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자유연재 > 판타지/SF
지오르고스의 일기
작가 : 현서랑
작품등록일 : 2020.7.31

J. 그녀는 그것을 지오르고스의 일기라 적었지. 모르탈 아이움, 그 옛 시대에 지오르고스가 일궈내어 셀 수 없는 시간을 지나온 그 신비의 역사를. 이젠 J라는 그 작은 여자아이의 이름이 우리들의 진실 위에 허구성과 함께 덮여질 테지. 인간들은 우리들의 존재를 믿으려하지 않아. 앞선 존재들. J는 우리를 그렇게 부르더군. 인퀴스토 디토스란 신들과 엄연히 구분되어야 함에도 말이야.

 
나가 IV
작성일 : 20-08-13 13:29     조회 : 234     추천 : 0     분량 : 8509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나가 19_

 어제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했던 비는 오늘 아침에야 조금씩 잦아들었다. 오전에 우린 안개비 속을 달려 루치노르 동부로 향했다. 뤼귀는 군대가 지나간 넓은 길 대신 지대가 높고 좁은 지름길을 택했다. 한나절을 달리자 로마노 동남쪽과 루치노르 동쪽의 경계를 타고 흐르는 아네이 강 서편 협곡 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의 눈 아래로 들어온 것은 수많은 군인들과 이제 막 지어지고 있는 막사들이었다.

 우린 먼저 루멘의 진영으로 향했다. 루멘의 진영엔 정제한 군기가 그윽이 깔려있었다. 그들의 사령관이자 루멘의 왕세자인 오디아르 웰렌은 강가에 나가 홀로 강 너머 아르도르의 국경지대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그의 수려한 얼굴엔 수심이 깊었다.

 

 - 처음 뵙겠습니다. 전 루완의 특사 메어 뤼귀라고 합니다.

 

 - 반갑습니다. 먼 길을 오셨군요.

 

 뤼귀는 르슈 왕의 은화를 내보였고 왕자는 그 뜻을 알겠다는 듯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어제 비가 내렸음에도 강류는 잔잔하기만 하군요. 큰 파도가 덮쳐오기 전의 백사장처럼 말입니다.

 

 루멘의 병사들마다에 서린 투기에 반하여, 정작 그들의 대장인 웰렌의 목소리는 낙망에 잠겨있었다.

 

 - 왕자님. 군대의 사기는 지도자의 의기에 따라 오르고 내리는 법입니다.

 

 뤼귀가 조언하자 왕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 아버님의 징표를 가진 분이라 그런지 제게 잔소리부터 하시는 군요. 그 징표는 저조차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인데 아버님께선 하나 뿐인 아들보다 타국의 특사를 더 신뢰하시는 가 봅니다.

 

 뤼귀는 왕자의 비아냥거림을 무시하고 첨언했다.

 

 - 현재 이곳은 지대가 낮고 주변엔 협곡을 끼고 있어 적의 급습에 대비할 수 없는 지형입니다. 그러니 밤중에라도 이동을 계속하여 진영을 옮기셔야 합니다.

 

 그러나 왕자는 여유를 부렸다.

 

 - 저희의 정찰대가 수시로 적의 동태를 파악 중이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적의 본대는 지금쯤 스코르 강 하류를 지나고 있을 겁니다. 적들이 이곳에 도착하기엔 적어도 하루가 더 걸리니 저흰 오늘 이곳에서 야영을 한 후 유격대를 편성하여 이 주변 협곡을 매복지로 삼을 것입니다. 그 후 저희의 본대는 남쪽으로 우회하여 적의 후미를 칠 것입니다.

 

 왕자의 계획은 나름대로 치밀해보였으나 뤼귀는 그 계획에 반대했다.

 

 - 적이 이 협곡지형과 일대의 지름길을 우리들보다 더 잘 알고 있어 저희 쪽의 군대를 나누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아네이 강을 건너 드라덴 평원에서 적과 정면으로 맞서십쇼. 저희를 도울 이들이 있습니다.

 

 - 누가 우리를 돕는단 말입니까? 록를린에서는 레아 누님이, 카르고에서는 실라 누님이 저희의 도움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에겐 다른 계획이 있는 것 같더군요.

 

 - 두 야경이 저희를 도울 것입니다. 전쟁에서 그 둘이 갖는 가치는 한 나라의 군대와 맞먹습니다.

 

 - 괴물들이 우리 인간을 돕는다는 말입니까?

 

 왕자는 코웃음을 쳤다. 로부르의 공주가 뤼귀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처럼 그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뤼귀는 한 번 더 르슈 왕의 은화를 꺼내들었다.

 

 - 당신의 말대로 이것은 당신의 아버지께서 저에게 보이신 신뢰의 표시입니다. 루완의 특사임과 동시에 르슈 왕의 신뢰를 받는 제가 당신께 해가 될 조언을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왕자는 마지못해 뤼귀의 간절함을 받아들이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때 뤼귀는 한 가지 조건을 더 붙였는데 그로 인한 결과는 좋지 못했다.

 

 - 병력의 일부를 페르미나로 보내주십쇼. 그곳 산맥을 지킬 병력이 필요합니다.

 

 그 조건은 언짢음을 참고 있던 왕자에게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 대체 왜 그곳에 병력을 보냅니까? 적의 진격로는 이곳과 남해 두 곳이고 지금은 이곳에 병사를 한 명이라도 더 보태야할 때입니다. 특사께서 아무리 아버님의 신뢰를 받는 분이라고 해도 전 그 조언을 따를 수 없습니다. 앞서 하셨던 말들도 사실 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야경 둘을 믿고 병력이 곱절인 적과 정면대결을 하라니요. 제 생각엔 아무래도 아버님께서 사람을 잘못보신 것 같습니다.

 

 제 말을 늘어냄에 따라 스스로 화를 쌓던 왕자는 결국 막사로 돌아갔다. 뤼귀는 실망한 채 룩스비오스 군의 진영으로 향해야했다. 이니스는 뤼귀의 심려에 동화했다.

 

 - 어르신께서 말씀을 잘못하신 걸까요?

 

 - 그럴지도 모르지. 그는 날 시기하더구나. 설득은 애초에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다. 그를 직접 만나고 나니 르슈 왕의 근심이 이해가 된다. 루멘은 차기 왕에 의해 지금의 위상을 잃게 될 지도 모르겠어. 왕이란 자고로 신뢰할 자와 신뢰하지 않아야 할 자를 가려낼 줄 알아야 하는데 말이야.

 

 룩스비오스의 병사들은 여러 모습을 띠고 있었다. 모닥불에 단란하게 모여 앉아 화기애애하게 말을 나누는 분대와, 일찌감치 겁에 질려 긴장 속에 전쟁을 기다리는 보초병들의 모습이 대비되었다. 그들의 지휘관은 섬나라 티포니 출신의 나르기스라는 장군이었다. 나르기스는 섬사람답지 않게 성격이 온화했다. 그러나 그 역시 뤼귀의 조언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결국 우린 연합군 진영에서 좋은 눈초리를 받지 못했고, 뤼귀는 협곡 위로 올라와 그들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우리만의 잠자리를 폈다.

 이곳은 지대가 높아 바람이 세차다. 내가 오늘의 서사를 정리하는 지금, 이니스는 우리 아래의 수많은 불빛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뤼귀는 더 높은 곳에서 아네이 강 건너를 주시하고 있다. 좀 전에 그는 자신의 능력에 아쉬워했다. 이미 바닥에 뿌려진 피 냄새가 아닌 다가올 피 냄새를 미리 맡을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고.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나가 20_

 모르탈 아이움 239년 나가 20일. 전쟁은 오디아르 웰렌의 예상보다 일찍 시작됐다. 나와 이니스는 포화 밖에서 머물렀고, 그것은 뤼귀의 바람이었다. 동족이 죽어나가는 전쟁터에서 물러나 전황만을 기록하기 바빴으니, 훗날 난 불명예스러운 비겁자로 보여 질지 모른다. 그러나 난 서사꾼의 의가 부끄럽지 않다. 내 손에 쥐어져있던 비망록과 깃펜이, 내가 휘둘렀어야 할 칼자루 보다 가치가 있길 바란다.

 새벽녘 고지대의 시린 바람은 나와 이니스를 깨웠다. 뤼귀는 어젯밤처럼 협곡 끝에 서있었으나 그의 시선은 강 건너와 반대되는 서향에 머물러 있었다. 뤼귀의 시선이 닿는 곳엔 옅은 흙먼지가 일고 있었는데, 그 속에서 한 무리가 우리에게 말을 몰아 달려왔다. 무리의 선봉에 있던 이는 실비아루스 공주였다. 공주는 자신을 따르는 정예병들을 로부르 주력부대의 후속으로 직접 이끌고 온 것이었다. 멀찍이서도 뤼귀를 알아본 공주는 자신 옆의 종자들을 돌려보내고 혼자서 우리를 대면했다.

 

 - 특사께선 테스미르미드로 간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뤼귀는 어제 우리가 연합군 진영에서 겪었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이 시작된 것은 뤼귀가 말을 잇던 때였다. 해는 여전히 없었으나 어둡진 않은 새벽이었다. 조용하던 일대엔 불현듯 웅장한 나팔소리가 울렸다. 강 건너 낮은 협곡에선 우리의 시야를 붉은 색으로 가득 채울 만큼의 빛이 나팔소리에 맞춰 날아들었다. 그 빛은 모두 화살촉에서 타고 있는 불이었다. 불화살은 모두 우리 발아래 연합군 진영으로 떨어졌다. 불은 한순간에 번졌고 연합군 병사들의 비명은 화재의 연기와 함께 협곡 위로 솟구쳤다. 내가 미처 상황을 인식하고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다음 화공은 이어졌다. 판단이 재빠른 뤼귀는 협곡 아래로 쏟아지는 화살들을 따라 절벽에서 뛰어내렸고 실비아루스는 그 높은데서 뛰어내리는 뤼귀의 모습에 놀라 가만히 서 있다가 뒤늦게 말고삐를 돌려 자신의 부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제야 난 고개를 들어 강 건너의 아르도르 군대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철갑옷에서 발해지는 쇳빛은 일출 직전의 수평선처럼 들녘 위를 채웠고, 횡대로 늘어선 그 궁사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은 먼 바다에서 검은 파도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담흑빛 파도의 시선 아래의 연합군 병사들은 방패를 치켜들고 화살세례를 피해 흩어지고 있었다. 협곡 아래로 뛰어내린 뤼귀의 모습은 진영 내 어디에서도 보이지가 않았는데, 곧 그가 강 위쪽에서 커다란 물줄기를 이끌고 나타났다. 그 모습은 그렇게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그는 그 얕은 강물을 상류에서부터 끌어 모아왔다. 거대한 강의 파도는 연합군 진영을 덮쳐 불을 잠재웠고 적들의 화살세례도 그쯤에서 멈췄다. 그러나 곧 또 다른 나팔소리가 울렸고, 칼을 빼든 아르도르의 군대는 아네이 강가로 향하는 내리막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아르도르의 대군이 아네이 강 동녘을 검게 물들이던 그 장엄함은 공포와 감복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연합군은 재빨리 진열을 갖췄다. 빠른 속도로 달려온 실비아루스의 군대는 그때쯤 연합군과 합류했다. 그런데 두 대군이 충돌하기 직전이었다. 무언가를 감지한 것처럼 북쪽을 응시하던 뤼귀는 마치 다른 급한 일을 찾은 것처럼 전장을 빠져나가 아네이 강류를 타고 순식간에 남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곧 뤼기가 응시하던 북쪽에선 두 존재가 나타났는데, 거대한 철검을 등에서 빼들며 앞서 달음박질해 오는 이는 놀랍게도 셰펄드였다. 그리고 그 뒤의 다른 이는 투기에 불타는 셰펄드와는 달리 발을 멈춰 전장을 둘러봤는데, 그가 바로 뤼귀가 언급했던 세르부스의 왕 헤밀롯이었다. 헤밀롯의 드러난 어깨엔 길고 검은 털이 갈기처럼 나있어 등줄기까지 이어져있었고, 은색의 긴 머리칼은 전장에 이는 바람에 멋대로 흩날렸다. 또한 그의 팔뚝엔 검붉은 핏대가 튀어나와있었는데, 그 핏대는 우리가 서있는 그 먼 곳에서도 보일만큼 선명했다.

 이내 양쪽의 군대는 얕은 물 위에서 정면으로 부딪혔다. 병사들의 함성과 끝없이 부딪히는 무기의 쇳소리는 협곡에 전체에 메아리치며 일대의 모든 소리 위에 군림했다. 셰펄드와 헤밀롯은 북쪽에서부터 아르도르군의 측면을 공격해왔다. 오로지 높은 협곡 위에 올라있던 나와 이니스만이 그 둘의 무용을 온전히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셰펄드는 자신의 철검으로 아르도르 병사들을 하나하나 쪼개고 갈랐다. 그러나 우리의 의구를 자아낸 건 그의 검술이 아니었다. 헤밀롯, 사람의 눈을 가진 우리가 그의 무용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전장에 들어섰을 때 난 그 광경에 매료돼 마른 펜에 잉크를 적실 수도 없었다. 때문에 그 광경은 비망록이 아닌 내 뇌리 속에 남아있다. 그의 재빠름은 인간이 헤아릴 수 없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엔 그의 형체를 닮은 잔상이 일순간 남아있었고, 내 눈엔 주인을 쫓지 못해 점차 늘어만 가는 검은 그림자들과 쇳빛의 대지가 붉은 핏빛으로 물들어가는 것만이 보일뿐이었다. 그의 활약만을 놓고 보자면 셰펄드가 수십의 적을 벨 때 헤밀롯 그는 수백의 적을 가리가리 찢어놓았다.

 헤밀롯의 공격로는 연합군 진영과 맞붙은 아르도르의 전열로 향했다. 그가 뿌린 아르도르 병사들의 피와 살들은 아네이의 얕은 강물 위에 둑처럼 쌓였고, 이내 아르도르의 병사들은 전황의 불리함을 깨달아 후퇴하기 시작했다. 헤밀롯과 셰펄드는 퇴각하는 아르도르 군대를 쫓지 않았고 적을 추격하려던 연합군의 지휘관들도 두 야경이 침묵으로 막아선 앞을 더는 넘질 못했다.

 그렇게 연합군과 아르도르의 첫 격돌은 반나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만에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남기고 끝이 났다. 협곡 아래엔 화살이 박힌 연합군 병사들과 찢기고 짓눌려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아르도르 병사들의 사체가 늘비했다.

 사태가 일단락 됐음에도 살아남은 연합군 병사들은 승리를 기뻐하지 않았다. 적의 기습이 많은 사상자를 낸 이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헤밀롯과 셰펄드의 무거운 침묵 때문이었다. 이윽고 셰펄드는 혼자 협곡 위로 튀어 올라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협곡 아래의 병사들은 자신들 앞에 남은 헤밀롯을 신비롭게, 또는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며 멀뚱히 서있었다. 그 수많은 시선을 의식치 않던 헤밀롯은 피로 범벅이 된 자신의 손을 아네이 강 얕은 물에 태연히 씻어내곤 순식간에 모습을 감춰버렸다. 손을 씻을 때 드러났던 그의 열 손톱은 맹금류의 발톱과도 같이 구부러져 재색 빛을 내고 있었다.

 병사들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부상자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대열을 가다듬던 연합군의 지휘관들은 헤밀롯이 사라져버린 강가에 모여들었다. 뤼귀가 없었기에 그들에겐 내 설명이 필요할 것만 같았다. 내가 뤼귀 없이 귀족들 사이에 나선 것은 오늘 그 순간이 생전 처음이었다.

 난 협곡을 내려갔고 이니스도 내 뒤를 따랐다. 이니스는 사상자들 사이를 지나며 눈을 가린 채 슬퍼했다. 강가엔 실비아루스와 웰렌, 나르기스까지 세 명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우리의 등장을 반겼다.

 

 - 마침 잘 오셨습니다. 특사께선 어디에 계신지요?

 

 우리를 가장 반기던 실비아루스가 먼저 내게 물었고 난 내가 본 뤼귀의 행방에 대해 숨김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실비아루스 뒤에 있던 나르기스는 내 대답에 자신이 본 것을 더하며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 제가 봤습니다. 그분이 강물을 일으켜 불을 끄더군요. 그리곤 이 청년의 말대로 남쪽 방향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웰렌은 반박을 했다.

 

 - 사람이 강물을 일으키다니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엊그제 내렸던 비가 이 강 상류에 묶여 있다가 우연찮게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특사라는 자는 적의 규모를 보고서 도망친 것입니다.

 

  나르기스는 자신이 본 광경을 또 한 번 설명했으나 웰렌은 들어먹지를 않았다. 실비아루스는 그 둘을 신경 쓰지 않고 나와 이니스에게만 관심을 뒀다.

 

 - 저흴 도운 두 사내가 특사께서 언급한 야경들인가요?

 

 난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는데, 그때 웰렌이 다시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 그는 제게도 두 야경의 등장을 예고했었지요. 도망자가 그것만큼은 용케 맞춘 것 같군요.

 

 웰렌은 뤼귀를 비겁자로 여기는 듯 조롱했다. 그리고 이에 화가 난 이니스는 목소리를 내세웠다. 병사들의 주검을 지나온 그녀는 감정에 북받쳐있었다.

 

 - 뤼귀 어르신은 전투에서 도망칠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르신께선 적의 기습에 대해서 대비하라 왕자님께 권하셨습니다. 그것도 어르신께서 하신 예고가 아닙니까?

 

 난 겁 없는 그녀의 신변이 걱정됐다. 하지만 웰렌은 그녀에게 대꾸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큰소리를 들은 주변 병사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웰렌을 원망스레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부하들의 시선을 느낀 무능한 지휘관은 말없이 막사로 돌아갔다. 실비아루스는 격양된 이니스를 달래며 우리 둘을 진영 밖으로 데려갔다. 곧 우린 셋만의 목소리만 오갈 수 있는 데에 이르렀고, 실비아루스는 대화를 이었다.

 

 - 특사께서 하신 말씀이 옳았습니다. 그분께서 어떻게 이 전황을 예측하신 것인지는…… 차차 알게 되겠지요. 지금 제가 걱정하는 것은 그분께서 걱정하시던 부분입니다. 오늘 제가 본 것이 야경의 진가라면 남해로 진격해올 적들은 루완과 테스미르미드의 힘만으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특사님의 말대로 그롯테의 야경 일부가 음침한 산맥을 넘어온다면 그 일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공주의 얘기를 들음으로써 난 뤼귀의 행방을 예측할 수 있었다. 뤼귀 그가 남부로 급히 떠난 이유는 그녀의 걱정에 부합할 만도 했다.

 

 - 혹시 특사께선 제 거절이 있은 뒤에 다른 대책을 찾으셨습니까?

 

 공주가 물었다. 난 고개를 저었고 이니스는 말로 답변을 했다.

 

 - 그 후로 저희가 만난 분들은 웰렌 왕자님과 나르기스 장군님이 전부입니다. 두 분 모두 어르신의 권고를 거절하셨고요.

 

 이니스의 대답에 공주는 대화를 급히 마무리 짓고 연합군 진영으로 돌아갔다. 나와 이니스는 덩그러니 남겨졌고 우린 새 목적을 찾아야했다.

 그러나 뜬 시간은 길지 않았다. 공주가 떠나자마자 한 남자가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그는 헤밀롯이었다. 그는 나와 내 서사에 있어서 뤼귀만치 귀빈이었다. 길게 늘어지는 검은 하의만을 걸친 그는 우리에게 따라오라 손짓해 우리를 조용하고 외딴 협곡 모퉁이로 이끌었다. 루멘의 왕자 앞에서도 당차던 이니스도 그때만큼은 내 뒤에 숨어 숨을 떨었다.

 

 - 지치는군.

 

 두터운 장작이 타는 것처럼 중후하고 심원한 목소리가 헤밀롯 그의 입에서 새나왔다. 언어는 우리에게 전혀 괴리감이 없는 린그노르어였다. 그에게 지친 기색이란 없었다. 그래도 그는 그렇게 말했다. 가까이서 본 그의 옆모습은 금방 목욕을 마친 건장한 청년처럼 깨끗했다. 갈기처럼 나있는 검은 털만을 제외하면 모든 외형이 사람과 같았다. 어째선지 전장에서와는 달리 맹금류의 발톱도 팔뚝의 핏대도 겉에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의 하의엔 여전히 많은 핏자국이 남아있었지만 말이다.

 잠시 후 그는 우리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제야 우린 그의 청수한 낯을 뚜렷이 볼 수가 있었다. 야경 헤밀롯의 이목구비는 사람인 나보다도 잘 나있었다.

 

 - 난 지쳤고 이제 세르부스로 돌아가야 한다. 너희가 나와 뤼귀 사이의 전달자가 되어라.

 

 그것은 부탁보다는 명령처럼 들렸다.

 

 - 그보다. 뤼귀에게 내 분명 이쪽엔 많은 병력이 필요치 않다 일렀거늘. 어째서 세 나라의 병력이 이곳에 모여 있는 것인가. 그가 왕들에게 권고를 하지 않았나.

 

 이니스는 여전히 나서지 못했고 내가 대답을 해야 했다. 난 더듬는 혀를 달래며 그간의 사실을 전했다.

 

 - 뤼귀의 말재주도 여기선 신통치 않나보군.

 

 헤밀롯은 이어서 말했다.

 

 - 뤼귀에게 전해라. 아르도르가 우리의 예상보다 일찍 물러나더라고. 또한 내가 셰펄드에게 레기야의 경고를 전했다고. 뒷일은 그 스스로가 더 잘 알 것이다.

 

 그는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가 떠나려는 기미를 보였을 때 난 그 기회에 대한 아쉬움을 참을 수가 없었고 질문으로 그를 붙잡았다. 우리가 뤼귀를 어떻게 찾느냐. 난 그것을 물었다.

 

 - 테스미르미드 남쪽 전선으로 가라. 뤼귀는 바다에 있을 것이다.

 

 대답을 마친 그는 사라졌다. 소리도 흔적도 남지 않아 이니스와 난 그가 하늘로 튀어 올랐는지 연기가 되어 땅속으로 숨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24 네냐 VIII 2020 / 8 / 23 238 0 10347   
23 네냐 VII 2020 / 8 / 22 256 0 12654   
22 네냐 VI 2020 / 8 / 21 258 0 4717   
21 네냐 V 2020 / 8 / 20 237 0 7805   
20 네냐 IV 2020 / 8 / 19 241 0 8653   
19 네냐 III 2020 / 8 / 18 252 0 12175   
18 네냐 II 2020 / 8 / 17 248 0 4678   
17 네냐 I 2020 / 8 / 16 254 0 6634   
16 나가 VI 2020 / 8 / 15 244 0 4947   
15 나가 V 2020 / 8 / 14 262 0 5026   
14 나가 IV 2020 / 8 / 13 235 0 8509   
13 나가 III 2020 / 8 / 12 252 0 7021   
12 나가 II 2020 / 8 / 11 254 0 4802   
11 나가 I 2020 / 8 / 10 260 0 8461   
10 엘레노어 IX, J 5 2020 / 8 / 9 257 0 5063   
9 엘레노어 VIII, J 4 2020 / 8 / 8 261 0 4894   
8 엘레노어 VII 2020 / 8 / 7 269 0 4877   
7 엘레노어 VI 2020 / 8 / 6 260 0 4064   
6 엘레노어 V, J 3 2020 / 8 / 5 248 0 7960   
5 엘레노어 IV, J 2 2020 / 8 / 4 246 0 5539   
4 엘레노어 III 2020 / 8 / 3 269 0 7052   
3 J 1 2020 / 8 / 2 271 0 7013   
2 엘레노어 II 2020 / 8 / 1 273 0 5506   
1 엘레노어 I 2020 / 7 / 31 451 0 13442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