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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작가 : 장연화
작품등록일 : 2020.8.15

살기 위해선 식인종까지 되야만 하는 세상. 타국을 집어 삼키고 민중의 피를 들이키는 제국에서, 백정으로 살아가는 청년과 독립을 바라는 홍등가의 공주가 멈춰버린 시대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1.
작성일 : 20-08-15 21:45     조회 : 381     추천 : 0     분량 : 9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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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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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직도 그날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귀가 먹먹해질 만큼 울린 총성과 비명, 피부를 무겁게 훑고 지나가는 열기, 횟가루와 땀, 화약내 따위가 섞인 탓에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지독한 공기.

 

  그리고 뜨거운 핏물까지.

 

  “미안해.”

 

  그때, 나는 그녀의 자그마한 목소리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죽지 마.”

 

  그리고 나는 이를 악문 채 그렇게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보단 더, 길 줄 알았는데… 명줄 참 짧다, 그치?”

 

  “그러지 마.”

 

  “미안, 해. 난,”

 

  “죽지 말라고!”

 

  점점 끊겨가면서도 평소처럼 웃어보려 애쓰는 그 목소리에 나는 피 끓는 절규를 토해냈다. 눈가가 불타는 것 같았다. 눈물로 젖어 시선이 번진 탓에 나는 그녀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내게, 세 손가락 밖에 남지 않은 오른손을 뻗어 이를 닦아 내줬다. 얼굴에 맞닿은 손끝은 이미 한계라는 듯 떨리고 있었다.

 

  “아실, 제발. 약속했잖아. 언젠간 꼭 세상을 보여주겠다고, 이 땅 전역을 함께 돌아보자고….”

 

  아실은 그저 힘없이 웃어 보였다.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빼앗긴 사람이었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수많은 책임을 진 사람이었다. 속국으로 전락한 조국을 되찾을 책임, 자신의 민족을 도와야 할 책임. 그러면서도 제국 아래에 복종해야 할 책임까지.

 

  “그래, 그랬…지. ”

 

  그런데도 그녀는 내게 이미 많은 걸 보여주었다.

 

  “거짓말하는 게 제일 싫었는데, 그렇게 되게 생겼네.”

 

  실없이 뇌까리던 아실은 눈가를 닦아내던 손을 내려 내 손을 맞잡아주었다. 검붉고 질척한 피가 손바닥에 감겼다.

 

  “정아, 이런 말하기엔, 너무… 늦은… 건, 지… 모르겠는데…”

 

 급격히 토막나며 잘게 찢어지는 말을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입가에 귀를 대가면서 마지막 한 자도 놓치지 않으려 발악했다. 내가 들을 수 있는 건 세 마디 뿐이었다.

 

  이제, 사람으로, 살.

 

  맺지도 못한 채 목소리는 끊어졌다. 그리고 아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잔인하게도 머리로는 납득했다. 비록 지혈을 했다지만 왼팔은 이미 끊어진 지 오래였다. 그 상태에서 등판에 한 발, 어깻죽지에 한 발,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날려버린 한 발, 그리고 가슴팍을 뚫은 두 발까지. 도합 다섯 발의 탄환이 아실의 몸을 꿰뚫었다. 지금껏 숨이 붙어있는 것 자체가 이미 기적이었다.

 

  가슴으론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무릎 꿇은 그대로 잠든 아실을 바라봤다. 너무나도 편안하게 잠들어버린 그녀의 모습을. 당장이라도 이름을 부르면 깨어날 것 같았다.

 

  입을 열었다. 그러나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전장으로 변한 도시에 드디어 적막이 찾아왔다. 지옥 같던 하루가 드디어 끝났다. 고작 하루 밖에 지나지 않은 사실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저 멀리서 생존자를 찾는 조명탄이 검푸르게 변해가는 하늘을 적셨다. 그래,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지원을 애타게 부르며 골목에 숨어 기댄 부상병도, 곳곳에서 타오르던 화마와 연기도, 쓰레기 마냥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사체도 전부 검은 장막에 파묻히고 있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지옥에서 벗어났을지언정, 악몽에서 빠져나갈 순 없으리란 걸.’

 

 

 

 

  아려오는 머릴 싸쥐면서 피터 모나한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잠시 선잠에 든 것 같았다. 과거의 기억은 잠에 들 때마다 되풀이되었고, 그때마다 그는 꼼짝없이 몸서리쳐야만 했다.

 

  피로로 머릴 휘젓길 잠시, 철문의 문고리가 돌아가며 음울한 소리를 퍼트렀다. 피터는 짜증 섞인 시선으로 그쪽을 쳐다봤다.

 

  “꺼져.”

 

  취조실이 열리자마자 말을 씹어뱉었다. 감청색 제복을 입은 남자는 그 폭언을 무시한 채 피터의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표정이 깎여나간 것처럼 낯빛은 조금도 변치 않았다.

 

  “사람 말 골라듣는 건 여전한걸, 아이작.”

 

  “…상해에 폭행, 가택 침입, 강도, 불법 무기 소지… 진즉 안 잡힌 게 신기할 지경이군.”

 

  “알아, 내가 좀 많이 험악해서. 그래서 백정이라 부르고 다니잖아. 짐승 새끼 도살하듯 인간말종들 패고 다녀서.”

 

  아이작은 대꾸하지 않았다. 수갑에서 나는 지독한 쇠비린내가 취조실에 자욱했다.

 

  들으라는 듯 일부러 짤깍이는 소릴 내가며, 피터는 죄수복의 앞섶을 쥐고 한 차례 자기 얼굴을 닦았다.

 

  “하지만,”

 

  그 소리 또한 무시하면서, 아이작은 마저 입을 열었다.

 

  “제국은 네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이런 파격적인 특사는 전례없는 일이란 걸 너도 잘 알고 있겠지.”

 

  대답 대신 피터는 메마른 조소를 지었다. 어련하시겠어, 무작정 감옥에 집어넣기엔 곤란한 구석이 많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그 앞에, 아이작은 검은 바탕의 서신을 한 장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즉시 피터의 표정에서 조소가 사라졌다.

 

  “…해당 임무를 처리하는 조건으로 말이다.”

 

  “지랄하지 마.”

 

  아무렇게나 자란 산발 사이로 핏발 돋은 눈알이 번뜩였다.

 

  “고작 아이 한 명을 정해진 장소까지 데리고 오면 끝나는 일이다. 크게 어려울 것도 없지. 자세한 사항은 기획안에 적혀 있으니 참고하-.”

 

  우악스러운 손아귀, 그의 목을 조를 것처럼 피터는 아이작의 멱살을 악쥐어 당겼다. 의자가 넘어지고, 악물린 잇사이에서 으득대는 소리가 새나왔다.

 

  가까스로, 정말 가까스로, 피터는 아직도 표정 없는 그 얼굴에다 대고 일갈했다.

 

  “개소리 집어치워, 아이작.”

 

  “왜 이러는지는 이해한다. 하지만 때로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는 법이지.”

 

  “그렇다고 다시 제국 아래에 까는 개새끼로 살라고? 대가리가 있으면 알 거 아냐. 들을 만한 정신머리였담 애당초 이 감방까지 굴러 떨어지진 않았겠지.”

 

  “아직도 1년 전 그 사건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건가?”

 

  아이작의 말에 피터는 순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흘러가는 플래시백, 아직도 그녀의, 아실의 시체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피터는 문득 오른손을 펼쳐보았다. 여전히 그때 그 질척한 핏물이 묻어있는 것만 같았다.

 

  아이작은 천천히, 자신의 멱살을 쥔 피터의 남은 왼손마저 잡아 떼어내며 말했다.

 

  “그렇다면 유감을 표하지. 당연히 잊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애당초 극복할 수 있었다면 네가 집행관 자릴 내려놓지도 않았을테지.”

 

  잠시, 아주 조금이지만 아이작의 목소리가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의금청에서 내려온 명령이고, 난 그저 이 사실을 알리려 온 전령일 뿐이다. 내 선에서 하라 마라를 정할 수 있는 게 아냐.”

 

  “…고작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사실만 전달하는 일이라면 다른 사람에게도 얼마든지 시킬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널 ‘납득하게 할’ 사람이 필요했다더군.”

 

  비척, 비척, 힘없이 뒷걸음질치던 피터는 이내 취조실 벽에 기댄 채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짧게 욕지거리를 뇌까렸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옛 동료가 이런 꼴이 된 걸 직접 보니 썩 유쾌하진 않다.”

 

  “넌 언제나 그렇게 말하면서 정작 눈 하나 깜빡 않더라.”

 

  아이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들어왔던 때와 같이 취조실 문을 열어 나갔다.

 

  “누구나 언젠간 무시하고 있던 현실과 마주해야 때가 오는 법이다.”

 

  그가 남기고 간 말에, 피터는 비릿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현실이라.

 

 

  아직도 난 꿈속에 갇힌 것 같은데.

 

 

 ——

 

 

  배를 타는 내내 이보다 더 끔찍할 순 없겠단 생각이 피터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는 원래부터 증기선을 싫어했다. 잠을 자면 두통과 악몽이, 깨어있으면 멀미가 찾아왔다.

 

  “괜찮으신가요?”

 

  지척에서 들린 앳된 목소리에 그는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사그라드는 연기, 그리고 하얀 머리칼이 복슬복슬한 여자아이가 자신에게서 왼손을 거두는 모습이었다. 녹빛으로 돋은 핏줄이 정상적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피터는 인상을 찌푸린 채 핀잔을 줬다.

 

  “생도 아씨, 마법을 쓸 수 있느냐와 별개로, 이런 데에다 함부로 쓰는 건 아니야.“

 

  “꼬박 한 시간 동안 계속 앓으셨어요. 그냥 두려고 해도 그만큼이나 끙끙대시면 신경 안 쓰일 수가 없다고요.”

 

  또랑또랑한 말씨가 듣기 거북했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학생복에 아직 생기 있는 눈동자도 마주보기 힘들었다. 피터는 살짝 시선을 비껴 뜬 채 대꾸했다.

 

  “…뱃길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괜히 신경 쓴 거야.”

 

  짜증을 최대한 숨기고서 그는 생각했다. 아이작이 내민 서신에는 단 두 문장만 적혀있었다.

 

 ‘아이를 데려오면 사면시켜주겠다.’

 ‘고도(옛 도읍)에 가서 안내자를 기다릴 것.’

 

  이렇게. 피터는 답답함에 시선을 창가로 옮겼다. 검은 종이를 쓴 서신은 제국이 비밀스럽게 처리해야 할 일을 상징하는 표식이었다. 보안을 위한다 해도, 그는 이 상황 자체가 달갑지 않았다.

 

  새벽이 차츰 가시고 있었다. 피로에 찌들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짙푸른 유리창에 비친 몰골은 감옥에 갇혀 있을 때보단 사람다워져 있었다.

 

  너저분히 자란 흑발을 뒷목 언저리에 한데 묶고선 그 위에 정모를 얹었고, 잿빛 죄수복 대신 정장을 제대로 차려입었다. 거추장스러운 탓에 자켓은 벗어버렸지만, 셔츠 가터에 커프링크스까지 찬 행색은 퍽 괜찮아 보였다.

 

  그럼에도 노려보는 눈매가 몸에 밴 탓에 인상은 더없이 험악했다.

 

  그의 심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맞은편에 앉은 여자아이는 더 말을 걸어왔다.

 

  “군적에 이름 올리신 분이 어연 일로 먼길 오르시게 되셨어요?”

 

  심드렁하던 표정이 한순간 무너질 뻔했다. 도대체 이 꼬마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아는 거지?

 

  “모자에 있는 계급장을 보고 알았어요. 2등육위 되신 분이니, 휴갓길이신 건가요?”

 

  이어지는 말에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왠지 모를 무안함에 피터는 괜히 정모를 푹 눌러썼다.

 

  “전역한지 오래야. 지금은… 일거리나 구하러 가는 거고."

 

  살짝 상대방을 곁눈질하던 그는 “그러면” 하고 운을 뗐다.

 

  “백화각의 생도께선, 역시 학교로 돌아가는 길인가?”

 

  “어, 학교 이름까지 맞추실 줄은 몰랐는데.”

 

  “그 하얀 외투만 봐도 뻔하지. 아직 2월 초인데, 이르게 움직이는걸.”

 

  정작 생도복과 달리, 흰 백 자가 아닌 일백 백 자를 써 '백 송이의 꽃을 피워내는 집'이란 뜻의 백화각은 알레아 제국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아곤 독립공국을 흡수한지도 어연 30여 년, 제국주의를 미는 의회의 기세도 조금은 꺾였고, 국가 재정은 내실을 다지는데 좀 더 쓰여지게 되었다.

 

  특히, 마법 체계와 상반된 기계과학을 발전시킨 서방국가연합에 밀리지 않기 위해서도 인재를 양성하는데 힘을 써야했고, 그 결과 백화각은 제국을 대표하는 교육기관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집안에선 학식을 쌓는 것만큼 실무 면에서 여러 경험을 해보는 게 중요하다 하거든요. 비록 아버님 지인 쪽 회사지만, 잠정적으로 수습 사원으로 일하게 되었답니다. 뭐어, 면접 보러 가는 거죠."

 

  챙 너머로 비딱하게 보는 피터의 시선을 마주하면서도, 맞은편의 여자아이는 서글서글하게 대했다. 그는 그것이 불편했다.

 

  방금 전부터 드는,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도 그랬지만, 어린아이를 보는 것 자체가 피터에게 있어선 거부감이 드는 일이었다.

 

  “보기보다 의젓하네.”

 

  “별 것 아녜요.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마음에도 없는 말을 흘리던 중, 창밖을 흘겨보던 피터는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일렁이는 파도 때문에 깨닫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방금 전부터 배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머릿속에 의문이 드는 그 순간, 새벽의 정적을 깨는 날카로운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비명과 고함, 그리고 발소리 따위가 들렸다.

 

  “…방금 그 총소리, 위층에서 들린 것 아녜요?”

 

  맞은편 여자아이는 총성의 여운이 가시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배는 화물과 승객을 동시에 수송하는 화객선이었다.

 

  그 중에서도 화물칸 일부를 개조해 선실로 만들어, 열차칸의 등급을 나누듯 일등석에서 삼등석까지 층별로 나눴다.

 

  이 둘이 있는 곳은 삼등석, 그러니까 화물칸과 같은 층을 쓰는 곳이었다.

 

  피터는 천천히 선실 문을 열고 주위를 살폈다. 그때를 노린 듯 두 번째 총성이 계단맡에서 터져나왔다. 곳곳에서 들리던 비명이 그와 함께 멈췄다.

 

  ‘선상반란인가?’

 

  총성의 진원지가 위층인 게 분명해진 상황에서 피터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생각했다.

 

  그는 처음 떠오른 가능성을 부정했다. 군함이나 원양어선이라면 몰라도, 정해진 항로를 왕복할 뿐인 여객선에서 반란을 일으킬 이유는 사실상 없다시피 하니까. 그렇다면….

 

  총을 쏜 장본인으로 추정되는 자가 무어라 고함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우렁우렁대는 소리 중 몇 번이고 반복하여 강조하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독립군’.

 

  그 순간, 가만히 있던 하얀 머리 여자아이가 피터를 스쳐지나가며 서둘러 계단으로 향했다.

 

  “잠…!”

 

  알 수 없는 돌발행동에 말릴 새도 없었다. 살짝 옆에서 본 소녀의 표정은 방금까지 싹싹하던 태도와는 상반된, 표정이란 게 전부 깎여나간 모습이었다.

 

  무슨 생각인진 알 수 없었지만, 만약 진짜 독립군이었다면 전략적으로 별 가치가 없는 한낱 여객선 따윌 노리진 않았으리라.

 

  누구 하나 피 보는 일이 아닌 이상 간섭할 생각은 없었는데. 피터는 피로감 섞인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 하얀 머리 여자아이를 따라 쫓아갔다.

 

 ——

 

  시작에는 빙하기가 있었다.

 

  제국 남부에서 시작된, 마소(魔素)로 이뤄진 폭풍. 햇빛 한 점 투과하지 못하는, 그 장벽 같은 회오리 무리들은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북진해오고 있었다.

 

  영토가 줄어드는 전대미문의 재난에, 줄어든 일조량으로 인한 기근. 제국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북진뿐이었다. 그 결과, 지중해를 끼고 바로 위에 존재한 아곤 독립공국은 제국이 집어삼킨 첫 번째 희생양이 되었다.

 

  “한 번만 더 말한다. 우린 아곤의 독립을 위해 일어선 독립투사다!”

 

  소총을 든 사내는 겁에 질린 사람들을 두고 윽박질렀다. 지금도 복도를 돌아다니는 부하들이 선실에 숨어있는 이들을 끌어냈다.

 

  “엎드려 기는 것밖에 모르는 너희 쓰레기들이, 저 잘난 제국놈들에게 빌붙는 동안 우린 피땀흘려 싸우고 있다 이 말이지.”

 

  사내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무리 노략질을 해도, 제국은 ‘독립군’ 석 자 앞에선 함정일지 모른다며 우물쭈물했다. 독립투사 행세만 해도 잡힐 걱정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 쓰레기들아, 너희가 싸우진 못할 망정 밑천은 대줘야 하지 않겠냐?”

 

  사내의 턱짓을 신호로 부하들은 승객들의 짐을 이리 저리 쑤셔댔다. 곳곳에서 애원과 고함 소리가 터져나왔다. 몇 안 되는 제물을 뺏기지 않으려 애쓰던 이들도 발길질과 총부리 앞에선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수 자체는 많지 않아. 하지만 어떻게 하면 좋지.’

 

  계단 맡 화장실에 숨어 이를 지켜보던 하얀 머리 소녀, 크리스는 조용히 상황을 셈했다. 그 순간,

 

  “이봐, 아가씨. 거기 숨어 있음 봐줄 줄 알았나?”

 

  드리우는 그림자가 크리스를 덮쳐 들었다. 총 든 사내의 패거리로 보이는 남자가 우악스레 그녀의 옷깃을 잡더니 그대로 끌어내려 했다. 그러나,

 

  오도독.

 

 뼈가 꺾이는 것 같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크리스는 역으로 품 안으로 파고들더니, 그의 안면에 손바닥을 가져다대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남자가 당황하던 순간,

 

  “아니.”

 

  짤막히 답하는 것과 함께, 녹색으로 빛나는 혈관이 도드라진 그녀의 손에 빨판이 자라났다. 급격히 공기를 빨아들이는 그것에 숨을 빼앗긴 남자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이, 이쪽도 마법사가 있었…!”

 

  그 말을 끝으로 기절한 남자를 치워버리고, 크리스는 상황을 어떻게 타계할지를 고민했다.

 

  대기 중에 있는 마소라는 물질을 원천으로 특정 현상을 일으키는 기술. 마법은 기계혁명을 일으킨 서방국가연합을 제국이 견제할 수 있는 원천이었다.

 

  “눈에 보이는 건 최소 셋. 방금 쓰러뜨린 하나까지 넷. 어떻게 하지.”

 

  크리스는 지금도 약탈에 열중하는 강도들을 보며 수를 강구했다. 마법의 발동에는 종류마다 별도의 술식이 미리 준비되어야 했다.

 

 언제든 쓸 수 있도록 몇 개는 신체에 각인할 수 있지만, 그를 셈해도 방금 같은 요행이 다시 일어나야 했다. 총을 가지고 있는 이상 머릿수의 차이는 극복하기 어려웠다.

 

  빨판이 지워진 손에 뒤늦게 땀이 쥐어지고, 크리스는 저들을 한 번에 제압할 수 있는 타이밍을 기다리며 초조해했다. 그게 문제였다.

 

  “지금이다!”

 

  말한 건 크리스가 아니었다. 황급히 복도 쪽을 돌아보려던 그녀는 개머리판에 얻어맞고 쓰러졌다. 순간 시야가 뒤집혔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충격에 구역질을 느끼며, 크리스는 신음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고통스러워했다. 낭패였다. 한 명이 더 있을 줄은….

 

  “왜 안 오고 있나 했네. 등신 같은 놈, 계집애 하나한테 뻗다니.”

 

  방금 제압한 남자의 동료로 보이는 자가 투덜댔다. 팔뚝까지 파란 핏줄이 꿈틀대는 걸 보아, 기습이 막혀도 바로 마법을 쓸 수 있게 준비한 것 같았다. 그는 크리스를 유심히 살피더니,

 

  “뭐야, 백화각 생도 양반 아냐? 얼굴은 반반한데 아주 정신이 나가셨구만 그래.”

 

  총부리로 툭툭 치며, 강도는 욕정 섞인 비웃음을 지었다. 머리를 너무 강하게 맞은 탓인지 아직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는 크리스의 머리맡에 쭈그려 앉더니 머리칼을 쥐어 올리며 말했다.

 

  “보아하니 공부 좀 한 모양인데… 그 정도 믿고 설쳐봐야 명줄만 짧게 만들 뿐이지. 안 그래?”

 

  “아니.”

 

  그때 다른 목소리가 더해졌다. 강도의 얼굴이 굳는 순간, 그의 뒤통수에 군홧발이 작렬했다. 화장실 벽면으로 굴러가다시피한 그 앞에, 피터 모나한이 서 있었다.

 

  “시팔, 뭐야! 구, 군인가? 뭐하는 놈이냐고!”

 

  당황한 듯 악을 쓰는 남자. 하지만 혼란스런 머리와 다르게 몸은 본능적으로 반응했는지, 곧바로 핏줄 돋은 팔을 내지른다.

 

 이상하게도 남자는 곧이어 자신의 손바닥을 쳐다보게 되었다. 팔이 낚싯대에 걸린 것처럼 급격하게 꺾인 것을 느꼈다. 피터는 오른손으로 그의 손목을 악쥐곤, 제 손바닥과 인사하도록 거꾸로 뒤틀었다. 뒤늦게 고통이 밀려오는 순간, 손끝에서 게워나온 화염에 남자는 자기 머릴 태우는 꼴이 되었다.

 

  피터는 모양새만 보면 자살한 남자를 두고 떨어진 소총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생각난 듯 자길 멍하니 쳐다보는 크리스에게 손을 뻗었다.

 

  “생도 아씨, 관등성명.“

 

  “…크리스 아키노트, 백화각 2년생.”

 

  무의식적으로 대답한 크리스는 그제야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을 보고 얼떨떨해 하며 마주 잡았다. 그녀를 부축해 세운 피터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저런 거 못 해.”

 

  뭘? ‘괜찮냐’, ‘다친 곳은 없냐‘ 같은 말 대신 밑도 끝도 없이 그리 말하는 피터의 말에 크리스는 당황했다. 더구나 방금 순식간에 사람 하나를 거꾸러뜨린 걸 본 만큼 그가 뭘 못한단 건지에 대해서도 혼란스러워했다. 가까스로, 그녀는 그가 마법을 지칭한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네가 도와줘.”

 

  피터는 아실에 대해 생각했다. 분명 그녀는 사람으로 살라고 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는 사람 잡는 백정으로 살고 있었다.

 

 
작가의 말
 

 향후 한 달 반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신만의 이미지를 등록해보세요
명황 20-10-20 06:30
 
고생하셨습니다.
무언가 이야기를 진행하려다가 끝났네요.
담편은???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1 1. (1) 2020 / 8 / 15 382 0 9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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