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미야. 너 동아리 들 거야?”
효미와 사이좋게 캠퍼스를 걸어가던 수아가 물었다.
“나는 별로... 넌?”
“난 씬나리오 가입 할 거야.”
“씬나리오? 그게 뭐야?”
“영화 동아리. 옛날부터 영화 만들어보고 싶었거든.”
“영화감독이 꿈이야?”
“아니. 시나리오 작가.”
“아... 난 그런 거 귀찮아서 동아리 가입은 안 할 것 같아.”
수아는 사람들과 잘 지내고 적응도 잘하는 편이긴 했지만, 은근히 낯가림이 있었다. 효미에게 스태프로라도 지원하면 안 되겠냐고, 의외로 재밌을지도 모른다며 졸랐지만, 효미는 냉정하게 도서관에 가야겠다며 돌아섰다.
‘할 수 없나.’
불편해하는 사람에게 더 권하는 것도 배려가 없는 행동인 것 같아서 수아는 할 수 없이 혼자 동아리 방을 방문했다. 공강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문은 열려있었다.
덥수룩한 검은 앞머리에 두꺼운 검정 뿔테 안경을 쓰고 검정 볼캡까지 눌러쓴 동아리 회장인 준민은 조용히 수아가 동아리 방에 들어오는 것을 주의 깊게 쳐다보았다.
준민은 단번에 창문 앞을 지나가던 여학생이라는 것을 알아봤지만 그걸 수아가 알 리가 없었다.
‘드디어 왔네.’
수아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준민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동아리 지원하려고 왔어요.”
수아는 자신을 응시하는 그 시선이 조금 불편했지만, 준민의 입에서 어떤 말이라도 나오길 기다렸다. 짧은 침묵 끝에 준민이 물었다.
“어떤 영화 좋아해요?”
“walk to remember. 시간이 지나도 첫 번째 순위에서 바뀌지 않더라구요.”
수아가 영화 제목을 말하자 준민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두꺼운 안경 너머로도 느껴질 만큼 강렬하게 수아를 직시했다. 준민의 이런 눈빛에 수아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준민은 표정의 동요 없이 가운뎃손가락으로 안경을 추어올린 후 다시 수아를 쳐다보더니 종이 한 장과 볼펜 한 자루를 내밀었다.
“어? 조수아?”
생각지도 않은 창윤의 등장에 놀란 수아가 물었다.
“이창윤? 너 이 동아리야?”
“응. 근데 너 영화에 관심 있었구나.”
준민이 말없이 창윤을 쳐다보자 수아를 반기던 창윤이 웃으며 말했다.
“교양 수업 같이 듣는 친구예요. 이쪽은 동아리 회장 준민이 형.”
“안녕하세요.”
‘동아리 회장이었구나.’
들어오면서 인사는 했지만 어쩐지 또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수아는 한 번 더 꾸벅하고 인사를 했다. 그런 수아를 쳐다보던 준민이 바닥에 놓인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한 다음 창윤에게 말했다.
“이창윤.”
“네.”
“네가 지원서 좀 받아서 챙겨줘. 나는 수업이 있어서.”
벌떡 일어난 준민의 키는 생각보다 컸다. 적어도 185는 돼 보였다. 수아는 자신이 한참 올려다보게 되는 준민의 키에 깜짝 놀랐다.
‘앉은키가 많이 작네. 다리가 얼마나 긴 거야.’
준민이 가방을 챙겨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자 수아는 또 한 번 인사했다.
“안녕히 가세요.”
준민이 잠시 멈칫하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수아의 인사를 받자 뒤이어 창윤도 인사를 했다. 준민이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얼굴이 작아서 몰랐는데 준민은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 편으로 뒷모습에서도 남성미가 강하게 풍겼다.
“원래 저렇게 말이 없어?”
“그래도 친해지면 조금 하는 편이긴 한데, 원래 말이 많은 편은 아니야.”
수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아리 활동 재밌겠다. 그치?”
수아가 동아리 지원서를 작성하는 동안 옆에서 수아를 가만히 쳐다보던 창윤이 말했다.
“응. 아는 얼굴이 있으니까 나도 적응하기 쉽겠다.”
수아는 창윤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지원서에 내용을 적으며 약간은 무감정하게 말했다. 집중해서 지원서를 쓰고 난 후 창윤에게 주려고 고개를 들었다. 창윤이 말없이 빤히 수아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수아는 창윤의 그런 행동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창윤은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동아리 방에 단둘이 있는 상황이 어색하고 불편해진 수아는 창윤에게 지원서를 내밀며 말했다.
“나 수업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나중에 보자!”
부끄러워하며 도망치듯 동아리 방을 나가는 수아를 바라보는 창윤의 입에는 미소가 머금어졌다.
‘귀엽단 말이야. 놀리고 싶어지게.’
자신을 의식하는 순수한 수아의 반응에 창윤의 기분이 좋아졌다. 따뜻하고 좋은 사람인 데다 귀여움은 덤이었다. 수업에 가면서 좀 전의 상황에 대해 떠올린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동글고 살짝 진 쌍꺼풀이 매력적인 창윤의 다갈색의 눈동자가 평상시처럼 밝은 소년의 느낌이 아닌 남자의 눈빛 같았기 때문이었다.
수아는 애써 그 기억을 털어내며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다시금 씩씩하게 걸어갔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것이 수아의 길고 아픈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
쉬는 시간에 수아가 파우치에서 쿠션을 꺼내 화장을 고쳤다. 무심코 수아의 파우치를 보던 효미가 눈빛을 섬뜩하게 빛내며 말했다.
“수아야. 혹시 말이야.”
효미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응?”
“이 샘플 나 줄 수 있어? 나, 이거 예전부터 계속 써보고 싶었거든.”
이미 포에버뷰티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수아에게 숨긴 채 말했다.
“너 이미 피부 너무 좋은데? 나도 하나는 써보고 싶어서 하나만 줄게”
‘지은이가 일부러 나 챙겨준 것이기도 하고.’
그러자 효미가 초조해하며 말했다.'
“너 피부 예민하잖아. 이거 고기능성이라 네가 바르면 트러블 생길 수도 있어.”
“아까 지은이가 아무 문제 없다고 하던데. 너 이거 써봤어? 샘플만 보고도 고기능성인지 바로 아네?”
가끔 수아는 본인이 의도하진 않았지만 날카롭게 상대의 허점을 짚어냈는데, 효미는 수아의 이런 면이 짜증스러웠다. 특히 지금은 더.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워낙 유명한 화장품이니까 나도 듣기만 했어.”
뭔가 다급해 보이는 효미의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졌던 수아는 갑자기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화장품 샘플로 치사하게 굴고 싶지 않아서 잠시 생각하다 수아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조심히 사용해볼게. 자.”
수아는 샘플 한 개를 효미에게 내밀었다. 효미의 표정이 뭔가 석연찮았지만 이내 곧 고맙다고 하며 샘플을 받았다.
“이게 좋긴 좋은 건가 보다. 모르는 사람이 없네.”
그러나 별 대답 없이 효미는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화장품 샘플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효미를 보면서 수아의 촉이 예리하게 불길함을 감지했다.
‘이게 도대체 뭐라고.’
수아는 효미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두 가지 즉 창윤과 샘플의 상관관계를 잠시 생각해보았다.
‘이창윤과 포에버뷰티 샘플. 뭔가 연관이 있는 건가?’
당장 답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가중되는 불안감 속에서 수아는 포에버뷰티 샘플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
자리를 박차고 나와 화장실에 간 효미는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었다.
‘그거 VIP한테만 나오는 건데 왜 조수아가 그걸 가진 거야? 박지은은 왜 또 쓸데없는 소리를 해? 아이씨 짜증나 진짜.’
손톱을 물어뜯던 효미는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자신의 매끄러운 얼굴 피부를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피부를 만들려고 들인 돈이 얼만데.”
효미는 수아에게서 받은 샘플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며 비웃듯 내뱉었다.
“그래. 어차피 너 같은 애는 샘플 밖에 못 쓸 텐데.”
형편이 어려운 수아는 화장품도 가장 저렴한 것을 몇 번이나 검색해서 사용하곤 했다. 이런 수아에 비해 어렵지 않게 포에버뷰티 본품을 사서 사용할 수 있는 효미는 이런 수아를 조소하듯 사람들 앞에서는 한 번도 짓지 않았던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효미는 곧 샘플 파우치를 찢어 내용물을 세면대에 버리고 껍데기를 쓰레기통에 버린 다음 화장실에서 나왔다. 뭔가 수아보다 우월한 입장에 놓인 것 같은 기분에 짜릿했다.
‘이제 시작이야. 조수아.’
*
수아는 집에 와서 문제의 그 샘플을 꺼내 보았다. 샘플 파우치의 색은 검정과 빨강으로만 이뤄져 있었다. 세안 후 얼굴에 이걸 바르려던 수아가 잠시 주춤했다.
과거에 좋은 거라고 얼굴에 발랐다가 피부가 엉망이 되어 피부과 신세를 꽤 오래 져야 했던 악몽이 떠올랐다. 그래서 얼굴을 제외하고 신체에 가장 부드러운 팔뚝 안쪽 살 정확히는 왼쪽 팔에 테스트 겸 샘플을 바르고 잠을 청했다.
“헐?”
아침에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잠옷을 벗고 습관처럼 거울을 보던 수아는 깜짝 놀랐다. 샘플을 발랐던 곳의 살이 완벽하게 탱탱해져 있었다. 마치 아기 피부처럼 탱탱하고 부드러웠다. 무서울 정도로 빠른 효과였다.
수아는 놀란 정신을 수습 후 얼른 사진을 찍어 기록을 남겨 두었다. 찍은 사진을 지은에게 보낼까도 생각했지만, 왠지 이 사실은 혼자만 간직해야 할 것 같았다. 정신없이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다 온 수아는 그날 밤 너무 피곤해서 얼굴에 겨우 기초만 바른 채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수아가 운동을 마치고 탈의실에서 옷을 벗는데 지은이 말했다.
“어? 조수아. 너 팔이?”
“응? 뭐가?”
“너 팔 양쪽으로 들어봐.”
“왜?”
“빨리.”
“일단 너 거울부터 봐봐. 양쪽 팔뚝 비교해봐.”
수아는 일어나서 어제 샘플을 바르지 않고 잤던 것이 생각나 얼른 거울을 보았다. 수아가 거울을 통해 양쪽 팔뚝을 보고 깜짝 놀랐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일단 시키는 대로 팔을 양쪽으로 벌리자 유심히 보던 지은이 말했다. 원래 수아의 팔은 마르고 살이 없는 편이라 심하게 쳐진 것은 아니었는데, 수아의 팔뚝 살은 이전보다 훨씬 더 보기 싫게 축 처져있었다.
‘아니 이렇게 차이가 심하다고? 도대체 이거 무슨 성분이 들어있길래.’
“아니 조수아 한쪽 팔로만 운동했어? 이 정도면 심한데?”
수아는 의아해하는 지은에게 일부러 화장품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 효과가 좋다며 일부러 자신을 챙겨준 지은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너무 효과가 좋은 거였지만 사용하지 않았을 때의 부작용은 상상을 초월했다.
집으로 돌아온 수아는 샘플 파우치의 뒷면을 살펴보았다. 별다른 정보가 없어서 얼른 홈페이지에 들어가 성분표를 보았다. 하지만 성분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안 바르면 원래 대로 돌아가서 현상 유지는 돼야 하는 거 아닌가? 더 심해지는 건 무슨 경우지?’
수아는 그날 밤 다시 그 전에 발랐던 양의 두 배 정도를 같은 팔에 바르고 잠을 잤다. 예상대로 다음 날 수아의 팔뚝 살은 처음 발랐을 때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이래서 판매량이 급증하는 건가? 어떻게 화장품으로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거지? 한번 사용하면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네.’
수아는 이 화장품이 대단하다기보다는 무서웠다. 성분의 문제가 없다고는 했지만, 이토록 빠른 효과와 부작용이 수아를 두렵게 만들었다.
남은 샘플 파우치는 수아의 쓰레기통에 버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