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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추리/스릴러
안의 너
작가 : 녹슨등잔
작품등록일 : 2020.8.18

과거의 악몽이 되는 3인방의 잔재를 떨치지 못한 부식이란 남자가 있다. 우연찮게 박나리라는 미스터리한 남자와 친구가 된 고독한 사람이다. 나리는 신비스런 힘의 소유자로,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객체로서 마주 보게 한다.
나리는 씻지 못한 죄를 저지른 자들로 하여금 낙인을 먹인다. 그가 모르는 곳에서는 X교라는 사이비 종교의 신봉자들이 세상을 잿빛으로 만들고 있다. 나리가 그들의 소굴로 흘러 들어간 건 순전히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 모두 지독한 악인들임에는 부정할 수 없고 부식의 소용돌이 또한 거기서 소멸되어야 한다.

 
23. 황혼
작성일 : 20-08-29 08:11     조회 : 240     추천 : 0     분량 : 7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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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스르륵 뜨는 현호였다. 그는 부드럽게 상체를 일으키곤 주위를 탐색했다.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얼굴을 비스듬히 둔 채 귓구멍을 최대한 열었다. 기다려도 특별한 징조가 없었다. 잘못 들었거니 생각을 하지만 가슴이 두근거려 쉽게 마음 정리가 안 되었다.

 “오빠?”

 그는 정말 깜짝 놀랐다. 큰 개를 골목에서 만난 고양이처럼 잽싸게 달아날 뻔했다. 열린 창문에 있는 얼굴이 믿기지 않았다. 달이 보낸 장난꾸러기 여신이 아닌가 했다. 격한 감정 때문인지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게 보이기까지 했다. 눈에서 광기마저 발견했다.

 “은샘이…… 은샘이 아냐?”

 그는 침대에서 슬그머니 내려갔다. 자신이 죽인 아내의 혼령을 만난 듯한 어느 옛날의 영주처럼. 영주라면 칼이라도 뽑아 들고 갈 테지만 그는 가져갈 게 없었다. 발바닥이 방바닥을 지날 때마다 갯벌이라도 되는 듯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실제로 걸음을 떼기가 어렵기도 했다. 눈을 내려 확인하면 한국전쟁에서 죽은 원혼들이 그의 발목에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걸 발견하게 될 거 같았다.

 적어도 수천 구의 시쳇더미가 눈앞에 펼쳐져 있을 것이다. 레이저 축제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도망칠 수 없을뿐더러 벗어날 수도 없다. 덩굴손처럼 엉기는 썩은 손모가지 하나도 버거우리라. 그는 시체의 늪이 턱까지 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는 호흡 곤란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시체의 산에 잠수가 되기 직전 겨우 창가에 도달했다.

 “오빠 얼굴이 왜 그래? 무섭단 말이야.”

 “내 얼굴……? 얼굴이 이상한가? 자다 깨서 그런가 봐. 들어와, 거기서 뭐 해? 얼마나 놀랐다고. 넌지도 몰랐어. 이렇게 예쁜 강도도 있나 싶었지 뭐. 하마터면 목숨까지 도둑맞을 뻔했잖아!”

 그는 변명을 하듯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그는 모르겠지만 바깥에 있는 그녀의 일행 중 한 명이 폭소를 겨우겨우 참고 있었다. 나리는 죽겠다는 얼굴로 겨우 입을 비틀어 막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이상한 나머지 부식은 연신 뒤에 눈을 준다. 도망갈 기회는 지금뿐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걱정하고 있는 일들이 너무도 막연해서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는 것이다.

 나리가 뒤에서 그녀를 찔러댔다.

 “문 좀 열어줄래?”

 “기꺼이.”

 자신이 말하고도 이상한 대답이라도 현호는 생각했다. 그는 날듯이 현관으로 달려갔다. 솔직히 그녀에게 일종의 분노가 있었다. 가면서 스마트폰을 챙긴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역시나 부재중 전화나 사전에 미리 통보하는 예의를 삼간 그녀였다. 그래도 화를 낼 순 없었다. 평소라면 알고 지내고 처음으로 화를 낸 순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앞으로 함께 지낼 여자였다.

 그는 현관문을 열었다. 환했던 얼굴이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깜짝 놀랐지?”

 선두에 있던 나리가 불쑥 다가오며 말했다.

 현호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나리의 눈에서 투영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썹을 일그러졌지만 어찌나 황홀한지 입이 헤벌쭉했다. 신음까지 내뱉었음을 본인은 절대 모를 것이다. 그는 일전에 내시경 검사 탓에 수면 마취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나른한 듯 퍼지는 얼굴을 보자니 쓰러질 듯하였다. 나리가 뛰어들었고 마침 그가 흐물흐물 내려앉았다.

 “어머!”

 놀란 그녀가 탄성을 터트렸다. 그녀는 나리와 현호가 동갑인 줄 알고 있었다. 당연히 나리가 거짓말을 했고 다른 두 사람도 속고 있었다. 두 사람까지 거들어 현호를 안으로 데리고 갔다. 무릎베개를 해주는 지극정성에 나리는 그만 탄복하고 말았다. 그는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동료를 보았다. 일종의 동료를.

 이제 어떡할 거야? 부식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그냥 말해. 이제 어떡할 거냐고!”

 답답함을 참지 못한 용문이 윽박을 질렀다. 아무래도 첫 진입부터 난감해 신경이 예민해진 듯했다.

 “시끄러워요. 아가씨가 놀라잖아요. 내 친구 꼴을 좀 보라고요.”

 나리가 말했다. 교활한 연기자였다.

 용문이 때려치우라는 듯 손목을 젖히는 시늉을 하며 부엌으로 갔다. 자기 집인 양 냉장고 문을 열어 먹을 걸 골랐다. 부식이 대신 사과를 했다. 좀비 남의 황폐한 꼴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여자라니! 나리는 퍽이나 갸륵하단 생각이었다. 마음 같아선 상을 내리고 싶었다. 상황이 계속 장난을 치고 싶게 만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손과 속이 근질근질했다. 물론 마음이 그렇지 장난질은 사절이었다. 성향이 그랬다. 누가 봤을 땐 장난을 친다고 여길 수 있는 행동도 나리 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최선의 선택이었다. 움직이는 걸 보면 덮칠 수밖에 없는 고양이와 같은 숙명이랄까.

 “어! 얼굴에 이거 뭐지?” 그녀가 화들짝 놀라 말했다. 남자 친구의 왼쪽 눈 밑을 손으로 문질렀다. X. 마크. 지워질 리 없었다.

 하지만 나리를 놀라게 한 진정한 장본인은 부식이었다. 마크에 놀란 부식이 눈을 껌뻑거렸다. 몇 번 본 마크였다. 모텔에서, 윤재에게서. 이로써 세 번째였다. 그는 자신이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 싶어 안도까지 했다. 그러나 2018년도 판 90년대 아이돌 스타일과 눈이 마주쳤을 때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하게 되었다. 나리가 거의 귀까지 입술을 찢으면서 씨익 웃고 있었던 것이다.

 

 “여보세요?”

 현승이 무거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는 모든 것이 죽은 방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탁상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패널로 된 벽 여기저기 까지고 움푹 들어가 있었다. 집기의 훼손은 참담해서 눈 뜨고는 볼 수 없었다.

 “현호야? 말을 해라.”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저, 저기요. 저 현호 오빠 때문에 전화를 드리는 건데…….”

 찬물을 맞은 듯한 현승이었다. 그의 두 눈이 정면만 응시한 채 시무룩하게 있다가 아 이런 거구나 싶어 천장을 한 바퀴 돌았다.

 “현호한테 무슨 일 있나요?”

 “네, 네. 쓰러졌어요.”

 “지금 어디예요?”

 “그게…… 현호 오빠네 집이에요. 죄송합니다.”

 “119엔 신고하지 마세요. 제가 갈게요.”

 “네, 네…….”

 “네.”

 현승이 전화를 먼저 끊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콧노래를 불렀다. 그도 자신이 왜 기분이 좋은지 몰랐다. 외간 여자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아예 남이 아니니 더 감미롭게 들리던 목소리였다. 계속 여자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고 있었다. 그는 선을 보러 가는 사람처럼 들떠서는 더러워진 옷 중에서 깨끗한 걸 골랐다. 옷장을 무너트리고 장롱을 작살낸 결과였다. 불까지 지를 뻔했었다. 볼 만한 게 있으면 그을음이 남아 있었다. 양복은 건들면 안 되었는데. 아쉬웠다. 제사장 때문이 아니었다. 새 아침처럼 다가온 여자 때문이었다. 손님맞이에는 예절이 필수 아니었는가.

 

 휠체어에 앉아 어머니가 나오는 꿈을 꾸고 있던 석구는 괴로웠다. 정말 아름다웠던 꿈이었는데 전화가 산통을 깬 것이다. 젊은 어머니와 어린 시절 자신이 나오는 꿈이었다. 바다였다. 꿈과 현실의 조화로 어머니는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6살쯤 되어 보이는 그가 휠체어를 쌩쌩 밀고 있었다. 그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머니도.

 그는 노기 어리게 전화를 받았다. 뜻밖에도 여자였다. 무슨 일인고 하니 손주 녀석의 애인이란다. 몸 파는 년이 아니냐고 된통 혼쭐을 내줄 요량이었다. 목소리로 사람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기술이 있는 걸로 보아 술집 년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한 번도 목소리에 한해서라면 문제점을 지적받은 사례가 없지만. 여하튼 그는 사람 보는 눈이 정확했다. 목소리만 봐도 어떤 인간인지 안다. 하지만 손주의 상황을 전하는 말에 기분이 달라졌다. 손주와 함께 있다는 말에는 호되게 욕을 쏴주며 일어났다. 걸레 같은 걸 요절내겠다는 심정으로.

 

 승합차 앞을 지나는 40대 남자를 유심히 살피는 용범. 그는 몸을 돌려 뒤에 있는 노래방 건물의 네온사인을 보았다. 남자가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짧은 옷을 입은 아줌마가 들어갔었다. 여자는 트로트 가수처럼 빤질빤질한 옷을 입고 있었다. 가게를 나오자마자 소리부터 지르는 걸 보니 꽤나 진상이었나 보았다. 절로 픽 웃음이 나왔다.

 그는 심심풀이로 말아대던 초코바 껍질을 조수석에 던졌다. 요기 거리가 생각이 났지만 참은 건 냄새 때문이었다. 오줌 때문에 물도 마실 수가 없었다. 그는 싱그럽게 웃으면서 몸을 길게 쭉 뺐다. 글로브 박스에서 마취 총을 꺼내기 위함이었다. 물론 라텍스 장갑도 꺼내야 한다.

 파이프로 만든 수제 총이라 조잡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신의 것인 이상 성스럽기 이를 데 없는 물건이었다. 혹시 나중에라도 종교를 키운다면 이런 건 성배나 다름없는 위치가 될 것이다. 그는 이것으로 무얼 하는가? 죄인을 수집한다. 이것으로 무얼 한다고? 낙인을 채집한다. 그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전사이자 세계의 평화에 앞장서는 대법관이었다. 모든 권능의 상층부, 제일 상단부에 위치한 존재인 유일무이한 신이었다.

 그의 큰 머리에는 위생모가 몸집에 비해 작은 발에는 덧신이 신겨져 있었다. 마스크도 덧신처럼 차가운 파란색이었다. 마치 크레졸에 흠뻑 재운 아이템들 같았다. 그는 라텍스 장갑을 끼기 위해 잠시 마취 총을 무릎 위에 올렸다. 깨끗하게 다려진 작업복은 마치 경갑 같은 느낌을 주었다. 흡사 새 옷인 듯 움직일 때마다 어깨가 거슬렸다. 일국의 귀족들이 입는 옷처럼 어깨 장식이라도 들어간 듯이 말이다.

 막 내려서 쫓아가려 할 때였다.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전원을 꺼놓았다고 생각했었다. 아마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흘려 넘겼던 모양이었다. 그냥 무시하고 몸만 나갔다가 오려고 했다. 하지만 죄인이 길바닥에 쓰러지는 걸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무리 없이 걷는다 싶었는데 저게 한계였던 모양이었다. 아마 정액에 알콜을 이기는 성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많이 흘려버리고 나왔으니 알콜에 지배당할 수밖에.

 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현호야.”

 “안녕하세요. 이 핸드폰, 저 그게 은샘이라고 하는데…….”

 순간 그의 머릿속이 물음표에 압도당했다. 분명한 목소리인데도 불구하고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길바닥에 자빠져 있는 죄인만 보고 있었다. 마치 전화 너머의 상대와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닌 저기 자유로운 영혼의 목소리를 일방적으로 듣고 있는 듯했다. 40대 남자의 몸을 하고서 20대 초반쯤 되는 앳된 여성의 목소리를 가진 보이스피싱 대장.

 “현호가 쓰러져요?”

 은샘이 무슨 말을 더 했지만 그는 알아먹지 못했다. 그녀가 말을 하고 다음 대사로 넘어가면 낱말들이 무너지면서 귀에 익히고 하는 식이었다. 통화가 길어지는 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는 알면서도 시간을 끌었다. 은샘과 통화를 하게 되리라고 생각도 못 했다. 그것도 이 시간에. 그는 굳이 손목시계까지 확인했다. 이른 새벽. 통화를 하기에는 늦은 시간이다. 그녀가 자신의 것이라서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상상해 보는 용범이었다. 그의 눈이 서서히 웃음을 잃었다. 왠지 냉혹한 눈빛이었지만 그만큼 진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마른 입가를 오늘따라 섬세하게 느껴지는 손가락으로 쓸어냈다.

 “은샘 씨 지금 외근 중이라서요. 저는 집에 돌아가지 못해요.”

 외근. 틀림없는 사실이다. 말을 내뱉은 후에야 그는 너무도 사무적인 말투였다며 자책했다. 그녀와 어떻게 전화를 끊은 뒤에도 뛰는 심장을 억누를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이 바뀌는 건 순간이었다. 이 시간에 현호가 쓰러졌다며 현호 휴대폰으로 전화를 건다는 건 당연히 한 가지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세 살 먹은 어린애라도 알만한 사실이었다. 섹스를 몇 번 했을까?

 그는 조용히 차 문을 열었다. 조용히 닫고 내리기 전처럼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발걸음만은 망설임이 없었다. 일단 발로 툭 찼다. 술에 취했든 말았든 상관없이 마취 총을 발사했다. 네 발 모두. 얼굴과 가슴에 박힌 걸 일일이 떼어내고 남자를 차에 태웠다. 그의 생각에 집에 도착하기 전에 남자는 죽을 것이다. 예상대로 차에 태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입에서 게거품이 뿜어져 나왔다.

 

 택시 뒷좌석.

 “오늘 재밌었어?”

 해연이 음침하게 물었다. 남이 보면 그럴 진대 진리는 모른다.

 “응! 짱 재밌었어!”

 “특히 뭐가?”

 “회전목마!”

 “인형은 마음에 들어?”

 “응! 짱 좋아!”

 진리는 인형 다발이 든 종이가방을 안고 있었다. 놀이동산에서 해연이 코르크 총을 쏴 맞춰서 딴 경품들이었다. 진리를 위해서 한 일이지 그딴 게임에 흥미도 없었다. 그녀는 죽은 사람마냥 음침하게 놀이동산을 돌아다녔다. 만약 진리가 옆에 없었다면 근처에 파리 한 마리도 꼬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건 역병이나 저주였다. 단순히 어두워 보이는 모습 때문만은 아니었다.

 눈에 띄게 새카만 머리와 지독히도 새카만 동공을 보고 있자면 자연 악마가 연상된다. 지상의 악마가 아니라 단어 상의 악마 말이다. 어떻게 보면 어리고 순수한 영혼에게 사냥당한 불쌍한 악마일 수도 있다. 그리고 또 어떻게 보면 순수한 영혼이라는 개념은 그들의 마을에서만 통용되는 진리의 핵심이었다.

 “언니 전화 왔다!”

 일부러 전화를 안 받으려 한 해연이었다. 진리가 이렇게 일러주니 안 받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막 전화를 받고 낯선 여성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택시가 뉴비틀 차량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얼어붙은 듯 수화기를 통해 들여오는 목소리를 잊어버렸다. 그녀는 바닥에 화상 모니터가 깔려 있고 지금 화상 통화라도 하는 것처럼 신발을 쳐다보았다.

 “네. 네. 네.”

 현호가 쓰러졌다는 소리는 확실히 알 거 같았다. 그녀는 혹시 낙인을 발견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여자가 알 거 같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차마 물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가요.”

 해연은 일단 전화부터 끊었다. 뱃가죽 안에서 부동액 같은 게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차 문을 열었을 때는 마치 달리는 기차에서 떨어질 뻔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면서 택시에서 내렸다.

 “언니 왜 그래?”

 “피곤해서 그런가 봐. 언니가 이상해 보이니? 진리야 이제 자러 가자.”

 그녀의 시선은 현호가 사는 데로 향했다.

 

 나리는 정중한 자세로 사람들 뒤편에 서 있었다. 지금 그의 모습은 마치 교육이 잘 된 집사처럼 보였다. 일단 조부인 김석구의 첫인상은 그럴싸하게 늙은 노인이었다. 젊었을 때는 매력을 그리 발산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곱게 늙은 영감이었다. 김현승의 첫인상은 매우 안 좋았다. 범아시아주의와 마우쩌둥 사상 같은 것에 미쳐 있고 군복 페티시에 인생의 절반을 쓴 어느 동남아 국가의 독재자처럼 보였다.

 나리는 눈을 내리깐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고 있으니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시청률 0.8%대의 일일 연속극 촬영 현장에 있는 기분이었다. 종합편성채널의 골칫거리. 투자금의 20%를 돌려받는 것도 어려운 총체적 난관. 그는 형편없는 가족 드라마가 지겨워서 팔로 입을 가린 채 크게 하품을 했다.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현승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리는 일부러 더 하품을 하면서 부엌 쪽으로 향했다. 식탁에는 빈 캔들과 과자봉지 여러 개가 뜯겨져 있었다. 이 짓을 한 뚱보는 남의 집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나리는 부엌 통로를 등진 채 과자를 입에 넣고 기세 좋게 오물거렸다. 현승이 뒤따라왔음을 알고 있었다. 나리는 맞이 방법으로 하품을 만들어서 했다.

 “어이? 지루하냐?”

 현승이 말했다.

 상대도 지루해 보였으니 이젠 재밌게 해 줄 차례였다. 나리는 누려온 게 많았다. 잘생겼고 매력 있고 훤칠한 데다 나름 톡톡 튀는 유머 감각도 있으니까. 그는 다른 사람의 그림자나 밟았을 형편없는 인간에게 이타적인 마음을 갖기로 했다. 바라는 것 없이 주고만 싶었다. 그래서 얼른 몸을 돌려 눈을 가져댔다. 그러다 위치 설정이 잘못되어 코가 짓눌리게 되었지만 인생에서 한 번쯤은 양보를 해도 괜찮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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