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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지오르고스의 일기
작가 : 현서랑
작품등록일 : 2020.7.31

J. 그녀는 그것을 지오르고스의 일기라 적었지. 모르탈 아이움, 그 옛 시대에 지오르고스가 일궈내어 셀 수 없는 시간을 지나온 그 신비의 역사를. 이젠 J라는 그 작은 여자아이의 이름이 우리들의 진실 위에 허구성과 함께 덮여질 테지. 인간들은 우리들의 존재를 믿으려하지 않아. 앞선 존재들. J는 우리를 그렇게 부르더군. 인퀴스토 디토스란 신들과 엄연히 구분되어야 함에도 말이야.

 
네냐 VIII
작성일 : 20-08-23 12:48     조회 : 237     추천 : 0     분량 : 1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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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불리한 전황의 참담을 받아들이려 마른 침을 삼키던 때였다. 괴상하게도, 여명은 자연의 섭리를 벗어나 다시 어둠으로 바뀌었다. 해가 지상의 살기에 놀라 다시 땅속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해는 변함없이 뜨고 있었다. 동쪽 수평선 위에서 타던 새벽녘의 태양빛이 거대한 무언가에 가려진 것이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해안의 모두가 그 어둠이 도래한 동쪽 바다를 바라봤다. 빛을 가린 것은 여태껏 본 적 없는 높이의 파도였다. 그 거대한 파도가 여명을 등진 채 홍수처럼 서쪽으로 들어 닥치던 광경은 경이로운 물보라를 동반하여 내 눈가장을 적셨고, 루완의 함대들을 좌우로 밀친 뒤 모래사장 위에 도달한 그 파도는 날카로운 물줄기들을 세차게 쏟아내며 해변에 남아있던 아르도르의 강병들을 모조리 휩쓸어버렸다. 모래사장 위에서 힘겹게 수압을 버텨낸 야경들은 그 즉시 자신들의 싸움을 중단했고, 마치 바다에게 예를 갖추듯 무릎을 꿇거나 고개를 숙였다.

 그 후 파도는 모래사장 속으로 스며들었다. 날카로운 물줄기들은 주인의 손아귀로 돌아가는 채찍 줄처럼 바다 속 한 지점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뒤 물가에선 모든 야경들의 절을 받는 이가 뭍으로 걸어 나왔는데, 그는 메어 뤼귀였다.

 뭍으로 나와 헤스판 성을 올려다본 뤼귀는 세르부스의 고관인 소녀 검객에게 다가갔다. 소녀를 에워싸고 있던 시카의 수색대 셋은 자신들의 칼날을 등 뒤로 숨기며 뤼귀와 소녀에게서 물러났다. 뤼귀는 무릎 꿇은 소녀에게 어떤 말을 건넸고, 고개를 든 소녀의 입모양도 움직였다. 소녀가 말을 마치자 뤼귀는 성내로 향하는 오르막을 오르며 야경들에게 크게 소리를 쳤는데, 그때 그의 목소리는 해변 너머에까지 울려 나 또한 정확히 들을 수가 있었다.

 

 - 너흰 모두 그롯테로 돌아가라.

 

 모래사장의 야경들은 고개를 들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레인웜의 야경들이 아니었고 뤼귀 역시 그들의 왕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메어 뤼귀라는 우두머리 야경에게 깃들어 있는 실체감이란 것은 모래사장에 있던 야경들의 충성심과 본질을 자극했는지, 대부분의 야경들은 모래사장에서 즉시 떠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카의 수색대 셋을 포함한 몇몇의 야경들은 모래사장을 떠나지 않고 버티는 모습이었는데, 이에 뤼귀는 한 차례 더 입을 열었다.

 

 - 떠나지 않는 자는 곧 이곳으로 돌아올 나와 적으로서의 대면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말을 남긴 뤼귀는 성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가 넌지시 던지고 간 마지막 말은, 모래사장에 남아있던 모든 야경들의 전의를 내려놓게 했다. 모래사장의 야경들은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켜 북쪽으로 떠나거나 모래 속으로 파고들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야경들이 모두 떠나자, 바다 위에서 잠자코 있던 루완군들은 허탈하게 무기를 내려놓으며 흩어진 배들을 다시 모았다.

 그렇게 뤼귀의 등장 한순간 만에 해안의 전투는 허무한 결말을 맺었다. 성안으로 향했던 뤼귀는 내가 해변으로 시선을 돌린 사이 이미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넓디넓은 헤스판 성내에서 그를 찾는 것은 막막한 일이었다. 다른 야경들과 달리 생김새에 특이점이라곤 없는 그였다. 그러나 곧 왕궁 주변에서 큰 굉음이 울렸고, 대머리 남성만을 찾던 내 눈은 자연히 그 소리로 향했다.

 굉음을 낸 건 왕궁의 후부였다. 왕궁을 에워싸고 있던 돌벽은 서쪽으로 향하는 관문만을 제외한 채 차례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평지에 드러난 왕궁은 갑옷을 벗은 군인과도 다름이 없었다. 아르도르의 부관들은 흩어져있던 자신들의 병력을 왕궁 둘레에 모아 왕궁의 모든 진입로를 봉쇄했다. 그들의 당황은 덜했고 대처는 빨랐다. 그들은 테스미르미드의 어떠한 계략이 왕궁의 벽을 무너뜨린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왕궁 벽을 무너뜨린 건 테스미르미드의 군인들이 아니었다.

 양측의 군사들은 짧게나마 숨을 돌리던 때, 궁내에선 비명이 여러 차례 들려왔다. 궁의 서문으로 향하던 비명은 곧 근위병들에게 둘러싸인 한 중년 남성을 왕궁 밖으로 뱉어냈다. 왕궁 속에서 부리나케 밖으로 도망쳐 나온 그 중년 남성이 바로 아르도르의 섭정 비즈니 운버트였다. 섭정의 얼굴과 왕관엔 붉은 핏방울이 튀어 있었고, 그의 뒤를 따라 궁내에서 걸어 나온 건 손에 피를 흠뻑 묻힌 뤼귀였다.

 섭정이 궁 밖으로 나오자 아르도르 병사들은 겁먹은 섭정 주위로 집결하여 그를 보호했다. 뤼귀는 가만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기만 했는데, 섭정이 겁을 먹은 이유를 알아챈 아르도르의 지휘관은 뤼귀에게 칼을 겨눴다. 집결한 아르도르의 병사들 역시 자신들의 지휘관을 따라 뤼귀에게 무기를 향했다. 그러나 섭정의 다급한 고함은 그 모두를 말렸다.

 

 - 칼과 활은 소용없다! 저 괴물과 맞서지 말라!

 

 섭정은 말 위에 올랐고 헤스판 밖의 광야를 향해 서쪽으로 내달렸다. 근위병들은 끊임없이 밀집해서 그를 에워쌌고 아르도르의 남은 전 병력이 그 행렬을 따랐다. 그들의 경로에 멀뚱하게 서있던 테스미르미드의 병사들은 재빨리 좌우로 흩어져 그들에게 길을 텄다. 그것은 옷시아의 명령이었다. 무너진 왕궁 벽 둘레에서 아르도르의 잔병들과 외로이 싸우고 있던 로워드는 섭정의 도주를 뒤늦게 알고 그들을 쫓으려 말에 올랐으나, 뤼귀가 로워드의 앞을 막아섰다. 뤼귀는 도망을 치는 섭정에게 일어날 일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난 적이 떠난 자리에 남아있는 뤼귀와 마주하기 위해 바위산을 내려가려했다. 그러나 그 멀리서도 어떻게 내 의도를 알아차린 뤼귀는 로워드의 앞에서 높게 뛰어올라 내 바로 옆으로 사뿐히 내려왔고, 그 광경이 여전히 신비했던 난 다시 다리의 힘을 풀고 주저앉았다.

 

 - 서사를 적기에 좋은 위치로군.

 

 주변 경관을 훑은 뤼귀는 내 몸의 상처들도 살폈다. 그는 내 고통들에 안타까워하지 않고 오히려 웃었다.

 

 - 크게 다치진 않았군. 셰펄드 그 녀석 걱정은 말게.

 

 사실 셰펄드에 대한 걱정은 내게서 떠나질 않고 있었고, 그제야 난 시름을 놨다. 뤼귀는 말을 이었다.

 

 - 운명이 자네를 돕는 것 같다 했던 내 말을 기억하나? 내 동족들도 다치고 죽어간 전장에서도 살아남다니. 한 인간의 재주치곤 신박한 일이지.

 

 그는 내게 무언가 보여주려는 듯 날 일으켰다. 그리고 헤스판 시내를 떠나는 아르도르의 군사들을 가리켰다.

 

 - 저들의 결말을 보기 위해선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해. 이동할 수 있겠나?

 

 난 고개를 끄덕인 뒤 그의 안내에 의지해 서쪽의 고지대로 향했다. 곧 적절한 시야를 찾은 뤼귀는 우뚝 솟아오른 바위 끝에 올라 내게 손을 뻗었다. 난 그 손을 잡았고 그는 날 가볍게 들어 올려 자신의 옆에 세웠다. 아르도르의 군대는 막 헤스판 서쪽의 관문을 나서고 있었다.

 동쪽에서 뜬 해가 이미 사방을 충분히 밝혀주던 때였다. 뤼귀는 드넓은 광야의 서쪽 끝을 가리켰다. 그곳에선 당당한 위세의 한 기수가 긴 머리를 흩날리며 바위산 옆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그녀는 실비아루스 공주였다. 그리고 그녀 뒤로 어마어마한 무리의 횡렬이 서서히 드러났다. 두 야경 왕의 싸움에서 물러나있던 연합군은 그렇게 적시에 나타났다.

 연합군은 섭정이 이끄는 아르도르의 잔병들을 멀리서 마주했다. 다급하게 헤스판 관문을 나선 섭정의 행렬은 더 이상 광야 안으로 나서질 못한 채 그을린 성벽 앞에서 초라하게 굳어버렸다.

 하지만 광야를 비춘 해가 드러낸 것은 양측 군대의 조우뿐만이 아니었다. 그들 사이의 공터엔 이 전쟁의 주역들이라 여겨졌던 두 존재가 쓰러져있었다. 시카와 헤밀롯, 두 야경 왕은 그 넓은 땅 가운데에 덩그러니 누워있었다. 양쪽의 군사들이 일으키는 기척에 시카가 먼저 깨어났고, 그녀는 몸을 일으켜 자신 근처에 쓰러져있는 헤밀롯을 바라봤다. 시카가 일어서자 광야 위엔 적막이 감돌며 모든 인간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적막을 깬 건 아르도르의 근위대 품에 숨어있던 비즈니 섭정이었다. 그는 말에서 내린 뒤 근위병들 사이에서 뛰쳐나와 단신으로 시카에게 씩씩거리며 다가갔다. 그때 시카에게 향하던 섭정의 목소리는 그 괄괄한 울림만 희미하게 들려왔으나, 그 광경을 한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뤼귀의 표정에서 난 어느 정도 상황을 읽을 수 있었다. 섭정의 고함은 이어졌으나 시카는 대꾸도 없이 쓰러진 헤밀롯에게로 걸어갔고, 이윽고 섭정은 주제넘게도 자신의 칼을 뽑았다. 시카는 걸음을 멈춰 그 같잖은 겨눔을 바라보았다. 섭정 딴에는 경고이자 협박이었을지 몰라도, 그가 여긴 의미는 아무런 가치도 없이 그의 목숨과 함께 득달같이 사라져버렸다. 시카의 손엔 검은 불빛이 켜졌고, 그 즉시 섭정의 목은 그의 화려한 은 갑옷과 분리되어 흙바닥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시카는 쓰러진 헤밀롯 앞에서 몸을 낮춰 가녀린 양팔로 그를 안아들었다. 그녀가 평원을 떠나기 전에 바라본 곳은 우리가 서있는 바위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뤼귀를 바라봤다. 헤밀롯을 들어 안은 그녀는 잠시 동안 뤼귀와 눈을 맞추곤 그 자리에서 튀어 올라 사라졌다.

 그것이 이 전쟁을 끝맺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거대한 함선을 계곡 위의 나뭇잎처럼 흔들던 동쪽 바다는 어느덧 잠잠해져 있었고, 살아남은 루완군들을 모래 위로 상륙하고 있었다. 흐린 구름 사이에서도 해는 그 수면 위로 쉬지 않고 떠올라 헤스판 광야를 지나는 연합군의 시위를 비췄고, 주인을 잃은 아르도르의 병사들은 전열에서부터 차례로 무릎을 꿇으며 항복의 예로 연합군에게 조아렸다. 오디아르 웰렌은 땅에 떨어져있던 섭정의 목을 집어 머리 위로 치켜들어 종전의 환호를 이끌었다.

 

 - 우리도 그만 내려가지. 곧 비가 내릴 것 같으니.

 

 산에 오르기 싫다고 고집하던 내 다리도 내리막 앞에선 관대했다. 뤼귀의 말대로 곧 하늘에선 빗방울을 떨어뜨렸다. 느리게 하산한 우리가 산 아래에 발을 디뎠을 땐, 태양 빛과 먹구름이 교묘히 장악한 헤스판의 천장 밑 광장으로 모든 이들이 모여 있었다. 뤼귀는 굵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광장으로 나섰고 막 비를 피하려던 모든 지휘관과 부관들은 뤼귀를 보곤 빗속에 멈춰 섰다.

 

 -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떨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옷시아였다. 그녀가 뤼귀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테스미르미드의 병사들 역시 모두 고개를 숙였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던 로워드는 고개를 숙이기에 앞서 뤼귀에게 의심부터 건넸다.

 

 - ……. 왜 저흴 도왔습니까.

 

 모든 이가 로워드의 말을 들어 뤼귀에게 집중했다. 입을 다문 뤼귀를 대신해 대답에 나선 이는 셰펄드의 친구이자 루완 포페타의 영주인 로메로 오비디우스였다.

 

 - 이제 여러분께 제 친구의 말을 알릴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오비디우스는 뤼귀를 봤고, 뤼귀는 고개를 끄덕여 그의 발언을 허락했다.

 

 - 이분의 존함은 메어 뤼귀이며, 과거 나가 신의 기사이자 현재 그롯테의 섬나라 레인웜의 왕이십니다. 레인웜은 세르부스와 에퀘스를 더불어 예로부터 줄곧 우리 인간들의 우방국이었습니다. 이는 그롯테에 대한 편협한 견해를 지닌 우리가 알아야 될 사실이며, 여러분께서 군신의 도를 지키고자 한다면 여기 계신 이분께 왕의 예를 갖추어야 합니다.

 

 오비디우스의 외침은 빗소리를 이겨내며 광장에 퍼졌다. 그가 젖은 땅에 왼 무릎을 꿇자 그 뒤에 서있던 오톤과 루완의 수군들 역시 뤼귀를 향해 신하로서의 예를 갖췄고, 로워드를 제외한 그곳의 인간들 모두가 각자의 직위를 막론해 뤼귀에게 절을 했다.

 뤼귀는 로워드 면전에 다가갔다. 빗물은 로워드의 눈에 깃들어 있던 악의를 씻어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동족들이 뤼귀에게 보이고 있는 예로써 무언가를 깨우친 듯, 서글픈 입을 열었다.

 

 - 전 우리가 주체를 잃을까 두려울 뿐입니다.

 

 로워드의 힘없는 한 마디에 뤼귀는 왠지 고개를 숙였다. 말없이 내 옆으로 돌아온 뤼귀는 해변으로 향했고 난 그를 따랐다. 광장에 내렸던 엄숙함은 그곳에서 멀어지는 우리의 걸음과 함께 서서히 풀어져 빗물과 함께 땅으로 스며들어갔다.

 해변엔 비바람을 맞아 일어나는 작은 파도가 수면 위의 시체들을 모래사장으로 올려 보내고 있었다. 뤼귀가 얕은 물가로 나가자 때마침 다가온 파도는 의식 없는 셰펄드의 몸을 뤼귀 옆으로 뱉어냈다. 셰펄드는 반쯤 시체가 된 상태에서도 자신의 오른손엔 검을 쥐고 있었다. 뤼귀는 그 반대쪽 팔을 붙잡았다. 그리곤 셰펄드의 늘어진 몸뚱이를 질질 끌어 가까운 해안 절벽 밑으로 들어갔다. 우린 그 동굴에서 비를 피하며 평평한 지대에 셰펄드를 두고 마주 앉았다. 그때 난 왜 셰펄드를 진작 바다에서 건져내지 않고 그때까지 놔뒀던 것이냐고 뤼귀에게 따졌다.

 

 - 물이 더 안전하잖나?

 

 내가 땅에서 난 인간이기에 뤼귀의 대답을 이해할 수 없었던 걸까? 어쨌든 곧 셰펄드의 입에선 바닷물과 기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눈을 뜬 셰펄드는 몸을 엎드려 몇 차례 물을 더 뿜어내더니 수척한 얼굴로 뤼귀를 바라봤다.

 

 - 난 할 만큼 했다. 결과야 어찌됐든지.

 

 셰펄드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흐리멍덩한 눈을 끔벅거렸다.

 

 - 퀘니, 아르도르가 항복했어. 섭정은 죽었고. 그리고 많은 인간들이 죽었지. 너무 많은…….

 

 뤼귀의 대답에 셰펄드는 은근히 만족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나쁘지 않네. 인간들이야 어차피 죽는다.

 

 휘청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가누던 셰펄드는 동굴 벽에 기대어 걸으며 바깥을 내다봤다. 그리곤 비오는 날씨에 대한 불평을 중얼거리며 동굴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와 뤼귀는 빗줄기가 얇아질 때까지 그 동굴에서 머물렀다. 그것은 오랜만의 휴식이었다. 우리가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많은 병사들이 해변에 나와 가는 비를 맞으며 전사자들의 시신을 치우고 있었다. 뤼귀를 본 병사들은 그를 의식하여 각자가 하던 일을 멈추고 길을 열었다. 뤼귀는 병사들 사이로 난 그 길을 걸었고 난 멋쩍게 그 뒤를 따랐다.

 성내는 시끄러웠다. 실비아루스가 이끄는 로부르 군이, 헤스판의 난민들이 곧장 돌아올 수 있도록 조취를 취한 까닭이었다. 아이들은 우리의 눈앞을 부산히 쏘다녔고, 강단에 올라있는 연설가들은 아르도르의 새 시국을 찬양하고 있었다. 몇몇 부녀자들은 패배를 위하여 희생된 아르도르의 가엾은 청년들의 주검을 구원으로 미장해주고 있었다.

 뤼귀는 그곳에서 오래도록 서성거렸다. 우리의 자리를 옮겨낸 건 해변 가로 향하던 오톤과 오비디우스였다. 뤼귀와 내가 한 장로의 연설 앞에 서있던 중 그 둘은 우리를 찾아왔다. 둘의 뒤엔 완전히 기운을 차린 셰펄드도 있었다. 그러나 셰펄드는 비 웅덩이 근처에서 뛰놀던 아이들에게 붙잡혀 걸음을 정체해야했다. 아이들이 셰펄드의 등에 메어진 철검에 관심을 가져 그의 발을 묶었던 것이다.

 오톤과 오비디우스는 뤼귀의 신분이 밝혀진 뒤에도 선생이라는 호칭을 고수했다. 오톤과 오비디우스는 뤼귀와 내게 동행을 제안했고, 우리 넷은 모래사장으로 나가 남향으로 걸었다. 남쪽 갯바위 절벽 너머엔 루완의 함선들이 정박해있었다. 파손이 적은 배들은 헤스판 시내에서 조달되는 자재로 빠른 수리가 이뤄지고 있었다. 오비디우스는 스스로 그곳의 감독관을 자처하여 갑판으로 올라갔고, 오톤은 선원들에게서 떨어져 조용한 구석으로 우릴 이끌었다.

 

 - 저희 루완은 오늘 저녁에 철군할 것입니다. 성한 배들이 많지 않아 일부의 병력은 육로로 이동할 계획입니다.

 

 함선들을 보고 있던 뤼귀는 오톤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 일찍 돌아가는군요. 승전 의식은 없나봅니다.

 

 - 저희 연합은 이곳에서 테스미르미드 병사들의 제를 올리기로 했습니다. 모두들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 각자의 왕 앞에서 승전을 치를 계획입니다.

 

 오톤은 말을 이었다.

 

 - 선생께서도 저희와 함께 루완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희 루완이 이번 서방연합을 대표해 선생께 은공을 표하고 싶습니다. 주공께서도 그 일을 바라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뤼귀는 오톤의 제안을 거절했다. 뤼귀는 이미 자신의 행로를 정해놓은 상태였다. 오톤은 아쉬워하며 그 옆에 있던 내게도 루완으로의 귀향 의사를 물었다. 난 바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결정을 미뤘다. 도어테일즈에 대한 향수가 딱히 일진 않았다. 대답을 망설였던 이유는 루완 어딘가에 있을 한 여인에 대한 그리움뿐이었다. 서사를 위해선 뤼귀나 셰펄드의 행로를 따라야했다. 뤼귀도 오톤도 내 망설임을 인정해 내게 시간을 주었다. 오늘 이 서사를 마무리할 즈음엔 결정을 해야 한다.

 그 후 우린 오톤과 헤어져 헤스판 시내를 지났다. 뤼귀는 붐비는 대로 대신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택해 조용히 광야로 향했다. 그는 드러난 자신의 직분으로 인해 이전과는 또 다른 무게가 느껴진다고 내게 말했는데, 난 그가 느끼는 무게감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뤼귀가 광야로 나온 건 셰펄드 때문이었다. 헤스판 시내에선 죽은 테스미르미드 병사들에 대한 제가 치러지고 있어 성 밖은 한적하기만 했다. 셰펄드는 그 한적함 속에서 홀로 병사들의 시신을 들추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가 죽은 병사들의 주머니를 뒤지던 건 아니었다. 그는 헤밀롯과 시카의 전투를 자기 나름대로 조사하고 있었다. 그의 목적을 바로 알아차린 뤼귀는 우리가 바위산 위에서 보았던 두 야경 왕의 결말을 말해주었다. 셰펄드는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냐며 뤼귀에게 투덜거리며 자신의 헛수고를 우리에게 탓했다.

 

 - 둘의 승패가 네게 중요한가?

 

 뤼귀는 물었다.

 

 - 만약 헤밀롯이 죽었어봐라. 그럼 앞으로 인간들이 됐겠냐.

 

 - 난 네가 루완 사람들만 걱정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이젠 우리가 인간들 편에 섰으니 네 그 걱정이 조금은 덜겠군 그래.

 

 - 그런 셈 치자. 뭐 그렇다고 그롯테의 내분 형세가 크게 바뀔 것 같진 않아. 뤼귀 너도 헤밀롯처럼 평화나 운운하면서 세월을 썩힐 테지.

 

 뤼귀는 웃었다. 그때 우리 뒤에선 새 인기척이 일었다. 실비아루스 공주였다.

 

 - 존공께서는 이 주검들 가운데서도 웃으실 수가 있습니까. 슬픔은 저희 인간들만의 감정인지요.

 

 그녀는 성내의 추모제에서 빠져나와 당돌한 인사말로 뤼귀를 마주했다. 그녀의 등장에 뤼귀는 미소를 감췄다.

 

 - 미안합니다. 제가 인간답지를 못했군요.

 

 뤼귀의 대답에 공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다음 물음엔 뤼귀에 대한 원망이 조금 섞여있었다.

 

 - 존공께서 진작 정체를 밝히시어 이 전쟁에 일찍 나서주셨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청년들이 살아남았을 것입니다. 존공께서는 루완의 특사라는 신분으로 미력한 조언들만을 일삼으셨고, 남쪽 바다에선 파도를 일으켜 아군의 행로를 가로막으셨습니다. 굳이 그러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요.

 

 실비아루스의 물음은 무례가 아니었다. 물음을 받아들이는 이에게 그만한 포용력이 있음을 그녀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제 선택은 제 나라의 입장과 인간들의 주권을 모두 고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무엇보다 인간들의 목숨을 우선했다는 것을 공주께서만큼은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뤼귀의 대답을 들은 공주는 이미 준비되었던 한숨을 내쉬었다.

 

 - 사실은 저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공연히 존공을 탓한 것을 사죄드립니다. 이 주검들을 눈앞에 놓고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을 뿐입니다.

 

 공주의 말로 찾아든 무거운 분위기는 대화를 멈춰냈다. 이에 셰펄드는 차가운 목소리를 꺼내 뤼귀와 공주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 장차 왕이 될 사람이라면 이런 광경에 건실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게 내 나라 루완과 당신네 평화국가들이 모르는 전쟁이라는 겁니다.

 

 셰펄드 그 특유의 거만한 말투는 로부르의 공주 앞에서도 그대로였다. 공주는 침묵했고 그들의 대화는 그대로 끝이 났다.

 광야에 남은 우린 이른 저녁을 맞이했고, 난 평소보다 일찍 서사를 써내려갔다. 그동안 실비아루스는 헤스판 성내로 돌아갔고, 뤼귀와 셰펄드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내 앞에서 논의를 했다. 뤼귀는 루크룸의 전선으로 갈 계획이었다. 그는 시카가 떠나온 그곳 전장에 대해 한 가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록를린과 카르고의 인간군이 그 전황 속에서 유리했다면, 시카는 루크룸을 떠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셰펄드 역시 라귈라가 어떠한 조치를 꾀했을 것 같다고 맞장구를 치며 뤼귀와의 동행을 약속했다.

 이젠 내 행로를 결정해야할 때다. 난 여전히 이니스와 서사 두 기로에 서있다. 다만 이 둘을 따라 잉코아 중부로 간다면 전장에서의 위험이 따른다. 이제껏 지나온 전장들은 뤼귀가 운명이라고 믿는 나의 운을 가까스로 실현시켜줬으나 다음 전장에선 그 운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셰펄드는 내 고민을 두고 입을 열었다.

 

 - 이니스 아가씨가 보고 싶으면 돌아가라. 글감이야 도어테일즈에도 넘친다. 정 우리들 얘기가 쓰고 싶다면 루완에서 우리가 돌아오길 기다리던지.

 

 이들이 살아서 돌아오리란 믿음은 내게 충분했다. 단지 이 둘이 훗날에 나와 재회했을 때, 자신들이 겪은 모든 일들을 기억해서 내게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내가 한 편의 서사를 완성할 수 있을 만큼의 이야기를 말이다. 그래서 난 한 가지 고안을 떠올렸다. 이 여정을 떠나기 전보다도 과거의, 셰펄드 그가 거절했던 코이눔 옵스를. 그는 분명 내게 말린 송어 두 마리를 돌려주지 않았다. 난 셰펄드 그에게 나의 그을린 비망록을 건넸다. 아직 기록이 없는 빈 책자 속에 둘의 경험을 채워와 달라고. 그가 갚지 않은 과거의 빚을 들먹여 당당히 말했다. 뤼귀는 웃음으로 내 코옵스에 힘을 더해주었다. 셰펄드는 마지못해 내 비망록과 깃펜을 받았다. 그리고 그렇게 둘은 북쪽을 향해 떠나갔다.

 이젠 이 광야에 나 홀로 남아있다. 오톤에게 돌아갈 시간이다. 비망록이 떠난 손아귀에 이젠 무엇을 간직하고 다녀야할까. 답은 정해져있었다. 여정 내내 품속에 모셔두었던 리넨을 꺼낸다. 나이팅게일과 라일락이 새겨진 이니스의 리넨이다. 그녀가 떠난 후 수백 번도 꺼내보았지만 일부러 외면하려고도 했던 것을 이젠 떳떳하게 움켜쥔다. 그녀에게 돌아갈 시간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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