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수씨는 어디 갔어?”
“잠깐 회사에 다녀온다고 아침 일찍 나갔어.”
“토요일인데? 요즘 바쁜가 보네.”
“그런가 봐. 이제 아이도 생기는데 열심히 일해야지. 근데 곧 올 거야. 한시 반에는 온다고 했어.”
내가 건네 준 비닐 백에서 파이와 타르트를 꺼내며 봄이 말했다.
“근데 이거 뭐야? 과일인가?”
“무화과. 어제 시식해봤는데 맛있어서 튼튼이도 먹이려고.”
봄은 왼손 엄지와 검지로 무화과파이를 눈높이까지 들더니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무화과 말고 다른 거 사오지.”
“너 말고 튼튼이 주려고 사왔다니까. 튼튼아, 이모가 사온 무화과파이 먹자.”
봄한테서 파이를 뺏어 비닐 포장을 뜯으려고 했다. 봄은 내게서 도로 뺏더니 다시 여몄다.
“산모가 싫어하는 건 태아도 싫어한다고 했어.”
“그만 투덜거리고 먹어 봐. 전문가가 그러는데 아주 맛있는 거래.”
무화과파이대신 에그타르트를 만지작거리던 봄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전문가라니? 어제 이거 살 때 누구랑 같이 있었어? 남자야?”
“무슨 말을 못 하겠다. 엄마한테 옮았어? 무슨 말만 하면 남자 타령이야.”
“말 돌리지 말고, 어떻게 생긴 사람이야? 뭐하는 사람인데? 그 가게 사람인가?”
그만하라고 손사래를 치는데 마침 현관문이 열리면서 준수가 들어왔다. 시간을 지키려고 뛰어왔는지 숨을 가쁘게 쉬고 있었다. 준수의 색은 연두색이다. 봄의 노랑과 아주 잘 어울리는, 봄 나무의 이파리가 생각나는 색이다. 봄이 결혼하겠다고 준수를 처음 우리 집에 데려왔을 때, 나는 준수의 색을 보고 ‘스물넷에 무슨 결혼’이냐는 반대를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두 사람의 색이 아주 잘 어울렸고, 그 연두색이 나에게 알 수 없는 신뢰를 주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 보답하듯 준수는 무척 성실했고 봄을 많이 아껴주었다. 처음에는 걱정하던 부모님도 준수를 만날수록 마음을 놓았다. 봄의 장애에 대한 준수 부모님의 반응도 다행히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는 봄이 준비한 비빔밥을 먹고 내가 사온 파이로 티타임을 가졌다. 설거지는 나보고 하라며 대장노릇을 하는 봄이 디저트와 차를 가지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
“누나,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준수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티타임을 가질 공간을 마련하느라 소파 앞 테이블을 정리하는 두 손이 분주했다.
“고마워요.”
나도 덩달아 소곤거렸다. 준수는 나를 ‘누나’라고 부른다. 준수는 나보다 한 해 늦은 1월에 태어나 나와 학년도 같다. 처음에는 ‘제부-처형’이라고 부르다가 너무 어색해서 ‘준수씨-누나’로 호칭을 정리했다.
“요즘 만나는 사람 없으세요?”
“준수씨까지 왜 그래요. 안 그래도 엄마가 집에서 쫓아낸다고 난리에요. 결혼은 못해도 독립이라도 해야겠어요.”
“얼른 좋은 사람 만나셔야죠.”
어느새 테이블 위쪽 정리를 마치고는 아래쪽을 정리하고 있다.
“그게 노력한다고 되는 거예요? 아직은 결혼 생각도 별로 없고, 결혼이 쉬운 것도 아니고.”
“너무 따지시는 건 아니고요?”
그 때 주방에서 봄이 한 마디 했다.
“자기야, 그만 좀 치워.”
두 사람을 보니 웃음이 났다. 두 손을 머뭇거리는 준수에게 말을 이었다.
“내가 뭘 따질게 있어요. 그냥 어떤 사람이어야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서 그래요. 준수씨는 언제 봄이다 싶었어요?”
“봄이 다리 얘기 저한테만 숨겼다는 걸 알았을 때요.”
“쟤가 그랬어요? 처음 듣는 얘기네.”
언제 쉬었냐는 듯 준수의 손이 다시 분주해져 있었다.
“동아리 친구한테 봄이 다리가 좀 불편하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는데, 나만 몰랐다고 생각하니까 화가 났어요. 그래서 봄일 만나 따지듯 물었는데, 나한테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고 진지한 얼굴로 답하더라고요. 그 때였던 것 같아요. 봄이 저한테 특별한 사람이라고 처음 느낀 게.”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나는 단 한사람에게도 나의 이상한 점에 대해 직접 말한 적이 없다. 반면 봄은 자신의 불편한 점을 거의 모두에게 얘기하고 다녔다. 봄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 엄마는 봄에게 특별한 신발을 사주었다. 왼쪽 신발을 안에서 3㎝만큼 더 높이고 발목까지 덮는 길이의 운동화를 만들어, 겉으로 보기에는 양쪽이 똑같아 보이는 특수한 키높이 신발이었다. 그 운동화를 신으면 봄은 절뚝이지 않고 걸을 수 있었고, 신발을 벗지 않는 한 봄의 장애에 대해 쉽게 눈치 챌 수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었다. 하지만 봄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새로 만난 친구들에게 거리낌 없이 자신에 대해 말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는 거야?”
“당연히 네 흉봤지.”
파이와 타르트는 먹기 좋은 크기로 잘려 예쁜 접시에 담겨 있었다. 꼭 봄 같은 샛노랑이다.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준수가 찻주전자와 잔을 테이블에 옮겼다.
“애플민트야. 마셔 봐. 좋더라고.”
“응, 고마워. 그나저나 너 준수씨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서 싫다고 한 적도 있다며?”
“난 이름에 ‘보’자가 들어간 사람이었으면 했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보’자로 시작하니까.”
봄이 중학생이었을 때 한 번은 개명소동을 일으켰었다. ‘이봄’에서 ‘이보미’로 개명하겠다며 아빠를 끈질기게 졸라댔다. 아빠는 ‘이보윤’, 엄마는 ‘최보영’, 언니는 ‘이보라’니까 자기도 ‘이보미’가 되고 싶다고 했었다. 아빠의 차분한 설득으로 소동을 일단락 났었지만, 준수한테까지 그런 소리를 했다는 게 참 봄답다 생각하며 웃었다.
“참, 누나 베이킹클래스 듣기로 했다는데?”
“이게 무슨 소리야?”
“파이 사온 가게에서 클래스도 한다기에. 한 번쯤 케이크 만들어 보고 싶었거든.”
봄은 급하게 허브티로 목을 한 번 축였다. 봄의 노랑이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꼭 아기 욕조에 넣어 주는 샛노란 러버덕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뭔가 말하고 있는 봄의 입술이 주황으로 보였다.
“뭐? 갑자기 무슨 케이크? 이상해.”
봄의 어디든 살짝만 건드려도 ‘삑’ 소리가 날 것 같다. 귀찮아지기 전에 빨리 화제를 돌려야했지만 이미 늦었다.
“내가 한 번 가 봐야겠어. 그 가게 남자, 분명 뭔가 있어.”
얼굴이 붉어질까 싶어 고개를 숙이고는 준수에게 손짓했다.
“얼른 쟤 좀 말려요.”
준수는 소리 내어 웃으면서 튼튼이 얘기를 시작했다.
집을 나서려는데 봄이 말없이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TV 옆에 놓여 있는 성모마리아상을 가리켰다. 눈빛으로 잊어버려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성물 앞에 섰다. 봄은 시범을 보이듯 성호경을 그었다. 어색하게 선 채 나도 따라했다. 그리고 짧게 기도했다. 봄의 집을 나서기 전에 꼭 해야 되는 일이다. 무교였던 봄이 천주교 신자가 된다고 했을 때, 나는 봄이 진지한 마음으로 종교를 가지려고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준수가 매주 미사를 드리러 가니까 몇 번 같이 가보고 호기심에 관심을 가졌을 거라 짐작했던 것 같다. 한참 후에 알게 되었지만, 봄에게 종교를 가지게 한 것은 튼튼이였다.
“엄마한테 빨리 좀 들르시라고 해. 집에 가자마자 나한테 영상통화로 N 보여 주는 것도 잊지 말고.”
고양이털이 산모에게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들은 뒤에 봄은 걸어서 이십분 거리에 있는 우리 집에도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나를 볼 때마다 매번 N이 보고 싶어 죽겠다고 우는 소리를 해댔다.
“베이킹클래스 다음 주 부터라고? 매번 보고해. 안 그러면 내가 진짜 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