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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재 > 로맨스판타지
푸른 잎에 능금
작가 : 목탄
작품등록일 : 2020.8.5

용의 여인이 될 운명을 타고난 능금,
행궁 청소를 하다말고
실수로 세자의 손을 베어버리는 데
지고지순, 능금만 바라보는 홍옥을 남겨둔 채
결국 궁궐로 납치되고 만다.
조선시대 온천과 궁궐 서가를 오가며 벌어지는 용팔이 로맨스,
흑룡과 청룡이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을 지어다.

 
4. 훔치고 싶은 꽃가지
작성일 : 20-08-10 17:41     조회 : 356     추천 : 1     분량 : 7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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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교태전에 들었던 세자빈이 후원으로 들어선다.

 “잠시 산책 좀 하자구나.”

 이른 별이 돋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답답하던 마음이 밤바람에 풀어진다. 꽃가지마다 꽃을 매달고, 초록 잎을 틔었다. 환한 낮에는 소홀히 지나쳤던 것이 이 밤에는 이리 어여쁘다. 세자빈이 매화를 꺾는다. 사내들이 꽃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한들한들 꽃가지를 흔들며 정자에 들어서던 세자빈이 우뚝 멈춰 선다.

 신선인지 동자인지, 쪽빛저고리를 입은 소년 하나가 천연덕스럽게 잠들어있다. 막 얼굴을 내민 달빛이 소년의 고운 얼굴에 비친다. 발칙하나 아름답다.

 “웬 놈이냐.”

 뒤따르던 상궁이 말릴 틈도 없이 소년을 깨운다. 소년이 스르르 눈을 뜬다. 먹감 빛 눈동자가 달빛에 붉다. 한아름 꺾어 백자 병에 꽂고 싶구나. 잠이 덜 깬 것인지 말간 눈으로 세자빈을 올려다보는 소년, 꾸짖던 상궁도 소년의 미색에 잠시 말을 잊는다.

 “못 보던 아이로구나.”

 그제야 정신을 차린 소년이 부스스 일어나 절을 한다.

 “송구합니다. 궁은 처음이라 길을 잃었습니다.”

 “비현각 시동이냐?”

 “예.”

 세자빈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오른다. 말벗을 데려왔다 하시더니, 예사 아이가 아니로구나. 비현각 시동이 아니라면, 곁에 두고 희롱하고 싶도다.

 “이 아이를 데려다 주어라.”

 상궁을 따라 능금이 밤바람 속으로 사라진다.

 “훔치고 싶은 꽃가지로구나.”

 밤을 걸어 비현각에 도착했다. 군데군데 불빛이 어룽대는 것이 누군가 든 모양이다. 며칠 되었다고 이리 안도감이 드나, 벌써 이곳에 정이라도 들었나. 능금이 한숨을 내쉬며 비현각에 들어선다.

 채 문을 닫기도 전에 누군가 능금을 거칠게 잡아끈다. 미처 어찌할 들 틈도 없이 푸른 빛 도포 속으로 안겨드는 능금. 사내의 호흡이 가쁘다.

 “도망친 줄 알았다.”

 절망한 눈빛의 사내가 품 안의 능금을 내려다본다. 검은 묵이 스며들 듯, 희고 검은 눈. 화홍이다.

 “저하,”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오직 홍옥뿐인 줄 알았는데, 이 비현각도 이제 내 집이란 말인가. 더는 정이 들어서는 안 되겠다. 더는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되겠다.

 “길을 잃었습니다.”

 꿈틀대며 벗어나는 능금을 화홍이 다시 끌어안는다. 내가 널 가두었구나. 궁에서 조차 길을 잃도록 가두었다.

 “혼자서 다니지 말거라. 내가 구경시켜 줄 터이니.”

 품속의 능금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야 꽃가지를 놓아두고, 화홍이 서가에 앉는다.

 “제가 도망치면 어쩌려고 그랬습니까?”

 “너 하나 잡는 건 일도 아니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꽁꽁 숨기면요.”

 “네가 비현각을 떠나 가야할 곳, 그 곳에 먼저 가있으면 될 게 아니냐.”

 그래서 홍옥을 죽이지 않은 거야. 참으로 두렵고 무서운 분이시다. 시무룩 서책을 넘기는 능금을 화홍이 지긋이 바라본다.

 “꽃이 지기 전에 날 버리지 말거라.”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인데, 어느새 졸고 있는 능금, 서고를 닦느라, 밤새 책을 읽느라 노곤하기도 하겠구나. 손을 들어 이마를 가린 머리칼을 넘겨준다. 희게 드러난 고운 이마를 어쩌지 못하고, 화홍이 붉게 낙인을 찍는다.

 

 “다시 궁에 드실 겁니까?”

 “아마도”

 처음 능금을 만났던 산 우물 앞이다. 풀은 더 우거졌고, 그늘은 더 깊어졌다.

 “궁으로 드는 우물을 메우지 않았습니까?”

 “하루하루 돌을 치우고, 모래를 파내었다.”

 “여의주 없이 하셨단 말씀이십니까?”

 “내 죄가 아니더냐.”

 “마음이 약한 것이 죄라면, 누군들 죄를 짓지 않겠습니까.”

 “편 들 것 없다.”

 홍옥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을 내려다본다.

 죄를 갚으려 메운 우물을 파냈건만, 그 벌 또한 나를 위한 것이 되었구나. 언제쯤 이 연약한 마음을 이기겠느냐.

 스산한 바람이 불어 잠잠하던 우물이 일렁인다.

 “여의주를 찾으러 가야겠다.”

 신선이 홍옥을 향해 공손히 절을 한다. 우물을 가린 나뭇잎들이 거세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홍옥이 우물로 사라진다.

 청룡 한 마리가 긴 우물을 지나, 너른 호수를 지나 순식간에 바다에 이른다. 잠잠하던 바다가 요동치고, 먹구름이 몰려온다. 어부들이 서둘러 그물을 걷고, 미역을 따던 아낙들이 종종대며 뭍으로 올라간다.

 “오랜만이로구나.”

 옥좌에 앉은 용왕이 절을 하는 홍옥을 너그러이 내려다본다.

 “그간 강령하셨습니까.”

 “그래. 영원히 아이로 남을 줄 알았는데 어느새 어른이 되었구나.”

 “인간세상에서 늙지 않는 건 귀신뿐입니다.”

 “백년해로 할 여인이라도 생긴 것이로구나.”

 홍옥의 얼굴이 붉어진다. 동자로 사는 것이 복잡한 인연에서 벗어나는 최선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오랫동안 그 모습이었다. 허나 능금을 만난 후, 같이 나이를 먹었다. 그래야 그 애와 같이 살 수 있으니까.

 “송구합니다.”

 “누군가, 궁궐 어정을 다시 파냈더구나.”

 홍옥이 머리를 숙인다. 용왕에게 허락을 받지도 않고 멋대로 행한 일이다.

 “여의주도 없이, 무모하였구나. 돌 더미에 묻히면 어쩌려고 그랬느냐.”

 “그 또한 죄 값입니다.”

 “네게 죄가 없음을 이 아비도 안다.”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되었다. 이미 지난 일이니, 이제 그만 일어나거라.”

 홍옥이 그제야 얼굴을 든다.

 “네가 용궁까지 든 것을 보면, 여의주라도 필요한 것이냐.”

 용왕의 뜻을 거역하고, 궁 밖으로 쫓겨났을 때, 여의주 또한 빼앗겼다. 물과 구름을 부를 수도 없고, 옷가지를 말릴 바람조차 쓰지 못해도, 괜찮았다. 그 애가 바람이 되어주었고, 그 애가 해를 가릴 구름이 되어주었다. 따뜻하게 데운 물로 등을 씻겨주던 여린 손이 그립다. 비늘이 돋은 등도, 역린이 돋은 목덜미도 사랑스레 보듬어주던 능금이 그립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네가 거역했던 일이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해내겠습니다.”

 용왕이 수염 속에서 여의주를 꺼내 홍옥에게 건넨다. 붉고 영롱한 구슬이 둥실 떠올라, 홍옥의 품으로 들어간다. 손끝부터 일어나는 비늘이 온몸을 덮고, 이마에 옥빛 뿔이 돋는다. 푸른빛이 찬란한 청룡이 포효를 하며 일어선다.

 “흑룡을 찾아 오거라.”

 명을 받은 청룡이 천둥처럼 날아간다.

 “어미에게서 자식을 빼앗을 만큼, 사랑하는 여인이 생긴 것이냐. 아니면, 그 어미의 간악한 욕심마저 간파할 만큼 지혜로워진 것이냐.”

 

 헐거워진 책 끈을 동이고, 헤진 끈을 새 끈으로 간다. 너덜거리는 책표지도 능화판으로 바꿔둔다. 능금의 섬세한 손길에 허름했던 책들이 거듭난다.

 “얼굴만 반반한 줄 알았더니, 손재주 또한 반반하네.”

 일을 거들던 소란이 살랑댄다. 저 바쁘다고, 능금을 버리고 간 것이 찔리긴 하나보다.

 “쉰 소리 그만하고, 돌대송곳이나 다오.”

 “어젠, 미안했어. 네가 길을 잃을 줄 몰랐거든,”

 “달포를 비현각에 갇혀있었는데, 지리를 알 턱이 있나.”

 “미안, 그치만 나도 마마님께 혼났어.”

 “어찌 알고, 혼 내셨대.”

 “세자저하께서 네가 사라진 걸 알고, 금군까지 동원하셨는걸.”

 “금군? 고작 그 일로?”

 “네가 그 만큼 소중한가 보지.”

 “소중한 물건을 이리 고생 시키냐. 내 손이 다 헤질라 한다.”

 뻣뻣한 책을 꿰매고, 붙이다 보니 여기저기 상처투성이다.

 “그래도, 여긴 마음은 편하잖아. 교태전이나, 빈궁전에 가면 더 고생이야.”

 “궁궐이 다 꼭 같지.”

 “모르는 소리 마,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혹여 전하의 승은이라도 입을까 궁녀들을 얼마나 다잡는 줄 알아. 동백기름도 마음대로 못 바른다고,”

 “그 정도야?”

 “미색이 반반한 나인들은 며칠 버티지도 못해. 있는 죄 없는 죄 다 덮어씌운다니까.”

 “너는 상관없겠네.”

 “야! 나 정도면 엄청난 미색이거든! 우리 동네에 나만한 미색도 없다고!”

 “그래서 비자를 하냐.”

 “그럼 어째, 기녀로 팔려가는 것보단 낫잖아!”

 말끝에 소란이 울먹인다.

 “내가 잘못했다. 네 사정도 모르고,”

 느닷없는 울음에 능금이 소란을 토닥인다.

 “이제, 나 용서하는 거야?”

 “용서는 이미 했어. 좀 놀려먹은 거뿐이지.”

 “백번 놀려도 좋으니까, 능금아, 나 글 좀 가르쳐 줘.”

 “글?”

 “책 고치는 건 내가 밤을 새워서라도 할 테니, 글 좀 가르쳐주라.”

 “글을 배워 무엇 하게.”

 “그래야 글월비자라도 하지. 안 그럼, 언제 내쳐질지 모르는걸.”

 그저 순진한 아이로 보았던 내 생각이 짧았구나. 어린 너도 그리 살 궁리를 하는데, 내가 이리 안일하였다.

 “그래. 대신 궁궐 좀 안내해줘.”

 “여부가 있겠어!”

 

 못을 메워 만든 정원은 제 아무리 가꾼들, 초라할 뿐이다. 봄꽃이 지천이나 수련 한 잎만 못하다. 별감이 술병을 입술에 댄 채 투덜댄다.

 “못을 메우고, 우물을 메워, 얻을 게 대체 무어란 말인가.”

 공연히 물을 떠오는 무수리들만 고생 할 뿐.

 “또 뭐가 불만이냐.”

 차를 마시던 화홍이 잠잠히 묻는다.

 “향원정 못이 얼마나 예뻤느냐.”

 “내겐 별 차이가 없구나.”

 “네가 무슨 풍류를 아냐. 여기다 무덤을 지은 들, 좋다고 할 게지.”

 “나쁠 건 없다.”

 “처녀귀신은 뭐하나 몰라, 저 목석 안 잡아가고.”

 부사의 실없는 소리에 화홍이 웃는다.

 “우물을 메운 건, 도가 지나쳤다.”

 “그러니까, 왜 우물에 빠져? 이게 다 너 때문 아니냐.”

 그날, 그를 부르던 목소리가 밤바람에 실려 온다. 오늘도 부르십니까.

 늘 곁에 있던 궁녀들이 보이질 않는다. 그를 이끌던 상선도 사라지고 없다. 나비가 날고, 꽃이 지천인데 모두들 어디 갔을까. 나를 두고 꽃구경을 갔나. 나를 두고 마실을 갔나. 어린 세자가 한들한들 길을 나선다. 후원도 기웃대고, 향원정도 기웃댄다. 이리 물이 맑던가. 이리 못이 깊던가. 황금잉어가 튀어 오르고, 나비가 수련을 희롱한다. 상궁들의 만류에 물가에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오늘은 실컷 놀아도 좋으리.

 “좋으냐?”

 어디선가 인자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물인 듯도 하고, 하늘인 듯도 하다.

 “예, 좋습니다.”

 “내 더 좋은 것을 주마.”

 목소리를 따라 걷는다. 어린 세자를 따라 나비가 날고, 벌들이 잉잉댄다. 평소에는 든 적 없는 궁 뒤편을 돌아, 어정에 멈춰 선다. 막혀있던 돌문을 치우고, 누군가 우물을 열어두었다.

 “용궁이 보고 싶지 않느냐.”

 우물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문득 구름이 걷히고 영롱한 오색 빛이 우물에 쏟아진다. 물방울 하나가 둥실 떠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금빛 여의주로 변해 세자를 미혹한다. 예쁜 구슬에 마음을 뺏긴 세자가 우물을 향해 다가온다.

 “네게 주마.”

 “제게요?”

 여의주를 쫓아 한발 한발 어정으로 다가서는 세자, 이내 돌담을 오르고, 우물에 올라 예쁜 구슬을 잡는다. 순간 밑도 끝도 없는 우물 속으로 빠져드는 화홍, 영롱하던 무지개도 걷히고, 흩날리던 꽃잎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사라진 세자를 찾아 상궁이며 나인들이 구석구석 샅샅이 뒤진다. 병사들이 몰려가고, 목숨이 붙은 모든 궁 것들이 대동된다.

 생각시 하나가 어정 근처에서 익선관을 발견한다. 곧이어 금군이 어정 우물에 남겨진 목신 한 짝을 찾아낸다.

 “뛰어들어라!”

 서슬 퍼런 중전이 익위사에게 명한다. 익위사가 머뭇대자, 병사의 칼을 빼내어 망설임 없이 벤다. 어정 마당에 피 냄새가 진동한다. 칼에 베인 시체가 쌓이고, 어정에 뛰어든 애먼 목숨들도 쌓인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분노가 하늘의 뜻을 어기고, 물의 뜻을 거스른다.

 “시체로 우물을 메워서라도, 세자를 찾을 것이다.”

 후원 뒤편에서 잠잠히 중전을 바라보던 동자 하나가 칼을 든 중전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온다.

 “어진 국모라 들었건만, 잔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구나.”

 중전이 칼을 멈춘다. 범상치 않은 동자다. 낯빛이 희고, 눈빛이 푸른 것이 필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내 아들을 구해주시오.”

 “주인에게 돌아간 것이다.”

 “그 아이는 내 것입니다!”

 “하늘의 것을 어찌 땅에 가둔단 말인가.”

 어미의 눈이 붉게 물든다.

 “온 백성을 다 죽여서라도 찾겠습니다.”

 귀를 막고, 마음을 막고, 천명을 막은 중전이 칼을 들어 생각시의 등을 벤다. 동자의 눈이 푸른빛으로 타오른다.

 “천계의 약속을 어긴 업보는 네게 돌릴 터이니, 너는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하리. 축생으로 태어나, 너를 모셨던 이들의 반찬이 되고, 너를 아꼈던 이들의 국이 되리.”

 분노한 동자의 몸에서 우수수 비늘이 돋아난다. 칼을 든 군사들이 놀라 달아난다. 구름이 몰려오는가 싶더니 느닷없는 벼락이 중전의 칼에 꽂힌다. 칼을 놓친 중전이 망연자실 무릎을 꿇는다.

 푸르게 변한 용 한 마리가 이윽고 우물로 뛰어 들어간다. 잠잠하던 우물에 파도가 일고, 천둥이 친다. 이어 우물에 뛰어들었던 병사들이 튀어 오르고, 칼을 맞은 궁녀들의 가슴에서 피가 마른다. 중전의 손을 적셨던 핏방울들이 주인을 찾아 공기 중으로 떠오른다. 이 기이함 속에 중전만 망연히 앉아있다. 죽었던 군사가 깨어나고, 공기 중을 떠돌던 피비린내마저 말끔히 사라진다. 그제야 일렁이는 우물 속에서 아이 하나가 튀어나와 상선의 품에 안긴다.

 “저하!”

  멍하니 주저앉아있던 중전이 화홍을 향해 내달린다. 철없는 아이는 세상모르고 잠들어있다. 아이를 받아들던 중전이 화홍의 옷깃 사이로 검게 돋아난 비늘을 발견한다.

 “짐승이 되어 네게 잡아먹혀도 좋다. 아가”

 세자를 안은 중전이 교태전으로 들어선다. 그날의 기억을 잃은 신하들이 고요히 뒤따른다. 구름이 걷히고, 여느 때와 같이 해가 비춰든다. 허나 중전의 마음은 이미 빛을 잃고 그 날의 우물에 빠졌다. 이리 될 것을 알면서도, 나는 용왕의 아이를 낳았구나. 그 아이를 놓지 못해, 영원히 천벌을 받는구나.

 

 “우물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목소리?”

 “인자했다.”

 “우물귀신이 언제부터 인자했대?”

 “귀신 아니다.”

 “귀신이 아니면 왜 멀쩡한 우물에 빠져?”

 정말 귀신일까. 저 대신 우물을 지킬 인간을 꿰어낸다는. 물귀신의 소행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러기엔 너무 상서로웠다. 무지개도 봤는데, 설마 귀신일까.

 “너 설마 귀신 아니냐?”

 “변방에 가고 싶은 게냐.”

 “변방 타령 그만하고, 이상하긴 하잖아.”

 “뭐가.”

 “명주실 한 타래가 들어가도 끝이 안 보인다던 어정이 아니냐. 삼척동자가 빠졌는데, 어찌 살 수 있단 말이냐.”

 “하늘이 구한 게지.”

 “네가 무슨 옥황상제의 아들이라도 되냐! 하늘이 구하게!”

 나도 그게 제일 궁금하다. 대체 어떻게 산 것인가. 중전은 그 날의 일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다만 우물과 못을 메우고, 그 어떤 물가에도 그를 내놓지 않았다. 화홍은 한 번도 바다에 가지 못했고, 흐르는 내를 보지도 못했다. 다리가 있어도 먼 길을 돌아 도착했고, 오직 물이라곤, 목욕통에 담긴 물이 전부였다. 부사가 간곡히 권하지 않았던들, 행궁조차 허락하지 않았을 게다.

 “하긴 우리 세자저하가 특별하긴 하지.”

 차게 식은 찻잔에 달빛이 어린다.

 “여전히 돋나. 그 비늘.”

 화홍의 눈이 더 짙어진다. 내 비늘을 보고도 놀라지 않던 단 하나의 사람, 그 애가 보고 싶구나.

 “비현각에 가야겠다.”

 “늦게 배운 도둑이 밤새는 줄 모르는 구나.”

 취기가 도는 부사가 화통하게 웃는다.

 “변방 갈 준비나 하시지.”

 “하나 뿐인 친구를 오랑캐에게 넘겨줄 테냐”

 “넘길 것까지야. 구차한 목숨 하나만 던져주마.”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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