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자유연재 > 무협물
壬辰倭亂
작가 : 미스테리
작품등록일 : 2020.8.24

임진왜란, 다시는 일어나선 안될 전쟁이지만 현재의 세상은 너무나 그와 닮아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 속에서 잘못된 역사날조 밎 왜곡의 잘못도 함게 알리며 극단적으로 치우쳐진 임진왜란의 영웅들과 악역들의 배치 밎 인격을 바로잡는 작품을 발표하기로 한다!!~

 
일본간 조선통신사 일행
작성일 : 20-08-24 20:00     조회 : 309     추천 : 0     분량 : 8493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일본에 간 조선통신사 일행

 

 

 

 

 

 서기 1590년 늦가을... 지난 3월에 조선을 출발해 한 달 만에 일본에 닿은 조선통신사 일행은 이제야 겨우 일본의 최고책임자인 관백이란 자를 만나게 되었다.

 

 “일본이란 나란 참 묘하오. 임금을 만나게 해달라니까 임금이 아닌 영의정격인 관백을 만나고 가라니…”

 

 당시 조선사람들인 이들은 일본이란 섬나라의 특수성을 잘 모르고서 이 상황을 매우 불평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도 조선처럼 국가의 정치대표자인 천황(일본의 임금)이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모든 나라 안의 일을 스스로의 손을 거쳐 움직이고 집행하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일본 즉 왜국은 [실질상의 왕(관백, 현대의 수상)과 형식상의 왕(천황)의 이중 임금체제]가 이 당시로부터 3백년 이상 전의 가마쿠라 막부 시대부터 이루어져 있는 나라였다. 이러한 두 나라의 정치형식의 차이를 조선 사신들은 전혀 이해하질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 체제는 후일에도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와, 에도 시대엔 간바쿠(관백)이 장군(쇼군)으로 명칭이 변하고 오늘날엔 수상이 되어 있는 정치권력의 이권분립의 효시로 되어 있다.

 

 (하긴 이게 나쁜 제도란 뜻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일본이 이런 제도가 거의 천년 전부터 있었기에 연산군 같은 나쁜 독재자 임금의 폭정은 그래도 일본에선 나올 수 없었고, 임금의 잘못된 선택이나 정책을 펼칠 때 그를 견제하고 제재할 물리적 제도가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점만은 일본이 한국보다 더 발전한 정치체제였다고 볼 수도 있다.)

 

 이것이 오랫동안 중국의 법도만을 따라서 나라를 이끈 조선이란 나라와, 이제 전면내전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되고 법도가 동양식이라기보다는 정말 우연히도 멀리 서양에 많이 비슷한 체제의 일본이란 나라의 정서차이였다.

 서양에서 [기사] 라는 무가계급이 사회의 지배층이고, 임금 즉 국왕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별 실권이 없는 영주들끼리의 다툼과 전쟁을 막기 위해 조정자가 필요해 만들어놓은 상징적인 존재일 뿐 영주들의 內治에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는 전혀 없었다.

 다시 말해 영주들이 자기 영토에서 개미다리에 장화를 만들어 신기건, 자기 영토 내의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리거나 막 죽이건 영주인 신하가 제때 세금만 바치고 병역의 의무를 다하는 이상은 국왕도 그 이상은 일절 상관할 수가 없었고… 만약 제 멋대로 개입하면 신하는 국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고, 신하들끼리 규합해 국왕을 폐위시키고 다른 왕을 옹립해도 별 다른 죄나 제재가 안 따르는 사회였던 것이다.

 일본도 물론 이런 서양적 정치체제와 놀랍게도 전혀 상관이 없는 동양의 뚝 떨어진 섬나라이면서도 모든 체제가 똑같이 닮은 나라였다. 정치 및 사회의 [수렴진화] 라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일본은 후일 근세 및 현대세계에서도 서양과 화합하고 서양식으로 사회체제를 개조하는 데 동양에서 제일 빠르고 신속하게끔 별 뒷탈이 없이 이루어졌다. 아마도 일본은 서양과 너무나 정치 및 사회가 닮아서 ‘근대화하는데 문화적 마찰 및 갈등’ 이 없거나 아주 적었다는 데 원인이 있었으리라.

 어쨌거나, 그것은 한 3백년 후의 먼 훗날의 일이니 일단은 차치하고…

 

 징비록에 의하면, 10월 하순이나 되어서야 멀리 성을 축성하는 곳에 갔다는 도요도미를 만나게 되었다. 5월에야 오사카에 닿았는데, 그때 그가 축성하는 곳에 갔다는 이유로 이래저래 알현을 미루다가 10월 하순에 되어서야 만나기를 허락하였다.

 

 도요도미를 만나던 날…!! 교토의 궁에서 겨우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별로 고귀하게 생기거나 기품이 있는 용모는 아니었다.

 키는 작고, 마치 일본원숭이 같은 유인원처럼 하체는 짧고 상체만 길어 앉은 키만 커보였다.

 얼굴도 꼭 영판 원숭이상으로 민꼬리 잔나비가 털을 모조리 뽑고 인간의 옷을 입은 듯한 형상이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범상치 않게 요사스럽게 번쩍여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전형적인 야심가이자 여러 풍파를 겪은 사람의 눈빛이 확실하였다.

 그런데, 그 날 만난 게 또 문제였다. 전혀 사신의 예를 갖추지 않고 조선사신들을 만났던 것이다.

 

 바로 그날, 크게 연회라도 베풀 줄 알았더니 연회는커녕 어두침침한 접견실에서 세 명의 조선사신들을 만난 것이다.

 얼른 보니 도요도미(풍신수길)는 아주 귀엽게 생긴 아기 하나를 안고 나오더니, 얼럴럴 까꿍하면서 얼르면서 조선사신들을 접견한다. 꼭 외교나 정치절차가 아니라, 일상생활을 하면서 심심풀이 땅콩 같은 여흥을 위해 사신을 만난다는 듯 보였다. 조선사신들은 기분이 나쁠 수밖에…

 

 “이 아이가 바로 내 후계자 쓰루마쓰야. 내가 쉰 살이 넘어서야 겨우 얻은 아들이지.”

 

 하면서 황윤길을 쳐다보며 이처럼 말해준다. 누가 그걸 물어보았나??

 

 연회가 없고 이런 무례를 저지른다는 건 그나마 이해가 된다.

 고작 사신들에게 준다는 것이 탁주(막걸리)였다. 그나마 두어 순배 돌리다가 치워버렸다. 무척 기분이 불쾌했다. 꼭 동냥 온 불청객 각설이패를 대하는 듯 했다.

 도요도미는 자세히 보니, 이런 무례가 예를 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조선사신들을 우습게 알고 고의로 홀대하고 있는 것” 이 분명해 보였다.

 

 황윤길 김성일은 몰랐겠지만, 당시에 도요도미는 지독한 ‘서양 사대주의자’ 가 되어 있어서 [동양 즉 조선과 명은 미개한 지역] 이란 편견에 꽉 사로잡힌 사람이 된 터라 조선과 명은 자신이 정복하고 짓밟을 대상이라고만 여기고 있어서였다.

 당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네덜란드나 영국은 엄청나게 많은 공물과 거대한 군함을 싣고 와서 그들의 국력을 일본에 과시했는데 그걸 수없이 접해본 일본인들은 서양이야말로 배우고 익혀야 할 선진국이고 동양은 미개하고 배울 게 없는 미개국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이 국토를 온통 쑥대밭으로 만든 조총도 사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네덜란드로부터 사들인 화승총을 개조해 만든 철포였다. 일본인들은 이런 과학무기를 사용하는 데다, 올 때마다 희귀한 전 세계의 물건을 가득 싣고 오는 서양인들이야말로 자신들이 본받고 배워야 할 민족으로 보였다.

 

 특히 서양인들이 일본에 가지고 온 철포와 화약만이 아니었다.

 당시 동양인 중에서는 그래도 일본인들이 제일 단 맛이 나는 음식(왜떡도 그 한 종류)을 많이 먹는 민족이었는데, 이것은 서양인들과의 무역을 통해 설탕을 많이 대량으로 아주 싼 값으로 수입할 수 있었던 탓이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도 역시 설탕이 매우 귀해 고위귀족들만 먹을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 하지만 서양인들이 일본에 무역차 들린 후인 16세기 중반엔 아주 흔한 기호식품이 되었다. 서양인들은 동양으로부터 주로 도자기와 비단, 차 등을 수입해가고 대신에 설탕이나 유리제품, 무기(조총도 한 종류)를 주로 수출했는지 그 무역으로 제일 큰 수혜를 본 나라는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이 근미래의 임진왜란 때 조선의 도공들을 수없이 잡아간 이유도, 이때 서양에 수출할 주력상품인 ‘도자기’ 를 만들려면 이들의 기술이 절대 필요한 때문이었다.

 일본 도요도미 군대가 무려 2백년 가까이 계속된 군웅할거의 전면내전 시대를 완전히 끝내고 1589년에 완전 일본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무기는 철포(조총)를 서양인들에게 수입하고 그걸 만들어내는 기술을 익힌 때문이고 설탕이나 후추 등을 수입해 병사들에게 군량 대용으로 지급하여 전투력이 어느 일본의 부대보다 높았기 때문이었다. 서양인들이 없었더라면, 도요도미 시대는 물론 몇 백년 후까지 일본은 여러 작은 나라로 갈라져 전면내전에 시달리는 형국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왜구피해도 수백 년 더 계속되었을 것이고…

 

 일본의 서양 사대주의는 이런 이유로 16세기부터 시작된 것인데, 그래서 후일 일본은 쇄국정책 시에도 네덜란드나 러시아 등 일부 서양과는 통상을 계속했고 그로 인해 세계문물 흡수엔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후일 19세기 중엽 미국의 페리제독에 의해 강압적으로 쇄국정책을 풀고 서양식으로 개혁을 하는 것이 조선이나 청과는 달리 매우 신속하고 쉽게 되었던 것도, 이때 일찍이부터 시작된 [서양 사대주의가 그들 민족에게 꽉 배인 탓] 이었던 것이다.

 身體髮膚 受持父母를 내세워 불결하게시리 머리도 손톱도 안 깎고, 쓸데없는 교조주의이자 실생활에 별로 응용되지 않는 非現實的인 학문인 유교만을 외치는 조선이나 명의 사신들은 전혀 본받을만한 자들도 배울만한 문화나 학문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라고 이미 당시부터 일본인들은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후일 脫亞入區를 외치는 사상의 기본)

 

 (주 : 하긴 약간 자존심 상하긴 해도, 이런 일본인들 생각이 크게 틀리지도 않았지만. 서세동점을 일찍 느낀 민족이 일본인들이라고나 할까?!~ 사대주의가 나쁘다곤 하지만, 어차피 한국 즉 조선도 중국 사대주의긴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오히려 중국 사대주의가 서양 사대주의보다 더 나쁜 결과와 동기만 낳았다는 건 역사를 조금만 아는 자라면 다 인정하는 바다. 서구화가 조선이 일본보다 훨씬 뒤졌던 것도 ‘중국 사대주의의 조선 특유의 잘못된 소중화 사상’ 이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이다. 일본마냥 차라리 서양 사대주의에 일찍 눈을 떴다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일은 적어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도요도미가 조선사신들을 이렇게 경홀하게 다룬 것은, 이때쯤 들어 머리 속에 차츰 들어찬 [동양 문화 깔보기]가 함께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조선사신들을 접견하고 있을 바로 그때…

 

 “허허, 쓰루마쓰, 이 놈이 애비 옷에다 오줌을 다 싸다니~ 얼른 가서 갈아입고 와야겠구만.”

 

 하더니만 양해도 구하질 않고 얼른 내실 쪽으로 피해버린다. 애기보면서 사신을 접견하더니, 애기 일 때문에 금새 그 행사를 작파한 것이다.

 자신의 아기 보는 일이 두 나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는 듯 천하의 무례한 태도였다.

 

 조선통신사들과 도요도미와의 만남은 이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떠나기 전, 멀리서 한번 다시 한번 보긴 했지만 그 날은 직접 독대도 하지 않고 멀찍이서 보기만 했었다.

 

 도요도미는 이 날 이후, 무려 두 달 넘게 한번도 조선통신사들을 만나지도 않았다.

 짜증이 나서 그냥 조선으로 돌아가버릴까 갔지만, 그래도 국서를 받지 않고 돌아가면 임금으로부터 문책을 받지 않을까 하여 참고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해가 바뀌어 새해(서력으론 1591년)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이국 땅에서 새해를 맡게 된 셈이었다.

 

 ‘쿵덕, 쿵덕궁.’

 

 은은하게 섣달그믐날밤 찰떡 치는 소리는 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국 땅에서 맞는 새해는 새해대로 또한 다른 풍치가 있었다.

 

 “우리 일본의 떡입니다. 한번 드십시오.”

 

 이튿날 아침, 외롭게 이국에서 새해를 맞은 일행에게 묵고 있던 영빈관의 관리가 왜떡을 가져왔다. 현재처럼 앙꼬(단팥)가 속에 들어있는 일본식 찹쌀떡이었다. 일본어론 모찌라고 부른다.

 

 “허, 제법 맛있는데.”

 “아주 답니다.”

 “우리 조선의 떡처럼 담백한데에다 쫄깃한 맛은 없지만 나름대로 풍미가 있군.”

 

 조선사람들이 일본땅에서 왜떡을 먹은 기록은 아마도 이 조선통신사 일행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황윤길과 김성일을 비롯한 조선 사신들은 이 모찌떡을 처음 먹어보면서 일본이 음식문화에 관한 한 이제 전혀 조선에 떨어지지 않는 나라란 걸 실감하고 있었다. 이 찹쌀떡이 바로 머잖아 역전될 [조선과 일본 사이의 문화역전 상황]을 자기도 모르게 예상하는 바였을까?~

 당시 서양과의 무역 호조로 [설탕] 이란 걸 서민들도 먹게 된 일본의 국위신장을 이 작은 일본의 왜떡에서 조선통신사들은 저도 모르게 실감하고 있던 판이었는데…?!

 

 

 새해가 지나자마자, 바로 두달 가까이 세월이 지난 후에야 통신사 일행에게 일본 정부측의 국서가 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그 서류를 수령하였는데?~~

 

 그런데, 문제는 또 다시 그 국서의 내용에서 터져나왔다.

 

 

 나 일본 관백은 조선국왕 합하에게 전하오…

 보내준 서신은 두세 번 거듭 읽었거니와, 우리 일본의 예순여 개의 주가 근래에 와서는 여러 나라로 갈라지는 바람에 나라는 어지러워지고, 조상 때부터 지켜오던 예절이 무너져 조정의 정사에 충실하질 아니하였소이다.

 그래서 내가 격분을 이기질 못해 서너 해에 걸쳐서 반역한 무리들을 토벌했으며, 멀리에 있는 다른 섬들(오키나와인 류큐 등을 말함)까지 다 손아귀에 넣고 복속시켰소.

 생각하건데, 나는 업적이 신통치 못한 보잘 것이 없는 사람이라오. 한낱 바늘장수까지 한 적이 있는 비천한 출신이오. 하지만 내 어머니는 나를 밸 때에 하늘에 있는 태양이 자신의 품속으로 들어와 안기는 희한한 꿈을 꾸었는데, 점쟁이가 말하길 나는 어른이 되면 천하의 지배자가 된다고 해몽했다오~

 이런 기이한 일이 생긴 후부터 역적들은 자연히 사기가 꺾이고 나는 싸울 때마다 반드시 이겨 승리하였소이다. 이미 나는 나라를 평정하여 일본 전토를 마침내 통일하였소이다. 전면내전 전쟁이 바로 재작년에 막 끝난 상황인데도 우리 일본은 오히려 평화시보다 더 부강하여졌소이다.

 인간의 한평생이란 따지고 보면 고작 백년이 채 안되는 데, 내 어찌 생각해보면 갑갑하게도 여기 일본에서만 오래 살 것이오? 평생 이 섬에서 살고 싶지는 않소이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밝히자면 조선을 뛰어넘어 명나라의 사백 주를 우리나라 영토로 만들고 백만년을 내려가며 우리 일본의 정사를 대륙에다 펼칠 참이오.

 이 뜻은 귀국이 먼저 입조하라는 것은 원대한 생각이 있으면 당연히 근심도 없다는 말을 따르고자 한 말이오. 바다 한가운데 있는 먼 섬의 뒤떨어진 무리들은 허용해줄 수 없소.

 나 도요도미가 명나라로 들어가는 날, 군사를 거느리고 군영을 바라보면서 이웃 바로 당신네 조선과의 관계를 더욱 좋게 가질 수 있을 것이오…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단지 세 나라에 아름다운 영웅의 명성을 떨쳐보자고 하는 것 뿐이라오. 그대에게 보내는 방물은 다음 목록과 같으니 아무쪼록 잘 받으시오.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선조에게 보내는 국서 내용이 대략 이와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럴 수가?~”

 “왜 그러십니까?”

 

 황윤길은 김성일에게 문제의 국서를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울분을 토해냈다.

 

 “감히 우리 전하를 정승에게나 쓰는 합하라고 썼고, 예물을 방물(내리는 물품)이라 적었소이다.”

 “어이가 없군, 섬나라 개구리 미개인들이 우리에게 어찌 이리 무례하단 말인가?”

 

 아직도 주제파악을 못한 조선통신사들은 지금껏 일본이 저희보다 미개국이고 약한 나라인줄 착각을 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땐, 과학기술과 국력에 관한 한 일본은 조선보다 훨씬 앞선 수준이었는데도 아직도 일본을 얕잡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이 일본이란 나라는, 아직도 해적질이나 해서 남을 약탈해 먹고 살며 거기에다 입을 옷도 없어 남자는 불두덩이만 가리는 훈도시에 여자는 곁만 가리는 얇은 유카타란 옷만 입고 다니는 데다 기술도 없어 철기조차 만들지 못하고 돈도 없어 맨 물물교환이나 하면서 사는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 야만인들에 불과한 상태라고 여겼다.

 아마 지금쯤으로 따지면, 이 나라 한국인들이 방글라데시나 몽골쯤의 나라를 일본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선입견은 원래부터가 일본이 한반도에서 도래한 가야나 백제인들이 만든 나라인데다, 이들 시절까지만 해도 일본열도는 거의 원시상태로 살며 가죽과 풀로 옷을 지어입는 원시인들이 사는 상태여서 생긴 편견이었다.

 하지만 이건 지나친 착각이었다. 조선이 유교의 교조주의에 잠에 빠져 오랫동안 제자리걸음만 하던 중, 일본은 발벗고 뛰어 이때쯤은 서양과 맞먹을 정도의 과학기술 및 문화수준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려 백제 멸망 이후 거의 천 년이란 수월찮은 세월이 흐른 상태였는데도 그 동안 일본이 헛수고만 하고 있는 줄 알았던 오해였다.

 실제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던 건 일본이 아니라 그들은 일취월장하고 있었지만 유학의 교조주의에 빠져 수백 년간 거의 과학 및 기술 사회제도의 진보를 않고 정체된 채로 진화를 자기들 쪽에서 거부하고 있던 이 조선이었다. 후일, 그들은 임진왜란으로 큰 교훈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그 후에도 삼백 년 간이나 스스로의 진화를 게을리하다가 결국 두 번째 일본의 침략엔 정말로 식민지가 되는 비운을 피할 수 없게 되지만…

 

 [지나간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자는, 결국 그 피해를 또 다시 당할 수밖에 없다.]

 

 조선에게 딱 맞는 역사적 진리였지 않을까?~

 

 

 (실제, 이로부터 삼백년 후 구한말 두 번째 일본의 침략 때엔 이순신 권율과 맞먹는 영웅인 전봉준이 있었음에도 결국 그도 막강한 일본군 화력에 잡혀 죽고, 백만에 달하는 동학농민군은 괴멸 당하게 된다.)

 

 

 어쨌든, 자기들 나름대로는 너무나 무례한 국서(주제파악을 못하고 자기들이 일본보다 더 상위의 나라라고 아직껏 착각해서)에 짜증이 난 통신사 일행은 이런 국서는 받아갈 수 없으니 다시 써가지고 오라고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에게 강요했다.

 결국, 그는 도요도미를 다시 만나 약간의 正刊(글을 바로잡음)을 거쳐 국서를 다시 가져왔다. 이번엔 합하를 전하로, 방물을 예물이라고 고쳐서 써 오게 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문단으로 보면, 꼭 조선을 자기들보다 아래 신분으로 보는 듯한 대목은 별달리 나아질 게 없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이런 내용이 맘에 안 들어 더 정중하게 써줄 것을 요구했으나, 그 이상은 절대로 도요도미도 물러나질 않고 그대로 전할 것을 강요하였다.

 결국, 조선통신사 일행은 한번만 고친 그 국서를 가지고 그대로 조선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오사카에서 배를 타고서 두달 여에 걸쳐 쓰시마를 경유해 이듬해 1591년 3월에 다시 부산포에 돌아온 일행은, 그로부터 약 보름 후에 서둘러(당시엔 너무 교통이 불편해 여럿이서는 부산서 서울까지 보름이면 빨라) 한양으로 올라와 임금을 만나 일본 순방에 대한 성과를 알리게 되었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공지 프롤로그 2020 / 8 / 24 545 0 -
18 신립의 공격~ 1차전투는 승리함. 2020 / 10 / 2 346 0 2459   
17 기병으로도 총병을 능히 이길 수 있다?~ 2020 / 9 / 28 310 0 2654   
16 신립의 출동~ 2020 / 9 / 25 295 0 3570   
15 상주에서의 전투준비, 왜군을 포위했는데도 … 2020 / 9 / 25 291 0 5684   
14 철수하는 경상우수영~ 원균의 한탄. 2020 / 9 / 21 300 0 3477   
13 너무나 한심한 국방백태~ 2020 / 9 / 16 297 0 3431   
12 마침내 전쟁이 난 줄 안 선조 2020 / 9 / 11 309 0 3790   
11 동래부사 송상현, 충성심이지만 미련한 죽음 2020 / 9 / 8 311 0 5111   
10 부산성 함락 2020 / 9 / 7 304 0 4088   
9 부산항에 도착한 일본군대 2020 / 9 / 7 301 0 5351   
8 가자!!~ 조선으로!! 2020 / 8 / 28 316 0 3456   
7 진관체제의 문제점, 신립의 설명 2020 / 8 / 27 320 0 3287   
6 선조의 전쟁준비 계산 2020 / 8 / 27 305 0 7249   
5 일본의 침략은 반드시 있다고 국시로 정해져~ 2020 / 8 / 26 308 0 3031   
4 이반하는 민심 2020 / 8 / 25 302 0 4298   
3 황윤길과 김성일의 상반된 보고 2020 / 8 / 24 316 0 3550   
2 일본간 조선통신사 일행 2020 / 8 / 24 310 0 8493   
1 녹둔도~ 원균과 이순신의 만남. 2020 / 8 / 24 504 0 8681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명탐정 이원희의
미스테리
戰爭과 사랑 (소
미스테리
남북통일 후 한
미스테리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