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찾았다.”
잘못 들었나 착각이 들었다. 아무도 없다 여겼던 공간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나무 뒤에 가려진 벤치에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파묻고 그렇게 추한 모습으로 울고 있던 자신의 머리 위로 가려진 커다란 그림자가 있었다.
“....?”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도여는 고개를 돌렸다. 인혁이였다.
“내 키스를 가져가서는 이렇게 ‘먹튀’하는 겁니까?”
도여는 자신의 머리 위에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진우가 그 여자에게 목걸이를 걸어주는 모습을 보는 순간, 무언가에 홀린 듯이 처음 보는 남자에게 키스했다. 아니, 생각해보면 제정신은 아니었지만 제가 한 키스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게…. 키스라고 하기에는, 너무 입을 살짝 맞춘 정도 아니었나?
“...큭…. 그게…. 크읍…. 하…. 키스는…. 후……. 키스는, 아니지. 큭…. 않나요?”
도여는 자신의 모습이 어떠할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눈물은 나는데 콧물은 멈춰야겠고, 얼마나 엉망일지 모르지만, 대답도 해야 했다. 그러나 이미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만큼 울고 난 뒤였기 때문에 어느 것도 신경 쓸 겨를은 없다.
“어쨌든, 책임지시죠? 그쪽 편도 들어 드렸는데.”
인혁은 짓궂은 표정으로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거 책임지라고’ 말했다. 도여는 서서히 진정이 되어가며, 잠시 꺼졌던 정신에 스위치가 켜졌다. 그러자 진우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에 휩싸여 잊고 있었던 자신의 행동이, 하나, 둘 떠올랐다. 어쩌다 본의 아니게 키스, 아니 입맞춤을 좀 했긴 했는데….
“아…. 죄…. 죄송해요. 아깐 제가 정신 좀 나가서. 죄송합니다.”
도여는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최대한 꾸벅 숙이며 자신의 미안함을 받아주길 바랐다.
“...뭘…. 또 그렇게까지 막 너무 미안한 표정을 짓지는 마시고…. 큭큭. 원래가 그렇게 순진합니까? 순수한 겁니까? 아니면 그냥 원래 그럽니까?”
“..네?”
인혁은 자신을 보며 이내 연신 고개를 꾸벅이며 '죄송하다' 말하는 도여를 보았다. 어쩌면 자기가 끼지 않아도 될 남녀관계에 이상하게 끼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제 앞에 어떤 일이 생길지 황당한 이 상황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왜인지 이 사람 앞에서는 왠지 모를 측은지심이 들었다. 정말, 순수하게.
“어휴…. 자, 이걸로 얼굴 좀 닦읍시다. 지금 본인 몰골이 어떤지 압니까?”
인혁은 순수하게, 도여에게 자신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카키색 체크무늬가 들어간 손수건을 건넸다. 지나가다 비에 쫄딱 맞은 강아지를 보면 안쓰러우니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거고, 어미가 버리고 간 새끼 길고양이가 ‘아옹’ 거리는것을 보면 맘이 짠해져서 지나치지 못하는 거 아니던가? 그러니 바람난 남자친구를 마주한 이 난감한 여자가 짠…. 하게 느껴질 수 있지. 동정 비슷한 그 무언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엄연히, 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는가. 2 대 2 쪽수에서는 밀리지 않았으니, 도여는 인혁이 건네어 준 손수건을 받아 눈가의 눈물을 닦아내고, 파우치 안에서 팩트를 꺼내어 거울을 보았다. 그제야 여자는 자신의 몰골을 발견한 듯, 소스라치게 놀랐다. 인혁은 그런 그녀가 웃기고, 황당했다.
“헉…. 지금껏 이 몰골로 그쪽을 보고 있었던 거예요? 아니, 이걸 왜 이제야 알려 주는 거예요? 으……. 이거 지워지지도 않아. 하…. 조커 같지 않아요?”
도여는 자신의 몰골에 끔찍한 무언가를 마주한 듯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인혁이 건넨 손수건으로 눈가에 흐르다 사방으로 번진 마스카라와 입술에 범벅이 되어버린 립스틱 자국들을 연신 지워갔다. 양 눈가가 벌겋게 홍조를 띤 듯한 모습이 될 만큼, 박박 문질렀다.
“아, 서인혁의 키스 상대가 이런 조커라니…. 하…. 하하하”
인혁은 문득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는데, 사람이 너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마주하면 웃음이 난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갑자기 왜 웃어요? 그리고…. 제가 아까는 잠깐 정신이 없어서 생각을 못 했는데요. 저는 키스하는 척, 자세만 취하려고 했지. 그, 키…. 아니 그 입맞춤은 그쪽이 하셨어요.”
도여는 이제야, 떠오른 아까의 기억을 더듬어 분명 자신은 ‘키스하는 척’ 만 하려 했지 진짜 할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계속 내가 자기의 키스를 빼앗아 갔다고 말하는, 그 정도는 바로 고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어쨌든,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아닌 건 아니니까.
“이제 보니, 먹튀, 발뺌. 전문이시네. 분명히 그쪽이 먼저 ‘제 편이 되어 주실래요?’ ” 이러지 않았습니까. 내 목에 두 팔을 두르고, 고개를 45도로 틀어서 코 밑까지 왔으면 이건 뭐,”
인혁은 굳이 온몸으로 재연을 해 보이면서까지 좀 전에 상황을 설명했다. 그 모습을 보자니, 도여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뭐 눈에 보이는 게 없으면 가능한 건가? 대단하네, 차도여.
“뭐, 그래요. 좋아요. 제가 진짜 살고 싶었나 봐요. 자존심 때문에 처음 보는 그쪽.”
“서인혁입니다. 그쪽 아니고,”
“네, 뭐 서인혁씨에게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어쨌거나…. 아깐 진짜 제 편 되어 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어떻게 보답을 해드려야 할까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고마운 마음을 담아 표현해 드리죠.”
도여는 무어든 간에 인혁이 요구하는 만큼, 보답할 의향이 있었다. 그가 무엇을 요구할지 예측은 되지 않았지만, ‘할 수 있는 선에서.’
“그쪽, 아. 차.. 도여씨라고 했나요?”
“네. 차도여.”
“차도여씨, 뭐든 차도여씨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제게 해 주실 수 있다는 겁니까?”
약간, 도여가 생각했던 의미에서 뭔가 방향이 틀어진 것 같은 미묘한 차이가 있었지만, 뭐 일단은 자신이 만난 이 사람이 완전 미친놈이 아닌 이상은, 설마 이진우만 하려고. 그 정도만 아니라면 뭐든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닐 듯했다.
“네,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인혁은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랑 결혼 좀 합시다.”
“..컥…. 켁…. 켁…. 큽. 뭐라고요?”
갑자기 이게 무슨, 진짜 미친놈이었나보다. 미친놈이 가면 또 다른 미친놈이 온다는 미친놈 질량 보존의 법칙 인 건가. 이건 무슨. 불과 30분 전에, 바람난 남자친구와 끝낸 이 시점에, 이 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괜찮습니까? 조금 미친 소리 같긴 한데.”
“조금 말고, 많이. 엄청, 완전.”
“어차피 미친 소리 하는 거, 결혼할 사람인 것처럼 부탁드려요. 아까 차도여씨가 먼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그 바람난 남자친구 앞에서, ‘인사해, 나랑 결혼할 남자야.’라고.”
그랬다. 입맞춤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까짓 자존심을 지켜내고자 처음 본 남자를 결혼할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너만 양다리냐, 나도 그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설마, 혹시 뭐 그런 병 있으세요? 나한테 결혼하자고 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이러면서 막 이런 거 좋아하거나…. 바로 앞에 시련 당한 사람한테…. 결혼이라니….”
“딱 한 번이면 됩니다. 결혼할 사람인 것처럼, 어차피 결혼은 외국에서 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냥 결혼할 거라는 거 정도만 확인시켜드리면 되는 거라. 저도 좀, 제 편이 필요해서.”
인혁은 자기도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되긴 마찬가지였으나, 어찌 됐든 인혁에게도 수습해야 하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도여는 지금 이 자가 하는 이 미친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되었지만, 뭐 지금 제 상황도 현실감이 없었기에 지금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마음이 들었다.
“좋아요. 뭐 계약 연애…. 그런 건가요? 대신 저도 조건이 하나 있어요.”
“음, 뭐든. 차도여씨 조건 하나 정도는 들어드리죠. 그래야 공평하다면.”
“다음 달에, 그 개자…. 아니 아까 보셨던 그 자식 결혼식에 같이 가주세요. 그날도, 쪽수에서 밀리면 안 되는 날이라 제 편이 필요할 거 같거든요.”
“굳이 가야겠습니까? 흠…. 뭐, 차도여씨가 원한다면. 좋습니다. 그럼 우리 계약은 이걸로 체결된 겁니까? 뭐 사인이라도 할까요?”
일주일 정도 쉬다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한, 두 달 정도는 괜찮을 듯싶은 인혁이였다. 도여는 이미 멘탈이 한번 강하게 흔들리고 난 뒤, 도리어 별다른 생각도, 감정도, 앞으로의 대한 별다른 의미들조차 하릴없이 느껴졌다. 그저 지금의 제 감정 깊이 빠지지 않게 오히려 요란스러운 무언가가 있는 편이 이러한 감정들을 견딜만하게 할 것 같았다.
“꾸…. 르륵….”
도여의 뱃속에서는 오늘 같은 이런 일들을 겪은 다음에도 조차 성실하게 기본 욕구를 해결하라며 사인을 보낸다. 이미 못 볼 꼴 다 보여준 듯한 이 남자 앞에서, 더 차릴 부끄러움조차 남지 않은 듯했다.
“하…. 하…. 이런 상황에서도 인간의 기본 욕구는 참 성실합니다. 이후 관련된 내용은 차차 정리하기로 하고, 밥이나 먹죠, 우리. 나도 거의 18시간째 공복 상태라 꽤 힘든데.”