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프지?”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긴 후 태영이 말했다.
“괜찮아.”
“잘 못 먹던데. 양고기 입에 안 맞았어?”
“안 먹어 본 음식이어서 그렇지 뭐. 사이드메뉴가 맛있어서 잘 먹었어.”
음료가 나왔다는 진동알림이 왔다. 내가 다녀오겠다는 손짓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픽업 테이블로 가서 음료를 받아 돌아섰다. 태영은 통화 중이었다. 누구랑 통화하는지 궁금했지만, 자리로 돌아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얼핏 본 이모티콘이 다시 떠올랐다. 음료 두 잔이 놓인 검정색 쟁반을 다시 내려놓고, 냅킨 몇 장을 더 올렸다. 뒤돌아서 태영 쪽을 바라봤다. 차갑고 무심해 보이는 빨간색이 머리 위에서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통화를 끝내는 걸 보고 다시 쟁반을 들었다.
“잘 마실게.”
“응, 나도 저녁 잘 먹었어.”
“거짓말. 다음엔 메뉴 네가 정해라.”
“괜찮았다니까. 새로운 경험이었어.”
미소를 머금은 입에 커피를 더했다. 태영의 붉은 색은 통화할 때보다는 자연스레 움직이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무심코 유리잔을 양손으로 잡았다. 얼음이 잔뜩 든 유리컵을 통해 전해 오는 차가운 기운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쥐어 주었다. 픽업 테이블에서 바라본 태영의 차가워 보이던 붉은 색은 누군가의 색을 연상시켰다. 몇 년 전 헤어진 그 사람은 깊은 바다가 생각나는 짙은 남색을 가졌었다. 태영이 여전히 ‘남태평양’이었다면 이름과 잘 어울릴 만한 그런 색이다. 태영의 색과는 전혀 다른데도 그가 떠오른 것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그 사람에게서 본 차가운 움직임을 오늘 태영에게서 느꼈기 때문이다. 눈도 오지 않았던 12월이었고, 우리가 자주 만나던 거리에 새로 생긴 커다란 카페에서였다. 마주 앉은 채로 말없이 한참을 있다가 다 식어 버린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의 머리 위를 보았다. 심해가 떠올랐다. 아주 고요하고 차가운 깊은 바다. 그리고 그의 바다를 따뜻하게 비춰 줄 태양이 다시는 될 수 없을 거란 걸 깨달았다. 아마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여기 커피 참 맛 없다.
이었던가. 그 후론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물론 그 카페에도 다시 가지 않았다. 그러곤 함께 했던 천 일이 넘는 시간이 무색하게 시작보다 자연스레 이별을 맞았다. 그 때 내가 더 평범했다면, 이상한 걸 보지 않았다면, 그와의 마지막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했었다.
“난 무슨 색이야?”
다시 양손에 한기가 느껴졌다. 커피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커진 눈에 힘을 살짝 풀고, 아랫입술로 윗입술을 문질러 커피를 닦아냈다. 분명 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시켰는데 평소보다 썼다.
“응? 무슨 소리야?”
일단 시치미를 떼고 이미 닦아낸 입술을 다시 한 번 냅킨으로 찍었다. 손이 가늘게 떨렸다. 들키지 않으려고 얼른 왼손으로 잡아 양손 모두 무릎위에 올려놓았다.
“컬러리스트라며? 이런 질문 많이 받지 않아?”
“보통은 자기한테 잘 어울리는 옷 색깔 같은 걸 묻지.”
“뭐 아무거나. 난 어떤데?”
“너는 뭐, 바다색? 남태평양 색.”
“전문가 맞긴 하냐?”
웃음으로 순간을 모면하려고 좀 더 과장되고 길게 웃었다. 태영도 마지못한 듯 웃어 주었다. 무릎 위에 있는 왼손은 얼음 한 조각을 쥐고 일부러 녹인 것 같았다. 오른손으로 냅킨 한 장을 집어 무릎 위로 가져갔다.
“뭐 묻었어?”
“아니야.”
대충 닦아내고 태영을 바라봤다. 태영의 붉은 색은 생기 있게 움직이고 있다. 호기심 많고 장난기 가득한 아이 같았다.
“남자친구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어?”
“한참. 근데, 남친 있냐는 질문이 먼저 아냐?”
“없어 보여.”
“그거 실례야.”
“반지도 없고, 전화도 없고. 금요일 저녁에 남자 동창 만나게 해 줄 남자가 어디 있어. 거짓말 하고 나왔다면 모를까, 이보라는 그런 캐릭터는 아닌 것 같고.”
나도 모르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남친만 없는 게 아니라 눈치도 없구나.”
“그러는 너는? 만나는 사람 없어?”
“나 아직 질문 안 끝났어.”
“뭐?”
“내가 헤어진 남친이랑 닮았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네가 한 눈에 나를 알아본 게 이상하잖아. 아는 사람인 것 같다는 건 핑계고, 다른 이유로 나를 찾은 것 같았거든.”
침을 한 번 삼켰다. 말라서 갈라져버린 입술을 입술끼리 문질렀다.
“아니, 전혀 다르게 생겼는데.”
“그럼 역시 첫 눈에 반한건가.”
“너 내일 꼭 병원 가. 연차 내서라도 가.”
“놀라긴, 그만 가자. 여기 커피 별로네.”
이제 막 9시가 지났다.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버스정류장은 한산했다.
“몇 번 버스 타?”
“버스 안 타.”
“집 어딘데?”
“걸어갈 수 있는 거리야.”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야? 안 그래도 되는데.”
“겨우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 준 걸로 감동 받는 거냐?”
태영은 웃으면서 도착알림 전광판을 가리켰다.
“몇 번?”
“700번이나 707번. 어, 저기 온다.”
“저 뒤에 오는 버스? 저게 보여?”
“응, 나 시력 좋아.”
“나도 시력 좋은 편인데. 신기하네. 그럼 난 이만 간다.”
“데려다 줘서 고마워, 잘 가.”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태영도 손을 들어 흔드는가 싶더니 갑자기 내 머리 위로 가져갔다. 머리를 쓰다듬을 것 같아 잔뜩 긴장했는데, 허공에서 손을 멈췄다.
“뭐 해?”
“궁금해서.”
“뭐가?”
“안 보이는 거.”
태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며 저만치 걸어갔다. 그 때 700번 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섰고, 나는 첫 번째로 올라탔다. 마침 하차문 근처 자리가 비어 있어 앉았다. 버스가 출발했다. 시간을 확인하려고 휴대전화를 들었다. 메시지가 와 있었다.
-조심해서 들어가고 조만간 또 보자. 안보라.
-안보라는 또 뭐야.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
문득 태영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하면 바로 물어보고 하고 싶은 말은 곧장 내뱉는 제멋대로인 성격을 빌리고 싶었다. 딱 한 사람 앞에서만 태영과 같으면 되는 거였다. 살짝 열려 있는 창문을 바라봤다. 바로 옆으로 태영이 걸어가고 있다.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태영을 만났으니까, 오늘이 다 가기 전에는 나도 태영처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차벨을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서둘러 가면 가게 문 닫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버스가 멈췄다. 서둘러 내리고는 봄의 집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찾았다. 지갑에서 조심스레 회색 명함을 꺼냈다. 전화를 먼저 걸어볼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막 솟아난 이 이상한 기운이 전화를 거는 순간 어딘가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양손으로 명함을 잡고 요정이라도 나오길 바라듯 비볐다.
안에 있는 사람이 이상우인지 아닌지 확인하지도 않고 무작정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쁜 숨을 입 밖으로 내쉬지 않으려고 하니 어깨가 들썩였다. 조금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계산대 앞에 섰다.
“아직 문 안 닫았죠?”
“어서 오세요. 이제 막 마감하려던 차였어요.”
목소리를 듣고 기뻤다. 똑바로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묻는 눈빛에
“궁금해서요.”
라고 소리 내어 답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