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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이,보라색
작가 : Riley
작품등록일 : 2020.8.1

이 소설은 저에게 많은 '처음'을 선물해 주었어요.
여러 '처음'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건 역시 '첫 소설'인 것 같네요.

이 글을 쓰면서 제가 관심있는 주제에 대해서도 깨닫게 되었어요.
그건 바로 '운명'인데요, 아마 이 후로도 계속 글을 쓰게 된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형태의 '운명'에 대해 쓰지 않을까 싶어요.
[이,보라색]은 '운명'을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를 궁금해하며
써 내려갔던 저의 첫 중편소설입니다.

너무너무 부족하지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연히, 또는 운명처럼, 읽어주실 분들께도 미리 인사 전할게요.
감.사.합.니.다.

 
#13
작성일 : 20-08-21 12:37     조회 : 203     추천 : 0     분량 : 8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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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정오가 다 되어 눈을 떴다. 어젯밤 광장에서 집으로 돌아와 대충 씻고, 입고 있던 옷은 바닥에 벗어버리고는,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눈만 감으면 잠들 것 같았는데 그러지 못 했다. 광장 바닥에 웅크리고 떠올렸던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베개를 꼭 끌어안고 잠들기만을 기다렸다. 방을 나서자 눈이 부시게 화창한 날씨가 펼쳐졌다. 조각구름까지 모두 끌어다 비를 쏟아 부은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같았다. 손으로 눈을 가리고 서 있는데, N이 내 발목에 몸을 돌려가며 비볐다. 통증을 느꼈다. 발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엄마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너 뭐하고 다니는 거야? 다리 좀 봐!”

 타박상과 찰과상으로 뒤덮인 다리가 보였다. 한참 잔소리를 하던 엄마는 소독약, 연고, 밴드, 파스 등을 종류별로 한 아름 안기고 병원으로 출근했다. 엄마 옆에서 걱정스레 나를 지켜보던 아빠도 친구 집 정원의 산수유가 아파서 가봐야 한다며 외출했다. 거실에 덩그러니 앉아 멍하니 있다가 두리번거리니 리모컨이 보였다. 무심코 리모컨을 손에 쥐었다. 빨간색 전원버튼을 눌러 TV를 켰다. 내용을 하나도 모르는 드라마, 등장하는 패널이 낯선 예능 프로그램이 재방송 중이다. TV를 잘 보지 않는다. 특히 드라마는 더 보지 않게 된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배우들의 색에 더 신경 쓰게 돼버린다. 그래서 영상물보다는 글을 좋아한다. 직장을 다니기 시작한 후엔 그것마저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계속 버튼을 눌러 채널을 돌리다 뉴스전문방송에서 멈췄다. 어제 집회에 관해 보도 중이었다. 집회는 자정이 넘어서야 완전히 끝났고, 공무집행방해로 1명이 연행됐으며, 주최측과 관계없이 독단적으로 행진 방향을 바꾸려던 일부 때문에 다소 소란이 있었으나 대체로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어제 크게 다쳐 응급실에 실려 갔으면 뉴스에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내 옆에 다소곳이 앉아 햇살을 온 몸으로 맞으며 털을 고르는 N을 번쩍 들어 볼에 마구 비볐다. N은 가늘고 길게 울었다. N의 울음소리를 휴대전화 벨소리로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고 있는 N을 바닥에 내려놓고 방으로 달려갔다.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 사이로 가방을 찾아 들었다. 휴대전화를 꺼내고 버튼을 눌러 화면을 켰다. 집에 잘 들어갔냐는 태영의 메시지 하나와 이상우의 부재중 통화 한 통이 남겨져 있었다. 휴대전화를 충전선과 연결했다. 수건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바닥에 있던 담요가 발에 걸렸다. 어제 택시에서 이상우가 덮어준 담요였다. 담요를 들어 침대 위에 걸쳐놓고 욕실로 들어가 물을 틀려고 샤워기의 레버를 잡았다. 태영이 손바닥 여기저기에 붙여 놓은 밴드들이 보였다. 떼어내려는데 딱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대로 머리부터 뜨거운 물에 적셨다.

 

 밤 산책을 즐기기 좋은 계절은 지나갔다. 느티나무 공원 벤치에 앉아 차가워진 가을바람을 맞아보니 알 수 있었다. 몇 번 못 했는데 지나가버린 것 같았다. 겨울, 봄, 여름을 지나 다시 맞을 가을에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봤다. 여전히 그 흔한 이과장으로 일하고 있고, 엄마의 잔소리를 견디며 함께 살고 있고, 이모가 되어 어색하지만 기쁘고, 이상우와는 한결같은 연인사이일 것이다. 생각이 멈췄다. 일 년이 흘러도 우리는 여전히 만나고 있을까? 아니라면 헤어지는 이유가 무엇일지 상상해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경우는 언제나처럼 내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은연중에 느낀 이상우가 나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이상우가 만나던 옛 연인이 갑자기 나타나 아직 그를 사랑하고 있으니 헤어져달라고 당당히 요구하고, 나는 버티고 버티다 눈물을 흘리며 물러나는 것이다. 상상하고 보니 어딘가 익숙한 이야기다. 오늘 낮에 채널을 돌리다 잠깐 봤던, 내용을 하나도 모르는 드라마 재방송이 떠올랐다. 그 옛 연인은 당연히 나보다 어리고 예쁘고 돈도 많다. 문득 내 눈은 여전히 이상한 상태일까 싶었다. 태영처럼 점점 평범해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그 녀석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갑자기 태영이 잔뜩 미워졌다.

 “춥죠? 얼른 들어와요. 오래 기다렸어요?”

 가게 문을 열고나오며 이상우가 말했다. 나는 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끝났어요?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 그리고 이거. 잘 썼어요.”

 “담요네요? 빨았어요?”

 “네, 건조기로 보송보송하게 말려왔어요.”

 “안 돌려줘도 되는데, 아무튼 고마워요. 저녁 먹었죠? 그래도 뭐 먹으러 갈까요?”

 “상우씨, 배고파요?”

 “괜찮아요. 아까 8시 넘어서 요기했어요.”

 “그럼, 난 상우씨가 만든 케이크 먹고 싶어요.”

 이상우는 한 번 싱긋 웃으며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잠시 기다리는 동안 진열되어 있는 파이와 타르트를 둘러보았다. 몇 개 남아있지 않았다. 이거라도 사다가 태영에게 감사인사를 할까 하다가 집었던 에그타르트를 도로 내려놓았다. 유리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작업장을 바라보니 이상우가 나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의자가 생겼네요?”

 “보라씨 오면 앉히려고 샀어요. 노란색으로.”

 테이블 모서리에 노란색 의자 두 개가 놓여있었다. 하얀 접시 위의 사과타르트케이크 한 조각이 테이블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유리병에 꽂아 둔 한 송이 꽃처럼 보였다.

 “11월 맞아 만든 케이크 신제품이에요. 먹어 봐요.”

 “냄새부터 맛있어요. 잘 먹겠습니다. 상우씨도 드세요.”

 이상우는 자신은 됐으니 맛있게 먹으라고 말하며 하얀색 머그에 따뜻한 차 한 잔도 만들어주었다. 작고 네모나게 자른 사과를 시나몬과 벌꿀로 조려 케이크 윗면을 장식했다. 입안에 넣을 때 향도 좋았지만 사과의 아삭한 식감과 달콤한 맛이 먹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케이크를 한 입 입에 넣고 주변을 한 번 돌아보았다. 겨우 한 달인데, 아주 오랫동안 오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고 이상우가 말했다.

 “뭐 바뀐 거 있어요?”

 “아니요. 너무 오랜만에 와 보는 것 같아서요. 그리웠나 봐요.”

 그는 케이크를 먹는 나를 한참 지켜봤다. 내가 먹는 모습 그만보라고 하자 잠시 시선을 돌리는듯하더니 금세 다시 나를 보며 다친 곳은 괜찮은지 물어왔다.

 “어제 좀 당황해서 그렇지 많이 다치진 않았어요. 가벼운 찰과상, 타박상인데요.”

 그래도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러곤 다음 말을 머뭇거렸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조용히 기다렸다.

 “어제… 보라씨 도와준 사람, 남태영씨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이상우의 머리 위를 봤다가 표정과 몸짓을 살폈다. 약간 숙인 고개, 조금 움츠려든 어깨, 굳게 맞잡은 두 손이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할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을 미루고 싶었다. 다음 말이 나오면 무언가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라 직감했다.

 “이 말을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지 말 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도 굳이 말을 꺼내는 건 오만일지도 몰라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반도 남지 않았지만 쏟아버릴까 싶었다. 남은 차를 단숨에 들이켜고 한 잔 더 달라고 말할까도 했다.

 “보라씨 생일에 남태영씨가 찾아왔었어요. 급하게 달려왔는지 거친 숨을 내쉬면서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자신이 보라씨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 특별하다고 했어요. 그 때 화가 났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가봐야 한다며 남태영씨를 남겨두고 가게를 나왔어요. 차를 타고 보라씨에게 가려는데 마침 보라씨가 공원 앞에 있었고, 둘을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아 빨리 태우고 이동했어요. 우리는 그 날부터 만나기로 했고, 난 더 이상 남태영씨를 신경 쓰지 않았어요. 아니, 솔직히 말하면, 계속 신경이 쓰였는데 그걸 인정하지 않았던 거죠. 어젯밤에 확실하게 깨달았어요. 지난 한 달간 보라씨가 나에게 오는 걸 망설였다는 걸요. 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하지만 한 구석에 있는 불안한 마음은 털어 버려야 해요. 보라씨,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나한테 온전히 와 줘요.”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그 말이 무엇을 부정하는 말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상우는 내 손을 살며시 잡고 데려다 주겠다고 말했다. 가게 문을 닫고 차에 타고 집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 앞에 도착하자 이상우가 먼저 내렸다. 그리고 따라 내리는 내 곁에 오더니 가만히 안아주었다.

 “잘 생각해 봐요. 그리고 꼭 나한테 와서, 나의 노란색이 되어줘요.”

 

 어김없이 월요일은 왔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버스를 타고 사무실에 도착해 자리에 앉아 업무를 진행하다 정오가 되어 점심을 먹으러 사무실을 나섰다.

 “과장님, 모습이 왜 그래요? 주말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나는 황주임에게 슬쩍 눈짓하며 입고 나온 긴 치마를 살짝 들어 다리를 보여줬다. 황주임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사고라도 당했어요?”

 “아니, 토요일에 집회 갔다가 좀 다쳤어.”

 “조금 다친 건 아닌데요? 다친 건 다친 거고 눈은 또 왜 그래요? 설마 아파서 잠도 설쳤어요?”

 “아냐, 골치 아픈 일이 있어서 새벽에야 잠들었어. 다크서클 심해?”

 “완전 심해요. 눈도 빨갛고요. 그런데… 과장님한테 두통 유발할 일이면 남태영씨겠네요.”

 국물을 뜨던 숟가락을 놓칠 뻔 했다. 난 뭘 이렇게 들키고 다니는 걸까 싶다가 황주임이 내 속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황주임은 그대로 얼어붙어 밥숟가락도 못 움직이는 상태가 된 나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디저트 뷔페 갔던 날, 과장님이랑 남자친구분이랑 가고 남태영씨랑 저랑 둘이 남았을 때 남태영씨가 제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요. 그러곤 걸어가는 과장님을 바라보더라고요. 자기 감정을 그 날에야 확실히 알았다고도 했어요. 글쎄 그런 말을 해 놓고, 내가 굳이 그런 자리에 끼었으면 왜 왔는지 뻔히 알 텐데, 사과 한 마디 안 하고 인사만 하더니 휙 가버렸다니까요. 그 날 집에 와서 얼마나 부끄럽고 화가 나는지 괜히 곰인형만 몇 번이나 바닥에 패대기쳤어요. 물론 사과할 일은 아니지만 말이라도 예쁘게 할 수 있는 거잖아요? 한 일주일쯤 남태영씨랑 과장님이랑 번갈아 미워하면서 곰을 때리고 또 때렸더니 결국은 배가 좀 터졌어요. 와, 말하고 나니까 이제 좀 완전히 풀리는 것 같아요.”

 황주임은 갑자기 입맛이라도 도는지 밥 한 공기를 다 먹고 내가 남긴 밥까지 가져다 먹었다. 나는 먹는 둥 마는 둥 하다 사무실로 돌아와 다음 날 제출해야 할 제안서를 마무리하고 내일 잡혀있는 외부 회의 일정을 조정해서 확정짓고 도망치듯 퇴근했다.

 

 11월이 되고 기온이 뚝 떨어졌다. 프로젝트가 한두 개 더해지더니 업무가 많아졌고 늦게 퇴근하는 날이 늘어났다. 나만큼 광장도 바빠졌다. 다가오는 주말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이라 예측되고 있었다. 나는 나의 분주함과 세상의 분노 사이에 숨었다. 그리고 일주일 넘게 내리는 비를 핑계 삼았다. 11월 들어 가장 늦은 퇴근을 하는 날이었다. 얄궂게 내가 퇴근 버스를 타러 가는 시간까지 비가 내렸다. 버스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버스 한 대가 들어섰다. 얼른 올라탔다. 마침 선호하는 하차문 바로 앞자리도 비어있어 앉았다. 몇 정거장 지나고 나서 깨달았다. 이상우를 만나러 갈 때 타던, 봄의 집 근처로 가는 버스였다. 중간에 내려 환승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가기로 했다. 이 시간이면 G로 향하곤 했었다. 그래도 고작 열 번쯤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정류장에 한참을 서 있었다.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데, 5분으로는 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봄에게 전화를 걸었다. 늦었는데 잠시 들러도 되겠냐고 물었다. 빨리 오라는 대답을 듣고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은 먹었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준수씨는? 아직이야?”

 “응, 요즘 바쁜가 봐. 언니, 저녁은? 뭐라도 줄까?”

 “그럼 차 한 잔 줘.”

 23주가 넘은 튼튼은 제법 자랐나보다. 봄의 배가 제법 볼록했다. 파란 꽃이 잔뜩 그려진 하얀 찻잔을 건네받아 마시며 봄의 건강은 어떤지 물었다. 점점 몸도 무거워지고 태동도 심해져 힘들다고 했다. 내 옆에 앉은 봄의 배를 살며시 어루만지며 넌 어떤 색을 가지고 태어날 거냐고 소리 없이 물었다.

 “언니 무슨 고민 있어? 안색도 별로고, 살도 빠진 것 같아. 연애가 잘 안 돼?”

 “그러게, 쉽지가 않네.”

 “뭐야, 그 선생님 안 되겠네. 내가 큰 맘 먹고 도와줬는데!”

 “상우씨가 아니라 내가 문제야.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설마, 언니, 그 동창?”

 봄이라면 금세 눈치 챌 것 같았다. 봄이 아는 척하며 떠들어대는 것이 싫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잠시라도 마음 편히 얘기할 수 있는 상대가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하다. 바로 1분 뒤에 후회하더라도 말이다.

 “어쩐지, 우리 넷이 밥 먹을 때 언니를 바라보는 눈빛이 좀 수상하긴 했어. 좋겠다. 언니, 그냥 즐겨! 난 이제 그런 연애 감정은 끝났어.”

 자연스레 준수 흉보기 시간으로 넘어갔다. 한참을 혼자 얘기하던 봄이 작은 비명소리와 함께 멈췄다. 내가 봄의 얼굴을 바라보자 내 손을 가져가 자기 배에 얹었다. 내 손으로 튼튼의 움직임이 전해진다. 봄은 통증으로 괴로우면서도 행복해보였다. 찻잔을 가져다 싱크볼에 옮겨놓고 다음에 또 오겠다고 인사하며 봄의 집을 나섰다. 봄은 마지막까지 한 마디 덧붙였다.

 “언니, 이기적으로 굴어. 언니가 더 행복한 선택을 하면 되는 거야.”

 

 내 의자 밑으로 축구공이 굴러왔다. 회의실 쪽을 바라보니 차부장의 쌍둥이가 나를 쳐다보며 푸른빛과 하얀빛을 깜빡였다. 지금 차부장은 자리에 없다. 차부장은 녹색어머니 당번이라며 오늘 휴가를 냈다. 그런데 오전에 대표가 차부장을 급하게 찾았고, 차부장은 하교한 쌍둥이를 차에 태우고 급히 회사로 왔다. 두시 조금 안 되어 도착했는데, 아이들 병원 예약 시간까지 촉박하다며 나에게 두 남자아이를 맡기고 대표실로 달려갔다. 나는 쌍둥이를 빈 회의실에 데려다주고 엄마가 일 끝날 때까지 잠시 여기 있으라고 말했다. 잠시 조용하던 아이들은 금세 일어나 회의실을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고, 조금 더 있자 어디서 나온 지 모를 축구공을 가지고 놀았다. 그 축구공이 지금 내 발밑에 있다. 양손으로 축구공을 들고 회의실로 갔다. 공을 건네려고 손을 뻗자 두 아이가 동시에 잡았다. 소리 내지 않고 옥신각신한다. 그러더니 푸른빛의 아이가 물었다.

 “누나, 편의점 다녀와도 돼요?”

 “미안. 그건 엄마가 싫어하실 것 같은데. 마실 거 가져다줄까? 대신 축구는 좀 참자.”

 “네.”

 두 아이가 합창하듯 대답한다. 나는 내 서랍에 있는 야근용 과자를 몇 개 집어 들고, 탕비실에서 주스를 챙겨 회의실로 다시 갔다. 다행히 아이들이 과자를 다 먹기 전에 차부장이 돌아왔다.

 “이과장, 나 정신이 하나도 없다. 주스병만 좀 치워줘. 부탁할게. 오늘 금요일이니까 빨리 정리하고 가고, 월요일에 보자. 오늘, 고마워.”

 아이들은 우렁찬 인사를 남기고 떠나갔다. 쌍둥이가 한 바탕 휩쓸고 지나가서인지 오후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여섯시가 조금 넘어서 일을 마무리하고 사무실을 나설 수 있었다. 황주임과 함께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횡단보도 앞에서 주말 인사를 하고, 다소 혼잡한 금요일 퇴근 시간의 버스정류장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조금 있자 내가 타야 할 버스가 왔고, 운이 좋게 자리가 남아 앉을 수 있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익숙한 음악을 틀었다. 검색창을 열었더니 실시간 검색어에 과자이름이 올라있었다. 오늘이 11일이었다는 걸 새삼 깨닫고 뉴스 검색을 했다. 내일 대규모 촛불집회가 예상된다는 기사와 검찰수사를 받는 대통령의 측근에 대한 이야기가 뉴스를 도배했다. 내려야 할 때가 다 되었을 때 태영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늘을 상징하는 과자 교환권과 함께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거 잊지 마. 요즘 늦게 끝나는 날 많다며? 야근할 때 먹어.

 어딘가 태영답지 않은 말투였다. 몇 번이나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하는 태영의 모습이 떠올라 몰래 웃었다. 집 근처 편의점에 들러 태영이 보내 준 과자 교환권으로 과자를 잔뜩 받았다. 태영에게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려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사진메시지가 와 있었다. 이상우에게 온 수제초콜릿과자 사진이었다. 짧은 메시지도 있었다.

 -내가 만든 과자 먹고 싶지 않아요?

 태영에게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낼 수 없었다. 과자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집 앞 골목을 지나는데 내 발밑으로 작은 공이 굴러왔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꼬마 아이가 아빠와 함께 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양손에 과자가 잔뜩 든 봉지를 들고 있어 공을 집을 수가 없었다. 금세 다가온 아빠와 아이는 내게 사과하며 내 발밑의 공을 집어 올렸다.

 “우와, 부자다!”

 “하나 줄까?”

 “네!”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많은 데 하나 줄게요, 괜찮죠?”

 과자를 하나 건네자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옆에 있던 아이 아빠도 정중하게 인사하고 아이와 함께 가던 길을 갔다. 노란빛을 가진 아이와 카키색을 가진 아이 아빠를 잠시 흐뭇하게 바라봤다. 오늘은 공이랑 인연이 있는 날인가 했다. 그러다 문득 공은 제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향했다. 거실에 앉아있는 아빠에게 과자 한 아름을 안기고 남은 과자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내 침대에 누워있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놀라 몸을 일으키는 N에게 손인사만 하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이상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가방을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섰다.

 “아빠, 저녁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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