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익숙한 이름… ….
[다니엘 선배]라고 적혀있는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끊어지기 전에 화살표를 받았다.
"…여보세요?"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걱정되게.]
“네? 제가 이 핸드폰 주인이 아니어서요. 말하자면 복잡…”
[무슨 소리야. 하하 또 장난치는 거지?]
“아닌데요.”
[뭐야~ 안속아. 난 목소리만 들어도 알아, 한여름.]
잠깐, 한여름? 그러고 보니 이름들이 다 낯익어.
한여름, 다니엘 선배, 서영위… ….
“!!!!!“
[미친개 길들이기]에 나오던 이름이잖아…?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이 모든 상황이 다 이해되긴 해… ….
좀 전까지만 해도 책방이었는데 이런 낯선 곳에서 눈을 뜬 것, 10년 전으로 타임워프한 것 마냥 촌스러운 패션과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핸드폰… ….
특히, 저런 존잘을 후진 뒷골목에서 보는 걸로도 모자라 나한테 말을 걸고, 얼굴 모를 남자가 다정하게 전화를 걸다니… 이게 현실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남자와는 몇 년째 담을 쌓고 살던 나는 이곳이 인소 속이라는 것을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여름아? 한 여름…?]
“네, 네?”
[어디야, 지금?]
“…모르겠는데요.”
[어? 학교 아니야?]
“아, 여기가 학교인가…?”
[응?]
짧은 순간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소설 속 한여름은 돈도 없고 가족이라고는 알코올 중동자인 아빠뿐이다. 한여름은 그런 아빠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을 용서해주는 등 빛이 없는 인생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남주는 그런 그녀에게 반하게 되고 결국, 부자 집 남주랑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산다는 뻔하디 뻔한 신데렐라 이야기.
내가 한여름이라면 그렇게 답답하고 융통성 없이 안 살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주인공이 된 지금. 난 내 식대로 이야기를 만들어갈 것이다. 최대한 이기적으로 나만 생각하며 살 거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다 이용해 먹고 살 것 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니엘 선배가 필요해.
넘쳐나는 재력에 선한 마음씨까지 가진 엘리트. 그런 사람이 내 말 한마디에 울고 웃는다면 이용할 수 있는 만큼 이용해 줘야지.
“아니, 그게 저 지금 음대 건물인 것 같아요”
[거긴 왜?]
“아 제가 길을 잃어버려서요… ….”
[…데리러갈게.]
“아니에요, 바쁘신데 그러…”
[여름아, 내가 걱정돼서 그런거야. 조금만 기다려.]
주인공 한여름이 서영위와 마주치게 되는 것은 음대건물에서였다.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가 길을 잃고 음대까지 가게 된 것.
나는 인소에서 본 내용을 생각하며 내가 어디 있는 지 선배에게 말했다.
비록 인소에서는 선배의 전화를 받지 못하고 서영위랑 엮이지만… ….
원래는 음대건물에서 길을 잃은 한여름은 벤츠에서 잠이 든 서영위와 마주치고 그의 부탁을 들어주며 서로 가까워지게 된다는 내용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아직은 잠이 덜 깬듯한 허스키한 목소리로 발걸음을 옮기는 나를 붙잡았다.
“아줌마.”
저게 또 아줌마라고 부르잖아?!
가만히 누워있는 그를 째려보고 있자 피식-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고 웃으며 말했다.
“어디가요.”
“알아서 뭐하게.”
“ㅡㅡ^”
“간다, 잠이나 자”
쏘 쿨하게 뒤돌아서 가려는 내 걸음을 다시 한 번 붙잡았다.
“한여름.”
살짝 갈라진 허스키한 목소리.
뭐지? 내 이름, 통화하는 거 듣고 알았나?
“왜?”
“…가지마.”
“… ….”
소설 속에서 한여름이 처음만난 남주의 부탁을 왜 그렇게 열심히 들어줬는지 알겠다.
어느새 일어나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맑고 큰 눈말울은 버림받은 고양이같았다.
그래, 서영위 얼굴이 개연성이지.
“나 좀 도와주라… ….”
물기가 살짝 서려있는 듯한 그의 한마디가 내 심장을 꽉 쥐었다 놓았다.
"싫어."
하지만 그건 그거고. 나는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다.
나는 갈색으로 빛나고 있는 그 큰 눈망울에서 시선을 때고 음대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