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
 1  2  3  4  5  6  >>
 
자유연재 > 추리/스릴러
안의 너
작가 : 녹슨등잔
작품등록일 : 2020.8.18

과거의 악몽이 되는 3인방의 잔재를 떨치지 못한 부식이란 남자가 있다. 우연찮게 박나리라는 미스터리한 남자와 친구가 된 고독한 사람이다. 나리는 신비스런 힘의 소유자로,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객체로서 마주 보게 한다.
나리는 씻지 못한 죄를 저지른 자들로 하여금 낙인을 먹인다. 그가 모르는 곳에서는 X교라는 사이비 종교의 신봉자들이 세상을 잿빛으로 만들고 있다. 나리가 그들의 소굴로 흘러 들어간 건 순전히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 모두 지독한 악인들임에는 부정할 수 없고 부식의 소용돌이 또한 거기서 소멸되어야 한다.

 
4. 수집
작성일 : 20-08-19 03:18     조회 : 238     추천 : 0     분량 : 11997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옷장 안에는 두 가지 칼라의 옷이 좌측과 우측으로 쏠려 있었다. 좌측은 턱시도였고 우측은 정비복이었다. 재킷을 건 옷걸이 안에 바지를 곱게 반으로 접어 넣은 회색 정비 복장. 용범이 죄인을 인도할 때 입는 옷이었다. 위생모, 라텍스 장갑, 부직포 덧신도 쓸 것이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정비복으로 갈아입었다. 처음 정비복을 살 때 가슴 쪽에 좋아하는 문구를 박아 넣을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지 않았다. 문신과 같이 특정 인물을 지목하는 수단으로 작용할 테니까.

 벨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현관으로 향했다. 물론 좋아서가 아니었다. 행사를 나갈 참인데 불청객이 끼어든 셈이니까. 세상 모두가 자기만의 룰이 있고 의식이 있었다. 더욱이 일가의 사람들이라면 모르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가 분명 오늘 죄인을 사냥하러 가겠다고 일러두었었다. 설마 응원이라도 하겠다면 도끼로 이마를 내리찍을 것이었다. 머릿속으로라도.

 김현호였다. 큰삼촌의 셋째 아들. 촌수로 따지자면 사촌 형이겠지만 현실적으론 용범보다 두 살이 어렸다. 장난으로라도 형이라고 부르라고 노래를 부르고 살았다면 진작 죽여 버렸을 것이다.

 “아침부터 웬일이야?”

 “저 그게…….”

 할 말이 있는지 현호는 손을 비비며 다른 곳을 봤다.

 “안에 들어가도 될까?”

 “물론이지.”

 용범이 문을 잡은 채 비켜서자 현호가 재빨리 안으로 들어왔다. 운동화를 벗자마자 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현호의 태도가 어딘지 수상했지만 용범은 점잖게 지켜보았다. 현호는 옆머리를 긁적이다 운을 띄울 생각으로 표정을 바꿨다. 하지만 말이 쉽게 안 나오는지 어색한 웃음만이다.

 “몹시 곤란한 일이 있는 모양인 거 같네. 현호야 혹시 돈 때문이니?”

 “어. 어? 아니. 아니야.”

 “돈이라면 얼마 정돈 빌려줄 수 있어.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형, 혹시 나도 끼워주면 안 돼?”

 “끼워달라니?”

 용범이 큰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현호는 아래 입술을 빨면서 턱을 문질렀다. 생각해 보면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다. 힘든 일도 아니었다. 낙인이 찍힌 죄인들을 수집하는 일에 개입 시켜 달라는 거니까. 자신도 일가의 피고 용범도 그랬다. 하지만 외부 세계로 가서 활약을 하는 일이기에 이만저만한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죄인이야 어차피 집안에선 재물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외부 세계로 따지면 적어도 자신보다는 막강했다. 그가 그만큼 약하다는 증거였다. 그는 싸움은커녕 배짱도 없었다. 똑같은 말이지만.

 “나도 죄인 수집에 가담시켜줘. 마을에만 있으려니까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미안하지만 그건 좀 곤란한데…… 넌 너무…….”

 “설마 어리다고 말하고 싶은 거 아니겠지?”

 “거의 그럴 뻔했지. 마음도 여리잖아.”

 “그래, 재물들을 다룰 때 말이지? 그런 거 못 봐. 근데, 나도 달라져야겠다고 생각을 했어. 나도 일가의 일원으로서 뭔가를 하고 싶다고. 그리고 형, 우린 두 살밖에 차이 안 나.”

 현호가 자세를 낮춰 두 손을 가슴 앞에서 펼치며 말했다.

 “심심해서잖아. 밖에 나가고 싶지? 도시를 동경하는 시골 처녀처럼?”

 “에이씨!”

 현호는 소파에 앉아서 발을 까닥거렸다. 용범의 집은 언제나 깔끔했다. 강박이 생길 만큼 너무도 정갈해 위화감이 대단했다. 의자든 뭐든 항상 같은 자리, 조금도 틀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형들의 방에 있는 매트리스 같은 덴 정액이라도 흘렸던 장소 일 까봐 못 안는다. 용범을 어찌 감히 그들 따위와 비교 대상으로 삼을까. 그의 눈에 비친 용범의 집은 중증의 결백증을 앓는 사이코패스의 집이었다.

 “내가 형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잖아?”

 “지금은 그런 게 이유가 되지 않아. 현호야 알잖아. 자칫 실수라도 있으면…….”

 “병신 취급하지 마!”

 “오해하지 마. 이런 일은 혼자가 편해서 그래. 도움이 필요했으면 내가 먼저 너를 찾았을 거야. 내가 달리 누굴 찾겠니? 커피 마실래?”

 “맥주 줘.”

 “아침부터?”

 “최고 시원한 거로.”

 용범은 맥주 두 캔을 가져와 하나를 내밀었다.

 “형도 마시게?”

 “시늉만 하려고.”

 촥. 쏴아. 현호가 차오르는 맥주 거품을 빨아 넘기며 웃었다. 하얀 산타 수염이 남았다. 용범이 자신의 입술을 가리키는 시늉을 해도 닦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형 진짜 안 될까? 나 잘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정 못 미더우면 수습 기간이라고 생각하고 심부름만 시켜줘. 정말 나도 밖에 나가고 싶어. 이러다가 미칠지도 몰라. 정신병이 생겨서 머리가 펑 터질지도 모른다고.”

 현호가 활짝 여는 식의 폭발 제스처를 주먹으로 하며 말했다.

 용범이 입을 다문 채 건치를 훑어냈다.

 “그것보다 엘릭서 연구에나 매진하는 게 어때? 불로불사의 몸만 되면 넌 자유의 몸이야. 무슨 짓을 해도 죽지 않을 테니까 누가 너를 막을 수 있을까? 칼? 총? 아무것도 네겐 해가 되지 않아. 떨어져도 죽지 않고 태워도 살아 있어. 마치 신상품처럼. 반짝반짝 윤이 나는 새것처럼.”

 “반딱반딱.”

 “그래 반딱반딱.”

 “안 된다 이거지.”

 “현호야?”

 현호는 캔을 발치에 내려놓는 거 같더니 다시 집어 올렸다. 용범을 지나쳐 가면서 작별의 인사로 캔을 쳐들었다.

 그가 나가면서 말했다.

 “엘릭서가 완성되면 뭐부터 할까나.”

 현관이 닫혔다.

 용범은 웃는 상의 얼굴로 날숨을 내뱉었다.

 “정말 죽여 버리고 싶게 만드네.”

 

 용범이 낮잠에서 깬 시간은 오후 3시 무렵이었다. 환기를 시켜놓지 않은 채로 자서 그런지 머릿속에 물을 섞은 알콜을 넣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우유를 한 잔 마셨다. 50대 남자를 생각하자 차가웠던 피가 데워지는 기분이었다. 딱히 계획이라곤 없었다.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든 현장에 가면 지켜지지 않는 걸 아니까. 현장은 유동적이고 오차가 많으며 엄청난 변수를 가지고 있다. 더욱이 바보들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러 가는 게 아니지 않은가.

 50대 남자는 주말마다 호숫가에 있는 별장에 갔다. 혼자는 아니다. 부하로 두고 있는 정부를 데리고 간다. 이런 정보를 아느라 대단한 돈을 쓴 것도 정성도 들이지 않았다. 빌딩 주차장 앞에서 삼삼오오 모여 밥맛 떨어지게 담배를 피우고 있던 회사원들이 술술 쏟아낸 것이다. 자기네들끼리 모여 하는 게 뒷담화인 거 같았다. 꼬치를 단 놈들이 참으로 멋지다는 생각이었다. 이중적 의미다. 어쨌든 용범에겐 도움이 되었다.

 저녁 6시쯤 되었을 때 그는 차의 시동을 걸었다. 부르릉거리는 자동차 안에서 말없이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잔디밭과 길을 바라보았다. 그 앞으로 아이들이 달려오는 상상을 했다. 공을 쫓는 것이다. 익살스럽게도 엑셀을 밟아 아이들을 튀겨 버릴까 했다. 하지만 그는 실행에 옮기지 않고 상상의 힘이 약해지는 쪽을 택했다. 아이들이 공기 중에 사라지자 흐리멍텅했던 눈에 총기가 돌면서 살갗에 파묻혔다.

 “자, 간다.”

 자동차가 밤길에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딱 2시간 걸렸다. 호숫가에 도착하자 환하게 불 밝혀져 있는 별장이 보였다. 별장은 하나가 아니었다. 별장들은 일가의 마을과 같은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호숫가 때문인 거 같았다. 까만 호수 위에 떠 있는 달은 달빛의 환상이 만든 노란 철새들을 꼬리로 두고 있었다. 수면이 바람결에 넘실댈 때마다 샛노란 철새들의 대열이 조각났다.

 그의 차는 20분이 넘게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곳이 아닐까 하는 걱정은 오면서 했다. 기우였다는 건 도착해서 알았다. 멀리서 20대들의 요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상관은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낙인이 찍혀 있다면 달라진다.

 수집을 해서 요긴하게 써 줄 것이었다. 세상에 나와 유일하게 한몫하는 순간이 그런 때다. 그들에겐 평생을 바쳐도 갚지 못 할 은혜를 선사하는 것이다. 그들이 무교이든 유일 신앙을 가지고 있든 하나는 그가 약속해 줄 수 있었다. 죽고 나면 아주 평화롭고 행복한 곳에 가게 될 것이었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이로운 존재로서 스스로를 소진한 것이니까.

 그는 머리받이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뒷좌석은 모두 드러내고 시트를 깔아 놓았다. 아무리 낙인이 찍힌 죄인이라지만 최선을 다해주고 싶었다. 그들에게도 그럴 권리가 있었다. 천장에는 수갑을 채울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처벌도 필요한 법이니까. 이렇게 배려하고 대우를 해주는데도 불구하고 건방지게 나온다면 천장에 팔을 묶는다. 투덜대도 상관없었다. 커브 같은 건 그럴 경우에 주는 처방이다. 과속방지턱도 아주 좋은 교훈이 될 것이었다.

 용범은 조수석에 밑에 손을 넣었다. 비닐봉지에 든 것들이 죄다 쏟아져 있었다. 오면서 계속 신경 쓰였었다. 미리 배를 채울 생각이었다. 저녁은 이런 데서 먹어야 제격이다. 긴장을 푸는 데는 생리적 활동만 한 것이 없다. 잠도 좋고 섹스도 좋다. 똥을 누는 것도 좋다. 공통적으로 일을 끝내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그는 플라스틱 포장된 샌드위치를 무릎에 올리고 275ml 용량의 캔 뚜껑을 땄다.

 커피부터 한 모금 마셨다. 간단히 먹고 집에 가는 길에 뭐 좀 사갈 생각이었다. 지금은 닭이 좀 먹고 싶었다. 살짝 매운 양념이 된 거로. 뚝뚝 떨어지는 고추장 소스를 손가락과 입술에 잔뜩 묻히고 마구 씹고 싶었다. 마치 혀로 사탕을 핥듯 앞니로 살을 정성껏 발라내고 싶었다.

 꼬르륵. 그는 배를 보면서 피식했다. 포장을 벗긴 샌드위치는 속부터 확인했다. 식은 탓에 양배추 채가 얇은 종이처럼 되어 있었다. 피클, 베이컨, 햄. 제법 두툼한 속이었다. 그는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양념이 배어 나오면서 침에 섞였다. 씹고 있으니 또 베어 물고 싶어졌다.

 불이 꺼지길 기다릴 마음은 없었다. 10명분의 동물 마취제를 가지고 있었다. 방갈로 형태의 별장에 10명씩이나 있을 거 같진 않았다. 더욱이 아까 한 바퀴 돌아봐서 아는데 주차된 차는 한 대뿐이었다. 별장에는 두 명만 있는 걸 안다. 지금쯤 신의 파란색 알약의 힘을 빌린 노땅이 매끈한 피부를 가진 20대 여자를 죽어라 농락하고 있을 터였다.

 그는 다 먹은 것을 봉지에 넣고 둘둘 말아 손잡이를 묶었다. 차를 몰았다. 번호판은 진작 바꿨다. 미리 차 이곳저곳에 스티커를 붙여 놓았다. 떼기 쉽게 종이를 덧대서 말이다. 누가 보면 해충방제업체의 차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문득 용범은 현자의 돌에 관한 일화가 생각났다. 현자의 돌은 연금술사가 최대의 목표로 삼는 것이었다. 완전한 현자의 돌은 붉은 색을 띠는데 이를 소유한 자는 초월적 신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확실히 엘릭서보다 구미가 당긴다. 더욱이 현자의 돌은 완전한 물질이라고 일컫기 때문이다.

 현자의 돌 제조에 특히 열성이었던 건 고모 부부였다. 제조 과정에서 증류가 가장 중요한 단계로 여겨진다. 증류는 물질의 정기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증류는 1단계다. 승화나 결정화 등도 중요한 조작이라 여겨진다. 따지고 보면 안 중요한 게 어디 있겠는가. 증류로 시작해 용해…… 응집, 착색 등으로 10단계가 넘게 이어지는 과정에서 누가 지치지 않으랴. 게임 머니를 벌기 위해 아침부터 컴퓨터 앞에 앉는 폐인처럼 될 수밖에 없다.

 용범이 늘 놀라는 게 예상을 빗나가는 변칙성이다. 금슬로 알아주는 그들 부부는 무기력과 공허를 사랑으로 해소했다. 전혀 엇나감이 없는 행복한 부부였다. 지금은 그들도 엘릭서에 매달리고 있다. 엘릭서. 그걸 말하자면 어죽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사람을 간다. 죽이 되도록.

 차는 별장을 조금 지나쳐 멈췄다. 멀리서 보면 주위의 별장이 가깝게 느껴지지만 체감하면 완전히 내용이 다르다. 비명을 질러도 못 들을 정도였다. 그는 차에서 내려 뒷문을 열었다. 쑥 들어가서 잠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운동 가방의 지퍼를 열고 마취 총을 꺼냈다. 파이프를 이용해 직접 만든 것으로 4연발 총이었다. 이제야 라텍스 장갑을 낀다. 덧신과 위생모로 무장을 했다. 마스크는 덧신처럼 파란색 계열이었다. 옷만 하얀색이라면 방역을 하러 온 사람처럼 보일 터였다.

 차 밖으로 나온 그는 잠시 정적에 귀를 기울였다. 별장에는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당당하게 현관으로 향했다. 당연히 잠겨 있으리라 생각했다. 장난을 쳐서 열고 들어가면 그만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당기니 열린다. 생각지도 못한 일에 가볍게 웃음 짓는 용범이었다. 솔직히 긴장성 복통이 일었던 것이다. 쾌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실내는 매우 신경 쓴 티가 역력했다. 정확한 눈으로 말해서 노땅에게 어울렸다. 전체적으로 엔틱 소재이며 색감에서 정이 떨어졌다. 연한 갈색이 주를 이루는 실내에는 예상 가능하게도 짐승의 머리가 높은 곳에 장식되어 있었다. 또한 예상했지만 곰 가죽 같은 것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재수 없게 머리까지 달려 있었다. 진짜든 아니든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유리가 깔린 테이블에서 샴페인 병을 발견한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50대 아저씨 주제에 별짓을 다 한다 싶었다. 진심은 아니었지만 어디 벗어놓은 옷가지가 없나 눈여겨보았다. 없었다. 눈에 보이는 문은 4개였다. 하나씩 검토하면 될 거 같지만 하나씩 틀릴 때마다 귀찮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변기 물 내리는 소리라도 들리길 바랐지만 고요했다. 그러다 땡땡하고 울리는 괘종시계 소리에 그만 질겁했다. 그는 웃음이 그친 얼굴로 벽에 서 있는 근엄한 목제 시계를 보았다. 얼마나 나갈지 몰라도 해머를 가지고 와 박살 내놓고 싶었다. 쪼가리 하나쯤은 이쑤시개 대용으로 쓰면 될 것이었다.

 “그만 하래두…….”

 여자 목소리였다. 가까운 곳. 그는 눈만 굴렸다. 벽에 붙으려다 마음을 돌렸다. 문과 벽이 가까워지는 방향, 즉 경첩이 붙은 쪽에 숨어야 했다.

 “아, 정말!”

 목소리의 위치가 바뀌었다. 아마도 밖에 나오려다 남자에게 잡힌 모양이었다. 백허그 자세로 쫄쫄 따라다니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선해서 용범은 혐오감이 샘솟았다. 그는 조금은 느긋해진 기분으로 숨기로 한쪽 벽에서 보다 멀찍이 붙어 섰다. 문틈을 통해 정체가 발각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문을 확 열고 들어가 카우보이 흉내라도 내는 게 좋을까 고민해 보았다.

 혀가 굵직한 앞니를 긁자 윗입술이 볼록 솟아올랐다. 그는 양쪽 어금니까지 혀로 후볐다. 뒤쪽에서 씹다만 베이컨 조각을 발견하고 오물거리며 삼켰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문제였다.

 거실 불은 끄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아까부터 창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누가 엿본다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만일이라는 건 어딜 가나 존재한다. 아무도 몰라야 할 암수범죄라도 목격자는 항상 있다. 필요할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단물이 빠지고 나면 등장하는 눈치 없는 족속들.

 상황에 익숙해진 만큼 그는 여유로웠다. 자신을 재촉하지도 않고 느긋하게 가서 거실 스위치를 내렸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는 데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어둠 속의 사물들이 서서히 자기 자리로 몸을 옮겼다. 그는 허전한 손으로 마취 총의 짤막한 총신을 만지며 걸어갔다. 이렇게 있으니 소음기를 단 콜트권총을 든 암살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문득 교향곡이 듣고 싶었다. 아는 건 비발디나 베토벤의 흔하디흔한 한두 곡 정도였다. 왜 영화의 킬러들이 교향곡을 듣고 있는지 알 거 같았다. 숭고한 일을 하려면 고전 음악이 필요했다. 교양을 찾는 사람들은 옛날 것을 좋아한다. 소설보다는 시를 팝송보다는 재즈를 찾는다. 왜 그런 선택의 결과가 나왔는지는 그가 잘 안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혀로 윗니를 긁어내렸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결계가 명확한 것들이 들쑥날쑥했다. 매끈한 에나멜질과 우둘투둘한 치석의 조화. 미뢰는 그 맛을 본다. 어둠 속에 서 있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서서 잠에 빠질 수도 있을 정도로. 시름도 없고 끼어드는 방해꾼도 없었다. 실로 암흑에선 손에 잡히는 것도 없을 터였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서 힘을 뺐다. 만약 잠겨 있으면? 이런 게 묘미였다. 잊고 있었다. 이런 것 때문에 현호 같은 녀석을 달고 다니면 안 되는 것이다. 얼핏 조심만 하면 되는 사사로운 일 같지만, 단순한 실수가 자아내는 경이는 참혹하다. 제대로 된 조직이었으면 머리통에 구멍을 뚫을 수밖에 없다.

 ‘우린 가족이잖아?’ 그는 마치 현호가 눈앞에서 실수라도 저질렀다는 듯이, 생각했다. 현호는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린다는 말도 현호 같은 얼간이 때문에 세상에 나온 게 틀림이 없었다. 그냥 따먹기만 하면 되는 여자를 괜히 들쑤셔서 자존심 때문이라도 가버리게 하는 인간. 재밌어서 자기도 뭐든 하고 싶어 남이 다 속여 놓은 걸, 눈치를 줘서 망쳐 놓는 인간. 현호는 그런 녀석이었다.

 아직 한 번도 패밀리 중에선 낙인이 나온 적이 없었다. 솔직히 나오지 말란 법도 없었다. 어느 종교는 이단으로 골치를 썩는 법이므로. 낙인은 하늘이 부여한다. 세상 모두를 속여도 하늘을 속일 수 없는 법이므로 그들 중에서도 죄인이 나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용범은 현호가 되길 바랐다. 사촌 형제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가장 최근에 귀찮게 군 이유 탓이었다. 달리 대단한 이유가 뭐 필요하겠는가.

 그러고 보면 큰삼촌도 좋을 거 같았다. 54살이라면 아직 살날이 많다. 하지만 52살과 비교하면 2살을 더 먹었고 49살과 비교하면 5년을 더 살았다. 용범의 부모님은 큰삼촌의 차가 먹어 치웠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용범은 기묘하리만치 평온한 감정을 느꼈다. 더욱이 납치를 목적으로 남의 영역에 침범한 상태인데도.

 순간 그는 팔자 모양의 눈썹을 세웠다.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긴장을 풀고 있었던 까닭으로 일을 그르칠 뻔도 했다. 그러나 그는 마취 총을 제대로 들었다.

 “밖에 불 껐었나?”

 여자가 말했다.

 그녀의 앞발이 문과 벽 사이에 있었다. 어떤 색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매니큐어를 바른.

 “불이 꺼졌어?”

 방 안에서 50대 남자가 말했다.

 남자가 징글맞은 눈웃음을 짓고 있을 거라고 용범은 생각했다. 목소리만 해도 웃음기가 엿보였다. 얼마나 즐거울까. 젊은 여자와 하루 종일 몸을 섞고 논다는 건. 몸만 따라준다면 하루 종일 그녀의 사타구니에 성기를 삽입한 상태로 지낼 것이었다. 밥을 먹을 때도. 전화를 할 때도. 어딘가로 이동할 때도. 방갈로 밖에서도. 재밌는 인간이라서 운전도 그런 식으로 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모를 거라는 생각으로. 신나는 여상 상위. 여성 상위 시대. 여성 해방 운동. 여자들의 궐기. 그래서 방아를 찧는다네.

 “껐었나……?”

 그녀가 문틈으로 밖을 엿보는 채로 말했다.

 의심 많은 여자였다. 용범은 목구멍까지 고이는 침을 간신히 물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들어가면 어쩌나 싶으면서도 따라 들어가면 되지 하는 생각을 했다. 170쯤으로 보이는 키에 마른 체형.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똑 부러지고 건조한 음성으로 보건대 말상일 듯했다. 저런 부류는 대개 아저씨 스타일을 좋아한다. 물론 방 안의 쫀쫀한 50대 남자를 말하는 건 아니다.

 문득 용범은 저 여자를 상대로 50대 남자가 쓴 돈이 얼마일지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순전히 사랑 때문일지도 몰랐다. 불장난 같은 거 말이다. 남자는 그런 마음일 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50대 남자는 회사의 사령관. 저 징그럽게 웃는 몰골을 멋지게 본다고 해서 어디 잘못되었냐고 마냥 여자를 탓할 수만은 없다.

 여자가 옷을 벗듯 문에서 나왔다. 바닥을 적시는 형광등 빛이 커졌다. 그녀는 실크로 된 홀복을 입고 있었다. 형광등 불빛에 야릇하게 번져대는 직조물. 엉덩이의 굴곡을 따라 움직이는 주름의 맥동. 그는 마취 총을 들었다. 그녀의 목을 노렸다. 뭔가를 느꼈는지 그녀가 뒤돌아본다. 이미 바늘을 단 묽은 액이 그녀의 목에 착지했다. 놀란 두 눈. 그녀는 역시 말상에 아저씨를 좋아할 상이었다.

 “경혜야 왜 그래?”

 50대 남자가 말했다.

 그 이유를 용범이 말해줄 생각이었다. 문을 더 열고 등장했다. 슬쩍 보니 여자의 눈이 풀려 있었다. 눈이 움직이지만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위치였다. 입에서 침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웃는 얼굴을 못 보여 주는 게 섭섭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봐도 그녀의 얼굴엔 낙인이 없었으니.

 “너 누구야? 야?”

 50대 남자가 침대에서 반쯤 나온 자세로 말했다. 뛰어나갈 수도 이불 속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있는 어정쩡한 자세. 둥근 어깨, 얼굴의 살집, 힘 좀 쓸 거 같은 가슴, 무덤 같지만 아기라도 있는 듯 단단한 배.

 “우선 소개하지. 나는 김용범이라고 해. 너를 심판대에 올릴 심판관이라고 할 수 있지. 간단히 말해서 그렇다는 거야. 주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어. 너는 죄인이고. 그러니까 죄인들의 주인. 노예상이라고 해도 좋겠군. 뭐든 좋아. 그래, 이런 거지. 너를 잡아다 갈 거야. 승합차에 실어서, 한 몇 시간 걸려.”

 “강도야 뭐야? 그거 총이야? 수제 총? 왜 이래, 이거?”

 “날뛰는 짐승을 잡을 때 쓰는 총이지. 직접 만들긴 했는데, 여잔 어쩔 수 없잖아? 나는 정의를 집행하는 존재라고. 여자는 아무 죄가 없는걸? 하지만 넌 다르지. 눈 밑에 있는 낙인만 봐도 말이야.”

 “뭐?”

 50대 남자가 두툼한 손으로 자신의 눈 밑을 만져댔다. 비글처럼 눈 밑 살갗이 늘어지자 자연 드러나는 핏대 선 눈알이 흉했다.

 “그나저나 밤꽃 냄새가 진동하는데? 비위도 좋은 여자라니까. 더 어렸을 땐 이런 냄새에 헛구역질을 했겠지. 잘도 버티는군. 저건 초밥 아니야?”

 용범이 벽에 붙어 있는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먹다 남은 새우, 문어 초밥이 보였다.

 “신경 꺼! 그보단 원하는 게 뭐야?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혹시 마누라가……?”

 50대 남자는 간을 보고 있었다.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포장을 하고 있는 놈한테 신세 한탄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마누라 몰래 빠구리 좀 했다고 뒤진다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고. 어쩌면 또라이 살인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요즘 뉴스를 안 보고 살아서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미친놈이 주위에 있다면 분명 들리는 소문이 있었을 것이다.

 “능글맞게 웃어 봐.”

 용범이 마취 총을 흡사 제임스본드처럼 가슴팍에서 쳐든 채 말했다.

 50대 남자는 다소 편안하게 침대에 몸을 의지했다. 오른쪽 종아리에서 쥐가 오는 듯했지만 착각이었다. 그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뭔가를 집어던질 게 있으면 좋으련만.

 “뭐라고?”

 “당신 하면 생각나는 게 능글맞은 눈웃음이거든. 그렇게 밥맛이 떨어질 수가 없더라고. 이참에 사업적인 느낌으로 한 번 제대로 감상하고 싶어서.”

 “너 정신병 있냐?”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건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다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무슨 소리야? 대체…… 돈 때문이야? 돈을 원해? 번지수가 틀렸어. 너 취업은 했냐? 사회생활은 제대로 해봤어? 명색만 오너지 껍데기뿐인 인간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회계 사무실 대표란 것도 허울 좋은 소리고 나 임대아파트 살아. 그래, 외제차를 끌고 다니긴 하지. 마누라 소유의 건물도 있고! 그 내역을 알면 네가 씨발……!”

 “어딜 가든 나만 보면 인상이 좋다고 하더군. 특별히 잘생긴 것도 아닌데 다들 나를 좋아해. 잘생길 수가 없지. 이렇게 큰 머리통에! 기분 나쁘게 웃기가 내 특기인데 사람들 눈에 그렇지 않나 봐. 그래서 나도 눈웃음을 장점으로 생각하고 있지. 그런데 말이야 지금 당신은 나를 정신병자로 생각해. 아마 다른 때 다른 장소였다면 나를 기가 막히게 마음에 들어 했을 거 같은데? 아니어도 상관은 없고. 당신 따위.”

 “그만 가줘. 부탁이야. 실수를 할 수도 있지 안 그래? 어이, 조용히 끝내자고. 이제 그만하고, 응?”

 50대 남자가 말하자 용범은 두 팔을 열었다. 회색 작업복. 덧신. 장갑. 모자. 마스크. 컬트 무비에서나 나올 법한 미친 수술실의 사이코 의사. 가끔은 손에 든 마취 주사만으로 간편하게 환자들을 보내 버린다네.

 “인상은 뭐 인상이야! 좆대가리 같은 거 다 가리고 왔으면서 인상은 뭔 이상이야? 이 겁쟁이 새끼야!”

 용범이 상대의 열렬한 태도에 고개를 끄덕이며 총구를 겨눴다.

 “하 씨발, 대가리 존나 크네.”

 50대 남자가 흐느끼며 말했다.

 그의 눈 밑 낙인이 향기를 내는 듯했다. 용범은 내일을 생각하자 설렜다. 저 폐기물은 새 주인을 잘 만나서 제 값어치를 낼 것이었다. 본인은 죽었다 깨도 알아차리지 못할 순기능들을 용범은 모조리 알고 있었다. 성공할 수도 실패 할 수도 있다. 물론 저울질할 수 없을 정도로 실패의 확률이 컸다.

 “그만 끝내자.”

 용범이 말했다.

 방아쇠가 당겨지고 마취액을 주사하는 바늘이 담배와 술에 찌들어 사는 살덩이에 박혔다. 연이어 하나가 더 날아가 어깨에 꽂힌다. 마지막 건 왼쪽 볼에 들어갔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31 31. 고백 (완결) 2020 / 9 / 2 224 0 7099   
30 30. 여자 2020 / 9 / 1 235 0 7209   
29 29. 독사 2020 / 9 / 1 240 0 8758   
28 28. 추적 2020 / 8 / 31 237 0 7160   
27 27. 인간 2020 / 8 / 31 247 0 6971   
26 26. 도시 2020 / 8 / 30 242 0 7884   
25 25. 달콤한 일상 2020 / 8 / 30 245 0 8118   
24 24. 왕 2020 / 8 / 29 259 0 7748   
23 23. 황혼 2020 / 8 / 29 240 0 7659   
22 22. 가정 방문 2020 / 8 / 28 235 0 6186   
21 21. 가족회의 2020 / 8 / 28 247 0 8543   
20 20. 3인조 2020 / 8 / 27 245 0 6428   
19 19. X교 2020 / 8 / 27 245 0 7727   
18 18. 가족 2020 / 8 / 26 251 0 7125   
17 17. 친구 2020 / 8 / 26 244 0 5975   
16 16. 즐거운 방문 2020 / 8 / 25 247 0 7477   
15 15. 살인 2020 / 8 / 25 240 0 8804   
14 14. 기분 나쁜 눈웃음 2020 / 8 / 24 244 0 10989   
13 13. 과거 2020 / 8 / 24 234 0 4806   
12 12. 만남 2020 / 8 / 23 244 0 6403   
11 11. 눈 2020 / 8 / 23 236 0 11430   
10 10. 여자 2020 / 8 / 22 238 0 13119   
9 9. 족쇄 2020 / 8 / 22 241 0 8803   
8 8. 감미로움 2020 / 8 / 21 252 0 7336   
7 7. 살인범 2020 / 8 / 21 241 0 6946   
6 6. 호문쿨루스 2020 / 8 / 20 239 0 10261   
5 5. 3인방 2020 / 8 / 20 240 0 10430   
4 4. 수집 2020 / 8 / 19 239 0 11997   
3 3. 거식증 2020 / 8 / 19 235 0 7050   
2 2. 가문 2020 / 8 / 18 231 0 7603   
 1  2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