 당사자를 만나 사정을 살펴보기로 했다.
“지나가는 과객이온데, 하룻밤 머물다 갈 수 있겠습니까?”
원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흥부의 집 문을 두드렸다.
마을 사람들에게 들었던 대로, 흥부는 마음씨 좋게 흔쾌히 허락했다.
뿐 만 아니라, 한 상 거하게 차려 저녁 식사까지 대접했다.
“그저 지나가는 낯선 이에게 이리도 극진히 대접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너무 부담 갖지 마시오. 그저 나 자신을 위한 덕을 쌓는 것뿐이니. 베풀면 베푸는 대로 다 내게 복이 되어 돌아오더이다.”
“그러고 보니, 머물 곳을 찾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들은 것도 같습니다. 부러진 제비 다리를 고쳐주시고 그 보답을 받으셨다고요.”
“하하하, 그렇소이다. 그 뒤로 그러한 신념이 더욱 확고해 진 것이라오.”
“헌데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에서 금은보화가 나왔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혹 밝히기 곤란한 사연이 있어, 그리 둘러대신 것은 아니신지요.”
순간 흥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게 무슨 뜻이오? 어디서 다른 얘기라도 들은 것이오?”
“아, 곡해하진 마십시오. 그저 한낱 미물에 불과한 제비가 그런 신통한 재주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여쭤 본 것뿐입니다.”
그제야 흥부의 표정이 다시 온화해졌다.
“하긴 그럴 법도 하지. 나 역시 처음엔 내 눈을 믿지 못해, 꿈인가 생시인가 했으니까.”
“그 신비한 박을 제게 한 번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례인줄 알지만, 호기심이 생겨 결례를 무릅쓰고 청을 드립니다.”
“이런... 이미 금은보화를 다 쏟아내고 쓸모없어진 박을 아직까지 놔 둘 리가 있겠나. 그럼 밤이 늦었으니, 그만 쉬시게.”
“제가 눈치 없이 너무 오랜 시간을 빼앗았나 봅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흥부의 사랑방을 나온 원은 수랑(守廊 : 행랑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객실. 손님이 머무는 방)으로 건너갔다.
일단 흥부의 집 안까지 들어왔으나, 별 소득을 얻지 못하자, 원의 고민은 깊어졌다.
한편, 흥부는 원이 방을 나가고 난 후, 집 안 사람들이 모두 잠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주위가 고요해지자, 원이 앉았던 자리의 두꺼운 방석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 밑에 거울 조각이 있었다.
흥부가 그 거울 조각을 집어 들고 들여다보자, 그 안에 원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부사 관복을 입은 원이 전령에게서 받은 밀서를 읽고 있는 모습이었다.
더구나 자신에 대한 것과 신비한 거울을 수거해오라는 왕의 명이 적힌 밀서의 내용까지 보였다.
흥부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
남원 관아에서는 홍길동과 이몽룡이 같은 옥사 안에 갇혀있었다.
“왜 도술을 사용하여 이곳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이오?”
몽룡의 물음에 길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록 처음 만났던 날, 몽룡이 최원 부사의 계획에 대한 정보를 주긴 했으나, 뭔가 의뭉스러운 자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울 조각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의 부하들조차 모르는 비밀이었다.
거울 조각을 도둑맞아, 이제는 도술을 부릴 수 없다는 이야기를 잘 알지도 못하는 몽룡에게 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신경 끄시오.”
“너무 그리 경계치 마시게. 어찌 보면 우린 같은 편이니.”
‘??’
“사실 난 부패하고 부조리한 관리들을 골탕 먹이는 걸 즐겨한다네. 나로 인해 그 동안 파직당하거나 좌천된 관리가 한 둘이 아니지. 지금 내게 씌워진 죄명이 무엇인 줄 아는가? 일부러 산사태를 일으켜, 이곳 남원 지역을 지나던 군사들을 죽였다는 것이야.”
“그것이 사실이오?”
“어떨 것 같은가?”
몽룡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 때였다.
갑자기 옥사 대문이 열리더니, 기절한 병사들이 웬 사내들에게 질질 끌려 들어왔다.
마을에서 대기하던 길동의 부하들이 관원들에게 토포당할 때, 그 중 예닐곱 명이 도망쳤었는데, 바로 그들이 옥사 앞을 지키던 병사들을 급습한 것이었다.
“두령님, 고생하셨습니다. 얼른 나가시지요.”
부하들이 길동이 갇혀있는 옥사 문을 열었다.
“역시 다 수가 있어서 도술을 쓰지 않은 것이로군.”
몽룡이 길동을 따라 나서려 했다.
그런데 먼저 밖으로 나온 길동이 갑자기 옥사 문을 걸어 잠갔다.
“??? 우린 같은 편이라 하지 않았나? 그러지 말고 같이 도망가세.”
“내 비록 겁박과 도둑질을 일삼긴 했으나, 살인자는 아니오. 우린 가는 길이 다르니, 같이 갈 수 없소이다.”
길동은 다른 옥사에 갇힌 나머지 부하들을 빼낸 후, 그대로 도망가 버렸다.
“탈옥이다! 홍길동이 탈옥했다!! 이 빌어먹을 관원놈들아! 홍길동 저놈을 당장 잡아 죽여 버려라! 당장!!”
몽룡이 옥사 안에서 목청껏 소리 질렀지만, 이미 길동의 무리는 관군들이 도착하기 전에 모두 도망쳐버렸다.
마을을 벗어난 길동의 무리는 산채 마을이 발각될 경우를 대비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은신처로 향했다.
인적이 없는 깊은 산 속 동굴이었다.
“이곳은 이제 그른 것 같습니다. 경상도 쪽으로 넘어가 다시 일을 도모하시죠.”
가장 명민한 부하가 길동에게 조언했다.
“아니다. 우린 당분간 이곳에 머물며, 우리가 납치했던 억삼과 심청이라는 자들을 쫓는다.”
“예? 안됩니다. 관군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너무 위험합니다.”
그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억삼이 자신에게서 훔쳐간 거울 조각을 찾아야만 했다.
“시끄럽다. 날이 밝는 대로 추적을 시작한다.”
길동을 바라보는 부하들의 눈빛이 의심에 가득 차 보였지만, 길동은 애써 모른 척 했다.
*****
다음날 이른 아침.
억삼과 심청은 담장 너머로 흥부 집 동태를 살폈다.
“틀림없이 이 집일 것이다. 제비가 보은을 하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헌데 이 집에선 어떻게 거울 조각을 수거한답니까.”
“글쎄다...”
그런데 그때, 사랑채에 있는 어느 방에서 한 선비가 나왔다.
바로 최원이었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순간, 억삼과 청은 재빨리 담장 밑으로 몸을 숨겼다.
“저 부사 나리가 어찌 이곳에 와 있는 것입니까?”
“낸들 알겠느냐. 벌써 명세경에 대한 비밀을 알아챈 것인가... 아, 그래, 어쩜 홍길동이라는 자와 결탁을 했을 수도 이겠구나. 같이 조각을 모아 이 나라를 꿀꺽하자고.”
“그럴 리 없습니다. 저 샌님은 고지식해서 그런 거 죽었다 깨어나도 못합니다.”
“그럼 저자가 어찌 알고? 그것도 우리보다 먼저.”
“...”
그런데 갑자기 담장 안에서 원의 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장 길을 터라!”
의아한 청과 억삼이 다시 담장 안을 몰래 들여다보니, 온 동네의 건장한 남정네들은 다 모아놓은 듯 했고, 그들은 모두 손에 몽둥이나 낫을 들고 최원을 위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