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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지오르고스의 일기
작가 : 현서랑
작품등록일 : 2020.7.31

J. 그녀는 그것을 지오르고스의 일기라 적었지. 모르탈 아이움, 그 옛 시대에 지오르고스가 일궈내어 셀 수 없는 시간을 지나온 그 신비의 역사를. 이젠 J라는 그 작은 여자아이의 이름이 우리들의 진실 위에 허구성과 함께 덮여질 테지. 인간들은 우리들의 존재를 믿으려하지 않아. 앞선 존재들. J는 우리를 그렇게 부르더군. 인퀴스토 디토스란 신들과 엄연히 구분되어야 함에도 말이야.

 
네냐 V
작성일 : 20-08-20 16:18     조회 : 235     추천 : 0     분량 : 7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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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냐 10_

 어젯밤을 보낸 바위산은 동쪽에 바다를 끼고 있었음에도 괴상하게 햇살이 잘 들지를 않았다. 매년 네냐 하순에나 린그노르 땅을 찾던 옅은 한기는 올해엔 그보다 이른 오늘에서부터 헤스판 일대에 기척을 비쳤다. 언더옥포드에서부터 외딴 길을 지나오며 지쳐있던 두 다리는 더 이상 걷기를 거부했으나 뤼귀를 따라야겠다는 의지는 게으른 내 사지를 다그쳐 일으켰다.

 나와 뤼귀는 바위산을 내려갔다. 우리에게 인사를 건넨 셰펄드는 내가 잤던 자리에 자신의 지저분한 철검을 던져놓곤 동쪽 해안을 보며 느긋하게 누워 휴식을 취했다.

 광야의 대지를 이룬 흙은 그 무게가 가벼운지 선선한 바람에도 먼지처럼 우리 눈앞에 흩날렸다. 뤼귀는 그 모래바람을 썩 언짢아했다.

 

 - 흙냄새가 영 익숙한 것이 느낌이 좋지 않군. 간혹 이 시기에 북서에서 강풍이 불어오긴 하지만 그롯테의 모래를 이곳까지 싣고 오진 않을 텐데.

 

 뤼귀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밟은 헤스판 광야엔 본래는 그곳에 없던 토질이 섞여있었는데, 그것은 가볍게 부서지는 그롯테 중부의 토질이었다. 뤼귀는 모래알들의 냄새와 무게로 토질의 변화를 구분해냈고, 광야를 지나는 내내 꺼림칙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곧 우린 헤스판 성곽지기들의 눈에 닿았다. 바위산 아래에서도 한 눈에 들어오던 성내의 첨탑 꼭대기들은 턱을 빼들어 시선을 위로 향하여야 보였고, 가까이서 본 철 장벽은 인간이라면 절대로 무너뜨릴 수가 없어 보일정도로 견고하기만 했다. 성벽 위엔 탁한 쇳빛을 내는 갑옷과 투구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군인들의 얼굴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는데, 뤼귀가 걸음을 멈춘 거리가 딱 그쯤이었다.

 

  - 우리에겐 갑옷도 기장도 없으니 화살이 날아올 지도 모르네. 그러니 내 뒤에 붙어있고 내가 은화를 꺼내기 전까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말게.

 

 다시 걸음을 계속하려던 뤼귀는 한 가지 조언을 덧붙였다.

 

 - 만약 우리가 성안에 들어가게 되면 기록은 자제하게. 적들이 자네를 어떻게 볼지 모르니.

 

 난 고개를 끄덕였고 우린 다시 걸었다. 난 뤼귀의 등 뒤에 붙어 그의 어깨 너머로 성벽을 바라봤다. 성벽은 보통의 사다리를 두세 개는 엮어 놓아야 오를 수 있을 정도로 높았다. 성문 역시 타탈론 전설 속의 거인들이 살아 돌아와도 허리를 펴고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어젯밤 뤼귀의 우려대로 아르도르의 파수병들은 우리에게 적대적이었다. 성벽 좌우에선 궁사들이 나타나 우리에게 활을 겨눴는데, 우리가 성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은빛 관복을 입은 한 무관이 성문 위에 나타나 궁사들에게 손짓을 보냈고, 이에 궁사들은 시위를 내리고 화살을 집어넣었다. 그 무관의 체격은 티포니 출신의 사공들만큼이나 우람하여 삼엄한 철벽 위에 엄중함을 더해놓고 있었다.

 

 - 출처를 밝혀라. 적이라면 사살하겠다.

 

 무관이 묻자 뤼귀는 루멘 왕의 은화를 꺼내 머리 위로 들었다.

 

 - 르슈 오디아르 클로드 왕께서 우리를 보냈소.

 

 - 루멘의 전령이라면 그대들은 우리의 적이다. 그대들이 루멘의 항복을 전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면 주군께선 그대들을 만나주지 않을 것이다.

 

 무관이 경고했으나 뤼귀는 도리어 당당하게 목적을 밝혔다.

 

 - 그게 아니오. 우린 아르도르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온 것이오.

 

 무관은 뤼귀의 말을 듣자마자 자신 옆에 서있는 궁사를 불렀고 궁사는 자신의 상반신만한 강궁을 꺼내들었다. 궁사는 활시위에 긴 화살을 메워 뤼귀를 향해 겨눴는데, 뤼귀는 그 궁사에게 눈길조차 주질 않았다. 무관은 그런 뤼귀의 태도를 가소로이 여겼는지 비웃음을 감추지 않으며 궁사에게 발사를 명했다.

 긴 화살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요란했다. 난 뤼귀의 등 뒤에서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궁사의 손을 떠났던 화살의 촉은 내 바로 옆 허공에 떠있었다. 웅크렸던 몸을 일으키니 뤼귀의 왼손이 그 화살대를 잡고 있었다. 그 광경에 놀란 무관은 자신이 직접 궁사의 활을 뺏어들어 다시 뤼귀를 향해 시위를 얹었다. 뤼귀는 왼손에 들려있던 화살을 천천히 땅에 내려놓았고, 곧 두 번째 화살이 뤼귀에게 날아왔다. 뤼귀는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그땐 날카로운 쇠가 단단한 바위에 부딪혀 튕겨지는 소리가 났으며, 뤼귀는 손등인지 손톱인지로 그 화살을 튕겨내 땅에 처박았다. 그 움직임이 워낙 잽싸, 난 뤼귀가 화살을 막아내던 것을 바로 앞에서 보았음에도 그의 손이 움직였다는 것 외엔 분간해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내 무관은 힘없이 활을 거뒀다. 성벽 위에 있던 파수병들 역시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이윽고 뤼귀가 입을 열었는데, 그 목소리는 나직했으나 위엄이 있어 평소 뤼귀의 말투와는 사뭇 달랐다.

 

 - 관문을 열어라. 너희가 루멘의 전령을 거부한다면 난 레인웜의 왕으로서 직접 이 문을 부수겠다.

 

 뤼귀의 명령조를 들은 무관은 성벽 위에서 부리나케 사라졌고, 그때부터 뤼귀는 덤덤히 기다렸다. 성벽을 넘을 수도, 성문을 강제로 열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 그였으나 그는 그저 서있기만 했다.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거대한 성문은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그곳에선 한 여성이 농염한 걸음걸이로 걸어 나왔다. 성문의 그늘은 그녀의 모습을 가리고 있었는데, 그늘이 걷히며 드러나는 그녀의 자태는 그녀가 인퀴스토 디토스임을 증명했다. 그녀는 하느작거리는 검은 천을 복면처럼 걸쳐, 눈 밑부터 이어진 하관을 모두 덮고 있었다. 그녀의 새까만 머리카락은 등 뒤로 가지런히 자라나 허리까지 닿아있었고, 야윈 여체는 얇고 어두운 실들로 가려져 있었다. 그녀의 하얀 두 팔 끝엔 그윽하고 차분한 광채가 날카로운 형상으로 뭉쳐져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그녀의 양손에 검은 불이 붙은 쌍수검이 쥐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땐 몰랐지만 그 상황이 지난 후에 알게 된 그녀의 이름은 시카였다. 그롯테의 여섯 국가 중 대부분의 영토가 모래로만 이뤄져있는 국가 우밀리타의 여왕이 바로 그녀였다. 뤼귀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루크룸의 왕 라귈라와 루마스피나의 여왕 퀴노르 스피나의 공통적인 뜻인 인간말살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인간에 대한 적대심이 과히 그들만큼 강하지 않았기에 적극적으로 전장에 나서지는 않는 성향의 소유자였다.

 시카는 뤼귀와 한 발짝 거리에까지 걸어와 멈춰 섰다. 밤의 우물처럼 어둡고 깊은 그녀의 두 눈은 뤼귀에게 고정되어 있었으나 그 검은 복면 안에선 아무런 말소리도 나오질 않았다. 그런 그녀를 잠시간 응시하던 뤼귀는 한숨 비슷한 숨을 크게 내뱉고 먼저 입을 뗐다.

 

 - 너흰 북방에서 루크룸을 도와 갈렌 호수를 지키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와중에도 이 도시를 지키려하다니.

 

 시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뤼귀는 그녀의 눈빛 속에서 답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네.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뤼귀는 내게 그만 돌아가자고 말했고, 시카 그녀도 다시 성안으로 돌아갔다. 난 그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뤼귀는 여느 때처럼 내 마음을 헤아렸고 우리가 바위산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난 그의 설명들을 들을 수 있었다.

 

 - 그녀는 곧은 성격을 가졌네. 긴 만남을 가져봤자 별 의미가 없어. 그녀의 존재 때문에 아르도르의 섭정은 쉽게 항복하지 않을 걸세. 퀴노르에 이어 시카까지 직접 이 전쟁에 나설 줄은 몰랐군. 이미 망조가 드리운 이 나라를…… 그들은 끝내 놓질 못하는군. 그만큼 린그노르에 발판이 필요한 게지. 덕분에 많은 인간들이 죽게 생겼으니 인간을 증오하는 그들에겐 어쩌면 손해가 없는 일이기도 하겠군 그래.

 

 뤼귀의 그 말은 내가 그간 모르고 있던 것을 깨닫게 했다. 바로 이 정세의 본질이었다. 동족을 배반한 아르도르의 선택은 그 거사의 흥망과 관계없이 야경들만을 위한 일이었던 것이다. 만약 아르도르가 반역에 성공했었다면, 뤼귀의 말대로 야경들은 린그노르에 새 발판을 마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에도 야경들은 잃을 것이 없었다. 아르도르라는 강성한 인간세력이 사라진다면 득이 될 이들은 야경들뿐이었던 것이다. 아르도르의 선왕 펄먼 아델리오가 야경과 담합을 이룬 그 순간부터 우리 인간들은 종족 전쟁에서의 불리를 떠안게 됐던 셈이다. 새삼 떠오른 건 셰펄드의 위대한 업적이었다. 셰펄드의 시해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의가 있었다. 뤼귀의 말대로라면 머지않아 헤스판에선 이제껏 보지 못한 큰 규모의 전투가 벌어질 것이었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모두 펄먼 왕이 초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윽고 우린 바위산에 도착했다. 셰펄드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누워있었다. 그는 우리가 자신의 예상보다 일찍 돌아온 것에 대해 의아해했다.

 

 - 성문 열리는 소리가 원체 시끄러워서 여기까지도 들리던데. 어째서 벌써 돌아온 거냐?

 

 묻고 난 셰펄드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뤼귀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고만 대답했는데, 더 상세한 대답을 원한 셰펄드는 날 쳐다봤다. 그리고 난 뤼귀가 한 행동에 대해서 내가 본 그대로를 말했다. 셰펄드는 내 말더듬에 답답함을 자아내면서도, 내 이야기 속 내용에 대해선 적잖게 만족해했다.

 

 - 뤼귀 네가 드디어 정체를 까발렸다니, 네가 한 짓에 후련함을 느껴보는 것이 얼마만인지도 모르겠다. 같잖은 인간들이 제 꼴에 관료랍시고 네 앞에서 누벼대는 것이 여간 답답했나보다.

 

 뤼귀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 그들 태도엔 신경 안 써. 퀘니, 다들 새 시대에 맞게 변해가고 있네. 다가올 시대의 방향을 위해선 내 권능의 도움도 필요할 것 같더군……. 평화를 바라고서 날 따르는 내 땅의 동족들을…… 이젠 마주할 면목이 없군 그래.

 

 중립국의 왕인 뤼귀는 자신이 느끼는 책임의 무게를 내비쳤다. 이에 셰펄드는 답답해했다.

 

 - 뤼귀 넌 따분한 왕이다. 레인웜에 있는 녀석들이 네 선택을 원망할 것 같으냐? 그들에게 널 따르라고 강요하지만 않으면 된다.

 

 셰펄드는 말을 이었다.

 

 - 지도자란 것들이 독단적이고 백성들은 예속을 당연시여기니 지금 잉코아 땅이 이 모양인 거다. 그따위 관행이 없어지는 것이 네가 말한 새 시대 아니겠냐.

 

 언제나 셰펄드의 견해에 인색하던 뤼귀였으나 그때만큼은 뤼귀 그도 침묵을 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뤼귀는 중요한 결심을 세운 듯 의기를 다졌고, 레인웜에 다녀오겠다며 바위산을 떠났다. 뤼귀가 자국으로 떠난 건 내가 그와 만난 이례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셰펄드의 조언은 분명 유효했고, 이번 귀향이 왠지 그에게 어떤 확신을 가져다줄 것만 같다.

 바위산에 남은 나와 셰펄드에겐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다섯 국가의 연합군이 도착할 때까지 우리에겐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다가올 전투를 위해 내가 준비해야 될 것은 마음가짐뿐이었다. 난 셰펄드에게 내 남은 시간을 맡기려했었다. 물론 그가 뤼귀처럼 매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성격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는 다시 잠자리에 드러누웠다.

 

 - 여긴 돌이 많으니 할 일이 필요하면 내 검이나 갈아라.

 

 그와 달리 난 누워서만 며칠을 보낼 수는 없었다. 내겐 최소한 마실 물과 양식이 필요했다. 그 토박한 바위산에선 물을 구할 수 없었고, 동쪽에 있는 바닷물을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더옥포드 요새에서 루완군에게 받아왔던 포육도 진작 다 먹어버리고 없었다. 셰펄드가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다 줄 일 또한 만무했다. 때문에 난 내 짐을 챙겨 일어났다. 내가 일어나자 셰펄드는 감고 있던 눈을 뜨더니 날 힐끔 쳐다봤다.

 

 - 어디가려고?

 

 난 이미 그가 잘 알고 있는, 인간이 느끼는 허기와 갈증에 대해 그에게 설명했다. 그는 고작 며칠도 못 참느냐고 투덜댈 뿐 자리에 그대로 누워 꿈쩍하지 않았다. 처음엔 그랬다. 그러나 내가 곧 혼자 걸음을 옮기자 그는 못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철검을 등에 맸다. 그는 날 가로질러 본인이 오히려 앞장을 섰고, 난 한동안 그의 한숨과 투덜거림을 들어야했다.

 목적지는 북쪽에 있는 휴모르 강 하류였다. 난 바위산 서쪽으로 내려가 우회하여 북상할 계획이었으나, 펄먼 왕 시해 당시 헤스판에 와본 경험이 있는 셰펄드는 내 계획을 반대했다. 그는 우회 없이 북쪽으로 곧장 가로질러가자고 했다.

 

 - 길을 가로질러도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위험이라곤 헤스판의 정찰병들뿐일 거다. 그러니 굳이 돌아서 갈 필요가 없어.

 

 그의 얘기에 난 시카의 위험성에 대해 물었다.

 

 - 시카는 퀴노르 같은 악녀가 아니야. 소문으로는 시카가 헤밀롯만큼이나 야경들의 실체감을 잘 느낀다지만 그건 신경 쓸 필요도 없지. 시카 그녀는 우리가 제 눈앞을 버젓이 지나가도 우리가 자길 해하려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에게 관심도 갖지 않을 거다. 그녀의 부하들이라면 위험하겠지만 아마 그들은 우릴 쉽게 못 찾을 걸.

 

 내가 안심하자 그는 말을 덧붙였다.

 

 - 다만 며칠 후 전투에서 그녀와 맞붙는다면 그때 그녀의 위험성은 퀴노르 그 이상이지. 아마 우리 쪽에선 그녀와 맞설 수 있는 이가 없을 거다.

 

 난 셰펄드 그나 뤼귀가 시카 그녀와 맞설 수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 나 따윈 그녀의 상대가 안 돼. 뤼귀도 육지에서 싸운다면 힘들 거다.

 

 난 그 말이 장난이 섞인 과장이라 여겨 웃었다. 내겐 헤밀롯이 테스미르미드에 있음을 떠올랐고, 이를 셰펄드에게 상기시켰다.

 

 - 그러고 보니 헤밀롯이라면 시카를 이길 수도 있겠다. 아니야, 나도 모르겠다. 우두머리들이 싸우는 걸 난 본 적이 없어. 이번에 언더옥포드에서도 기절해 있었고.

 

 난 그의 우유부단함에 대해 따졌다. 뤼귀도 우두머리 인퀴스토 디토스인데, 뤼귀와 시카의 싸움에 대해선 어떻게 예측하느냐고 물었다.

 

 - 그것들은 다 제들만의 영역이 있어. 그게 아마 각자 주관하던 힘이 달랐던 신들에게서 물려받은 기질일 거다. 며칠 전 퀴노르와 헤밀롯의 전투가 언더옥포드가 아닌 루마스피나 숲 지대에서 벌어졌다면 헤밀롯이 졌겠지. 뤼귀는 물에서 났고 바다를 모시던 기사였다. 뭍에선 다른 우두머리들에 비해 힘이 달릴 수밖에 없어.

 

 대화를 적어가다 보니 어느덧 우린 토박한 바위지대를 이미 지나있었다. 아르도르엔 주거지가 드물었고, 주변엔 마을은커녕 인적이 묻은 길조차 잘 나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덕에 야생관목들은 무성했고 또 그것들은 대부분 네냐 초를 맞아 설익은 과실들을 달고 있었다. 셰펄드는 내가 먹어도 탈이 없을 열매들을 가려내주었고, 밤에 우린 개울가에 앉아 작은 수확제를 벌였다. 음식을 거의 먹지 않던 뤼귀에 반해 셰펄드는 내가 딴 열매들을 곧잘 뺏어먹었다.

 배를 불리며 나눴던 대화들 중엔 유독 인상적인 대화가 있었다. 내가 셰펄드 그에게 인간이 먹어도 탈이 없는 열매들을 어찌 구분해냈느냐고 물었을 때였다.

 

 - 옛날에, 너희 여왕이 알려줬다.

 

 뜻밖에도 그의 대답에 등장한 이는 내 고향 루완의 주인, 리오르닌 안 테레지아 여왕이었다. 과거 셰펄드는 내게 안 여왕과 자신의 관계를 언급했던 적이 있었다. 그땐 단지 여왕이 자신에게 각별한 사람이라고만 했었는데 그 자세한 이야기를 그는 오늘에서야 이어간 것이다.

 

 - 너희 선왕 발락 왕 시절에 난 브리테니엄 근위대에 들어갔었다. 직급이 말단이긴 했지만 내가 괴물이란 건 아무도 몰랐으니 지낼 만 했지. 어느 날엔 상관 한 명이랑 단둘이 공주 호위 임무를 맡게 됐는데, 그때 산적들이 덤비는 바람에 거기서 내 정체를 들켜야했다. 그때 나와 같이 있던 그 상관이 지금 포페타의 영주 로메로 오비디우스다. 거기서 내가 공주를 살리긴 했는데, 내 직업은 버려야 했어. 공주가 내 정체를 인간들에게 알리면 내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몰랐으니까. 내가 지금처럼 뤼귀한테 붙어 다녔던 것도 아니어서 발락 왕이 뤼귀와 친한 줄도 몰랐고. 그때 오비디우스가 날 도와줘서 내가 그나마 탈 없이 도망을 쳤는데 안이 날 따라오더라. 그녀는 어렸어. 어린 애답게 호기심도 많고 궁 생활도 싫어했어. 너처럼 우리 종족에 대해 관심도 많았다. 무엇보다 자신을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내게 미안해하더라.

 

 그렇게 셰펄드는 마지못해 공주 호위 임무를 한동안 이어가야했다고 한다. 얘기를 마친 그는 그저 자기 추억에 빠져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나또한 그에게 얘기를 더 해달라고 보채지 않았다. 그와 안 여왕 사이엔 남다른 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내 손에서 뺏어간 열매를 먹지 않고 아련히 바라봤고 난 내 품안에 있던 이니스의 리넨을 꺼냈다. 그리고 우린 각자의 추상으로 각자의 밤을 채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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