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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지오르고스의 일기
작가 : 현서랑
작품등록일 : 2020.7.31

J. 그녀는 그것을 지오르고스의 일기라 적었지. 모르탈 아이움, 그 옛 시대에 지오르고스가 일궈내어 셀 수 없는 시간을 지나온 그 신비의 역사를. 이젠 J라는 그 작은 여자아이의 이름이 우리들의 진실 위에 허구성과 함께 덮여질 테지. 인간들은 우리들의 존재를 믿으려하지 않아. 앞선 존재들. J는 우리를 그렇게 부르더군. 인퀴스토 디토스란 신들과 엄연히 구분되어야 함에도 말이야.

 
네냐 IV
작성일 : 20-08-19 13:05     조회 : 240     추천 : 0     분량 : 8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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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냐 5_

 전날 뛰고 걷기에 지쳐있던 내 몸은 일출의 부름도 잠으로 이겨내고 있었다. 대낮에 눈을 떴으나 그 역시 햇볕이 부른 기상은 아니었다. 성벽너머에서 들려오는 한 음성이 날 깨운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난 셰펄드가 마구간에서 사라진 걸 알았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뤼귀는 어젯밤처럼 성벽에 올라가있었다. 그리고 막 잠에서 깬 사람처럼 흐리멍덩한 셰펄드는 성벽 위로 향하는 계단을 터벅터벅 오르고 있었다. 의식을 찾은 그의 모습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일었고 난 그에게 달려갔다. 그는 귀찮은 척 날 반겼고 우린 함께 성벽 위로 향했다.

 성벽에 오르자마자 장대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서쪽으로 내려다보이는 평원엔 어마어마한 수의 군사들이 정렬해 있었다. 바다를 넘어온 로워드의 군대와 어제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옷시아의 군대, 그리고 루완의 수군과 지상군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평원으로 향하는 내리막에서 부동의 자세로 열을 갖추고 있었지만 일부는 북쪽 산지로 흩어져 그곳에 있는 시신들을 수습하고 있었다. 날 깨운 목청의 주인은 테스미르미드의 기장을 달고 성문 앞에까지 와있던 전령병이었다. 그는 열려있는 성문을 유심히 살피다 뒤늦게 성벽위의 우리 셋을 발견했다. 그때 뤼귀는 먼저 말을 꺼냈다.

 

 - 이곳엔 우리뿐이오. 로워드 군사께 돌아가 여긴 안전하다고 전하시오.

 

 - 당신은 누구십니까?

 

 - 루완의 특사라고 하면 알 것이오.

 

 병사는 말고삐를 돌려 재빨리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서쪽의 대군은 곧 우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우리 셋 역시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천천히 성벽에서 내려왔다.

 가장 먼저 문으로 들어온 건 양국의 네 지휘관이었다. 뮈헨 로워드와 뉘므레 옷시아, 레기오른 오톤, 그리고 루완의 수군을 이끌고 온 포페타의 영주 로메로 오비디우스가 그들이었다. 그 고관들과의 만남자리에서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건 로워드와 셰펄드 둘 뿐이었다. 셰펄드는 네 지휘관중 그나마 오비디우스에게만 눈인사를 건넸다. 둘은 그 짧은 눈짓으로도 서로의 친분을 모두에게 드러냈다.

 이후 네 지휘관은 말에서 내려 각자의 일을 시작했다. 오톤은 먼저 무너진 돌탑 앞으로 가 그곳을 살피며 자신의 부하들에게 성내를 수색하라 명령했다. 오비디우스는 셰펄드와 함께 성벽 위로 올라가 평원을 가리키며 대화를 나눴다. 비망록을 들고 있던 난 셰펄드를 따라가야 할지를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로워드가 뤼귀에게 다소 언짢은 태도로 말을 걸어왔고 난 그 자리에 남아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 전 어제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들었습니다. 괴물들이 특사님의 말을 알아듣고 모두 물러갔다고요. 그리고 특사께서 이곳에 와 괴물들을 돌려보냈을 때가 마침 우리 배를 가로막던 파도가 사라졌을 때와 같더군요.

 

 로워드 옆에 있던 옷시아 역시 뤼귀의 대답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뤼귀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답변이었다.

 

 - 군사께서 예상하고 계신 것처럼 전 인간이 아닙니다. 하지만 파도란 바다와 바람이 만드는 것이며, 어제 이곳에 왔던 야경들은 되돌아가달라는 저의 부탁을 들어줬을 뿐입니다.

 

 뤼귀는 그렇게 말했다. 거짓이 섞인 말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감춰왔던 자신의 일면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신만이 가득한 로워드는 반박했다.

 

 - 그럼 루치노르 협곡에서 당신이 아네이 강물을 부렸다는 소문은 무엇인지요? 또한 제가 아는 바 그롯테의 괴물들은 자신보다 강한 자 앞에서만 굴복합니다.

 

 - 물을 부리는 재주는 저에게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 야경들도 린그노르의 인간들처럼 여느 동족의 부탁을 들어줄 줄은 압니다.

 

 뤼귀의 그 반론엔 그다지 신빙성이 없었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난 그가 물을 이끌며 헤엄치는 모습을 두 차례나 봤기 때문이다.

 

 -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군요. 그렇게 자신을 숨기려는 이유가 뭡니까.

 

 로워드의 물음에 뤼귀는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테스미르미드 두 수장의 눈을 번갈아봤다. 다만 뤼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마주하는 로워드에 반해, 옷시아는 뤼귀의 시선이 닿자 불안한 안광을 내며 반쯤 눈꺼풀을 덮었다. 뤼귀는 대답할 말을 골랐고 그 말로 그들의 대화는 끝이 났다.

 

 - 여러 이유들로 단지 드러내지 않았을 뿐입니다. 두 분 눈에 서린 야경에 대한 적개심 또한 그 이유들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요.

 

 뤼귀는 셰펄드와 오비디우스가 있는 성벽위로 걸어올라가 그들의 대화에 함께했다. 뤼귀의 대답에 고개를 숙인 옷시아는 잠깐의 침묵 이후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로워드는 뤼귀의 말을 곱씹는 것처럼 그 자리에 서서 오랫동안 언짢은 태를 풀지 않았다.

 난 오톤에게 갔다. 이니스에 대해 묻기 위해서였다. 무너진 탑의 잔해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오톤은 자신을 찾아온 날 반겼다.

 

 - 이이오르, 당신이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난 그의 위로에 감사를 전한 뒤 이니스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 저흰 민간인과 사병들을 먼저 배에 태워 고국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아마 숙녀께선 어제 루완으로 돌아간 선발대에 계셨을 텐데요. 지금쯤 그들은 테스미르미드의 영해를 지났을 겁니다.

 

 그때 난 이니스가 순순히 루완으로 돌아갔으리라 생각지 않았고, 이에 더 상세한 대답을 구했다.

 

 - 제가 따로 보고받은 바는 없군요. 허나 아가씨께선 단순한 고집만으로 군령을 어길 수는 없었을 겁니다.

 

 내가 이니스에게 루완으로 돌아가라 권한 장본인이긴 했으나, 왠지 아쉬움은 몰려왔다. 그때 내가 오톤의 대답까지만 들었다면 아쉬움이란 단순하게 아쉬움만으로 남았을 지도 모른다. 문제는 내 주변에 있던 한 루완 병사였다. 오톤과 나의 대화를 엿듣던 그 병사는 그때 내게 이니스 얘기를 꺼냈는데, 그의 이야기는 내 기분을 망쳤고 결과적으론 살기 도는 소란마저 일으키게 됐다.

 

 - 그 여자는 떠났습니다. 굳이 남겠다는 걸 제가 떠나도록 설득했죠. 전쟁터에서 군인도 아닌 여자가 어떤 일을 당하게 되는 지를 제가 잘 설명해줬습니다. 그것도 그런 생기 도는 처녀에게라면 말입죠. 물론 남았으면 좋았겠지만 군령이지 않습니까.

 

 그는 부관도 아닌, 그저 승전에 도취해있던 일개 병사였다. 그의 설명은 더러운 몸짓이 더해져 내가 듣기에도, 이곳에 묘사하기에도 상스러운 것이었다. 이니스를 두고 비아냥거리며 시시덕거리는 그를 보고 있자니 화가 치밀었다. 그때 난 그 병사의 역겨운 얼굴을 세게 쳤다. 한 대뿐이었다. 그를 더 때리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한 손으로 볼을 감싼 그는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창을 움켜쥐었고, 주변의 병사들이 그와 날 떨어뜨려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도 우린 서로에게 달려들기 위해 주변의 만류를 뿌리쳤는데, 성벽 위에 있던 셰펄드가 그 소란 가운데에 내려와 자신의 손으로 병사의 창을 분질렀고 그 창날을 쥐어 병사의 목에 갖다 댔다. 자연히 소란은 멎었다. 창날이 이미 꽤 들어간 병사의 목에선 피가 흘렀다.

 고통스러워하던 병사는 겁을 먹어 신음마저 잃고 손에 쥔 창대를 떨어뜨렸다. 그때 오톤은 침착하게 셰펄드를 말렸다.

 

 - 길손, 창을 거두십쇼. 그의 언행에 대해선 제가 징계를 내리겠습니다.

 

 하지만 오톤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셰펄드는 말을 들어먹을 성격이 아니었다.

 

 - 이놈이 한 말은 나도 들었다. 사죄를 듣고 죽일 것이니 네 징계는 이놈 시체에 대고 내리던지 해라.

 

 그때 뤼귀가 내려와 셰펄드를 말렸고 셰펄드는 마지못해 창날을 거뒀다. 오톤은 뤼귀에게 눈짓을 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뤼귀도 고개를 까닥했다. 오톤은 병사에게 당장 사죄를 빌라 꾸짖었고, 목을 감싼 병사는 상관의 엄령에 따라 셰펄드와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사죄에도 만족하지 못한 셰펄드는 그가 고개를 들자 그의 얼굴에 걸은 가래침을 뱉었다. 뤼귀는 셰펄드를 아니꼽게 쏘아봤고 셰펄드 역시 불만 섞인 눈을 뤼귀와 맞췄다. 겁을 쉽게 떨쳐내지 못한 병사는 얼굴에 묻은 가래를 닦지도 않은 채 오톤의 부관에게 끌려갔고, 의무병이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제야 주변에 있던 병정들은 모두 안도를 했다. 그때 난 내심 셰펄드의 행동에 지지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의 처사가 과분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그의 처사 덕에 난 화를 금방 가라앉힐 수 있었다. 다만 뤼귀는 그 일을 적잖게 못마땅해 했다.

 

 - 퀘니, 분명 성격을 가다듬기로 하지 않았나?

 

 - 그래. 그래서 나도 답답하다. 죽일 놈들이 한 둘이 아닐 텐데 앞으로가 걱정이다.

 

  뤼귀는 고개를 내둘렀고 셰펄드는 다시 오비디우스에게 돌아갔다. 성벽 위에 있던 오비디우스의 자신 옆으로 돌아온 셰펄드를 빤히 바라보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여하튼 그 일로 이니스가 떠난 것은 확실해졌다. 그 뒤로 줄곧 내겐 한기와 공허감이 시시각각 들락거리고 있다.

 점령엔 많은 절차가 필요했다. 요새 내에서 여러 명령들을 하달하며 일들을 처리하던 오톤은 병사들이 늦은 점심 끼니를 채울 때가 되자 모든 지휘관들을 불러 담론을 나눴다. 뤼귀는 그 자리에 함께했고 난 루완의 병사에게 포육을 얻어 셰펄드 옆에 앉아 그것으로 첫 끼니를 채웠다. 셰펄드는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불평했다.

 

 - 여기 있는 놈들 중엔 날 좋게 보는 놈이 없는 것 같다. 특히 로워드라는 그 테스미르미드 대장 놈 시선이 제일 거슬려.

 

 예전에 로워드는 이니스와 나를 찾아와 셰펄드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난 그때의 이야기를 떠올려 셰펄드에게 전해줬다.

 

 - 내가 하고 다닌 짓 때문에 날 아는 관료들은 많아. 그 대부분이 날 없애고 싶어 해. 로워드 저놈도 아마 그럴 거다. 그는 우리 종족을 미워해. 보면 알아.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던 난 다른 화제를 찾다가 그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 당분간 너희랑 같이 움직일 거다. 나야 이제 어차피 묶인 신세니 뤼귀와 같이 다닌다고 해서 손해 볼 것도 없지. 네가 옛날처럼 날 귀찮게 할 것 같지도 않고.

 

 그는 내가 들고 있던 비망록을 툭 건들더니 말을 이었다.

 

 - 린그노르엔 날 잡으려는 인간들이 많아. 멍청하고 편협한 놈들 같으니……. 너희랑 같이 다니면 나보다 뤼귀가 나서서 그런 놈들을 다뤄주겠지. 난 죽여 버리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을 잘 못 찾는다는 걸 뤼귀는 알아.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의 동행은 내게도 좋은 일이었다. 잠시 후 담론을 마친 뤼귀는 내 옆으로 와 앉았다.

 

 - 헤밀롯과 약속한대로 난 헤스판으로 가면 되겠어.

 

 뤼귀는 내가 자신과 동행하리란 걸 바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는 셰펄드를 바라봤다. 셰펄드 역시 뤼귀가 보내는 무언의 물음을 바로 눈치 챘다.

 

 - 나도 가. 지금 바로 출발하자. 여기에 조금 더 있다간 저 로워드라는 놈이 시비를 걸어올 것만 같다.

 

 셰펄드의 말대로 우린 즉시 떠날 채비를 갖췄다. 뤼귀는 우리가 탈 말을 찾았으나 요새엔 양국 고관들의 말들만이 남아있었다. 결국 뤼귀는 걷기를 택했다. 그러나 이를 안 오톤은 자신의 말을 우리에게 내어주려 했고 오비디우스 역시 그와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뤼귀는 그 둘의 호의를 거절한 채 요새를 나섰다. 로워드는 우리가 성문을 나서는 모습을 지켜봤으나 그도 우리도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지는 않았다.

 우린 곧이 북상하는 길을 택해 요새 북부의 산등성이를 올랐다. 발밑에선 타버린 나뭇잎들의 재가 밟혔고, 테스미르미드의 병사들은 그때까지도 그곳에서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었다.

 던게르 숲은 음침한 산맥이라는 별칭에 맞게 초입에서부터 사방이 어두웠다. 탁한 잎을 단 나무들은 듬성듬성하게 나있음에도 교묘하게 하늘을 가려 밝은 햇빛을 막고 있었다. 뤼귀는 길을 내기 위해 맨 앞에서 걸었고, 셰펄드는 바로 내 뒤에서 걸었다. 셰펄드는 일전에 내게 음침한 산맥에 있는 루크룸의 야경들에 대해 말했었고, 그 말이 떠오른 난 우리가 가로지르는 길의 위험성에 대해서 그에게 물었다.

 

 - 여기 있는 괴물들 말이냐? 뤼귀 저 친구랑 같이 다니면 위험한 데 따윈 없으니 신경 쓰지 마라.

 

 뤼귀는 길을 서두르지 않았다. 우린 느긋하게 걸었고 해가 졌을 땐 이동을 멈춰 숲 가운데서 일찌감치 잠자리를 폈다. 우리의 발소리가 멈춘 숲속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게다가 달빛과 별빛이 가려진 주변은 너무도 어두워, 셰펄드가 피워낸 모닥불이 한낮의 태양처럼 밝게 느껴졌다.

 

 - 여기 있는 괴물 놈들이 산짐승들을 모조리 잡아먹은 건지 아무런 소리도 안 나는군.

 

 던게르 밤의 고요함은 야경 셰펄드가 그렇게 느낄 만치 깊었다. 뤼귀는 그 고요함이 싫었는지 이야기를 꺼냈다.

 

 - 오톤과 오비디우스가 이끄는 루완군은 정비를 마치는 즉시 아르도르 남쪽에서 해상으로 북상할 거야. 북부 연합군은 루치노르와 웨인우드에서 동진할 것이고, 로워드와 옷시아의 군대는 현재 페르미나에 있는 실비아루스의 군대와 합세해서 동북으로 행로를 잡을 것이네. 헤스판은 열흘이내로 다섯 국가의 군대에게 포위당할 테지.

 

 - 섭정 놈이 항복해올 기미는 없고?

 

 셰펄드는 물었다. 뤼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셰펄드는 허탈하게 웃었다.

 

 - 그놈이 미친 게 아니라면 다른 믿는 구석이 있나보다. 하긴 퀴노르 스피나가 언더옥포드에 있었으니 헤스판엔 더한 게 있을 만도 하다.

 

 - 아, 그러고 보니 퀘니 넌 어쩌다 퀴노르에게 잡힌 건가?

 

 뤼귀의 물음에 셰펄드는 힘없이 장작을 들어 모닥불에 던져놓으며 자신이 겪었던 일을 꺼냈다.

 

 - 난 퀴노르 그녀가 요새 안에 있는 줄도 몰랐어. 요새가 보이는 산기슭에서 갑자기 정신을 잃었는데 그 후론 악몽을 꾼 것처럼 짧은 기억들만 있다. 요새 안쪽 돌탑에 갇히고 퀴노르의 검은 가시가 내 몸에 파고들더라. 그렇게 꽤 오랫동안 묶여있었는데 헤밀롯이 왔다. 그 돌탑엔 퀴노르의 그 기분 나쁜 가시줄기가 둥지를 튼 것처럼 뿌리내리고 있었어. 헤밀롯이 탑을 부수고 날 묶고 있던 가시 줄기들을 잘랐다. 내 기억은 그게 다야.

 

 언제나 기세등등하던 셰펄드 그의 나약한 얼굴은 내겐 어색해보이기만 했다.

 

 - 그랬군. 난 네가 잡힌 줄도 몰랐어. 옷시아 그녀가 그렇게 무모한 전투를 벌일 줄도 몰랐네. 전쟁을 미루려 바닷길을 막고 있었던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던 것 같군. 로워드가 내 행위를 알게 된다면 그는 아마 이번 실패에서 자신의 무모한 출전명령이나 옷시아의 투지를 탓하지 않겠지. 파도를 일으킨 날 탓할 거야. 내 방해 때문에 테스미르미드군이 패했다고 생각할 테지.

 

 - 뤼귀 넌 인간들이 너에 대해 내리는 평가에 너무 신경을 쓴다. 그냥 마음을 편히 먹어라. 어차피 레인웜이 중립국 입지도 다 잃어가는 마당에 굳이 터분한 왕 노릇을 이어갈 필요가 있겠냐?

 

 - 네가 불같은 성격을 다스리기 힘든 것처럼 나도 내가 이어오던 기질을 바꾸기가 어려운 법이다.

 

 대화는 끝났고 셰펄드는 드러누웠다. 그리고 내가 서사를 정리할 때 뤼귀는 넌지시 한마디를 던졌다.

 

 - 이니가 없으니 많이 허전하군 그래.

 

 내 마음도 그와 같다.

 

 

 네냐 9_

 지난 서사 이후 사일이 지났다. 우린 음침한 산맥에서 북으로 이어지는 고지대를 걸어 오늘 저녁 헤스판 성이 보이는 이 바위산에 도달했다. 우리가 지나온 길은 아르도르의 어느 구역을 지나는지 정확히 가늠할 수도 없이 외딸았다.

 멀리서 보이는 헤스판 성은 전쟁국가이자 강대국인 아르도르의 위엄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성은 어마어마한 높이의 철 장벽에 둘러싸여 있었고, 철벽 너머로 솟아있는 성내의 첨탑들은 보통 때라면 혁혁해 보일만도 했으나 흐린 날씨와 저녁의 어스름으로 인해 음산하게만 느껴졌다.

 우리가 머무르는 바위산과 헤스판 성 사이엔 언더옥포드 평원의 수배에 달하는 너비에 광야가 있었는데, 셰펄드는 그 광야를 가로지르는 것이 아닌 동쪽의 해안 쪽으로 우회하여 헤스판 성으로 가길 바랐다. 그러나 뤼귀는 일전에 루멘의 왕 르슈 오디아르 클로드에게 받았던 은화를 꺼내들며 셰펄드의 제안을 거절했다.

 

 - 이번에 난 루완이 아닌 루멘의 특사자격으로 헤스판에 입성할 생각이네. 섭정에게 항복을 권하기엔 그게 나을 것 같아.

 

 뤼귀의 말이 옳았다. 그는 셰펄드에게 이 바위산에 남아있으라고 제안했다. 혹여 헤스판에서 선왕 시해자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가 있다면 우리의 처지가 곤란해질 것을 대비해서였다. 셰펄드는 아르도르의 섭정을 자신이 직접 왕좌에 앉힌 것이나 다름없는데 억울하다며 빈정거렸다.

 그간 우리가 지나온 길엔 개울은커녕 물웅덩이조차 없었던 터라 내 모습은 지저분하기에 짝이 없었다. 우리가 밤을 보내기위해 자리 잡은 곳은 먼 동쪽에 해안을 끼고 있었고, 난 내일의 입성을 위해 그 해안으로 향했다. 오래간 걸어 바닷물에 몸을 씻어내던 중, 수평선에 있던 시선을 뒤로 돌리니 내 옷이 놓인 모래사장 위엔 소리도 없이 나타난 뤼귀가 서있었다. 난 그의 앞으로 가 모래바닥에 앉았다. 수많은 별들이 일찌감치 하늘에 올라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흐린 날씨 속에서도 바다와 하늘이 이루는 미관은 보는 이들의 눈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뤼귀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 겁나지 않나? 적진인 헤스판으로 들어가는 일은 그리 무난한 일이 아니라네.

 

 난 겁나지 않았고 그렇게 대답했다. 나도 내가 아무런 긴장도 느끼지 못하는 것에 대해 새삼 놀랐다.

 

 - 자네도 나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군. 그땐 겁도 참 많았던 것 같은데.

 

 우리 둘은 같이 웃었다. 나도 그제야 그동안의 나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인퀴스토 디토스라는 종족에 대한 호기심으로 단순하게 시작한 일이 불과 한두 달 남짓한 사이에 나의 일면을 모두 바꿔놓았던 것이다. 뤼귀는 우리가 처음 도어테일즈에서 나설 때 탔던 말들과 그 말들을 빌려준 여인 베스티아에 대해 이야기하며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그는 우리가 처음 칼로스 강을 건널 때 그 말들을 맡겨둔 곳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내 비망록을 뒤져 그의 기억이 틀리지 않음을 확인했다.

 

 - 우리가 루완으로 돌아갈 때 그 말들을 잊지 말자고. 우리가 빌린 것이니만큼 반드시 주인에게로 돌려줘야하니.

 

 그 후 그는 우리가 루멘에서 만났던 딩곤들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수면위에 그녀들을 그렸다. 나 역시 그의 의도를 쫓았고 우리의 모래사장은 바닷물과 더불어 아련한 감상 속에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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